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의눈]God Father!? Oh my god!!

애프터 서비스-인디포럼 영화 대 영화, <남자다운 수다> vs <어른 아가씨 되기>

인디포럼의 재정적 사정은 수차례 들은 바 있지만 본 기자의 ‘코도 석자’인지라 무료로 얻은 초대권으로 몇 편씩 골라 보았다. 이른바 골라 보는 재미(?)는 상시적인 눈치와 긴장감으로 점철돼 보통 성격이 아니면 이 노릇도 쉽지 않다. 이런 탓에 신중에 신중을 기해 골라 본 영화 두 편, 애니메이션 <남자다운 수다> vs 독립영화 <어른 아가씨 되기>

<남자다운 수다>의 번쩍거리며 울렁거리는 색감과 촬영기법은 실사를 기본으로 덧입힌 만화기법과 함께 살아 있는 듯 좁다란 서민적 도시풍경을 사실적이면서도 과장된 형태로 그린다. 주로 등장인물의 독백으로 스토리가 전개된다.

그는 동네에 사는 할머니를 몹시 싫어한다. 그 이유는 그 할머니가 어린 시절 자신에게 아버지가 없다는 이유로 자신을 친구로부터 떼어놨다는 것. 그러나 사실은 그가 생각하고 있는 것과 전혀 다르다. 남성지배이데올로기 속에 왜곡되어 버린 그의 사고는 어떻게 된 것일까?

<어른 아가씨 되기>는 10분이 조금 넘는 영화로 짧은 시간 내에 많은 것들을 드러내야 하기 때문에 긴장감마저 느껴지고 끝난 뒤의 여운은 장편영화보다 길다. 대사가 거의 없고 상황을 보여주면서 사건이 전개되므로 독자들의 넓은 이해가 필요하다.

그녀는 자신이 아직 어른도 아가씨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어른 아가씨 되기’ 위해 자신의 데이터를 분석하는데 자신이 어른 아가씨가 아닌 첫째 이유는 손가락이 가늘고 길지 않다는 것. 둘째 식당에서 혼자 밥을 먹을 줄 모른다는 것. 그런 그녀가 어른 아가씨가 되기 위한 도전을 시작한다.

줄거리는 이쯤에서 되었으니 이제부터 기자 마음대로 핵심 문구와 장면만 꼽아 영화를 재해석 해보았다. 물론 그 해석이라는 것도 기자 마음대로다. 그와 그녀를 만나러 가보자. 잘 좇아와 보시라.

#1. Intro

<남자다운 수다>

“첫사랑? 그럼 있었지!! 내 나이가 몇 살인데~”

그가 누군가에게 말하고 있다. 그 누구는 추측컨대 아마도 가깝다고 느끼면서도 경쟁관계인 XX친구쯤? 드러나지 않고 반응도 없는 그의 상대는 과장된 몸짓과 씹어 내뱉는 말투로 던지는 그의 언어가 일회적이고 듣고는 쉽게 넘겨버리도록 만든다. 그리고 감독은 말한다.

“이것은 2003년, 대한민국 서울에 살고 있는 어느 한 남자의 이야기”라고.

“근데 그냥 금방 헤어졌어. 첫사랑 결말이 다 그런 거 아니겠어. 내가 남자답지 못하다나! 내가 차인거야~ 아아 내가 찬 여자도 있었어. 어휴 짜증나잖아. 무슨 기지배가 애교도 없지 또 치마를 한번도 안 입어요”

한국의 남성과 여성은 남자답지, 여자답지 못하면 금방 차이고 찬다. 그러나 남자다움과 여자다음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우리 모두는 안다. ‘뻥’과 ‘내숭’이라는 것을.

“놀구 있네, 짜장면 처음먹냐? 갑빠가 있지. 남자라면 한 손으로 비벼야 하는 거 아냐!!”
결국 힘의 불균형으로 젓가락은 두동강 나고..


그는 자장면 먹을 때도 ‘갑빠’를 찾는다. 자장면은 한 손으로 비비고, 침과 오줌발은 되도록 머얼리 머얼리 내지르고(이래서 절대로 여자는 남자다울 수 없다) 얼굴에 핏줄이 도드라질 정도로 힘에 부치는 뭔가를 할 때도 끝까지 “힘들지 않다”고 묵묵히 대답해야 이 시대 ‘진정한 남자!’다.

