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부독재체제 하에서 한국의 정치지형은 크게 보아 군부세력 중심의 파쇼적 지배블록과 군부독재에 반대하는 다양한 세력들이 참여한 범민주연합전선과의 대립구도에 의해 특징지워졌다. 이 연합전선에는 지배블록에서 배제된 자유부르주아 야당세력과 야당을 지지한 재야 명망가들 및 청년·학생세력과 기층민중세력이 참여했다.
이 전선의 상층부는 야당세력과 야당에 동조적인 재야인사들이 차지한 반면 청년·학생세력이 이 연합전선의 실질적인 중추를 이루었다. 이들 청년·학생세력은 애초에는 주로 정치적 민주주의의 쟁취에만 관심을 지녔었다. 그러나 유신체제를 경험하고, 80년 5월 광주민중항쟁이 신군부세력에게 무참하게 진압된 이후부터 이들은 급속하게 급진화되어 한국사회의 발본적인 변혁을 추구하는 세력으로 변모하기 시작했다.
청년·학생세력은 이후 크게 보아 일제시대의 민족해방운동의 전통을 계승하면서 반제운동 및 분단체제 극복을 위한 통일운동을 중시하는 '민족해방파(NL)'와, 그간의 한국사회의 산업화과정이 가져온 계급모순의 해결을 중시하는 '인민민주파(PD)'로 분화되기 시작했다.
청년·학생운동의 주류적 흐름을 대변한 NL파는 '민주대연합'의 유지를 중시해 김대중세력으로 대표되는 자유부르주아세력에 대한 '비판적 지지'노선을 견지한 반면, PD파는 변혁세력의 독자적 세력화와 노동자·민중 헤게모니에 의한 자유부르주아 헤게모니의 대체를 주장했다. 이와 관련하여 당시에 성립된 '범민주연합'은 크게 보면 지배블록에 대항하는 자유부르주아세력과, 급진화된 청년·학생세력 - 이들 세력을 우리는 '쁘띠부르주아 진보세력'으로 규정할 수 있다 - 및 당시에는 아직 강력한 힘으로 성장하지 못했던 노동자·민중세력이 주축이 된 진보세력간의 연합체였다고 말할 수 있다.
쁘띠부르주아 진보세력은 1980년대 후반에 이르러 괄목하게 성장했지만, 자유부르주아 야당세력과 재야 명망가들을 대신하여 반독재민주화운동의 대외적 주도권과 대국민적 헤게모니를 장악할 정도로까지는 성장하지 못했다.
1987년 6월 민주화를 위한 범국민적 투쟁은 한국의 정치지형을 변화시키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자유부르주아 야당세력은 이미 이전부터 선거를 통해 군부정권을 종식시켜야 한다는 '선거혁명론'을 일관되게 주창하고 있었다.
그러나 김영삼세력과 김대중세력의 분열에 힘입어 13대 대선에서는 전두환의 후계자인 노태우가 당선되었다. 이 점에서 자유부르주아 야당세력은 13대 대선에서 자신이 줄곧 주창해온 선거혁명을 실현시키기 못했다. 그러나 합법적 정치활동의 공간을 확보하고 의회에 대거 진출할 수 있었던 자유부르주아세력은 6월투쟁의 최대의 수혜자였다. 이로 인해 자유부르주아 야당세력은 노태우정권 하에서 이미 이전에 '반독재민주대연합'의 형태로 형성되어 있던 저항전선에서 이탈하기 시작했다. 이어 김대중세력과 더불어 자유부르주아 야당세력의 양대 산맥을 이룬 김영삼세력이 90년 2월 '3당통합'의 형식을 빌려 군부세력과 손을 잡았다.
이에 따라 자유부르주아 세력의 일부는 노태우정권 하에서 이미 지배블록의 한 분파로 편입되었다. 이후 1992년 12월의 14대 대선을 통해 김영삼정권이, 그리고 1997년 12월의 15대 대선을 통해 과거 파쇼적 지배블록의 한 분파였던 김종필세력과 손잡은 김대중세력이 정권을 장악했는데, 이를 통해 이들 자유부르주아세력은 지배블록의 핵심분파로 상승할 수 있었다.
