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체신서’는 무엇을 해체했는가?

[박석준의 의학철학이야기](8) - ‘해체신서’의 개념적 갈등

‘해체신서’(1774)는 일본에 번역된 최초의 서양 해부학 책이다.1) 이 책은 서양의 해부학이 본격적으로 동아시아에 소개되었다는 점에서도 그 의의가 크지만 한국이나 중국에서 오늘날에도 사용되고 있는 기본적인 의학 용어를 번역해냈다는 점에서도 그 의의가 크다. 또한 일본으로서는 이 책을 계기로 네덜란드의 학문인 난학(蘭學)이 대중화되면서 본격적인 근대 서양문물의 도입을 가능하게 했다는 점에서도 큰 의의를 갖는다.

일본에는 18세기에 들어서면서 실용성을 추구하는 내재적 흐름도 있었지만 난학은 이를 강화하고 발전시켜 동양에서는 유래가 없을 정도의 근대화를 이루어낸 오늘의 일본이 있게 한 바탕이 되었다는 점에서 ‘해체신서’는 적어도 일본에서는 근대화의 상징이라고도 할 만한 책이다. 여기에서는 이 책의 발간을 둘러싼 사정과 그 의미를 알아봄으로써 전근대와 근대를 대비하고자 한다.

이 책은 독일의 쿨무스(Johann Adam Kulmus, 1689-1745)가 1722년에 펴낸 책(Anatomische Tabellen)의 네덜란드 번역서(Tabulae Anatomicae. 1743)를 기본으로 번역한 것이다. 네덜란드어-일어 사전 하나 없는 상황, 거기에다 그나마 네델란드어를 안다고 하는 마에노 료오다쿠(前野良澤, 1723-1803)가 겨우 7, 800 단어 정도를 알고 있는 상황2)에서 번역의 어려움은 이루 다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어려움이 문제가 아니라 이런 정도의 상황이라면 번역은 거의 무모한 일이었겠지만 이들은 3년 반 정도의 짧은 시간 내에 번역을 마치고 출판을 한다. 그런데 이처럼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을 하도록, 이들을 몰아넣은 동력은 무엇이었을까.

오늘날 한국에서는 서양 근대의대에서만이 아니라 한의대에서도 해부학은 기초과정으로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그러나 정작 해부학의 도입과 그 의미에 대해서는 그만한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우리나라의 경우, 이규경(李圭景, 1788-?)에 의해 최초로 아담 샬(湯若望. Joannes Adam Shall von Bell, 1591-1661)의 ‘주제군징(主制羣徵)3)’의 내용이 ‘서의(西醫)’로 소개되었고 그 뒤 최한기(崔漢綺. 1803-1872)는 홉슨의 ‘전체신론(全體新論)’을 비롯한 의서오종(醫書五種)을 소개하였다.4) 이 중 대표적인 ‘전체신론’은 해부학을 포함한 서의의 전반에 관한 해설서였다.

그러나 이런 의서의 소개가 당시 대부분의 의사들에게 별다른 영향을 미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서양에서도 그랬지만 해부학 자체가 아직은 의학의 영역과 직접적인 연관을 갖고 있지 않았으며 더군다나 이런 서적이 번역, 출판되었다고 해서 곧바로 그것이 도입된 나라에 적응하여 발전해간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당시 조선을 비롯한 중국에 소개된 서의서(西醫書)들은 대부분 사상가들의 관심에 그쳤다.

‘신경’이라는 번역어

문법도 제대로 모르는 상태에서의 번역은 모든 것이 어려울 수밖에 없었지만 ‘해체신서’를 번역한 사람들이 부딪친 가장 큰 어려움은 아마도 기존에 없던 개념을 만드는 일이었을 것이다. 사실상 번역은 언어의 문제가 아니라 인식의 문제다. 모든 언어는 그 언어가 바탕으로 하고 있는 사회의 문화를 담고 있다. 사회가 다르고 따라서 문화가 다른 언어를 번역한다는 것은 곧 번역하려는 언어가 담고 있는 문화를 어떻게 인식하고 그것을 자신의 언어, 곧 자신의 문화로 옮기는가 하는 것, 그리고 이런 과정 전체를 어떻게 인식하고 실천하는가 하는 것이 문제로 된다.

