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 몸, 신경 그리고 근대적 개인의 탄생

[박석준의 의학철학 이야기](3)-"木火土金水는 생장화수장(生長化收臧)의 운동 양식"

한의학을 어떻게 정의할 것인가는 매우 어려운 문제이지만 여기에서는 논의의 편의상 ‘한의학(漢醫學)’을 동양, 특히 한중일 삼국의 전근대사회에 탄생하여 실천된 의학체계를 지칭하는 용어로 한정해서 사용하고, ‘한의학(韓醫學)’은 현재 실천되고 있는 다양한 내용을 지칭하기로 한다. 이하 이 글에서 사용된 한의학은 따로 한의학(韓醫學)으로 지칭하지 않는 한 모두 전근대 사회에서의 한의학을 말한다.

번역의 어려움

번역(飜譯)은 말 그대로 뒤집는 것이다. 뒤집어서 뜻을 가리는 것, 고르는 것이다. 그러나 번역은 손바닥 뒤집듯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다. 번역이 어려운 이유는 번역의 대상이 되는 언어가 특정 시대와 사회라는 바탕에서 생겨난 것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보자. ‘쏘싸이어티society’라는 말은 오늘날 ‘사회(社會)’로 번역된다. 물론 사(社)와 회(會)는 기존에 있던 말이지만 ‘사회’처럼 연용해서 쓰인 예는 드물며 더욱이 오늘날의 사회라는 의미로는 사용되지 않았다. ‘사(社)’는 원래 토지의 신을 의미하여, 새 왕조를 세우면 반드시 토지의 신인 ‘사’와 곡물의 신인 ‘직(稷)’에 제사를 지냈기 때문에 사직(社稷)은 곧 국가를 의미했다. 행정단위로는 25가(家) 또는 사방 6리(里)를 ‘사’라고 했다. 조선 중기 한 ‘가(家)’의 구성원 수가 100-200명을 상회하기도 했던 사실에 비추어 보면(미암 유희춘의 경우) 그런 ‘가’가 25개씩 모여 있는 ‘사’는 매우 큰 조직인 셈이다. 또 사회에서의 ‘회(會)’는 원래 고기와 같은 음식을 담아 요리를 할 수 있는 그릇을 의미하며, 여럿이 함께 모여 밥을 먹는다는 데서 모인다는 말로 뜻이 넓어졌다. 이처럼 ‘사’와 ‘회’는 각각의 의미와는 전혀 다른 의미로 만들어진 말이다.(각주1)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넓은 의미에서든 좁은 의미에서든 전근대 사회에 도입된 ‘사회’라는 말은 근대적 개인의 결합을 기반으로 한 관계에서 형성된 관계를 말한다는 점이다. 이에 비해 전근대 사회에서는 당연히 근대적 개인이라는 개념이 없었기 때문에 이런 번역어들이 당시에 이해되기 힘들었음은 자명한 일이다.

왜냐하면 전근대에서의 사회는 개인의 결합이 아니라 ‘가(家)’의 결합이었고 그것도 봉건제를 바탕으로 하는 결합이었다. 한 사람, 한 사람이라는 의미의 ‘자(自)’나 ‘기(己)’라는 단어는 있었지만 그것은 독립된 사회적 존재로서의 개인이 아니라 ‘가’에 속한 구성원으로서의 개별적 존재에 불과한 것이었다. 특히 나를 가리키는 ‘아(我)’ 자의 어원은 낫처럼 생겨서 벨 수 있는 무기인데, 글자 속의 ‘과(戈)’는 적이 아니라 아군 혹은 공동체 내의 배반자를 처단하거나 결속력을 다지기 위해 쓰였던 무기였고 동물을 희생(犧牲)으로 쓸 때도 썼다. 희생 역시 공동체의 결속을 다지기 위한 것이다. ‘아(我)’는 오늘날 나를 의미하는 글자지만 원래의 의미는 ‘우리’라는 공동체를 의미하는 글자였던 셈이다. 따라서 전근대에서 ‘가’를 떠난 개인은 있을 수 없었다. 오늘날에도 부모와 자식의 인연을 끊는다는 의미의 ‘호적을 판다’는 말이 있지만, 당시로서는 호적에서 빠지는 것은 곧 사회적인 의미에서만이 아니라 실제로 육체적인 죽음까지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우리는 마치 전근대 ‘사회’에 근대적 개인으로 구성된 사회가 있었던 것처럼 착각한다.