다시 말해 진정한 남자란 정말 ‘가진 자’가 아니라 ‘없어도 가진 척 잘하는 자’, 즉 이빨을 잘 까는 자다. 사실상 남자다움은 물론 여자다움이란 허상에 가깝다.

그는 2003년 아니 2005년에서도 흔히 보는 그런 보편적이며 일반적인 대한민국 싸!나이다.

다음, 어른 아가씨 되기의 그녀는 어떤 인물인지 살펴보자.

<어른 아가씨 되기>

바람이 살랑살랑 부는 어느 알 수 없는 계절, 낮에는 한적한 주택가로 밤에는 퇴근하는 사람들로 분주한 또 알 수 없는 어느 주택 밀집 지역, 소희를 둘러싼 정보들은 이렇듯 모든 것이 불분명하다. 단지 그녀가 어른 아가씨가 아니라는 것과 일상 속에 존재한다는 것 뿐. 그러나 일상 속 소희는·그다지 일상적이지 않다.

무표정한 얼굴과 깡마른 몸, 아직 소녀티를 벗지 못한 그녀는 방금 이사 온 듯 정리되지 않은 방에서 텔레비전 화면을 통해 또 다른 그녀를 만난다. 텔레비전은 두 개의 비슷한 단자와 한 개의 다른 단자, 또는 쓰임 받는 단자와 쓰임 받지 못하는 단자로 구성되어 있다.

그녀가 어른도 아가씨도 아닌 제 3의 성이며 또한 사회에서 배제된 성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대한민국의 ‘아줌마’들처럼

소희는 자신의 단편적인 데이터들을 꼼꼼하게 수집한다. 허리둘레, 목둘레, 눈의 길이 등등 그리고 한쪽 벽면 가득 빽빽이 데이터들을 그려놓고 분석한다. 그 결과 소희는 자신의 치명적 오류 두 가지를 발견하는데...

뒷 내용이 궁금해도 잠시 화제를 전환.

#2. 하나님이 남자야?

<남자다운 수다>

그는 또 나불거린다. 누군가에게..

“너한테 가장 중요한 게 뭐라고 생각하냐? 나한텐 그게 없어. 그래서 내가 한동안 교회에 들락날락 거린거야. 나한테 가장 중요한 것은 아버지라는 존재였거든. 난 다들 하나님 아부지 아부지 하길래 난 하나님이 남잔 줄 알았다니깐. 근데 하나님 남자 아니지? 그럼 여잔가?”

하긴 대통령하는 노무현이도 남자, 그 밑에서 국무총리 해먹는 이해찬이도 남자, 경찰청장이며 대학 총장까지 ‘이 세상’ 한자리는 주로 남자들이 앉아있다. 참고로 ‘이 세상’ 뿐만 아니라 ‘참세상’의 편집장도 남자다.

그래서 “하나님 아부지~ 아부지~”하는 ‘하나님’도 남성으로 형용되는 것에 문제의식도 갖지 못한 채 그저 감탄사 마냥 내뱉는 모양이다. 그뿐인가! 그가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생산한 예수도 아들 아니던가! 결국 현재의 원죄는 지금으로부터 약 6000년 전, 이브가 아담에게서 고작 갈비뼈 한 대로 생명을 얻은 때부터 시작된다.

감독은 이러한 남성지배이데올로기에 주목하며 그의 왜곡되고 과장된 남성성이 남성지배이데올로기에서 기인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가 어떻게 왜곡되어 있는지는 지금부터다.

#3. 왜곡된 사실 vs 전수(纏手)

<남자다운 수다>

그는 20년째 같은 동네살고 있는 한 할머니를 몹시 싫어한다. 온갖 못된 짓으로 그녀를 괴롭힌다. 아니 도대체 그 못된 녀석은 왜 할머니를 그토록 못살게 구는 걸까? 그는 20년 전 유년시절 기억을 되짚으며 말한다.

“그날도 이렇게 눈이 왔었지 친구랑 놀고 있는데 저 노인네가 나 같은 애랑은 놀지 말라고 친구랑 나랑 떼어놨어. 나는 아버지가 없었거든. 그날 난 깜깜해질 때까지 울었어. 아이씨 지금도 생각하면 열 받아. 야!! 아버지 없는 남자의 삶이 얼마나 초라한지 알기나 해??”