더군다나 자신의 사회에 전혀 존재하지 않던 개념을 옮긴다는 것은 언어적으로 새로운 창작일 뿐만 아니라 그러한 새로운 개념, 곧 새로운 인식체계와 문화를 자신의 사회에 도입하게 된다는 의미를 갖는다.

예를 들어 유일한 인격신과 같은 신(神)의 개념이 없었던 중국이나 한국의 전근대에 기독교의 신이라는 단어를 번역한다는 것은 단순한 언어상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것은 현실에서는 그 신의 승인 여부를 둘러싸고 분열되는 사회 집단 간의 사상적인 대립을 유발할 수 있는 문제였으며 이러한 사상적 대립은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 대립을 유발하거나 반영한다. 실제 신이라는 개념의 도입은 역사상, 사상적인 대립을 넘어서 그 나라에서는 사회 집단 간의 분열과 분쟁을 야기했고 국가 간에서는 제국주의와 식민지주의를 초래했다.

이러한 예는 신만이 아니다. 성(性. sex)이나 예(禮)와 같이 그 문화를 직접적으로 드러내는, 곧 사람들이 몸으로 바로 느낄 수 있는 분야에서 두드러진다. 그 중의 하나가 바로 의학이다.

‘해체신서’를 번역한 사람들을 괴롭혔을 단어 중의 하나가 ‘신경(神經)’이라는 단어였을 것이다. 왜냐하면 신경은 전근대의 동아시아에서는 없었던 개념이었기 때문이다. 일본을 포함하여 동아시아의 전근대에서도 분명히 해부가 있었고 또 분명히 전쟁과 같이 인체의 속을 들여다 볼 기회가 많았음에도 신경이라는 개념은 나오지 않았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이는 전근대 사회의 이론 자체가 해부를 기초로 한 체계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한의학은 기의 의학이다. 기는 객관적으로 독립해서 존재하는 어떤 것이 아니라 그런 것들을 몸을 통해 느낀 것이다. 그러므로 기 의학에서는 해부와 해부학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5)

일본에서 해부학이라는 관념이 생긴 데에는 당시 일본의 사상적 풍토가 크게 영향을 미치고 있다.6) 일본은 18세기가 되면서 사변적인 성리학을 부정하고 실증적인 경향으로 흐른다.7) 일본에서 흔히 고방파(古方派)라고 부르는 고의방파(古醫方派)의 ‘상한론’ 중시 경향은 이러한 사상적 흐름과 직접적인 연관관계가 있다. 이들은 내경의학(內經醫學)의 아들이라고 할 수 있는 소위 ‘이주(李朱)의학’8)을 강하게 비판한다.

야마와끼 도우요우(山脇東洋, 1705-1762) 역시 이러한 흐름의 하나로, 그는 의학을 공부하면서 가졌던 의혹을 해부를 통해 해결하고자 하였다. 야마와끼에 의한 해부학 책, '장지(藏志)'(1759)라는 책은 이러한 흐름의 한 결절점이었다. 물론 일본에 '상한론'을 중심으로 한 의학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 이전에는 오히려 '내경'을 기본으로 의학이 형성되었으며 이런 점에서는 동아시아 3국이 거의 비슷한 체계를 갖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18세기가 되면서 3국 공통적으로 전근대적 사유에 대한 회의와 의문이 일면서 후에 ‘근대적’이라는 수식어가 붙는 사상적 흐름이 나타난다.

