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이와 변혁을 가져오는 대항기억의 반복을"

상상적 재구성으로 본 일본군 성노예 문제와 페미니즘의 대항 기억

박미선 (여성문화이론연구소) neoburi@jinbo.net / 2005년10월12일 11시11분

1991년 김학순 할머니의 용감한 증언과 더불어, 보다 넓은 인식의 지평에 들어온 일본군 성노예 문제는 한국의 20여개 페미니즘 단체들이 결성한 정신대문제 대책 협의회 등의 끊임없는 노력으로 90년대 중반들어 전지구적인 인식의 지평에 떠오르게 되었고, 미국 내에도 일본군 성노예 담론 구성체를 형성했다. 이런 가운데 일본군 성노예에 관한 세 편의 소설이 1990년대 후반 미국에서 출판된 바 있다.

그 중 가장 페미니즘적인 작품인 <종군 위안부>(Comfort Woman 1997 한국어판: 밀알 펴냄 1997)에서 노라 옥자 켈러는 한국의 식민지 상황과 태평양을 건너 미국에서 후기식민 조건하에서 억압과 착취, 침묵의 삶을 살아간, 전 일본군 성노예 여성의 삶을 허구적으로 다시 불러낸다(fictively revive). 켈러는 이 여성의 딸이 성인되어 가는 과정을 어머니-딸 관계를 중심으로 펼쳐나가면서, 지금 여기 "우리"를 여전히 "홀리고 있는"(haunting) 과거의 역사적 폭력을 페미니즘 페다고지 및 페미니즘 재현 정치학과 밀도높게 연결한다.

이 작품은 1993년 하와이 대학에서 있었던 황금주 할머니의 증언 때문에 쓰여지게 된 소설이다. 이 증언을 듣고 충격에 빠진 한국계 미국인 여성 작가 켈러는 몇 년에 걸쳐 일본군 성노예에 대한 연구를 수행했다. 그녀의 원래 계획은 이에 관한 역사적 에세이를 쓰는 것이었지만, 대신 소설이라는 허구적 장르를 택한다. 왜?

이 소설에서 켈러는 과거의 역사를 있는 그대로 재현할 수 있다는 순진한 믿음이 착각이라는 것을 분명히 보여준다. 우리는 과거를, 특히나 트라우마를 남기는 폭력의 과거를 있는 그대로 재현할 수 없다. 하여, 켈러가 선택하는 방식은 상상력을 동원한 재구성(imaginative reconstruction)이다. 이 상상적 재구성에는 애드리안 리치가 페미니즘적 역사쓰기에 필수적이라고 했던 바 있는 "교육된 추측"(educated guess)이 필수적이다. "왜냐하면, 여성들의 삶은 말 그대로 가장 많이 기록되지 않아 왔기 때문이다"(Blood, Bread, and Poetry 148).

이런 점에서 켈러의 소설은 "과거지사"운운함시롱 역사적 망각에 빠져들려는 의도적인 무시, 무지에의 의지(willing ignorance), 스피박이라면 "인가된 무지"라할 작태에 맞장을 뜨는 비판적 작업이다. 또한, 이 소설은 침묵속에 갇힌 "서발턴" 아카이브를 뒤져 또하나의 다른 역사를 기억하는 작업이자, 종속된 지식들을 풀어내는 대항기억(countermemory)의 작업이라 할 수 있다.

"위안부질"을 거부하는 저항 속에서 무참히 죽어간 아키코 40번에 이어 이른 10대에 아키고 41번 "위안부"가 된 순효/아키코를 "교육된 추측"을 통해서 재구성한 이 소설은 최소한 다음과 같은 세 가지를 보여준다. 1) 20세기 젠더화된 폭력의 역사를 가장 복잡하게 보여주는 중층결정된 층위는 여성의 성차화된(sexed) 몸이다. 2) 특히 식민지 공간에서 여성의 섹슈얼리티와 몸에 대한 초강력 착취와 극도의 폭력은 지배와 종속을 유지하는데 강력한 수단이다. 3) 여성의 몸을 남성중심적, 초강력 섹슈얼리티화로 동원하는 것은 한때 피식민의 압제를 몸소 경험했던 한국인들의 민족 운운하는 공모성 속에서 전적으로 침묵되었다. 스피박이 "인가된 무지"라 부른 이런 작태야말로 소위 독립 후의 상황에서 탈식민(decolonization)을 여전히 미완의 기획으로 남게 한 것들 중 하나다.

