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적 파시즘은 배아복제에서 탄생한다

[황우석사태진단](2) - 황우석 사태와 과학문화

이득재 교수는 배아 복제에서 '과학적 파시즘'이 생겨난다는 도발적인 제목의 글을 보내왔다. 이 글에서 '파시즘'이라는 단어는 세 번 나온다. 과학적 파시즘, 종교적 파시즘, 문화적 파시즘.

이득재 교수는 현실에서 의사나 과학자는 시혜자이고 대중은 일방적인 수혜자인 까닭에 수혜자가 이 명령-복종 관계를 초월하는 것은 불경죄에 속하는데, 여기서 "과학적 제국주의를 방불케하는 과학적 파시즘"과 "과학에 대한 맹신주의"가 발생한다고 짚었다.

그리고 난자기증지원모임이 만들어지고 난자기증자 수가 며칠만에 수백 명에 이른 사태를 두고 "과학을 복제한 종교적 파시즘"이라는 표현을 썼다.

'태극기 휘날리며'에 천만 명의 관객이 몰려 이미 문화적 파시즘의 위용을 보여주었던 대한민국에서 호들갑을 떨 일은 아니지만, 수천 명이 일사분란하게 '아이러브황우석'을 외쳐대는 데서 역시 문화적 파시즘이 발견된다고 서술했다.

과학자가 아니면, 하다 못해 학부에서 생물학이라도 전공하지 않으면 황우석 논란에 젓가락 하나 올려놓지 못하는 현실을 감안하면, 인문학자인 이득재 교수가 과학문화를 들어 황우석 사태를 거론하는 모습이 한갓져 보일 수도 있겠다.

그러나 황우석 사태와 과학문화 진단에서 핵심을 놓치지 않는다. 이득재 교수는 "우리에게 과연 과학 혹은 과학지식이 있는가"라고 묻고 "황우석 사태의 본질에는 과학지식이 기술로 전화하면서 발휘한 거대한 물리적인 힘이 있다. 요컨대 배아줄기세포 복제는 과학이 아니라 복제기술의 문제인 것"이라며 본질을 꿰뚫는다.

이득재 교수는 작년 1월 국무총리 산하 '인문사회연구회' 소속 및 인문과학자들이 배아줄기세포에 대해 별반의 논쟁도 주의주장도 없이 황우석 박사를 추켜세웠던 사실을 낯뜨거워했다. 그리고 "과학의 제도화·대중화만이 아니라 배아줄기세포 복제에 대한 기독교적 근본주의나 종교적 열광주의, 유치한 휴머니즘 논의를 벗어던지고 배아에 대한 철학적인 논쟁을 시작"하자고 제언한다. "과학을 기술로 환원시키고 철학을 천박한 휴머니즘으로 환원시키는 것은 그대로 우리 시대 과학문화의 천박한 수준을 입증하는 것"이라는 게 그의 생각이다.

참세상 '황우석사태진단' 두 번째, '황우석 사태와 과학문화'에 대해 쓴 이득재 교수의 기고 전문이다.



대한민국, 확실히 용두사미의 왕국이다. 이건희 삼성재벌 회장은 다시 재벌의 반열에 오를 채비를 갖췄고 이병철 집안과 막역한 관계를 가진 홍 회장 집안의 아들 홍석현은 언론재벌에 귀환할 예정이다. 이 회장과 홍 회장 두 가벌 간의 사회적 근친상간 앞에서는 법도 속수무책인가보다.

최근 사립학교법 개정안 통과에 몸 던져 반대하던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는 아이들의 미래를 위한다며 장외투쟁에 나섰고 사학들은 학교를 폐쇄하겠다며 으름장을 놓고 있다. 이들에게는 사회적 공공성에 대한 관념이 전혀 없다. 중앙일보든 삼성그룹이든 사학이든 모두 개인 및 친인척 소유물로만 생각한다. 아이들의 미래를 염려하는 것은 핑계이고 사적인 소유의 미래가 염려스러울 뿐이다.

중앙일보, 삼성그룹, 사학만 그럴까? 우리시대 과학문화도 마찬가지다. 최근 MBC PD수첩이 황우석 박사 연구과정에 나타난 의혹을 문제삼은 후, 한편에서는 연구과정의 연구윤리, 법적인 윤리가 불거지고 다른 한편에서는 기자들의 취재윤리가 불거지면서 거의 시정잡배들의 패싸움에 가깝게 양 진영이 대치하고 있다.