이런 상황에서 '장지'가 나오자 비판이 없을 수 없었다. 심지어는 같은 고의방파 내에서도 비판이 나왔다. “요시마스 토오도(吉益東洞, 1702-1773)는, 해부학의 지식은 병의 치료에 어떠한 가치도 가지지 않는다고 했고, 사노 야스사다(佐野安貞)는 '비장지(非藏志)'(1760)를 출판하여 죽은 내장의 관찰은 전혀 의미가 없다고 했다.

즉 ‘장(藏)’의 의미는 외적인 형태의 문제가 아니라 여러 가지 기능을 가진 기(氣)가 들어 있는 장소이고 기가 없어진 후에는 빈 통과 같은 존재라고 하였다.”9)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사노의 견해다. 그는 기를 ‘기능을 가진’ 어떤 것이라고 보았다. 장은 단순히 그런 기능을 갖는 기가 들어 있는 장소일 뿐이다.

기는 실체가 아니라 기능이라는 것이며 대부분의 근대적 관점에서 기능과 실체를 하나의 짝으로 보는 것과 달리 기능과 실체는 서로 분리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발언은 전근대에서 기를 어떻게 생각했는지를 잘 보여준다. 사람이 죽으면 기가 없어지고 기가 없어지고 난 뒤의 그릇(장부)은 더 이상 담을 것이 없기 때문에 아무 의미가 없다. 기는 몸으로 느껴지는 기능 내지는 효과일 뿐이다.

그러므로 이런 관점에서는 해부나 해부학은 아무 의미가 없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해부학은 기 의학인 한의학(漢醫學)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 해부는 병의 치료에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요시마스의 말은 바로 이러한 기 의학의 관점에서 나온 말이다.

신경이라는 말은 기존의 의학에 없던 개념이다. 신경이라는 개념이 없었다는 것은 신경을 의학의 대상으로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의학의 대상은 신경이 아니라 기의 흐름인 경락이었다. 이에 비해 근대 서양의학은 신경을 비롯한 해부학의 내용을 의학의 대상으로 한다.

‘해체신서’에서의 ‘해체’는 ‘장분(臟分)’을 말한다. 장을 나누어 갈라본다, 해부(解剖)한다는 말이다. ‘해체신서’에 따르면 해부의 방법은 여섯 가지가 있다. 첫째는 뼈와 관절을 조사하는 것이고 둘째는 선(腺. 편도선과 같이 분비작용을 하는 기관)이 있는 장소를 조사하는 것, 셋째는 신경을 조사하는 것, 넷째는 맥관(脈管)의 주행과 맥이 닿는 곳을 조사하는 것, 다섯째는 장기(臟器)의 형상과 그 작용을 조사하는 것, 여섯째는 근육의 주행을 조사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해체신서’의 역자인 스기다 겐바쿠(杉田玄白, 1733-1817)는 선(腺)과 신경에 대해, 이것은 중국인도 지금까지 기술한 적이 없는 것이라고 주를 달고 있다. 또 혈관을 의미하는 맥관도 중국에서 말하는 것과 일치하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다.10) 이를 보면 스기다는 자신이 하고 있는 작업의 의미를 충분히 이해하고 있는 것 같다.

스기다 등이 해부학 책을 번역하기로 한 것은 무엇보다도 당시 네덜란드의 뛰어나 기술에 대한 감명이었다. ‘해체신서’의 도판을 그린 화가 오다노 나오다케(小田野直武, 1749-1780)는 「범례」에서 이렇게 말한다. “생각컨대 네덜란드의 기술은 대단히 뛰어나다. 지식이나 기술의 분야에서 사람의 힘이 미치는 한 궁구(窮究)를 다하지 않은 것이 없다. 그 중에서도 가장 신속하게 세계에 은혜를 줄 수 있는 것은 의학이다”(「범례」).

이러한 감명은 상대적으로 기존의 한의학(漢醫學)에 대한 비판으로 이어진다. “중국의 치료법이나 학설을 연구해 보면 그것은 무리한 억지가 많고 더구나 모자란 곳이 있기 때문에 이것을 명백히 하려고 하면 점점 알 수 없게 되고 이것을 바로잡으려고 하면 더욱 틀려버리게 되어서 일상적으로 쓸 수 있는 치료법은 하나도 없다”(「범례」).