이런 점에서 페미니즘 정치학에 입각한 의미화 실천인 이 소설의 핵심 기획은 역사적으로 자행된 "성적 홀로코스트"의 자취를 밟아 나가면서 이에 대한 공모적 침묵의 자지중심적 후기식민 역사까지도 밝혀내는 것이다. 더 나아가 이 소설은 이러한 폭력과 공모의 역사가 현재에도 수많은 위장과 다른 형태들로 계속되고 있다는 점을 시사한다. (그래서 이 소설의 2탄으로 켈러는 한국 내 미군 기지의 성매매 여성들에 대한 소설을 출판한다. Fox Girl [2002].)

이런 점에서 이 소설은 페미니즘의 대항기억으로 무장하고서 21세기 미래를 열어젖히는 페미니즘 윤리를 탐색해 보는 작업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식민폭력의 육체적 공간과 타자화된 자아

순효/아키코는 동일인물이지만 동시에 이 둘 사이에는 환원불가능한 불귀의 지점이 있다는 점은 식민 폭력이 육체적 공간에서 가장 중층결정적으로 일어난다는 점을 보여준다. 다시 말해 순효/아키코는 근본적 불연속성이 있는, 모순어법적인 연속성을 체현하는 인물인데, 아키코가 된 순효/아키코의 육체와 심리, 마음, 정신은 "너무나 상처를 깊이 있고 얻어 터져서 제대로 치유되기가 불가능"했다 (15). 순효/아키코는 같지만-같지 않다. 이 동일한 인물 사이에 놓인 빗금이 시사하듯이, 이 둘 사이에는 역사적이고 경험적인, 넘어갈 수 없는 장벽(bar)이 있다. 이 순효/아키코 사이의 장벽/빗금은 개인적이고 집단적인 역사의 환원불가능한 불연속성을 시사한다. 그리고 이것은 역사적 폭력이 남긴, 근본적인 수준까지는 치유불가능한 트라우마의 자리를 가리키기도 한다.

순효/아키코는 "얼빠진 사람"(57), 즉 영혼은 상실했으나 그 몸은 계속 움직이는 사람으로 살아간다. "화냥년"에 대한 "우리" 사회의 집단적 낙인을 잘 알고 있는 순효/아키코는 평생 아키코라는 호명에만 응함시롱, 자신은 "부모에게서 받은 그 이름을 사용할 권리가 이제 더 이상 없으며, 그 소녀는 죽은지 오래"라고 느낀다(93). 이렇게 짓밟혀진 여성의 육체에 가하는 사회적 낙인은 미국인이라고 해서 별 다를 것이 없다. 미국인 선교사이자 해방후에 순효/아키코의 "섹시함"에 끌려 결혼한 리차드에게도 전 일본군 성노예 여성은 "타락한 여성"(94)일 뿐이다. 하여 의도적인 침묵속에서 아키코는 순효라는 이름을 "자신의 진정한 이름"으로(183), "진정한 목소리이자 순수한 언어"(195)로 몰래 간직한다.

여기서 우리는 순효가 아키코의 타자화된 자아라는 점을 알 수 있다. 순효/아키코는 여전히 순효다. 하지만 동시에 일본군 성노예 폭력이전의 순효로 돌아갈 수 없다는 점을 알고 있다. 아키코는 살아남기 위해서 이 환원불가능한 장벽이 있지만 또 복잡하게 연결되어 있는 순효/아키코를 숨긴다: "나의 진정한 자아, 나의 근본적 본성을 숨김으로써 나는 위안부 캠프에서, 그리고 이 새 나라 미국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다"(153).