‘자연’이라는 말도 마찬가지다. 전근대 문헌에서 자연은 오늘날의 ‘네이춰nature’의 번역어가 아니다. ‘자연’은 스스로 그러함, 자연스러움이라는 의미로, 여기에는 오늘날의 자연도 포함되지만 그것은 더 넓은 개념이다. 외부에서의 충격이나 자극에 의해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자기 운동을 하면서 거기에 일정한 법칙, 곧 도(道)를 실현하고 있는 것, 그러면서도 그 실현이 자연스러운 것이 바로 자연이다. 그러므로 ‘도법자연(道法自然)’이라고 하면 “도는 스스로 그러함을 본받는다”는 의미로, 도는 자연에서, 스스로 그러함에서 자연스럽게 나오는 것이라는 의미다.

또한 전근대의 ‘자연’은 명사적으로 사용될 경우에도 주체인 나와 분리된 대상이 아니다. 곧 ‘자연’은 주체와 대상의 합일을 전제로 하고 있다. 전근대의 ‘자연’은 이를테면 내 몸 속으로 들어온 자연이며 내 마음까지 투영된 자연이다. 이에 비해 ‘네이춰’는 주체와 대립하는 대상이면서 정신과 대립한다.

기(氣)의 경우는 번역의 어려움이 더 크다. 우리는 ‘氣’를 그냥 ‘기’라고 하지만 영어로는 ‘vital force’ 혹은 ‘vital energy’ 등으로 번역한다. 영역에도 문제는 있지만 적어도 ‘氣’를 ‘기’라고 그냥 말하는 것보다는 한 단계 올라선 번역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영역된 용어는 적어도 기를 외국어로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떤 말을 외국어로 인식하는 것과 자국어로 인식하는 데에는 큰 차이가 있다. 외국어로 기를 보게 되면 적어도 기를 반성적으로 인식하게 된다. 설혹 기 본래의 의미는 알 수 없거나 일면적인 이해에 그친다고 해도 대상을 대상화할 수 있다는 것은 곧 자기 자신에 대한 자각을 의미한다. 그러나 ‘氣’를 모국어로 보게 되면 ‘氣’ 본래의 뜻과 기존의 모국어로서의 기의 뜻이 뒤섞이게 되어, 마치 ‘nature’를 자연이라고 번역하면서 본래의 ‘自然’이라는 뜻을 혼동하는 것과 같은 결과를 가져온다. 이런 점에서는 차라리 ‘Ch'i’ 같은 방식으로 표기하는 것이 더 바람직할 수도 있다.

번역이 어려운 이유

번역이 어려운 것은 어학상의 단어나 문법의 문제만은 아니다. 어려운 영어나 한자 단어 때문에 해석이 안되는 것만은 아니다. 또한 문법을 잘 몰라서 해석이 안되는 것만도 아니다. 번역이 어려운 것은, 사실은 번역이 될 글의 내용을 이해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내용이란 곧 그 글을 사용하는 사람의 인식 체계를 말한다. 바로 이 인식체계가 서로 다르기 때문에 번역에 어려움이 생긴다.

위에서 말했던 기를 예로 들어보자.

기는 무엇인가. 많은 정의가 있어왔지만 오늘 우리를 지배하고 있는 근대 서양과학의 인식, 곧 대상은 주체와 독립하여 객관적으로 존재한다는 인식과 대비하여 말한다면, 기는 주체의 몸으로 느끼는 현상이며 이런 점에서 신체적 인식에 의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기를 에너지로 정의하든 물질로 정의하든 아니면 물질도 정신도 아닌 어떤 신비한 것으로 정의하든 기는 몸을 통해 느껴지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기는 객관적으로 주체와 독립한 존재가 아니라 오로지 몸을 통해서만 느껴지는 어떤 것이다. 이런 관점은 사실 전근대 사회에서는 동서를 막론하고 보편적인 사고방식이었다. 그리고 근대에 와서도 우리의 일상을 지배하고 있는 가장 보편적인 사고방식이기도 하다.

일상적인 삶에서 우리는 오로지 생산과 유통과정, 곧 교환가치를 만들고 그것을 실현한다는 의미에서의 경제활동(직업으로서의 정치나 외교 등도 포함된다)과 이를 위한 여러 가지 이론 작업, 곧 근대 서양과학(자연과학은 물론 인문과 사회과학을 포함한다)의 학습과 그 실천과정에서만 대상을 객관화한다. 그러나 이런 경우를 제외한 일상의 모든 부분에서 대상이 객관화되는 일은 없다. 특히 소비에서는 철저하게 대상과 하나가 되어 소비한다. 교환가치를 생산하기 위해 열심히 일한 당신과 이제는 사용가치를 즐기기 위해 떠나야 하는 당신이 완벽하게 분리된다. 교환가치의 생산을 위해 머무는 곳(이곳도 자연이다)과 사용가치를 즐기기 위해 머무는 곳(이곳도 자연이다)도 분리된다.