'영추'에도 ‘해부해서 관찰한다’는 구절이 있고 또 해부도 분명히 이루어졌지만 제대로 전해지지 못하여 마시(馬蒔)나 손일규(孫一奎), 활백인(滑伯仁), 장중경(張仲景)이 말하는 삼초나 추절[椎節. 등뼈]에 관한 학설이 서로 엇갈린다(이상 「범례」)고 보는 것이다.

'기' 철학의 해체

그런데 ‘해체신서’를 번역하게끔 추동한 최대의 원동력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바로 현실에 대한 변혁 의지였다. 이들에게 기존의 한의학(漢醫學)은 완전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근본적인 한계를 갖고 있었다.

이러한 판단의 근거는 무엇일까. 그것은 이들의 질병 관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이들은 기존의 한의학(漢醫學)이 갖고 있던 질병관, 곧 병은 자연 속에서 자연의 일부인 몸 안의 음과 양이라고 하는 기가 어긋난 것이 아니라 특정한 장소에 있는 몸의 구조의 이상에서 오는 것이라고 보았다.

이들이 이러한 질병관을 갖게 된 데에는 여러 가지 역사적인 배경이 있다. 첫째는 기존의 한의학(漢醫學)이 외과가 아니라 내과를 중심으로 발달되어 왔다는 점이다. 한의학(漢醫學)은 기 의학이기 때문에 거기에서는 몸으로 느끼는 기가 중요한 것이지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구조적 실체로서의 내장(內臟)과 신경은 의미가 없고 오로지 기의 작용 기전을 밝힐 수 있는 내경(內景)과 경락만이 중요하다.

그러므로 해부를 했어도 내장이나 신경을 보려고 하지 않았다(혹은 볼 필요가 없었다). 이런 점에서 외과라는 과목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구조적 실체에서 직접적으로 발생하는 질병, 예를 들면 골절과 같은 질환에서 일정한 한계를 보였다는 점이다.

두 번째는 이러한 상황에서 일본에 도입된 초기의 서양의학은 남만류(南蠻類)나 화란류(和蘭類)라고 하는 외과가 중심이었다는 점이다.11) 그리고 이렇게 도입된 외과는 의학만이 아니라 네덜란드의 학문과 문명을 가리키는 난학(蘭學) 전반에 대한 신뢰와 명성을 가져왔다.

세 번째는 17세기 중반부터 시작된 고의방파의 성립이다. 고의방파는 기존의 사변적인 한의학(漢醫學) 이론을 부정하고 오로지 병 자체의 진행과정과 그에 대한 치료에 중점을 두었다. 이러한 관점에서 ‘내경’과 ‘상한론’이 재해석되고 수많은 저작과 논쟁이 꼬리를 물었다.12) 특히 고의방파를 만든 고또오 곤잔(後藤艮山, 1659-1733)은 모든 병은 하나의 기가 머물러 막혀서 생긴다는 일기류체설(一氣留滯說)을 주창했다. 이는 일견 전통적인 기 개념을 유지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지만 사실 그 속에서 한의학(漢醫學)의 기는 이미 부정되고 있었다.

