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영재(민족화해자주통일협의회 사무처장)
꿈은 참혹하게 짓이겨졌다!
"꿈★은 이루어진다."
독일과의 월드컵 4강전 때 '붉은 악마'가 내건 구호다. 그러나 나라가 온통 월드컵으로 환희와 희망에 들떠있던 사이, 서울 근교의 한 농촌 마을에서는 참극이 벌어졌다.
지난 6월13일 오전 10시30분 경 경기도 양주군 광적면 효촌 2리 56번 지방도로에서 친구들과 생일잔치를 벌이기 위해 갓길을 걸어가던 조양중학교 2학년 신효순, 심미선 양이 미 2사단 44공병대(캠프 하우즈) 소속 미군 장갑차(운전병 워커 마크 병장)에 깔려 그 자리에서 숨진 것이다.
이날 사고는 ATT(대대 전투력 측정) 훈련을 위해 파주에서 양주군 덕도리 소재 훈련장으로 이동하던 차량 행렬 중, 세 번째 차량인 장갑차(AVLM)가 맞은 편에서 오던 다른 장갑차 행렬과 무리하게 교차 운행하는 과정에서 빚어졌다.
사고가 일어난 도로는 왕복 2차선으로, 편도 1차선의 폭이 3.3m에 불과하여 폭이 3.67m나 되는 장갑차 두 대가 교차 진행하기 위해서는 갓길을 침범할 수밖에 없는 도로였다.
한국인으로는 처음으로 사고현장에 도착했던 심미선 양의 이모부인 홍기식씨는 마을에 수소문해서야 신원을 확인할 수 있을 정도로 피해자들의 형체가 완전히 뭉개져 있었음을 증언하였다. 소녀들의 꿈이 미군 장갑차의 캐터필러에 산산히 짓이겨져 버린 것이다.
오만, 은폐 그리고 거짓말
미군은 이 사건과 관련하여 '철저한 조사'를 공언했던 그들의 처음 주장과는 달리 진상을 은폐하는데 급급했다. 사건 직후 미군은 한국인 최초로 사고 현장을 확인하려는 주민(홍기식씨)의 접근을 막은데 이어, 구급차 기사의 사진촬영을 방해하였으며, 심지어 한국 경찰의 운전병에 대한 초동수사조차 가로막았다. 우리를 더욱 경악케 하는 일은 한 방송사의 인터뷰에 나온 미 2사단 공보실장이 미군 누구도 이 사건에 책임이 없다고 당당하게 주장했다는 점이다. 가해 운전병은 지금 '정상적'으로 근무하면서 부대 근처 술집까지 들락거리고 있다.
또한 미군측은 사고 조사과정에서 무성의하고 오만한 자세로 일관하고, 자신들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수시로 말을 바꾸었다. 그들은 사고 차량과 도로의 폭, 정확한 사고 시간조차 적시하지 못한 채 브리핑에 임하였고, 브리핑자료와 질의 응답 내용이 서로 모순되는 일도 빚어졌다. 그리고 계속되는 질문을 끊고 서둘러 브리핑을 마침으로써 그들의 의도가 진실규명에 있지 않음을 드러냈다.
미군은 처음에는 맞은편에서 오는 장갑차를 피하다가 사고가 났다고 한국경찰을 통해 발표했다가, 나중에는 교행한 사실이 없다고 했다가, 최종수사결과 발표에서는 또다시 교행을 인정하였다. 장갑차의 속력도 한국경찰을 통해 발표할 때는 시속 30∼40㎞였다가 그 다음에는 시속 16∼25㎞, 마지막으로는 시속 8∼16㎞였다고 주장하였다. 또 처음에는 선탑자가 운전병에게 정지명령을 내렸으나 운전병이 듣지 못했다고 발표했다가, 나중에는 선탑자가 정지명령을 내릴 수 없었다고 말을 바꾸었다. 그리고 사전에 한국측에 운행 사실을 통보했다고 했다가 마을 이장들이 들은 바 없다고 반박하자 다음부터는 통보하겠다고 발을 뺐다.