인간관계는 더욱 그러하다. 우리는 아무도 어머니나 아버지, 가족은 물론 친분관계를 갖는 사람들을 대상화하지 않는다. 몸무게 몇 킬로그램에 키 몇 센티 등으로 수학화하지도 않는다. 그럼에도 우리는 적어도 사회적으로는 모든 것이 대상화된 세계에서 살고 있는 것처럼 생각한다. 이렇게 일상의 삶과 사회적인 삶이 분리됨으로써 사람들은 교환가치의 생산을 위해 일할 때는 자신을 하나의 동물, 기계로 느끼고 그 일에서 벗어났을 때 비로소 사람임을 느낀다. 일은 그 일을 벗어나기 위한 수단으로서만 의미를 갖는다.

그러나 전근대에서의 자연은 나와 관계없이 존재하는 대상이 아니라 내 몸을 통해 느껴지는 대상이다. 다시 말해서 내 몸 안에 들어와 있는 대상이다. 이런 점에서는 대상이라는 표현도 사실상 부적절하다. 동서양의 전근대 사회에서는 보통 대우주(자연)와 소우주(몸)를 말하는데, 이런 발상은 바로 자연과 몸이 하나라는 인식을 보여주는 것이다. 크고 작은 차이, 다른 말로 하자면 위계질서는 있어도 모두 하나의 우주일 뿐이다.

기를 제대로 번역하려면 바로 이런 인식의 차이를 염두에 두어야 한다. 번역하려는 사람은 물론 번역된 글을 읽는 사람도 이런 인식의 차이를 이해할 때 그 말을 올바로 이해할 수 있다. 근대에 들어서 서양의 근대적 용어를 번역하면서 생긴 혼란과 어려움은 바로 이런 인식의 차이에서 생긴 것이다.

신경(nerve)이라는 역어는 무엇을 도입했는가

이제 ‘신경’이라는 말이 어떻게 도입되어 번역되었는지를 보자.

1815년에 발행된 로버트 모리슨(Robert Morrison)의 󰡔중영사전󰡕 1권은 ‘nerve’ 라는 영어를 중국에 소개한 최초의 책이다. 그는 기(氣)를 ‘nervous fluid’라고 번역했다. 기를 신경의 흐름(액체)으로 이해한 점이 특이하다. 모리슨의 기에 대한 이해 방식은 고체로서의 신경이 아니라 신경과 연관을 갖는 액체이다. 이는 기의 한 측면, 곧 몸 안에 흐르고 있는 무엇이라는 기의 특성이 반영된 것이다.

이에 비해 1851년에 벤자민 홉슨은 󰡔전체신론󰡕에서 신경계를 중국어로 최초로 번역하면서 신경을, 뇌의 활력을 전달하는 건(腱), 또는 근육이라는 의미에서 뇌기근(腦氣筋)으로 번역하였다.(각주2) 모리슨의 번역과 비교해보면 여기에서는 액체라는 개념이 배제되어 있다.

홉슨이 신경을 뇌기근으로 번역한 것은 분명히 선교상의 이유에서였다. 홉슨은 인간이 느끼는 모든 의식과 경험, 감각은 모두 신경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라는 점을 말함으로써 그때까지 모든 의식과 경험, 감각이 사람에게 선천적으로 주어진 성(性)이며 이것이 사건을 통해, 곧 몸과 사물과의 관계를 통해 정(情)으로 드러난다는 인식체계를 부정한 것이었다. 이는 뇌를 정신의 본원으로 내세우기 장치였다. 이를 더 설명하기 위해 홉슨의 말을 들어보자.