다시 말하자면 그에게는 일기(一氣)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것이 특정한 장소에 머물러 막혀있다는 사실이 더 중요했던 것이다. 이런 데서 복진(腹診)이 중요한 진단의 수단으로 발전한다. 이런 점에서 서양의 근대의학이 도입되기 이전에 일본에서는 단순히 서양의 근대의학을 받아들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기를 부정하면서 해부를 받아들일 내재적인 준비가 되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이외에도 사상적인 측면에서 일본의 고학파(古學派)인 이토 진사이(伊藤仁齋, 1627-1705)와 오규 소라이(荻生沮徠, 1666-1728)의 영향도 고려해야 할 것이다.13)
‘해체신서’를 번역한 이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열정은 바로 이러한 역사적 배경에서 나왔다. ‘한 방울의 기름을 넓은 호수에 떨어뜨리면 그것이 퍼져서 연못을 가득 채우듯’14) 이 ‘의도(醫道)’의 위대한 경전이자 위대한 근본[大經大體]인 신체의 내경(內景)을 다룬 책’15)을 하루라도 빨리 번역하여 세상에 퍼뜨리고 그럼으로써 치료에도 실용적으로 사용할 수 있게 하려는 열망이 이들을 사로잡았던 것이다. 바로 이런 열망이 있었기에 네덜란드 언어를 거의 이해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이들이 감히 번역에 나설 수 있었던 것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들의 열망은 단순한 해부학의 도입에 그치지 않았다. 앞에서도 말한 것처럼 ‘해체신서’의 발행은 난학, 나아가 근대 서양의 문물을 본격적으로 도입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이는 곧 일본 근대화(서구적 근대화)의 바탕이 되었다.

그러면 한의학(漢醫學)에는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 이 문제는 복잡하면서도 심층적인 연구가 필요한 부분이어서 다음의 과제로 삼기로 하고, 여기에서는 우선 질병관에서의 변화를 간단히 살펴보기로 한다.16)

‘해체신서’를 번역한 사람들은 고의방파에 속했거나 그러한 흐름 속에 있던 사람들이었다. 이들의 질병관은 앞에서도 본 것처럼 병의 원인을 특정한 장소에서 찾는, 이를테면 질병국재론(疾病局在論)이라고 할 만 한 것이었다. 그리고 이들의 관심은 기의 상태가 아니라, 아마도 객관적 실체로서 인식했을, 기가 어느 장소에서 막혔는지에 있었다. 이렇게 되면 기는 질병을 이해하는데 과정에서 별 의미를 가질 수 없다. 이제 기는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어떤 것이 되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해체학, 곧 해부학의 도입은 그동안의 한의학(漢醫學)의 단점으로 간주되는 외과를 보충하는 것은 물론 기를 배제한 내과의 성립을 가능하게 하는, 곧 한의학(漢醫學)을 근대 서양 의학화 하는 획기적인 계기가 된다. 결국 ‘해체신서’가 해체한 것은 단순한 인체가 아니었다. 그것은 철학의 해체였으며 나아가 한의학(漢醫學)의 해체였던 것이다.17)