황우석을 죽이든지 MBC를 죽이든지 기싸움이 펼쳐지고 있는 것이다. 황우석 연구팀 뒤에는 노벨상 후원회 운운하는 장관, 국회의원, 황금박쥐, 황사모, 노정권, 불교계, 조선일보가 있고 MBC PD 뒤에는 근본주의 기독교 세력이 도사리고 있다. '~카더라' 담론을 굳이 전부 믿을 까닭은 없겠지만 PD가 맹렬한 기독교 신자라면 우리 시대 종교문화 환경을 고려할 때 배아복제에 대한 단세포적인 반응이 충분히 나올 법하다. 어쨌든 최근 황우석 사태로 형성된 국면은 가히 표범과 하이에나가 아프리카 벌판에서 숱한 부하들을 거느린 채 대치하는 형국을 닮았다.

패싸움의 결과는 썩은 고기만을 찾아다닌다는 그 하이애나가 표범 앞에서 꼬리를 내리듯이 DNA검증이라는 신화적 언설 앞에서 MBC PD 쪽이 패할 공산이 크다. 삼성 앞에 검찰이 꼬리를 내리는 것과 어쩌면 이리도 닮았을까?

그런데 용두사미도 문제지만 또 한가지 문제가 되는 것은 우리 나라 과학자집단의 폐쇄성이다. 정치도 성역을 부숴가는 마당에 과학자집단은 이미 자율적인 조정능력을 잃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의 성역 안에서 언론과 대중을 비전문가집단으로 분류하고 여기에 과학자집단을 대립시키며 '니가 뭘 알어' 하는 식으로 나간다. 과학지식이 사회적 생산과정의 일부이고 문화적으로 개방되어야 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지식은 과학자집단의 독점적인 소유물로 전락한다.

과학의 문화이론가인 조셉 라우스는 『과학에 개입하기 : 과학의 실천을 철학적으로 이해하기』란 저서에서 과학지식은 다른 지식형태와 달리 객관적 보편적인 것으로 간주되지만 그러한 특권성이 과학지식에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우리의 대중의식 안에 각인된 과학의 이미지는 라우스의 지적과 정반대이다. 특권적이고 폐쇄적이며 권위주의적인 지식이 과학 및 의학에서 지배적인 것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이미 경험하고 있는 터이다. 전부는 아니겠지만 거의 대부분의 의사들과 환자 보호자 사이에 일방적인 통보 지시 명령만 있을 뿐 환자 보호자 측으로부터의 어떠한 질문 자체도 용납되지 않는 것이 우리 의료계의 의사소통구조이다.

이 점은 과학계에서도 마찬가지다. 의사나 과학자는 시혜자요 우리 대중은 일방적인 수혜자이므로 그 수혜자가 명령 - 복종 관계를 초월한다는 것은 불경죄에 속한다. 이건 과학적 제국주의를 방불케하는 과학적 파시즘이거니와, 과학에 대한 맹신주의는 여기서 발생한다.

본질을 더 따져 보자. 우리에게 과연 과학 혹은 과학지식이 있는가? MBC PD수첩으로 시작한 황우석 사태의 본질에는 과학지식이 기술로 전화하면서 발휘한 거대한 물리적인 힘이 있다. 요컨대 배아줄기세포 복제는 과학이 아니라 복제기술의 문제인 것이다.

오늘날 우리 시대에 황사모 대중, 정치인들, 황우석 박사와 대전고 동문을 비롯해 깊은 연고가 있는 사람들은 그 '기술의 성공'에 파쇼적인 열광을 표시하고 있다. 황우석 박사는 기술의 시혜자이며 대중은 그 은혜에 감읍할 따름이다. 하느님이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예수를 이 땅에 보냈듯이 복제기술의 위협은 은폐된 채 인류의 불치병·난치병 환자의 치유를 위해 이 땅에 황우석 박사가 현현한 것이다.

이 마당에 난자기증이 뭐 특별할 것도 없는지 모른다. '연구 치료 목적을 위한 난자 기증을 지원하기 위한 모임'이 만들어지고 불과 며칠 만에 난자기증자수가 수백 명에 이른 이 사태는 과학을 복제한 종교적 파시즘이라는 단어로 밖에는 설명할 길이 없다.

더군다나 MBC PD수첩 문제가 불거졌을 때 나온 연구원 난자채취의 문제는 단순하게 연구윤리 위반의 문제로 끝날 성질의 것이 아니다. 영화 '아일랜드'가 장기매매 문제를 다루었듯이 난자라는 장기가 교환가치의 대상이 되었다는 것도 문제이거니와, 연구원 난자채취 문제에는 과학과 성의 관계, 지식과 권력의 관계 문제가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푸코가 『감시와 처벌』에서 명확하게 말했듯이 병원, 공장, 학교 등은 권력관계를 공간적인 배치를 통해 구현한다. 브루노 라투어는 푸코의 이러한 논의를 부연하여 실험실의 공간적인 배치도, 예를 들어 교수와 학생의 권력관계를 반영한다고 이야기한다.