“눈에 뇌기근[신경]이 없으면 볼 수 없고, 귀에 뇌기근이 없으면 들을 수 없으며, 코에 뇌기근이 없으면 향과 악취를 가릴 수 없고, 혀에 뇌기근이 없으면 달고 쓴 맛을 알지 못한다. 온몸의 손발이 아픔과 가려움, 차고 뜨거움, 부드러움과 단단함, 껄끄러움과 미끄러움을 알고, 고금을 기억하고 만사에 응하는 것은 뇌가 지도하지 않음이 없다. 이렇게 묻는 사람이 있다. “뇌는 머리뼈 안에 있는데 어떻게 온몸을 운용할 수 있는가?” 나는 이렇게 답한다. “뇌는 매우 높은 곳에 있어 한 몸의 주재자이다. 다만 그 기근이 새끼처럼 줄처럼 실처럼 나뉜 것을 함께 ‘뇌기근’이라고 말하니, 모두 온몸을 휘감아 5관(五官)·백체(百體)·피육(皮肉)·근골(筋骨)·장부(臟腑)의 내외로 이르지 않는 곳이 없다. 그러므로 온몸은 뇌가 시키는 것을 따르고, 뜻에 어긋남이 없게 하니 만일 손과 발과 살의 뇌기근이 망가지면 폐해져 쓸 수 없다.”(合信, 󰡔全體新論󰡕, 8 「腦爲全體之主論」)

“모든 사람의 영혼은 두뇌의 가운데 있고 영혼은 묘하게도 바탕이 없이 온몸의 뇌기근을 빌어 그 쓰임을 운용한다. 남녀노소할 것 없이 피차 모두 같으니 그 쓰임은 눈에 볼 것이 있으면 뜻하여 보게 하고, 귀에 들을 것이 있으면 뜻하여 듣게 한다. 언어 또한 이와 같고 행동 또한 이와 같다.”(合信, 앞의 책, 40 「靈魂妙用論」)


여기에서 홉슨은 전통적으로 사고와 생명은 심장이 주관한다는 심주설(心主說)을 부정하고 뇌주설(腦主說)을 내세운다. 그는 자율신경의 작용을 예로 들면서 “뇌기근이 있어서 항상 스스로 행동할 수 있으니, 그 작용은 사람의 뜻이 명령함을 기다리지 안는다”(合信, 앞의 책, 8 「腦爲全體之主論」)고 말한다. 나아가 홉슨은 “폐가 항상 호흡하고, 심장이 항상 열리고 수축하고, 위가 소화하며, 신장이 오줌을 만들고, 성기가 정(精)을 만드는 등의 이치가 이것이다. 충분히 잠에 푹 빠진 사람의 입에 물을 넣으면 입이 스스로 삼킬 수 있고, 그 발을 간질이면 그는 반드시 움츠린다. 그 눈을 들쳐서 불로 비추면 그 눈동자가 반드시 작게 수축하고 빛을 피한다. 이와 같은 종류가 뇌근이 스스로 감각하고 운동할 수 있기 때문에, 그 기력(氣力)을 전할 수 있는 것이니, 또한 그 사람의 의지가 아니다”(合信, 앞의 책, 8 「腦爲全體之主論」)라고 말한다. 이제 사람은 마음과 분리되지 않은 몸으로 대상이 나에게 작용하는 효과를 느끼는 것이 아니라, 마치 자율신경이 그러한 것처럼 나라는 주체와는 별개의 객관적으로 독립된 물질, 곧 신경에 의해 느끼는 존재가 된다. 이 신경은 영혼이 작용하는 기틀이다.

홉슨은 영혼을 두 가지로 나눈다. 하나는 ‘각오(覺悟)’로, 대상에 대해 이해하고 분별하며 사려하고 기억하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심성(心性)’으로, 욕망이나 바람, 성정(性情), 의지 같은 것이다. 영혼은 시작은 있으나 끝이 없어서 태어나 선한 일을 한 사람은 위로 올라가고 나쁜 일을 한 사람은 아래로 내려가 벌을 받는다. 영혼을 더럽힌 사람은 문둥병 같은 병에 걸린다. 그리스도는 영혼의 좋은 의사이고 󰡔성서󰡕는 좋은 약이다. 그러므로 이 영혼은 신(God)에 의해 구원받을 수 있다.

선교사로서의 홉슨의 목적은 여기에서 우리의 관심이 아니다. 우리의 관심은 홉슨이 신경(뇌기근)의 개념을 도입함으로써 그때까지와는 전혀 다른 인식체계를 도입했다는 점이다.

전근대 사회에서의 기(氣)

전통적으로 인식의 출발점인 ‘의(意)’는 마음[心]속에 어떤 생각이 떠오른 것이다.(󰡔靈樞󰡕 「本神第八」) 여기에서 말하는 마음[心]은 외부의 대상과 접하여 반응하고 작용하는 것이다. 외부의 자극은 신경을 통해 전달되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마음[心]을 통해서만 전달된다. 마음이 외부와 작용하는 통로가 아홉 개의 구멍[구규(九竅), 곧 눈, 코, 입, 귀, 항문, 요도]이며 이런 통로를 통해 나는 외부를 인식할 뿐만 아니라 외부를 느낀다. 다른 말로 하자면 이 아홉 개의 구멍은 내 몸의 기가 외부의 기와 상호 교통하는, 교제하는 곳이다. 이 교제는 몸 내외의 기를 전제로 한다. 사물은 빛이 있어야 볼 수 있는 것이지만 몸 안에 빛을 볼 수 있는 기가 없으면 눈으로 사물을 볼 수 없다. “안광(眼光)이 지배(紙背)를 철(徹)한다”는 표현은 몸에 대한 이런 인식을 잘 보여주는 말이다.