순효를 아키코의 "진정한" 자아로 마침내 긍정하는 것은 아키코/순효가 아니라 그녀의 딸 베카라는 점은 의미심장한 데가 있다. 여기서 우리는 여성들의 계보가 가지는 역사적 힘을 감동적으로 목도한다. 즉, 순효를 한때 "좋았던" 시절의 "통합된" 자아로 낭만화하지 않은채 역사의 폭력을 까발림시롱, 3.1독립 운동에 가담해서 멀리 피신한 차에 어느 농부와 결혼해야 했던 지식인 여성 할머니 --> 식민지 공간에서 "위안부질"을 강요당한 후 미국인 남편과 태평양을 건넌(cross-cultural) 어머니 --> "미국인 소녀," 딸 베카(119)로 이어지는 여성들의 계보를 마침내 전수해주는 것은 바로 이 순효/아키코라는 복잡한 자아인 것이다.

이런 식으로 켈러는 정체성을 무역사적으로 고정하지도 않고 하나를 특권화시켜 다른 것에 우위를 점하게 하지도 않는다. 대신, 동일하지만 환원불가능한 불연속성을 지닌 순효/아키코라는 이중적 인물화를 통해서 켈러는 하나의 중요한 역사의 아이러니 혹은 아포리아를 드러낸다. 즉, 타자화된 자아(순효), 자기 자신의 자아를 타자화하는 것은 타자(인덕)을 자아화함으로써 의미심장한 방식으로 보완되며, 타자를 자아화하는 윤리야말로 후기 식민 조건하에서, "상실된 무언가를 다시 복구해내는" 방식이 될 수 있다는 점.

타자를 자아화하는 윤리

순효/아키코의 삶, 서사의 심장부에는 "위안부" 40번 아키코/인덕이라는 홀리는 형상이 존재한다. 인덕은 이 소설의 유령적 중심을 이룬다. 인덕은 아키코 40번으로 다시 명명되어 "위안부질" 강요에 저항하다가 처참하게 죽어갔고, 원혼(wandering ghost)이 되어, "위안부" 캠프에서 천신만고 끝에 탈출하여 두만강에 빠져 죽으려는 순효/아키코에게 나타나 "살아남아 나를 기억하라"고 주문하는 수호귀신으로 묘사된다.

단절되었지만 연결되어 있는 순효/아키코 관계와 비슷하게, 인덕은 순효/아키코에게 나와-함께있는 혹은 내-속의-또다른-나이다. 즉, 인덕은 말그대로 육체적으로는 죽었지만 유령적으로 살아있는 순효-변형판이다. 아키코의 말대로 하자면, 아키코는 인덕의 살아있는 "겁쟁이"(144) 버전이다. 아키코/순효가 어딜 가든 두 번 버려진 인덕의 육체 이미지가 늘상 따라다닌다. 숲속에 아무렇게나 버려진 인덕의 시신을 수습하지 못했다는 점땜시롱 인덕을 두 번 버렸다/죽였다는 죄의식에 찬 윤리의식.

하여 이것은 순효/아키코는 인덕의 원혼이 자신 속에, 자신과 함께 있기를 강렬히 원하게 되는 모티브가 된다. (이것 때문에 빈번히 의식불명 상태, 혹은 "미친" 상태에 빠져들어도.) 이런 점에서 살아남은 순효/아키코의 이후 삶은 인덕의 원혼을 평생 달래는 과정이며, 이 바통을 딸 베카가 이어받으며, 이러한 달램과 기억의 제의는 다른 누구가 아니라 바로 자기 자신을 위한 제의가 된다.

여기서 우리는 comfort woman에 들어있는 comfort가 명사가 아니라, 가부장적 제국주의의 폭력 속에서 죽어간 여성들을 기억함으로써 '위안하라'는 동사라는 점을, 가부장제 자본주의에 맞서 투쟁하는 여성들끼리 상호 '위안'하는 페미니즘 윤리와 문화의 절박성을 촉구하는 동사로 바꿀 수 있다.