이러한 사태에서 연구원의 자발적인 난자기증이 이루어질 수 있었을까? 설령 자발적으로 난자를 기증했다고 하더라도 이미 거기에는 공간배치를 통해 나타나게 될 권력관계가 전제되어 있던 것은 아닌가? 교육계에서 자주 저질러지는 성희롱 사태도 강자로서의 교수와 약자로서의 학생이라는 권력관계에서 비롯하는 것 아닌가.

이 때 그 학생의 성이 여자일 경우는 권력관계가 더욱 더 명확하게 관철된다. 이번 황우석 사태에서도 마찬가지다. 난자 기증을 한 연구원이 여성이었지만 언론은 난자채취에 집중한 나머지 이 문제를 부각시키지 못했다.

정치권력은 과학과 성의 관계에 대한 불감증보다 더 유치한 행보를 보이고 있다. 황우석 교수가 대전 출신이라서 그런지 대전 지역구 의원들을 중심으로 황우석 살리기 운동이 벌어지고 있고 일국의 통일부장관은 충청도 농장까지 쫓아다니며 황우석 박사를 위로하기에 여념이 없다.

노 정권은 전 국민에게 국가경쟁력이라는 인공칩을 이식시켜 놓고, 여야 정치권은 모두 황우석 신화 굳히기에 혈안이 되어 있다. 일국의 대통령이나 장관, 국회의원들이 연구윤리, 생명과학의 문제를 사회적 의제로 설정하여 공론장을 만들기는커녕 패거리적이고 지역주의적인 행태를 보이고 있는 것이다.

잡지의 1/4이 광고로 채워져 있고 상당히 정치적이고 문제적인 잡지 《사이언스》를 두고 과기처장관이 《사이언스》가 황 교수 논문에 이상없다는데 왜 문제로 삼느냐고 과연 강변할 수 있는가? 그리고 그것이 과학입국을 책임진 일국의 장관이 과연 뱉을 수 있는 말인가? 게다가 '사이언스'는 미국 과학단체의 기관지 아닌가. 미국에 대한 맹신은 미국에 대한 굴종을 낳을 뿐이다.

과학문화에 대한 이러한 저급한 인식을 가지고는 과학패권주의가 지배하는 시대에 대처해나갈 수 없을뿐더러 과학 자체가 정치적으로 이용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황우석 박사가 거절했다고 하지만 열우당 소속 장관이 황우석 박사를 17대 총선 비례대표 1순위로 천거한 것은 치졸한 정치적 술수인 것이다.

황우석 사태는 황우석 교수의 논문을 300% 신뢰한다던 섀튼이 다음 날 자기 이름을 황우석 교수 논문의 공동저자 명단에서 빼달라고 하면서 쉽사리 사그러들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이제까지 황우석 사태 혹은 파동은 있었어도 황우석 논쟁은 없었다.

사립학교법 개정안이 통과되었다고 득달같이 일어나 야당은 으레 그런 것처럼 장외투쟁에 나서고 맥아더 동상 철거를 요구하자 우익들은 벌떼같이 일어나 폭력을 저지르고 언론이 국민의 알권리를 충족시키고자 황우석 교수의 연구과정을 문제삼자 황사모 카페에 수천 명이 일사분란하게 가입해 '아이러브황우석'을 외쳐댄다. 하긴, '태극기 휘날리며' 천만 명 관객으로 이미 문화적 파시즘의 위용을 보여주었던 대한민국에서 그 정도 일이 일어났다고 호들갑을 떨 일은 아닌 듯하다.

그러나 문제는, 황우석을 과학영웅으로 만들기 위해 온 나라가 목청을 높여 한 목소리만 낼 것이 아니라 이제부터라도 황우석 '논쟁'을 차분하게 시작해야 한다. 과학의 제도화·대중화만이 아니라 배아줄기세포 복제에 대한 기독교적 근본주의나 종교적 열광주의, 유치한 휴머니즘 논의를 벗어던지고 배아에 대한 철학적인 논쟁을 시작해야 한다.