이런 안 밖의 교제 과정을 통해 몸으로 느끼는 효과가 바로 기이다. 곧 기는 몸 밖의 대상이 나에게 작용하는 힘이나 작용(이것도 기이다)이 몸 안의 기와 작용한 결과 효과로서 느낀 것을 가리키는 말이다. 이는 외부의 기와 내부의 기가 상호 작용한 결과다. 예를 들어 전근대 사회에서 음식의 성질을 나타내는 용어로 기미(氣味)가 있는데 여기에서 기는 차고 더운 것을 말한다. 그러나 이때의 차고 더움은 그 음식 자체가 갖고 있는 객관적인 성질로서의 물리적 온도가 아니라 그것이 내 몸에 들어가 몸 안의 기와 작용하여(그리고 근본적으로는 사계절의 기에 의해 규정되면서) 내 몸에 차거나 더운 효과를 가져온다는 의미에서의 온도다.

마음도 마찬가지다. 외부의 사물이 나를 미혹하게 할 수 있지만 그 유혹은 내 몸 안의 기와 작용하여 일정한 작용을 해야 느낄 수 있다(한의학에서는 이러한 작용의 결과 나타난 내 몸의 기를 상화(相火)라고 한다). 마음의 변화는 마음 자체의 변화가 아니라 몸이라는 기 덩어리의 변화일 뿐이다. 따라서 이런 작용에 따른 변화나 효과를 느끼는 것은 특정한 몸의 한 부분이 아니라 몸 전체다. 다시 말해서 몸 자체가 하나의 기이기 때문에 외부의 작용은 그것이 음식이든 기후든 아니면 사건이든 그것 자체가 역시 또 하나의 기로서 내 몸의 기와 작용을 주고받게 되고 그 결과 변화된 기의 상태가 느껴지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마음은 그것이 슬픔이나 기쁨과 같은 정서든(한의학에서는 슬픔이나 기쁨도 역시 하나의 기일 뿐이다), 아니면 판단과 같은 사고과정이든 모두 몸의 기라는 차원에서 설명된다.

기를 이렇게 이해할 때 우리는 세계를 통일된 하나의 전체, 곧 기일원론으로 설명할 수 있게 된다. 예를 들어 더운 곳에 사는 사람들은 양념이 많이 된 음식을 좋아한다. 그 양념 중에서도 특히 매운 맛을 좋아한다. 이런 현상을 설명할 때 자연을 내 몸에 들어와 있는 것으로 설정하지 않으면 아무리 자연과 인간의 밀접한 관계를 강조한다고 해도 자연은 자연 그 자체로 설명해야 하기 때문에, 위의 예에서 음식보관의 필요성 이상의 설명을 할 수 없다. 날씨가 덥기 때문에 음식이 쉽게 상하고 그러므로 음식을 소금에 절이거나 갖은 양념을 해서 부패를 막아야 한다는 식의 설명은 날씨와 음식과의 관계만을 고려하여 분석한 다음 사람을 거기에 결합시킨 것이다. 이런 설명은 자연을 주체인 몸과 분리시켜 자연은 자연대로, 사람은 사람대로 분석한 뒤 소위 종합한 결과다. 그러나 이런 관점으로는 말리거나 훈제하는 방법도 음식보관에 유리한데 양념, 그 중에서도 왜 매운 맛을 선택했는지를 설명할 수 없다.