그러나 아이러니다. 어느 날 술에 취해 쓰러진 그의 머리 맡, 그가 어린 시절 써놓은 일기장에는

“1980. 1. 15. 오늘 친구와 친구 할머니와 눈싸움을 하면서 놀았다. 할머니가 아빠 없이 우리엄마가 고생한다고 나보고 저녁밥을 같이 먹자고 했다. 난 엄마를 기다려야한다. 그래서 친구와 할머니와 빠빠이 했다”

무엇이 사실일까? 이 부분에서 관객들은 의문을 던진다. 감독은 80년. 1월 그가 쓴 일기의 내용이 사실이라고 말한다. 20년 전의 그러한 ‘사실’은 2번의 강산이 변한 2003년, 전혀 다른 방향으로 왜곡된 채 그에게 존재하고 있다. 아버지가 없는 그에게는 남성적 또는 남자다운 수다가 살아남기 위한 생존수단으로써 존재하며 이는 다시 이 사회가 요구하는 생존 방식이기도 하다. 주인공의 작은 기억이 남성지배체제 속에서 왜곡되어 폭력적인 남성이 되어가는 과정을 면밀히 나타내고 있는 장면이다.

그렇다면 <어른 아가씨 되기>의 소희는 어떤 모습일까?

<어른 아가씨 되기>

그녀가 수집한 정보로 발견한 오류 하나 “아가씨는 손이 가늘고 길어야 한다”는 것.

천장부터 팽팽히 내려오는 굵은 실은 중력을 받는 그녀의 손가락을 장력을 이용해 끌어올리고 있다. 무딘 굵은 실은 오히려 칼날 끝처럼 잔혹하게 긴장되어 있다. 이러한 극단적인 행위는 소희가 오류를 극복하려는 특단의 방법,

잔혹한 그녀의 행동은 10세기 중국의 전족을 떠올리게 한다. 중국 10세기 시인으로 유명한 이욱이 황금의 연꽃 대좌에서 춤을 추게 하기 위해 궁녀 예낭의 발을 비단으로 싸서 아슬아슬한 모습을 연출했다는 전족은 이후 여아의 발을 천으로 감아 후천적으로 교정하여 기형적인 작은 발을 만드는 관습으로 널리 퍼졌다. 이는 남성의 성적 욕구 만족을 위한 관습으로 이유야 어찌됐든 소희의 극단적 모습과 닮은 구석이 있다.

이렇듯 ‘가늘고 긴 손가락’은 주류 사회로 편입되기 위한 티켓 또는 배제된 제 3의 성이 아닌 사회에서 다수에 의해 결정된 성으로 인정받기 위한 필사적 몸부림이다. 또한 이는 우리가 TV를 통해 획일화된 여성의 모습을 보고 수많은 여성들이 ‘죽음의 다이어트’를 계획하며 또한 365일 쏟아지는 다이어트 광고로 어떤 이는 배를 채우는 등 남성화된 사회로부터 요구되는 여성의 상징적 모습이다.

소희의 두 번째 오류 “어른은 혼자 점심을 먹을 수 있어야 한다”는 것.

그런데 왜 소희는 혼자 밥을 먹는 것을 어른스러운 행동으로 보았을까?

함께 생산하고, 함께 나눠먹고 함께 토론하는 등 공동의 목표를 정하고 행동하는 것이 전혀 자본주의적이지 않다는 것. 결국 상호파괴를 전제로 한 자본주의적 경쟁사회를 의미하며 이는 소희가 자신의 변태(變態)과정들을 분석해 도표와 통계, 그래프로 벽면 빼곡히 그려놓은 장면에서 보여지듯 목표를 달성을 위한 엄격한 자기통제, 자발적 구속과 상당 수준의 경쟁력을 갖추는 등 전문성이 요구되는 경쟁 사회를 말한다.

에이 쒸~ 갑자기 마음이 무거워진다. 다시 씹다 버리는 듯, <남자다운 수다>의 그를 만나보자.

#4. 지배이데올로기는 우연적이며 동시에 자발적으로

<남자다운 수다>

그는 계속 누군가에게 지껄이고 있다.