정권을 장악한 자유부르주아세력은 위로부터 민주개혁을 일정하게 추진하는 동시에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의 물결에 편승하여 그간 한국사회의 신자유주의적 개편을 주도적으로 추진해 왔다. 이로 인해 자유부르주아세력이 피지배블록에서 이탈해 지배블록의 한 분파로, 이어 지배블록의 핵심분파가 되는 과정은 지배블록의 정치적 성격을 '파쇼적 지배블록'에서 무엇보다 '신자유주의적 지배블록'으로 변화시키는 과정을 동반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오늘날 한국의 지배세력은 여당이든 야당이든 모두다 신자유주의 정치세력의 성격을 기본적으로 지니고 있다.
그런 가운데 노무현 중심의 여당세력이 '상대적으로 진보적인 신자유주의분파'로서 출현하고 있다면, 이회창 중심의 야당세력은 '상대적으로 보수적인 신자유주의분파'로 출현하고 있다.
자유부르주아세력이 피지배블록에서 이탈함에 따라 피지배블록은 애초에는 쁘띠부르주아 진보세력을 중심으로 재편되었다. 쁘띠부르주아 진보세력은 민중항쟁의 조직화를 통해 노태우정권을 퇴진시키기 위해 노력했지만, 야당과 중간층의 불참 및 정권과 보수언론의 대대적인 이데올로기적 공세에 밀려 별다른 성과를 얻지 못했다.
이러한 과정은 쁘띠부르주아 진보세력에게 커다란 좌절감을 안겨줌으로써 그들의 힘을 급속하게 약화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이들의 힘을 결정적으로 약화시킨 것은 그러나 1980년대 말과 90년대 초에 현실사회주의권이 붕괴하고, 1992년 말에 실시된 14대 대선에서 김영삼이 당선된 것이었다. 이 이후 쁘띠부르주아 진보세력의 많은 부분은 진보진영에서 이탈해 갔는데, 이와 관련하여 우리는 1980년대가 쁘띠부르주아 진보세력의 '급속한 성장과 급진화의 시기'였다면 1990년대는 이들 진보세력의 '급속한 조락과 우경화의 시기'였다고 말할 수 있다.
다른 한편 민주화과정이 도입됨과 더불어 부르주아 인텔리층과 신중간층 중심의 시민운동이 급속하게 성장하기 시작했다. 이들 시민운동세력은 한국사회의 민주화에 일정하게 기여하면서도 오늘날에는 한국사회의 신자유주의적 개편을 뒷받침하는 사회적 힘이 되고 있다.
그런데 1987년 6월 민주화를 위한 범국민적 투쟁 이후의 시기는 노동운동을 비롯한 기층민중운동이 본격적으로 성장·발전하고, 노동운동이 한국진보운동의 명실상부한 중심적 운동으로 성장·발전한 시기이기도 하다. 1987년 7∼9월 노동자대투쟁 이후 성장·발전하기 시작한 민주노동운동은 오늘날 한국사회의 신자유주의적 개편에 반대하는 가장 강력한 사회적·정치적 힘으로 등장하고 있다.
그렇지만 민주노동운동은 오늘날 두 개의 중요한 내적 장애물에 부딪쳐 커다란 진통을 겪고 있다. 그 하나는 민주노동운동 상층부의 많은 부분이 갈수록 관료주의적 집단으로 변질되고 있고, 이들이 투쟁하는 노동자대중에게 끊임없이 좌절을 안겨주고 노동자대중의 신자유주의반대투쟁의 성장·발전을 훼방놓고 있다는 점이다.
다른 하나는 사민주의적 계급타협노선 - 이 노선이 오늘날에는 '사회적 조합주의' 등으로 표현되고 있다 - 과 노동자계급의 정치세력화를 제도정치권으로의 진출로 축약하는 의회주의적·선거주의적 노선이 민주노조진영의 주류적 정치노선이 되고 있고, 그런 노선을 대변하는 민주노동당에 소속한 후보들이 이번 지방자치제 선거를 통해 제도정치권으로의 진출을 눈앞에 두고 있다는 점이다. 이 점에서 한국의 노동자정치운동은 오늘날 중대한 고비를 맞이하고 있다고 하겠다.
노동자대중의 열망을 관료주의적으로 짓밟고, 사민주의적·의회주의적으로 왜곡하는 일체의 경향에 대항하며 대중정치를 활성화하고 노동자대중 자신을 정치의 진정한 주체로 상승시키기 위한 비상한 노력이 요구되는 시점에 우리는 놓여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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