이에 비해 한의학에서는 더운 곳의 사람들이 매운 것을 좋아하는 이유를 이렇게 설명한다. 여름과 같이 더운 날씨에는 사람의 몸속은 상대적으로 차게 된다(이를 복음(伏陰)이라고 한다). 날씨라는 자연은 이미 내 몸속에 들어와 있다. 거기에 따라 내 몸도 이미 변했다. 그러므로 내가 섭취할 자연은 아무 것이나 일 수 없다. 자연의 흐름에 따라 음양의 질서를 맞추기 위해 내 몸에는 필연적으로 속을 덥히는 자연이 필요하다. 그 자연은 매운 맛이다. 그러므로 더운 곳의 사람들은 음식을 말리거나 훈제하지 않고(물론 전혀 그렇지 않다는 의미는 아니다) 매운 맛을 중심으로 양념을 진하게 한다. 우리가 더운 여름에 삼계탕을 먹는 이유도 내 몸이 자연과의 교류를 통하여 닭고기와 인삼의 더운 기운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이런 식의 설명 방식은 기일원론의 세계에서만 가능하다. 자연이 분석과 종합의 대상이 아니라 이미 내 몸과 하나인 세계, 자연과 몸의 상호작용을 하나의 원리로 설명할 수 있는 세계, 자연에 대한 실천이 곧 몸에 대한 실천이고 몸에 대한 실천이 곧 자연에 대한 실천인 세계, 그럼으로써 자연과 몸이 서로를 해치지 않고 서로 작용하면서 조화될 수 있는 세계(만일 조화되지 않으면 그것은 곧바로 병이라는 몸의 현상으로 나타난다)가 기일원론의 세계다.

순환적 발전과 관계의 세계

동양의 전근대 사회에서는 모든 사물을 오행의 논리로 설명한다. 오행은 현실에 존재하는 다양한 기의 양태를 각각의 성질에 따라 분류한 것이다. 여기에서 분류라고 했지만 이 분류는 배제를 위한 분류가 아니라 그렇게 분류된 것들 사이의 관계를 설정하기 위한 분류다. 이는 생식이 가능한지 아닌지에 따라 하나의 종(種)을 다른 종과 구분하고 배제하는 근대 서양 식물학의 분류와 근본적으로 다른 점이다.

세계의 모든 사물을 하나의 기로 보는 관점은 모든 사물을 그것이 생겨나 발전하고 성숙해져서 다시 쇠퇴하게 되는 일련의 순환과정으로 이해하게 한다. 오행에서 말하는 목화토금수(木火土金水)는 현실의 나무나 불 등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정확히 말하자면 그것은 현실에서 하나의 기가 생장화수장(生長化收臧)하는 운동 양식을 정식화한 것이다. 생겨나서 자라며 무르익어 거두어지는 발전과정을 다섯 단계로 나눈 것이다. 그리고 이런 단계들은 서로에 대해 상대의 기를 낳아서 키워주거나[相生] 반대로 억누르는 작용[相克]을 한다. 예를 들어 사계절은 기후라는 하나의 기의 발전과정이지만 봄의 기는 여름의 기를 낳아 키우며[木生火] 여름의 기는 겨울의 기에 의해 제압된다[水克火].

또한 오행의 논리는 다양한 층차를 갖는 다양한 사물들을 다섯 단계의 기의 양태로 분류함으로써 같은 기의 발전단계에 있는 사물 사이에 마치 같은 음(音)이 공명하듯 동질적이면서 서로 작용하게 되면 그 기를 더 강화하는 관계를 형성하고 다른 발전단계에 있는 사물 사이에는 낳아서 키워주거나 반대로 억누르는 관계를 형성한다. 이런 오행의 체계가 완성되면 이제 마음이나 색깔, 계절, 오장육부와 같이 전혀 관계가 없어 보이는 사물들 사이의 관계가 기의 상호 작용이라는 측면에서 분명하게 드러나게 된다. 그래서 두렵고 무서운 감정은 여름의 기를 억누르기 때문에[水克火], 음양의 조화라는 측면에서 공포영화는 여름에 그 효과가 극대화된다.

마음과 몸, 그리고 신경

마음의 경우에도 장기의 오행분류에 따라 예를 들어 성내는 감정은 간과 같은 기이고 기쁜 감정은 심장의 기와 같다는 식으로 배속된다. 같은 기라고 하지만 그것이 지나칠 때는 오히려 같은 기를 상하게 한다. 그렇기 때문에 성을 지나치게 내면 간을 상하게 된다. 이러한 작용은 상호 작용과 반작용이 가능한 열린 관계다. 따라서 간이 나빠지면 성을 잘 내게 된다. 다양한 감정 상호간의 관계 역시 오행에 따라 성립된다. 그러므로 성내는 감정은 슬픈 감정에 의해 누그러지게 된다. 이런 식의 관계는 이 세상의 모든 사물 사이에 성립하는 것이어서 이 세계가 하나의 기로 이루어졌다는 전근대의 사고가 완성된다.