“그러다가 군대에 가기로 결심을 했지. 아무래도 남자가 되려면 군대에 갔다 와야겠더라고.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 야!야!야!야! 너무 고민하지마 머리만 아파 짜식아”

거기다 노래까지 부른다. 군대 안가도 4000만 전 국민이 다 아는 이 노래

“사나이로 태어나서 할 일도 많다만, 너와나 나라 지키는 영광에 살았다. 전투와 전투 속에..”

군대는 때때로 ‘도피처’가 된다. 국가는 한창 팔팔한 20대, 생각도 고민도 하지 못하게 기냥~ 군대에 보낸다. 사춘기 시절의 반항과 저항은 서슬 푸른 청년기에 군대에다 몽땅 버리고 결국 푸른빛을 잃은 사나이는 ‘태어나서 할 일도 많지만’ 그냥 그럭저럭 산다.

벽에 자신의 키를 그려넣던 그, “이젠 이 짓도 삽질하는 거 같아. 더 이상 크지도 않는데 한 5년 전만해도 조금씩 차이가 있었거든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 데, 나도 많이 변했겠지? 내가 통 알 수가 있나. 내가 어디가 어떻게 변했는지. 아니 뭐 별로 알고 싶지도 않고, 내가 생각하고 고민하는 거 별로 안 좋아하잖아”

부모의 부재라는 결격사유를 지닌 그는 소수자다. 그러나 그런 그도 주변인으로서 지배이데올로기에 순응하며 소극적으로 살아가는 피억압계층의 모습을 그대로 지니고 있다. 지배체제의 이데올로기는 조밀하고 거대하게 다가오는 까닭에 무장해제 된 피지배자는 반항 한 번 못하고 동화, 흡수되어 버린다.

<어른 아가씨 되기>

그녀가 그녀의 오류를 어떻게 풀어가는 지는 다시 스토리를 거슬러야 한다.

어떻게 하면 어른 아가씨가 될 것인가! 골똘히 그 하나만으로 몰입된 소희는 우연히 길을 걷다 시차를 두고 한 줌으로 구겨져 버린 종이와 맞닥뜨린다. 주울까 말까?
그 종이에는 “손이 가늘고 길어지는 방법”과 “혼자 식당에서 점심을 먹을 수 있는 방법”이 쓰여 있다.


지배 이데올로기를 접하고 그것의 노예가 되는 과정은 소희가 맞닥뜨린 종이조각처럼 매우 우연적이고 자발적이며 다발적이다. 그것은 너무나 널리 퍼져 있어 우연적으로 접하는 형태를 띠므로 매우 커다란 비용과 의지를 동원하기 전에는 피하거나, 사태의 원인으로 인식되지 못한다. 이렇듯 지배이데올로기는 피억압대중의 자발적인 수용과 자기구속, 자기 확신에 의해 존재하고 재생산되기 때문에 깨뜨리기 어려운 확고한 힘을 발휘한다.

앞서도 언급했지만 지배이데올로기는 소희가 마주한 종이조각처럼 또한 <남자다운 수다>처럼 통 알 수가 없게 우연과 자발을 가장, 피지배 계급에게 수용된다. 결론은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 곧 피지배 계급의 이데올로기라는 것”

#5. 에필로그

애니메이션 <남자다운 수다>의 홍덕표 감독은 이 영화가 자신의 이야기이기도 하다고 말한다. 이 시대 남성. 또는 그것으로 대표되는 감독 자신도 남성적지배이데올로기가 휘두르는 폭력에 멍드는 자이며 자신도 모르는 새 그런 폭력적 이데올로기에 변모되는 나약한 존재라는 것.

영화 <어른 아가씨 되기>의 김소성 감독도 영화 속 소희가 자신이기도 하다고 말한다. 자신이 경험했던 것 또 경험하고 있는 것, 그리고 때로는 성장해버린 자신을 후회하면서 잃어버린 자신에 대한 집착을 나타내고 싶었다고.

지배이데올로기의 폭력은 남녀를 불문한 온 인류에게 시퍼런 멍을 남기고 있다.

21세기 한국, 갓 대학에 입학한 앞집 청년은 군대 가서 오바 하다가 맞아 죽고, 옆집의 여대생은 다이어트하다 굶어 죽고, 죽고, 죽고, 또 죽고.

오! 하나님 아버지......!? Oh my Go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