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동지역의 역사적 의미와 변천사②] 근대화 시기의 정동

[문화사회 편집자주] 주한 미국 대사관측은 현 세종로 대사관 청사를 오는 2006년까지 현 중구 정동 1-8번지 옛 덕수궁 터에 지상 15층, 지하 2층, 연면적 54,976.13㎡ 규모(과거 조선총독부의 1.8배)로 신축, 이전하겠다고 합니다. 미 대사관측은 또한 대사관 신축예정 부지와 인접한 옛 덕수궁 터에 대사관 직원용 8층 아파트와 4층짜리 군인용 숙소도 함께 지을 예정입니다. 하지만 미국 대사관 및 아파트, 군인숙소 등이 들어설 장소는 과거 일제에 의해 강탈당한 덕수궁의 옛 터입니다. 즉 그곳은 단순한 공터가 아니라 대한제국을 비롯한 우리 근대사의 숨결이 남아있는 역사적 장소이자 장차 복원해야 할 매장문화재가 묻혀있는 소중한 문화유산의 터전인 것입니다.
[문화사회]에서는 정동지역의 역사적 의미와 변천사를 네 차례에 걸쳐 연재할 예정입니다. 정동지역의 의미를 되새김과 동시에 현재 "(가칭)덕수궁 미대사관 신축을 반대하는 시민모임"에서 벌이고 있는 거리서명전(매주 금요일), 덕수궁앞 1인시위(매일), 인터넷 서명(www.palace119.org) 등의 활동에도 많은 관심과 참여를 바랍니다.


①근대이전의 정동
②근대화 시기의 정동
③일제하의 정동
④현재의 정동과 역사적 의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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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근대화시기의 정동

정동지역이 변화하기 시작한 것은 1883년부터이다. 1880년 초까지 외국인들이 4대문안에 거주하는 것이 금지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1887년 고종이 황제로 즉위하면서 경운궁을 신궁으로 설정하였으며, 조선과 접촉하기를 원하는 서구의 압력으로 외국의 사절단 수가 증가하자 고종황제는 제한을 완화하여 정동지역을 외국사절단이 사용하도록 하였다. 또한 외세의 압력을 파악한 고종이 필요할 때 덕수궁으로부터 피신할 수 있는 외교적 은신처를 갖기를 원했던 것으로 보여진다.

개화기가 되면서 덕수궁내외에 서양식의 건물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궁내에는 돈덕전, 정관헌, 구성헌이 궁외에는 중명전, 환벽정이 신축되었다. 수옥헌(중명전 포함)은 주변에 서양 열강들이 둘러싸고 있어 중요한 거점이 되었다. 덕수궁은 세 번에 걸친 화재가 있었는데 치명적인 피해를 입은 화재는 1904년 일본인들이 방화한 것으로 추측이 된다. 이때에 덕수궁의 내전은 거의 화마를 입었으며 불에 피해를 입지 않은 것은 양관인 돈덕전과 구성헌인 것을 이탈리아 군이 그린 그림에서 볼 수 있다. 황제는 화재가 나자 거처를 중명전으로 옮긴다. 1905년 이토 히로부미는 을사보호조약을 체결하는데 그 조인이 이루어진 곳이 중명전이다. 또한 1907년 고종은 강제로 양위 당하고 수옥헌에서 지내게 된다. 하지만 중명전도 1925년 화마를 입어 외벽과 낭하만 남기고 전소하게 된다. 그 후 재건되어 외국인구락부로 사용되었고, 해방후에는 서울클럽으로 사용되었다.
중명전 옆에는 양복당이 있었다. 이곳은 순종의 계비 윤씨가 황태자비일 때 살던 곳이다. 양복당 외에도 만희당, 흠문각, 장기당, 강태실, 수풍당, 등이 있었다.
환벽정은 양관으로 미국공사관과 러시아 공사관 사이에 있었으며, 순종이 왕세자일태 거처로 사용되었으며, 순종이 창덕궁으로 옮기면서 해체되었다. 정관헌은 1901년에 세워진 것으로 태조의 영안을 봉안하던 곳이다 구성헌는 고종이 외국사진을 접견하던 곳이었는데, 석조전을 지으면서 철거 되었다.

