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의창]노동당 전쟁광의 수수께끼

토니 블레어와 영국 노조 상층부의 무지

박노자/노르웨이 오슬로국립대 한국학교수
미국에 의한 또 하나의 유색인종 살육극이 임박한 듯하다. 이라크 정권이 무슨 양보를 하든, 세계여론과 유엔의 결의가 어떻게 되든, ‘불령(不逞)한’ 것으로 ‘찍힌’ 후세인 정권의 ‘교체’(즉, 친미괴뢰정권의 수립)와 유전점령을 목적으로 세운 미국은 “그래도 힘으로 해치우겠다”는 식으로 시종일관한다.

후기에 접어들어 점차 최종적인 파탄으로 가는 자본주의가 1백년 전 ‘열강’의 ‘세계 나누어먹기’ 시절로 퇴보한 듯한 느낌이다. 다만 그때 5∼6개국쯤이나 됐던 ‘열강’들 대신에, 이제는 하나밖에 안 남은 초대형 깡패국가 미국이 제3세계의 폭력적인 ‘재(再)식민화’에 나선 셈이다.

아니, 하나가 아니다. 그 밑에 또 하나의 “사냥개”(노암 촘스키 교수의 표현), 영국이 있기 때문이다. 구체적으로 세계를 호령하는 조직폭력단체 ‘부시파’의 “사냥개” 노릇을 맡은 자는, 엉뚱하게도 명색이 노동당(!) 당수인 토니 블레어 총리다. 도대체 어떻게 해서 무산계급의 입장에서 반전을 내세워야 할 노동당 운동가가 미국 전범들의 하수인이 됐는가.

블레어와 그 측근들은 변색되어 이미 노동자 대중과 무관하다고 치자. 그러나 노동당과 그 기반인 영국 노조에서는 일세기 넘는 영국 노동운동의 역사상 최고의 수치로 기록될 만한 그의 부시 들러리 활동을 왜 제대로 막지 못하는가. 왜 영국노조회의(TUC)는 지난달 총회에서 “후세인이 실질적인 위협이라는 사실이 확실히 입증된다면 공격이 가능하다”는 식의 죽도 밥도 아닌 결의문을 채택했는가.

문제는 “자본과 상호이익이 되는 타협, 자본주의의 점차적인 개량”이라는 노동당의 애당초 취지가 중심부 후기 자본주의의 위기라는 새로운 상황에서 의미를 많이 잃어 노동운동의 발목을 잡는 데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 싶다.

1백년 전 영국의 자본과 그 대표자인 정부 당국은 생산자, 구매자, 그리고 전시 징집 대상자로서 영국 노동자들을 필요로 했다. 그래서 제1차 세계대전 때 노조와 노동당 협조의 대가로 일체 국민에게 보통선거권을 주는 등 노동당 내각이 최초로 집권할 수 있는 기반을 만들어주었다.

자본·관료와 조직화된 노동·노동당 협력의 기본틀은 영국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버틸 수 있었던 버팀목이 되기도 했다. 전후에 집권한 노동당이 복지국가의 구조를 마련하는 등 전시협력에 대한 ‘보상’을 노동자층이 어느 정도로 챙길 수 있었다.

즉, 노동자들이 제국주의 전쟁에서 이용을 당한 점은 노동당의 ‘대(對)자본 협력 방침’의 엄청난 결점이지만 결국 노동자들도 나름대로 혜택을 받은 사실을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모병제 군대를 가지고 유럽연합·WTO체제에서 유럽과 세계를 판매시장으로 삼는 등 징집 대상자나 구매자로서의 영국 노동자들을 더 이상 그토록 절실히 필요로 하지도 않는 지금의 자본들은, 그들의 괴뢰가 된 블레어를 내세워 무리한 공공시설의 사유화와 무상교육의 파괴에 나서는 등 노동과의 ‘계급협력’인 ‘신사협정’을 먼저 파기했다.

‘세계화’의 파고 속에서 점차 제3세계의 생활수준으로 떨어지는 영국 노동자층의 이익으로 따진다면, 노조로서는 강경한 대(對)자본 투쟁에 나서는 것이 최적의 선택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기득권층에 편입된 블레어 등의 노동당 상층부의 배신을 아직 이해하지 못한, 1세기 전통의 ‘계급협조’에 연연하는 대다수 노조 간부들은 변화된 현실에 너무나 느리게 적응한다.

그들이 1, 2차 세계대전의 전례대로 정부에 협력을 하려고 하는데, 그때와 달리 전시협력이 그들에게 아무런 ‘보상’을 가져다주지 못할 것임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 그들의 현실인식 부족과 지나친 ‘전통주의’는 지금 배신자 블레어가 부시의 부하로 동분서주하는 일을 가능케 하고 있다.

자본주의가 거의 ‘개량’되지 못한 한국의 경우에는, 영국 노동당 식의 ‘개량주의’가 아직까지도 부분적으로나마 필요하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먼저 그 길로 간 영국의 전례를 거울 삼아 ‘대(對)자본 협력방침’의 위험성과 한계도 아울러 인식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 106호] 10.7 ~ 1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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