이러한 세계관에서는 마음과 몸을 나눈다는 것은 다만 기의 양태의 차이 혹은 기의 발전 단계의 차이를 나누는 것뿐이다. 전근대 사회에서 사유를 담당하는 뇌를 따로 설정하지 못한, 아니 더 정확히 말하자면 설정하지 않은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사유 역시 몸 전체로 하는 것이기 때문에 뇌에 대한 언급은 있지만 그것은 생명의 근본 물질인 정(精)이 변화하여 만들어지는 수(髓)가 모이는 곳일 뿐이다. 전근대의 사유가 어떻게 이루어지는 지를 두고 심주설(心主說)이라고 하지만 이것도 정확한 표현은 아니다. 심(心)은 사유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하기는 하지만 역시 오장의 한 부분으로서 역할을 하는 것에 불과하다. 한의학에서의 사유는 몸 전체를 통해 이루어진다. 이런 의미에서는 심주설이 아니라 몸주설(主說)이라는 표현이 더 정확할 것이다.

바로 이런 세계 속에 홉슨은 신경이라고 하는 객관적으로 독립된 물질을 도입함으로써 몸과 마음은 물론 세계는 기로 이루어졌다는 기일원론을 정면에서 부정하게 된다. 이제 세계는 상호 관계를 갖지 않는, 혹은 배제의 관계를 갖는 사물들의 세계가 된다. 홉슨이 도입한 신경이라는 개념과, 감각을 느끼는 몸과 관계없이 오로지 신경을 통해서만 작용하는 영혼이라는 개념은 바로 마음과 몸을 분리시키는 작업일 수밖에 없다. 이는 곧 기 개념의 부정이며 나아가 모든 전근대적 사고의 부정이었다.

감각을 상실한 물질

데모크리토스는 물질의 성질을 두 가지로 분류했다. 그에 따르면 물질의 제1성질은 물질에 속해 있으면서 인간의 감각기관의 인식과는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객관적 성질이다. 크기나 모양, 운동 등이 그러한 성질에 속한다. 이에 비해 물질의 제2성질은 인간의 감각기관을 떠나서는 존재할 수 없는 주관적인 성질이다. 여기에는 맛, 소리, 냄새, 색 등이 속한다.

근대 서양의 과학은 데모크리토스가 말하는 물질의 제2성질을 배제함으로써 성립한다. 물질의 제2성질을 부정함으로써 자연은 주관적인 감각을 벗어나 객관적으로 수학화할 수 있는 대상이 되었다. 대상을 양적(量的)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은 대상에 대한 임의적인 작용을 가능하게 하면서 동시에 표준화를 가능하게 한다. 이는 자본주의적 상품생산의 기초다. 어떤 상품이 자본주의적으로 생산되기 위해서는 표준화되지 않으면 안된다. 그리고 자본주의적 생산이 가장 효율적으로 이루어지려면 나아가 질적인 것도 표준화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인간의 감각이 표준화되어야 한다. 특정한 색이나 냄새, 맛과 같은 것에 대한 인간의 감각이 동질적인 것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제 사람들은 똑같은 입맛을 갖게 되며 입맛 이외의 다른 감각에서도 똑같은 대상에 대해 똑같은 느낌을 갖도록 강요당한다. ‘미스 코리아’라는 미(美)의 정형이 탄생하는 것도 이런 표준화의 요구다. 이제 사람들은 파블로프의 개처럼 36-24-36이라는 숫자만으로도 아름답다는 느낌을 갖는다.

거칠게 말한다면 인식 주체의 감각에 기초한 주관적인 물질의 제2성질은 상품의 가치라는 측면에서는 사용가치를 충족시키는 것이며 반면에 제1성질은 교환가치를 만드는 것이다. 데모크리토스가 말한 물질의 제2의 성질을 배제하면 이제 그것은 더 이상 유용한 쓰임이 있는 어떤 것이 아니라 오로지 교환을 위한 것으로 변한다. 그런데 어떤 상품이 다른 것과 교환되기 위해서는 거기에는 교환의 기준이 되는 동가(同價)의 무엇(동일한 단위)이 있어야 한다. 다시 말하자면 환원되어야 할 무엇이 있어야 한다. 이는 바로 아리스토텔레스가 찾았던 ‘등질부분’이기도 하다(󰡔동물지󰡕).