작년 1월 국무총리 산하 '인문사회연구회' 소속 및 인문과학자들이 배아줄기세포에 대해 별반의 논쟁도 주의주장도 없이 황우석 박사를 추켜세웠던 것은 사실 어머어마하게 낯뜨거운 일이다.

개체 중의 개체이자 성체도 살아낼 수 없는 원기를 축적한 괴물로서의 배아 문제를 원시선이 생기는 14일 혹은 6개월이라는 숫자로 해결해버릴 수 있는 것인지 따져봐야 하는 것이다.

어느 나라에 이로운지도 모를 헬싱키선언을 들먹일 것이 아니라, 질베르 시몽동의 개체화원리든 뭐든 과학에 대한 철학적이고 깊이있는 논쟁이 공개적으로 요구되는 것이다. 과학을 기술로 환원시키고 철학을 천박한 휴머니즘으로 환원시키는 것은 그대로 우리 시대 과학문화의 천박한 수준을 입증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필자는 황우석 교수의 배아줄기세포 복제성공 자체를 의심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줄기세포 하나를 만드는데 242개의 난자가 필요했다면 배아 - 괴물을 건드려 복제를 하고 그것을 분화시켜 병 치료에 쓴다는 것은 사실 요원한 일이고 심지어는 실패로 끝날 수도 있는 일이다.

하지만 우리 나라 과학계는 스스로 성역을 만듦으로써 과학을 오랫동안 신비화시켰고 그 과정에서 권위주의, 그리고 그 짝인 맹신주의가 생겨났으며, 황우석 사태 해결의 지름길은 DNA검증에 있다는 식으로 DNA도그마에도 푹 젖어 있다. 또 하나의 DNA신화인 셈이다.

그러나 최근의 복잡성 생물학이 말하는 것처럼 인간이라는 유기체는 창발적인 성질을 갖고 있기 때문에 복제의 그물이 유기체 생명의 약동을 포획하기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어려운 일이다. 이 지난한 생명과 기술의 싸움에서 복제에 성공한 줄기세포 숫자 부풀리기 의혹이 진실로 판명된다면, 내신 부풀리기로 이미 진흙탕이 된 교육계를 이어 대한민국을 다시 한 번 구렁텅이 안으로 곤두박질치게 만들 것이다.

주지하다시피 수소자동차, 불소치약에는 지식을 통해 거대한 이득을 챙기는 다국적기업들의 음모가 도사리고 있다. 에이즈 가설에는 아프리카에 만연한 기아의 문제, 그리고 전지구적으로 확산되어가는 경제적 불평등구조가 질병의 공포 속에 은폐되어 있다.

기 드보르가 만년에 지적했듯이 세계는 분명히 날조되고 있다. 과학을 빙자하여 광대무변한 우주 안의 한낱 나뭇잎 같은 기술을 가지고 생명의 힘을 날조한 것으로 판명 나지 않기를, 그래서 "국민들에게 한 점 부끄럽지 않다"는 황우석 교수의 고백이 윤동주의 싯구와 일치하기를, 참으로 순진하게도, 바랄 뿐이다.
덧붙이는 말

이득재 님은 대구카톨릭대 교수로 일하고 있다.

태그

로그인하시면 태그를 입력하실 수 있습니다.
이득재(대구카톨릭대)의 다른 기사
관련기사
  • 관련기사가 없습니다.
많이본기사

의견 쓰기

덧글 목록
  • 박덕수

    15일 아침에 이 교수님의 글을 읽었습니다. 그리고 저녁에 전교조부산지부 공립동래지회 올해 마지막 집행위가 열렸습니다. 뒤풀이 도중에 황우석 대사건이 터졌습니다. 여러 선생님께 이 교수님의 글을 이야기했지요. 오늘 우리학교 게시판에도 올렸습니다. 참신하고 건강한 소장과학자들이 있어 그래도 희망을 가져봅니다. 이 교수님에게도 당연히 희망을 가집니다. 우리 아이들에게 자랑스럽게 이야기 할렵니다.

  • 박덕수

    15일 아침에 이 교수님의 글을 읽었습니다. 그리고 저녁에 전교조부산지부 공립동래지회 올해 마지막 집행위가 열렸습니다. 뒤풀이 도중에 황우석 대사건이 터졌습니다. 여러 선생님께 이 교수님의 글을 이야기했지요. 오늘 우리학교 게시판에도 올렸습니다. 참신하고 건강한 소장과학자들이 있어 그래도 희망을 가져봅니다. 이 교수님에게도 당연히 희망을 가집니다. 우리 아이들에게 자랑스럽게 이야기 할렵니다.

논설
사진
영상
카툰
판화
기획연재 전체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