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동지역의 역사적 의미와 변천사③] 일제하의 정동

[문화사회 편집자주] 주한 미국 대사관측은 현 세종로 대사관 청사를 오는 2006년까지 현 중구 정동 1-8번지 옛 덕수궁 터에 지상 15층, 지하 2층, 연면적 54,976.13㎡ 규모(과거 조선총독부의 1.8배)로 신축, 이전하겠다고 합니다. 미 대사관측은 또한 대사관 신축예정 부지와 인접한 옛 덕수궁 터에 대사관 직원용 8층 아파트와 4층짜리 군인용 숙소도 함께 지을 예정입니다. 하지만 미국 대사관 및 아파트, 군인숙소 등이 들어설 장소는 과거 일제에 의해 강탈당한 덕수궁의 옛 터입니다. 즉 그곳은 단순한 공터가 아니라 대한제국을 비롯한 우리 근대사의 숨결이 남아있는 역사적 장소이자 장차 복원해야 할 매장문화재가 묻혀있는 소중한 문화유산의 터전인 것입니다.

[문화사회]에서는 정동지역의 역사적 의미와 변천사를 네 차례에 걸쳐 연재할 예정입니다. 정동지역의 의미를 되새김과 동시에 현재 "(가칭)덕수궁 미대사관 신축을 반대하는 시민모임"에서 벌이고 있는 거리서 명전(매주 금요일), 덕수궁앞 1인시위(매일), 인터넷 서명
( http://www.palace119.org ) 등의 활동에도 많은 관심과 참여를 바랍니다.


①근대이전의 정동
②근대화 시기의 정동
③일제하의 정동
④현재의 정동과 역사적 의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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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7년 8월 순종이 돈덕전에서 즉위하고 11월 창덕궁으로 옮겨간다. 고종은 중명전에서 다시 덕수궁(고종의 궁호)으로 옮겨온다. 1919년 덕수궁에서 고종이 승하하자 궁은 버려지고 건물들은 노후화 되고 황폐화된다. 1907년 일본의 제실재산에 대한 정리가 되면서 관방의 특권은 폐지되고 궁장토는 제국재산정리국의 관리에 들어가며 1908년 "칙령 제39호"에 의해 국유로 이속되며 궁내부의 소관이 된다.

한성부가 경성부로 바뀐 것은 일본에 의한 것으로 1910년 10월의 일이다. 이때까지 정동은 대정동과 소정동으로 되어 있었으며 1914년 4월 정동정으로 통합되어진다. 대정동 일부는 무교정과 태평통 1정목, 태평통 2정목으로 소정동 일부는 서소문동에 포함되었으며 오늘날의 정동이 대체로 확정된 것은 1914년이다. 정동동역은 현재의 서대문과 서소문 그리고 광화문 네거리, 태평로 지역을 말하는 것이며 정동지역은 대부분의 사사지(社寺地)로 이루어져 있었고 정동 땅의 24.17%는 창덕궁의 소유로 되어있었다. 1931년의 통계자료에 따르면 정동동역은 2만2천223평, 인구는 753명(조선인: 396명, 일본인 207명, 외국인 150명)이었다. 아직 조선인이 월등히 많이 살고 있지만 외국인의 증가와 그 중에서도 특히 일본인의 증가가 많은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1929년 일본이 촬영한 사진을 보면 정동지역을 조선의 심장(덕수궁, 경성부청)이라 했으며 남대문에서 경성부청까지, 덕수궁 돌담길 순화동 길이 보이고 있으며 건물은 경성부청, 석조전, 서소문동의 고등법원(옛 대법원 청사)등이 보이고 있다. "경성부내 등외도로 국부개선 노선"자료를 보면 정동 중심에서 주변으로 나가는 4개의 도로를 개수하고 있고 1916년부터 연차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1) 정동에서 서대문통 2정목까지는 270간을 폭 3.5간으로 1917년 개수
2) 정동에서 서대문까지는 1916년 1차 개수에 이어 1920년 320간을 2.5간으로 다시 개수했다. 정동의 돌담길은 1917년에 생겨난 것이다.
3) 정동에서 의주통까지는 1924년에 개수되었는데 이는 210간을 폭 4.5간으로 늘리는 것이었다.
4) 정동에서 태평동 1정목은 1924년 길이 160간을 폭 4.5간으로 개수했다.
5) 우회로는 1개소로 정동 16번지에서 화천정 1번지까지, 90간을 2.5간으로 개수
덕수궁과 미국대사관 관저간의 도로는 해방이후 개수된 것이다.(1간은 6자, 1.8미터)

1910년 일본에 병합되면서 점차 덕수궁의 건물은 황폐해져 갔다. 1930년에 덕수궁에 남아 있던 건물은 당(堂)이 7개, 전(殿)이 6개, 헌(軒)이 5개로 18개 건물에 불과했다. 원래 있던 건물은 모두 불에 타거나 헐리게 되었다. 1931년 5월 일본이 덕수궁의 공원화 문제를 공론화하자 이왕직(李王織)과 어용단체인 "경성도시계획연구회"는 "덕수궁의 일부분인 약 1만평(총 2만 1백평)을 민중의 유원지로 만든다."고 발표했다. 또한 도시계획을 세운다며 그 이름을 "중앙공원"이라 붙였다. 경성부윤은 "주변에 있는 경성부청, 재판소, 각국 영사관, 조선호텔과 어울려 태평통에 면하는 아주 이상적인 공원이 된다."고 하였다.

이에 따라 1932년 4월 덕수궁 내 각전을 수리하고 정원을 수축하면서 궁 안에는 벚꽃나무를 심었다. 그리고 석조전 뒤편에 있던 돈덕전 자리에는 아동운동장을 설치했으며, 휴게소 2개소, 매점 등 기타시설도 보완했다. 이후 석조전은 일본 고관들의 여관으로 사용되다가 서울에 호텔들이 늘어나자 일본인들의 미술품을 진열하기 시작되었다. 석조전은 이때부터 이왕가미술관이 된 것이다. 일본은 1933년 10월 이왕직의 명의로 덕수궁을 일반인에게 공개했으며, 순종에게 허락을 받았다고 했다.


하지만 오래된 사진을 보면 정동지역엔 오래된 나무와 건물들이 드문드문 남아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정동지역은 얼마동안 아주 특별하고 제한적인 용도로 남겨져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정동에 제일 먼저 들어 온 외국공관은 미국공사관이었고, 처음 세워진 이양관은 러시아 공사관과 러시아 아치이다. 배재학당과 영국공사관, 프랑스공사관등 약 25개의 건물이 들어섰으며, 현재 존재하는 건물은 9개정도 이다. ..(계속)

2002년 5월 김정동(목원대 교수)의 논문 "개화기 이후의 서울 정동동역의 변천사"에서 요약 정리한 내용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