각주
1) 물론 해부나 해부학의 소개는 이보다 앞서지만 ‘해체신서’가 갖는 의미는 의학적인 것 이상이었기 때문에 여기에서는 ‘해체신서’를 중심으로 논의를 전개하기로 한다. ‘해체신서’와 해부학의 일본에의 도입에 관한 국내에의 소개는 여인석 황상익, 「일본의 해부학 도입과 정착과정」(醫史學 제3권 제2호 통권 제5호, 1994년 12월)과 하름 베케르스(Harm Beukers), 「일본의 서양의학 수용」(醫史學 제9권 제1호(통권 제16호) 2000년 6월. 이상 . http://www.medhist.org/menu3.htm)을 참조.
2) 小川鼎三, 「解體新書の時代」(酒井シツ, 新裝版解體新書ꡕ, 講談社, 1998, 241쪽). 이하 ‘해체신서’에서의 인용은 모두 이 책에 의한다. 번역에서는 ‘文明原流總書’ 第二(圖書刊行會, 1913)에 실린 ‘解體新書’를 참고하였다.
3) 여기에 대해서는 심우준, ‘일본전존한국일서연구(日本傳存韓國佚書硏究)’(일지사, 1985) 참조. 이 책에는 ‘주제군징’의 원문과 번역도 실려 있다.
4) 여기에 대해서는 이현구, ‘崔漢綺의 氣哲學과 西洋科學’(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 2000) 참조.
5) 이는 체질의학을 말하는 히포크라테스에서도 마찬가지다. 그의 체액설에서는 네 가지 체액의 균형이 중요한 것이지 해부는 큰 의미가 없었다.
6) 다른 한편으로는 당시 일본에서 받아들인 대부분의 서양의학이 외과에 치중하고 있었다는 사정도 하나의 배경이 된다. 해부학은 명백히 ‘외과가 필요로 하는 것’('해체신서' 「범례」)이었다는 점도 하나의 배경이 될 것이며 또한 내과에 관한 부분은 기존의 한의학(漢醫學)으로 일정하게 해결할 수 있었다는 점도 배경이 될 것이다.
7) 이 부분에 대해서는 마루야마 마사오, 김석근 옮김, ‘일본정치사상사연구’(통나무, 1995)를 참조.
8) ‘이주의학(李朱醫學)’은 금원사대가 중 이고(李杲)와 주진형(朱震亨)의 이론을 중심으로 받아들인 일본 후세가(後世家)에 의해 만들어진 일본의학 용어다. 후세가들이 사용한 처방을 의미하는 ‘후세방’과 상대적으로 ‘상한론’ 계열의 처방을 가리키는 古方이라는 말도 역시 일본의학 고유의 용어다. 이런 용어들이 우리 의학계에서 사용되고 있는 것은 일제 식민지 교육의 잔재가 아직도 청산되지 않고 있다는 증거다.
9) 하름 베케르스, 앞의 글.
10) 解體新書 1卷 第1 「解體大意篇」(앞의 책, 44쪽).
11) 이러한 사정에 대해서는 杉田玄白, ‘蘭學始事’(緖方富雄 校注, 岩波書店, 1982)에 자세하게 나와 있다.
12) 이 과정에 대해서는 富士川游, 日本醫學史(形成社, 1942) 제8장 「江戶時代の醫學」 참조.
13) 이 시기에 앞서 조선에서는 ‘내경’과 금원사대가의 의학, 도교의학을 기초로 ‘동의보감’(1613)이 출간되었고 실학자를 중심으로 서학(西學)이 소개되고 있었다. 그리고 중국에서는 기존의 ‘신농본초경’의 분류를 벗어난 이시진(李時珍. 1518-1593)의 ‘본초강목’이 1590년에 출간되었고 ‘주제군징’ 등 서학을 자신의 관점에서 재해석한 방이지(方以智. 1611-1671)의 ‘물리소지(物理小識)’는 1643년에 출간되었다.
14) ‘蘭學事始’ 卷之下(앞의 책, 68 쪽).
15) ‘蘭學事始’ 卷之下(앞의 책, 43 쪽). 여기에서 ‘內景’은 한의학(漢醫學)에서의 ‘내경’이 아니라 인체 내부의 모양이라는 해부학적 관점에서의 내경이다.
16) 현재 이론이나 임상에서 한의학(韓醫學)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으로 평가되는 일본의 의학에 대한 연구는 의외로 보잘 것이 없다. 많은 경우, 그것의 역사적인 맥락이나 현실에서의 의미에 대해 무관심한 채 일본의 ‘상한론’이나 ‘내경’ 등의 이론서와 임상서가 ‘실용적으로’ 활용되고 있다.
17) 이러한 흐름은 메이지(明治) 유신을 계기로 한의학(漢醫學)의 말살 정책을 통해 법적으로도 더욱 강화 된다. 그 결과 ‘한의학(漢醫學)’은 그 이론을 해체당한 채 단순한 기술로서의 ‘한방(漢方)’으로 전락하였다. 그렇다고 일본에서 한의학(漢醫學)의 전통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일본에서는 해방 이후 한의학 중흥의 바람이 일어났고 그 결과 오늘날 일본의 한의학은 세계적으로도 독자적인 한의학 체계와 임상을 갖고 있는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물론 여기에서 말하는 ‘한의학’은 해체된 기의학으로서의 한의학이며 오늘날 일본의 한의학은 이런 의미에서는 세계 최고 수준의 하나라고 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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