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일 발표된 남북정상회담 합의와 관련해 '개최 반대' 입장을 표명한 한나라당이 채 하루도 안지나 입장을 바꿨다. 그러나 한나라당은 여전히 남북정상회담의 '정략적 이용 가능성'을 잔뜩 경계하며, 의제설정에 있어서의 폭을 제한하고 나섰다. 특히 한나라당은 '평화선언', '종전협정' 등의 의제에 대해 민감한 반응을 보이며 "차기 정부로 넘겨야한다"고 주문하고 나섰다.
한나라당, "이미 하기로 한 이상 정상적 정상회담 되어야"
9일 오전 열린 최고위원회의에서 강재섭 한나라당 대표최고위원은 전날 저녁 진행된 당지도부와 경선후보자 간 회의 결과를 설명하며 "이미 남북 간에 정상회담을 하기로 합의를 한 이상 이미 화살이 시위를 떠났다고 생각한다"며 "반대만 자꾸 얘기하는 것보다는 반드시 '이런 내용', '이런 식'의 정상회담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해두고 싶다"고 밝혔다.
나경원 한나라당 대변인도 이날 현안브리핑을 통해 "정상회담조차도 정략적으로 사용하겠다는 발상이 매우 서글픈 일"이라고 지적하면서도, "이미 정상회담을 하기로 결정한 이상 정상회담이 정상적 정상회담이 되어야 할 것"이라고 전날과는 다른 반응을 보였다.
이 같은 강 대표최고위원과 나 대변인의 발언은 당의 공식 입장이 '개최 반대'에서 '조건부 찬성'으로 선회했음을 의미하는 대목이다. 전날 한나라당은 대변인 공식 논평을 통해 남북정상회담에 대해 명시적으로 반대 입장을 밝힌 바 있다.
이명박-박근혜, '반대'에서 '조건부 찬성'으로 입장 선회
강재섭 대표최고위원은 당의 입장선회 배경과 관련해 "어제 우리 대통령 후보 네 분과 당 지도부가 모여서 정상회담에 관한 당의 입장을 조율했다"며 "이구동성으로 똑같은 얘기를 말씀하시고 당 지도부도 같은 생각이라서 당의 입장이 짧은 시간에 바로 제대로 정리가 됐다"고 설명했다. 이명박, 박근혜 후보 등 한나라당 대선주자들이 당 차원의 명시적 '남북정상회담 개최 반대' 입장에 제동을 걸고 나선 것.
전날 열린 당지도부와 경선후보자 간 회의에서 이명박 후보는 "남북정상회담 개최가 이미 확정되어 있음으로 반대한다는 것보다는 의제를 분명히 해야한다는 것을 요구해야 한다"며 "의제가 분명하고 절차가 투명하다는 조건하에서 남북정상회담이 이루어져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박근혜 후보도 "정부 측에 우리가 요구해야할 것은 핵 때문에 평화정책이 한 발자국도 갈 수가 없다는 것"이라며 "6자회담이 있는 마당에 남북정상회담을 한다고 하니, 핵문제를 매듭지으라고 이야기해야한다. 의제, 절차를 공개하라고 요구해야한다"고 조건부 찬성 입장을 밝혔다.
이명박-박근혜 후보는 8일 남북정상회담 합의 발표 직후에도 한나라당과는 다소 다른 포지션을 취했었다. 당 차원의 명시적 반대 입장 표명과 달리 두 후보는 반대도, 찬성도 아닌 애매모호한 입장을 표명하며 여론의 눈치를 살피는 기색이 역력했다. 이들의 기대와 달리 여론의 전반적 흐름은 남북정상회담 개최 찬성 쪽으로 기울었고, 두 후보로서도 계속 애매모호한 입장을 고수하기란 힘들었던 것으로 보인다. 남북정상회담 관련 각종 여론조사에서 75% 이상의 국민 대다수가 정상회담 개최를 찬성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강재섭, "국가보안법. NLL, 연방제.. 의제 채택 결코 안 된다"
하지만, 지지기반인 보수층을 챙겨야 할 이명박-박근혜 두 후보는 물론, 한나라당 차원에서도 남북정상회담 개최를 대놓고 반길 수만은 없는 노릇이다.
남북정상회담 소식이 전해지자 대한민국재향군인회, 자유주의연대, 뉴라이트전국연합 등 보수단체들은 일제히 우려의 목소리를 높였다. 특히 대표적인 보수논객인 조갑제 조갑제닷컴 대표(전 월간조선 대표)는 8일 자신의 홈페이지에 "노무현-김정일 회담은 정상과 수괴 사이의 회담이므로 정상회담이란 말은 맞지 않다"며 "이번 회담은 본질상 조공회담"이라고 남북정상회담 개최를 맹비난했다.
이 같은 보수진영의 여론을 의식한 듯 한나라당 지도부는 이번 정상회담의 의제가 '한반도 비핵화', '국군포로 송환' 등에 한정되어야 한다고 주문하고 나섰다.
강재섭 대표최고위원은 "(남북정상회담은) 한반도 비핵화 문제가 의제의 초점이 되어야 한다"며 "낮은 단계의 연방제라든지 NLL문제라든지, 국가보안법 폐지 등 이런 내용들이 의제가 되어서는 결코 안 된다"고 밝혔다. '개최 반대'에서는 물러섰지만, 보수층이 눈감아 줄 리 만무한 국가보안법 폐지 등은 양보할 수 없는 '마지노 선'임을 강조한 것.
김형오 원내대표, "종전협정 논의하지마라. 차기 정부에 넘겨라"
한나라당은 이번 정상회담의 주요의제 중 하나로 일각에서 제기되고 있는 '종전협정', '평화선언' 등에 대해서는 "차기 정부에 넘기라"고 주문했다.
강 대표최고위원은 "북한 핵이 완전하게 폐기되지 않는 가운데 섣부른 '평화선언'이나 '종전협정' 체결 등 허황된 논리가 국민적 합의 없이 밀실에서 함부로 이루어져서는 안 된다"는 우려를 나타냈다.
김형오 원내대표 역시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에 있어서 1단계는 북핵 폐기이고, 그 다음 단계는 군축협상 구체화를 통한 한반도 평화선언 및 종전협정 등으로 나아가는 전략적 로드맵에 따라서 진행해야 한다"며 "현 대통령의 임기가 얼마 남지 않았기 때문에 현 대통령은 북핵 폐기문제를 매듭짓는 1단계 역할에 총력을 기울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 원내대표는 이어 "이를 바탕으로 차기 대통령이 한반도 평화체제를 완결하는 2단계 역할을 추진하도록 하는 것이 옳다"며 "현직과 차기 대통령은 단계별 역할에 따라서 남북문제를 풀어나가야 할 책임이 주어지는 것"이라고 밝혔다.
성사 가능여부를 떠나, 종전협정 체결과 평화선언은 사실상 이번 남북정상회담이 낼 수 있는 성과의 최대치다. 또 굳이 한나라당 입장에 서지 않더라도, 만일 종전협정 체결이 현실화 될 경우 그 정치적 성과가 누구의 공으로 돌아갈 지는 자명하다. 천호선 청와대 대변인은 이번 남북정상회담이 "누구에게도 유리하지도, 불리하지도 않다"고 했지만, 한나라당이 이 말을 곧이곧대로 믿고 따라줄 지는 미지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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