죽어서도 자기 권리를 얘기할 수 없는 여자들

미아리 성매매 여성들의 죽음에 부쳐

김선화  / 2005년03월31일 14시13분

서울시의 성매매 집결지 가운데 하나인 미아리에서 화재 사건이 발생해 ‘또’ 성매매 여성이 죽임을 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새벽에 일어난 불은 크지는 않았지만 미로처럼 만들어진 건물에서 입구를 찾지 못하고 5명의 여성이 연기에 질식해 숨지고 말았다고 한다. 사건이 발생하자 경찰과 여성계에서 발 빠르게 현장을 방문하고 시신이 안치된 병원들을 방문하는 등 성매매 방지법 이후에 발생한 화재참사에 촉각을 세우는 모습을 보였다. 또는 ‘장례에 대한 책임’을 지는 모습을 보였다. 이 화재가 얼마만큼 세간에 각인되고 있는지 알 도리는 없지만 연이은 성매매 여성의 죽음에 이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대하려는 태도를 무시할 수는 없는 셈이다. 공언과 비현실적인 사후약방문에 너무나 익숙해져 있는 탓일까? 오히려 최소한 장례에 대해 책임을 지려는 정부의 태도가 신선해 보이기까지 한다.

그러나 조금 더 유심히 들여다보면 의례적인 모습일 뿐이라는 생각이 든다. 2002년 군산 지역에서 잇따라 발생했던 화재 사건 이후에 반복적인 비극이 과연 우연인 것일까? 성매매방지법이라는 이전의 정책과는 약간 다른 대안을 만들어 놓고도 우리는 개복동과 대형 화재로 여러 명의 성매매 여성이 목숨을 잃는 사고를 또 접하게 되었다. 게다가 언제나 그렇듯이 당장의 ‘사태수습’은 있지만 ‘진정’ 책임지고자 하는 세력은 없다.

이번 사건만 해도 업주는 경찰 조사를 받다가 도망간 상태고 관계 당국의 관리 소홀에 대한 책임론이 나왔지만 이는 슬그머니 뒤로 빠지고, ‘좁은 공간에서 여성들이 새벽까지 술을 마셨다더라, 그러다가 담배를 피웠겠지’ 등 책임회피적 인과관계가 억지로 만들어지고 사건을 유야무야 덮어버리려는 모습들이 보인다. 성매매 방지법 시행 이후에 발생한 사건이기 때문에 정부에서도 이전 사건과 달리 성의 있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하지만 이러한 일련의 과정이 비현실적이고 알맹이 빠진 의례로 비춰지는 것은 왜일까?

이 죽음의 책임에 대해서 누구보다도 할 말이 많은 사람들은 죽은 여성들일 것이다. 그러나 언제나 그렇듯 死者는 말이 없다. 서로 다른 공간에서 다른 위치에 있는 개인으로서 한 여성이 죽은 5명의 여성에 대해서 무엇인가를 말한다는 것은 매우 조심스러운 일이다. 무엇이 이 여성들을 죽음으로 내 몰았는지,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는지 왈가왈부하는 것이 혹여 죽은 자에게 폐를 끼치는 것이 아닌가 살얼음판을 딛는 것처럼 조심스럽다.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개복동 사건이 발생했을 때 세간에 많은 사람들이 성매매 여성의 현실에 이목을 집중했고 이 사건은 성매매 방지법을 추진케 한 계기로 평가되기도 할 만큼 ‘죽어야 사는 여자들’의 전형을 만드는 사건으로 재현됐다. 미아리 사건도 같은 방식으로 재현되고 있는 것일까? 그러나 나에게는 뭇매 때리듯 미아리를 비롯한 ‘집창촌 단속’에 박차를 가하려는 경찰과 관계 당국의 모습이 마임처럼 읽힌다. 집창촌 단속이 문제 해결의 처음이자 끝인 것처럼 말하고 있지만 부산에서 발생한 사건을 살펴 볼 때, 그 것이 ‘모든 성매매 여성들’의 살 권리, 안전할 권리를 찾는 방식은 분명 아니다.

개복동 이후 3년이 지난 지금, 미아리 화재에 이르기까지 ‘그녀들의 권리’는 찾아졌는가를 물어야 하지 않을까. 아님 최소한 반발자국이라도, 아님 권리의 ‘ㄱ’자라도 꺼낼 수 있는 틈바구니라도 있는지를 점검해 봐야 하지 않나. 이 사회에서는 아이러니하게도 죽어야 사는 많은 여자들이 있다. 죽어야만 그 여성이 겪었던 삶에 대해서 떠들어대기 시작한다. 죽지 않고서는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어떤 고통을 겪고 있는지? 혹은 어떤 삶을 기획하고 있는지? 소리칠 광장, 아니 조그만 틈도 갖지 못한 사람들. 그 가운데 하나가 성매매 여성들이다.

미아리 사건 또는 동류의 사건이 발생할 때 사람들은 늘 미연에 방지하지 못한 것을 책(責)하고 앞으로 이런 사건이 발생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에 대해서 논의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남의 다리 긁는 식의 이런 논의는 금세 사그라진다. 언론이 조용해지고 일상의 시간으로 돌아와서 책임져야 할 숙제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죽은 여성들의 안타까운, 억울한 죽음에 대해서 얼마나 생각하고 있을까?

한 여성이 가족의 시신확인절차 후에 무연고처리 되는 일이 있었다. 죽어서도 가족으로부터 배제당하는 일련의 과정을 목도하면서 제 설 자리를 찾지 못하는 여성들의 ‘권리’에 대해서 고민하게 된다. 성매매 여성이 되어 돌아 온 죽은 딸을 외면한 가족을 여기서 비난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누구도 안아 주지 않는 여성에게 더 이상 ‘안타깝게 희생당하는 여성들이 없도록 미연에 방지하도록 노력하겠다’는 공치사는 그만했으면 좋겠다. 문제의 당사자가 아니고서는 누가 진정으로 ‘아픈 가슴’을 가지고 있을까? 죽어서가 아니라 살아서, 성매매 여성들이 말하는 ‘안전할 권리’를 들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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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듣고 싶었던 좋은글 입니다
그들은 도대체 무었이 문젠지 모르는 사람들인것 같습니다
법만 만들면 된다는 건지?돈한푼 더주면 된다는 건지?
도대체 문제점이 뭔지나 알고있는지 모르겠더군요
그들은 더 나은 해결방안이 뭔지는 안중에도 없는것 같습니다.
지금까지 지켜본 봐로는 진실로 여성들의 인권을 생각하는 마음은 없고 오로지 자신들의 실적 만들기가 전부인 사람들처럼 보입니다 이번 사건을 다시한번 기회로삼아 이용하려는 모습에서 분노가 느껴집니다.

무지랭이
2005.03.31 21:3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