이런 동가의 무엇은 노동이라는 측면에서는 구체적 노동이 아니라 추상적 노동을 통해서 만들어진다. 구체적인 노동은 주체에게 ‘유용하다’는 의미에서의 사용가치를 만드는 노동이고, 추상적 노동은 노동의 구체적 형태나 그 결과물의 유용성과는 관계없이 상품의 가치를 만드는 노동이다. 추상적 노동의 경우, 그것이 아름다운 옷을 만드는 것이건 살기 좋은 집을 만드는 것이건 모두 단순한 인간 노동력의 지출로 파악된다. 옷을 만드는 노동과 집을 만드는 노동은 질적으로 다른 것이지만 추상적 노동이라는 측면에서는 인간의 두뇌, 근육, 신경, 손과 같은 것들을 생산적으로 사용한 결과일 뿐이며 오로지 양적인 측면(노동 시간의 양)에서만 의미를 갖는다.

이에 비해 물질의 제2성질을 만드는 구체적 노동의 생산 결과물은 나에게 유용한 것이다. 그것은 교환을 전제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며 오로지 소비하는 주체의 감각을 통한 것, 욕망을 충족시키는 것, 그러므로 유용한 것이다.

기는 바로 이러한 물질의 제2성질, 감각에 기초한 개념이다. 이는 근대적 상품으로 환원되지 않는다. 또한 기는 객관적으로 독립해서 존재하는 보편적인 추상적 물질로도 환원되지 않는 것이다. 기는 주체의 감각에 기초하여 성립하는 개념이기 때문에 주체의 기의 상태에 따라 늘 변화한다. 같은 부류끼리는 통하며(공명하며) 다른 부류의 기와는 오행의 논리에 의해 상호 작용한다. 하나의 기(의 양태)를 다른 것과 교환할 수도 없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교환을 위한 기준, 곧 동가의 무엇이 없기 때문이다. 환원이 되기 위해서는 양적으로 비교가 가능한 어떤 것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기는 그 자체가 양화(量化)될 수 없는 감각에 기초한 것이기 때문에 환원은 불가능하다.

데카르트는 감각적인 신체적 인식을 배척한다. 물질에서 정신을 배제함으로써 데카르트는 물질을 해방시킴과 동시에 물질에서 독립한 정신을 바탕으로 진정한 자기 인식을 추구할 수 있게 하였다. 이는 추상적 노동의 대상으로서의 물질을 확보함과 동시에 사유의 자립성, 곧 근대적 주체를 확립했다는 의미가 있다. 이는 가장 정확한 의미에서 인식의 근대화다.(각주3)

이는 감각적 인식, 신체적 인식에 기초한 전근대 사회의 부정이면서 동시에 봉건적 질서[家]에 예속된 전근대적 개인의 해방, 곧 근대적 개인의 탄생이기도 했다.

(각주1) 이 사회라는 말이 만들어져 사용된 것은 일본의 1868-1877년 대였다(야나부 아키라 지음, 서혜영 옮김, 󰡔번역어 성립사정󰡕, 일빛, 2003, 14 쪽).

(각주2) 신경이라는 말을 처음 도입한 것은 일본의 󰡔해체신서(解體新書)󰡕(1774년)다. 󰡔해체신서󰡕 제1권에서는 해부의 방법의 하나로 신경을 말하면서, 이 ‘신경’은 “중국인이 지금까지 서술하지 않았던 것으로 시각, 청각, 말, 움직임은 모두 신경에 의해 지배되고 있는 것”이라고 설명했다(杉田玄白, 酒井シツ 語譯、󰡔解體新書󰡕, 講談社, 1998, 44 쪽).
신경(神經)은 말 그대로 귀신같은 망(network)이다. 이는 한의학에서 신(神)이 생명력의 발현 현상을 가리키는 용어라는 점에서 차용한 것이고 경(經)은 경락과 같이 온몸을 얽고 있으며 유주하고 있다는 점에서 차용한 것이다. 뇌기근이 어떻게 신경으로 대체되었는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이후 한중일 모두 nerve는 신경으로 번역되기에 이른다.

(각주3) 데카르트는 물질과 정신을 나누었지만 이 둘을 다시 통합하려는 시도를 보인다. 곧 물질과 정신은 서로 교통하는 것으로, 정신은 신체를, 신체는 감각과 정념을 생기게 함으로써 정신을 움직인다. 이러한 교통은 송과선(松科腺, glans pinealis)이라는 곳에서 ‘동물정기(spiritus animalis)’에 의해 일어나며, 심장 안의 혈액의 미세한 부분에서 기체화된 이 액체는 엄밀한 기계적 법칙에 근거하여 심장에서 뇌수 속으로 상승하여 송과선에 이르러 거기에서 이 정기의 운동은 모든 임의적 운동의 원인으로 된다. 즉 정신은 송과선에 의해 동물정기의 진행방향에 변화를 줄 수 있다고 설명한다(玉井茂, 󰡔서양철학사󰡕, 일월서각, 26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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