지금 유족과 사회단체들은 미군의 재판관할권 포기를 요구하고 있다. 공무중인 사건은 미군측에 재판관할권이 있다고 하더라도 한국측이 이에 대한 포기 요청을 하면 호의적 고려를 하도록 되어 있을 뿐 아니라, 사안이 워낙 중대하고, 과거의 행태나 이 사건에 대한 미군측의 태도 등을 볼 때, 한국측이 재판관할권을 행사하는 것은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조건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미군은 한미연합사령관이 갑자기 자신들에게 모든 책임이 있다며 사과 입장을 표명하는 한편, 부랴부랴 가해 책임자들을 자신들이 기소하였다. 미군의 이런 태도 변화는 그들이 유족과 사회단체들의 요구에 동의해서가 아니라 거세게 타오르는 대중적 반미투쟁을 적당히 무마하고 한국측에 재판관할권을 넘기지 않기 위한 교활한 책략이라는 것은 너무도 분명하다. 미군측이 법무부가 국민적 압력에 못이겨 마지못해 제출한 재판관할권 포기 요청에 대하여 부정적 입장을 표명하고 있는 것을 보더라도 그들이 진상규명에 관심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건의 진실 - 미필적 고의에 의한 살인
미군측은 이제까지 자신들은 아무런 책임이 없다거나, 사고는 불가피했다고 강변해왔다. 그러나 미군은 도로 폭보다 넓은 차량의 통행을 금지하고, 그 경우 관할 경찰서장의 허가를 받은 경우에만 예외적으로 통행을 허용하고 있는 한국의 도로교통법을 명백히 위반했다. 또한 차폭이 도로 폭보다 넓어 교차통행해서는 안 되는 도로를 아무런 안전조치도 없이 교행한 것도 작전교리 위반이다.
그들 주장대로 시야제한이 큰 차량이라면 더욱 확실한 안전조치를 취했어야 마땅했다. 즉 호위 차량(컨보이 차량), 도보 안내자(그라운드 가이드), 경찰, 헌병 등을 배치하고 선탑자가 운전자와 교신을 통해 수시로 안전운행을 보장해야 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통행해서는 안되는 도로를, 그것도 아무런 사전 안전조치도 없이 통행했을 뿐만 아니라, 게다가 두 대의 폭을 합하면 갓길까지 완전히 점령할 수밖에 없는 차량을 교행시킨 것은 사람을 깔아 죽여도 관계없다는 생각을 가지지 않고서는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한국군의 경우 사고가 나면 지휘 책임자가 문책을 당하기 때문에 사전에 철저히 안전조치를 취하지만, 미군의 경우 이른바 '군기'가 완전히 빠져 있다는 것이 기갑병이나 카투사 출신들의 일치된 증언이다. 이렇게 볼 때, 이 사건은 한국민의 생명과 재산보호는 아랑곳하지 않는 미군이 자기들 멋대로 작전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미필적 고의에 의한 살인'이라 아니할 수 없는 것이다.
문제의 본질
주한미군은 이 땅에 주둔한 지 약 57년 동안 약 15만 건의 크고 작은 사건들을 저질러 왔다. 우리가 숱한 미군 범죄에 시달리면서도 변변한 대응을 하지 못해온 것은 한미관계의 불평등성에 그 근본원인이 있다. 한미상호방위조약과 한미주둔군지위협정(SOFA)은 법적, 제도적 측면에서 한미관계의 불평등성을 상징하고 있다. 이런 규정들로 인해 범죄를 저질러도 제대로 처벌받지 않는 조건에 미군의 인종차별과 인명경시 풍조가 겹쳐지면서 한국은 미군의 무법천지가 되고 있다. 여기에 미국 눈치보기에 급급한 한국의 정치권, 경찰, 검찰, 군대, 언론 등의 사대주의적 행태가 이들의 범죄를 더욱 조장하고 있는 것이다. 이로 인해 애꿎은 우리 국민들만 미군 범죄에 무방비로 노출되어 피해를 당하고도 제대로 하소연할 데 없는 상태가 60여 년 간 지속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이번 사건은 결코 단순사고이거나 피해자 유가족들만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국민 누구에게나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는 사건이다. 따라서 범국민대책위원회가 부시 대통령 사과, 진상규명과 책임자처벌, 피해배상, 재발방지 대책마련, 사고부대 폐쇄, 재판관할권 포기, 한미SOFA전면개정 등의 요구를 내걸고 이 투쟁을 범국민적 차원으로 끌어올리기 위해 노력하는 것은 지극히 정당하고 필요한 일이다.
우리가 양키놈들로부터 우리 자신과 이웃의 생명과 재산을 온전히 보호하기 위해서는 주한미군 범죄를 근절하고 한미관계의 불평등성을 극복하기 위해 우리 모두가 떨쳐나서는 일이 무엇보다 긴요하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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