일제때 들어선 경성지방법원은 1886년 국립 육영공원이 세워졌던 곳이며, 1895년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재판소인 평리원이 들어선다. 현재는 시립미술관으로 사용중이다. 1897년 이후 영선사는 덕수궁의 대지와 궁내부, 의정부가 있는 도로 건너편으로 다리를 놓았다. 이것을 "운교" 또는 "홍교" 라고 불리었으며 이준열사의 회고록에 의하면 평리원과 덕수궁사이에 구름다리가 놓여져 있어 고종이 자주 왕래했었던 것으로 되어 있다. 또한 서궐인 경희궁과도 연결된 다리가 있는 것이 황성신문(1902년)의 기록에 있으며 해방후에도 그 흔적이 남아 있었다.
한미수호통상조약(1882년)이 체결된 후 미국특명전권공사로 푸트가 임명되었다. 1883년 서울로 들어온 푸트는 많은 외교사절을 데리고 경복궁에서 고종을 배알한다. 미공사관의 개설은 "윤치호의 일기"에 처음 나타나며, "경성부사"에 의하며 당시 중부 정동에 있는 민계호 소유의 사저를 구입(1883년)한 기록이 있다. 조선에서 외국인의 땅매입은 1884년 말에나 가능하게 되는데 미국이 조선의 땅을 불법취득한 것이다. 궁궐일대의 토지는 명성황후 민씨일가의 땅이었으며, 관방전과 궁장토로 나누어져 있었으며 당시 일반인들에게는 정동지역의 많은 부분이 사유재산이기보다는 국유의 재산으로 생각되고 있었다. 현 미대사관저 터는 민계호와 민영교의 소유로 되어 있었다. 미대사관의 자료에 의하면 1884년 8월14일 125간의 건물과 300간의 공터를 민계호에게 1만량을 주고 매입했다고 되어 있으며 같은 날 민영교는 150간의 토지와 140간의 기와집을 사들였다고 되어 있다. 4년후 한성부에서 공식적인 문서가 발급되었는데 1888년 "Year of Our Lord"로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대사관의 자료에는 1884년 김감역의 토지매입과 1890년 김영보의 토지매입을 기록하고 있어 미국정부는 정동지역의 작은 규모의 땅과 주택을 추가로 사들이고 있는 것으로 추측된다.

1902년 5월 한성부와 외부(현 외교통상부)사이에 오고간 보고서를 보면

"1901년 12월 정동에 황궐이 소재한 위치와 개발이 금지된 지역의 면적도면 및 그 지역 내에서 건축되는 가옥의 높이 제한을 헤아려 적어서 일체를 보고한 일로 외부 제 11호 훈령을 받은 바 있습니다. 이는 관련 각국 공사와 의논하여 결정할 사안이므로 그 평면적과 고저 제한의 측량에는 진실로 차이가 있어서는 안되며, 또 아무나 할 일이 아닙니다."

"막중한 궁궐 인근지역에는 외국인과 본국인을 막론하고 마음대로 서로 팔고 살 수 없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간혹 외국인이 양옥을 높이 지어 궁중을 내려다보니 그때마다 공무수행에 곤란한 점이 많습니다....... 각 궁궐 부근의 지형을 샅샅이 둘러본 결과, 궁궐 담장 밖으로부터 500미터 이내의 지역에 대해서는 반드시 가옥 건축을 방지하고 제한하는 금령을 두는 것이 일의 체통을 미안하게 하는 사례를 방지할 수 있는 방도가 될 것입니다."

"이에 각 궁궐을 열거 기록하여 보고 하오니, 살펴보시고 각 궁궐 담장으로부터 500미터 이내의 지역에는 내외국인을 막론하고 마음대로 새집을 짓지 못하도록 해야 할 것이며, 만약 옛집을 매매할 경우에는 반드시 관공서의 허락을 받은 후에 팔겠다는 의사를 각 공관에 먼저 알리도록 해 주시기 바랍니다."

대한제국 황실은 덕수궁으로부터 500미터 지역에 대해 개발 제한을 가하고 있고 집의 높이를 제한하고 있었다. 황실은 정동지역을 "녕의 공간"으로 인식하고 있었으며, 정동일대의 옛집을 매매할 경우 한성부와 외부의 허락을 받아야 했다.

1888년 경희궁에 소속된 언덕인 상림원엔 러시아공사관이. 1889년 독일공사관이 옛 서울지방법원 언덕자리에, 1901년엔 이탈리아공사관이 서소문부근에 지어졌다. 이런 공사관 건물들이 우후죽순 격으로 들어서면서 정동지역은 도시화되기 시작하였으며 외국공사관들이 우리의 법을 어기고 있음을 알 수 있다..

2002년 5월 김정동(목원대 교수)의 논문 "개화기 이후의 서울 정동동역의 변천사"에서 요약 정리한 내용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