자신의 평생 과제를 인덕을 "위안하는" 것으로 삼은 순효/아키코는 항상 "인덕이 자신 가까이 있음시롱 자신을 기다리고 원한다"고 느끼면서 자신과 인덕을 분리하려고 하지도 않는다. 이렇게 순효/아키코 속에 있는/와 함께 하는 인덕을 통해서 우리는 자아와 타자를 배려하고 기억하는 서발턴 여성들의 윤리를 엿볼 수 있다.

다시 말해서, 공식 역사 기록에서는 거의 한결같이 누락되었는지라 우리에게 잘 전해지지 않았지만, 서발턴 여성들 사이에는 역사적으로 항상 서로를 돌봄으로써 자신을 돌보는 자생적인 윤리가 존재해 왔다는 점.

이러한 서발턴 여성들의 윤리를 보여주는 하나의 예로서 인덕―순효/아키고의 관계는 타자를 자아화하는 윤리(the ethics of selfing the other)의 급진적 정치학을 우리로 하여금 그려볼 수 있게 해준다. 인덕은 순효/아키코의 자아화된 타자(selfed other)이다. 즉 타자가 될 수 없는 타자/자아말이다. 이런 형상으로서 인덕은 트라우마적 경험이 남긴 상처들이 터뜨리는 목소리를 끊임없이 그라고 주의깊게 듣는 것에서 나오는 변혁적 인식을 촉구하는 인물이다. 그렇지만 유령적인 인물로서 인덕은 유령을 우리가 생포할 수 없듯이, 우리가 전적으로 과거를 포착할 수 있다는 착각이야 말로 또 다른 지배를 위한 욕망(desire for mastery)이라는 점을 환기시킨다.

우리 시대 (페미니즘을 포함한) 비판 이론에서, 타자는 타자나 차이를 존중하기 위해서라기 보다는 자아를 정의하기 위한 가장 강력한, 분석적 용어가 되었다. 동과 서는 상대방을 타자로 취해서, 스스로를 보다 강력하게 재정의하고 그라고 동서의 경계들을 전지구적 자본주의에 유리하게 끊임없이 다시 그리고 있을 뿐이다. (이것이 흉내내기에 급급한 "우리"와 서구 비판, 급진 이론들의 윤리적 덫이다.) 그러는 사이 타자와 자아는 다양한 이데올로기적, 수사적, 정치적, 이론적 합주 속에서 순전한 추상속으로 녹아 없어지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우리 자신의 이론적 실천이 궁극적으로 어디에 무엇에 봉사하는지 경계하고 또 경계해야 한다. 이러한 자기비판적 경계 역시 아이러닉하게도 또 하나의, 새로 발견된 담론 권력을 형성할 지라도.) 이것이야말로 왜 우리 시대 담론들이 신체, 체현, 육체성 등을 다시 사유하는 근본적인 방식들에 그토록 천착하고 있는지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또한 이것은 왜 자아화된 타자가 인덕―순효/아키코라는 유령적인 복합체로 밖에는 재현될 수 없는가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문학적 재구성을 통해서, 태평양 건너 미국에서까지 인식의 공간을 협상해냄시롱 더 나아가 감정이입과 대항기억의 지평을 넓히는 이 작품을 길게 논한 것은, 역사적 망각에 맞서 끊임없는 재기억의 제식이 우리에게 너무나 절실하기 때문이다. 요즘의 과거사 반성 문제도 반성을 운운하는 정도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제의화된 반복, 그러나 차이와 변혁을 가져오는 그런 대항기억의 반복을 통해서만, 폭력의 역사와 잘못된 억압으로 점철된 역사를 다시 되풀이 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요즘 쟁점이 되고 있는 성노동(자 운동) 문제도, 우리가 이러한 젠더화된 억압의 역사에 대한 집단적 기억 속에서, 그리고 관련된 여성들 (전 일본군 성노예 여성들이든 성노동자 여성들이든)을 피해자로 냉큼 규정해버리거나, 우리의 '가정'을 안전히 지키고자 사회적 낙인속에 철저히 가두어 두는 것이 아니라, 자기 결정권을 지닌 역사적 행위자-주체로서 "논의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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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미선 님은 여성문화이론연구소 연구원으로 일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