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원에 있는 전국금속노조 R지회가 ‘노조 설립 20주년 기념 - 가족과 함께 하는 투쟁문화제’를 열었다. 사회자는 마이크가 쩌렁쩌렁 울리는 목소리로 웅변을 토한다. 출연료를 지불하고 데려온 전문 MC라면 이런 멘트를 안 날렸을 거다. 조합원이 사회자다보니 이런 대사를 칠 수 있는 것이다.
“제 말 맞죠? 맞으면 기분 좋게 박수 한번 쳐 주십시오.”
“와아....짝짝짝....”
초등학생 몇 명이 장단을 맞춰 환호성을 지르며 박수를 친다. 무심하게 늘어서 있는 텅텅 빈 천여 개의 프라스틱 의자들이 드넓은 행사장 분위기를 더욱 썰렁하게 만든다. 장마가 끝나고 불볕더위가 시작되던 날이다. 해가 졌지만 도심은 아직도 열기로 후끈후끈하다. 가만히 앉아만 있어도 땀이 줄줄 흐른다. 이런 삼복더위에 야외행사라니? 아무래도 약속한 정각에 행사가 시작되긴 틀린 것 같다.
안내조로 보이는 조합원들이 행사장 정문 앞에서 똑같은 단결 투쟁 조끼에 똑같은 챙 넓은 모자를 쓰고 차량과 방문객들을 일일이 친절하게 안내한다. 또한 무대 주위에서는 전기 및 조명, 그리고 음향에 대한 각종 시설 점검이 한창이다.
얼음과자 박스를 어깨에 메고 객석 주위를 돌며 부지런히 돌아다니는 조합원들도 여럿 눈에 띈다. 앉아있는 관객들에게 이것저것 얼음과자를 권하며 서비스를 한다. 새빨간 수박 쭈쭈바를 빨고 있는 어른이라니? 보기만 해도 웃음이 난다.
행사장 위쪽 큰 나무 그늘 아래에서는 먹거리 장터가 한창이다. 노동자가족협의회(‘노가협’) 부인들이 앞치마를 두르고 난전을 펼치고 있는 것이다. 야채전을 지지는 구수한 냄새가 바람에 실려 온다. 아이스박스에는 맥주와 막걸리, 각종 음료수병, 그리고 수박이 가득하다.
노가협은 87년 이후 모든 노조마다 다 생겼지만, 신통하게도 지금까지 명맥이나마 유지하는 건 R지회뿐이다. 비록 영화보기나 등산 등 미미한 취미활동에 국한되어있지만 그나마 이런 행사 때는 없어서는 안 될, 한 몫 톡톡히 하는 존재다.
솔직히 조금 놀랬다. R회사는 철도차량과 중기차량 그리고 산업기계 등을 생산하는, H자동차그룹 계열사로서, 한마디로 잘 나가는 재벌 회사다. 임금 좋고, 노동조건 좋고, 3-4년 전에는 구조조정의 악몽에 시달리기도 했지만, 이젠 어느 정도 안정권에 접어든 상태다. 그런 노조가 연 문화제에서 돈 냄새가 안 난다는 건 다소 의외다.
조합원 2천 명 정도 되면 야외 문화제 한 번에 몇 천만 원은 예사로 든다. 가수에다 댄서, 그리고 밴드까지 불러 크게 키우면 억 단위가 들어간다. 근데 이상하게도 돈 냄새가 안 난다. 알뜰살뜰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다. 행사를 기획하고 준비하고 진행하는, 처음부터 끝까지의 전 과정을 조합원과 그 가족들이 직접 몸으로 뛰면서 행사의 주체로 나서고 있다.
이미 대부분의 노동자행사들이 전문가나 대행사에게 맡겨지는 게 요즘의 추세다. 지역에서 일 년에 한번 열리는 가장 큰 노동문화제 역시 행사전문 대행사가 전담하고 있다. 행사가 전문가들 손에 맡겨지다보니 조합원과 가족들은 행사의 주체가 아닌 단순한 구경꾼으로 멀어지고 있다.
예전에는 노동문화제 하면 각 노조가 주체로 나섰다. 함께 기획하고 함께 예산 짜고 함께 역할 분담하면서 직접 몸으로 때웠다. 지금은 눈 씻고 찾아봐도 그런 모습이 안 보인다. 어쩌면 R지회 역시 기획에서부터 준비 점검 진행에 이르기까지 몸 바쳐 땀 흘리는 사람은 집행 간부나 몇몇 열성 조합원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바로 이 몇 명에 의해 노동운동은 유지되고 발전하는 거 아닐까.
과문한 탓인지는 몰라도, 노동자문화제를 기획하고 준비하고 역할을 분담하는 과정 자체가 조합원들의 단결의식을 고취하는 노조의 기본적 일상적인 조직 활동이라고 들어왔다. 그런데 요즘은 이런 거 보기 힘들다. 이러고서 어떻게 총파업을 조직하겠다는 건지 알 수가 없다.
어떤 이들은 이렇게 말한다. 민주노총 실무자들에게 문화제 행사를 맡기는 건 소모적이다. 행사 뒤치다꺼리에 매달리다보면 노동운동에 전념하기 어렵다. 차라리 행사는 전문가에게 맡기고 실무자들은 진짜 노동운동에 전념하는 것이 좋다. 과연 그럴까? 난 진짜 노동운동이 뭔지도 잘 모르겠고, 또한 행사를 전문가들에게 맡겨도 노동운동이 발전하기는커녕 이전보다 더 못한 걸 보면 진짜 노동운동에 전념하는 게 뭔지도 잘 모르겠다.
오히려 “욕하면서 배운다”더니 노동자들도 자본가를 닮아가는 건 아닌가하는 기우마저 든다. 돈이 모든 걸 해결하는 자본주의 세상을 바꾸려고 노동운동하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닌 모양이다. 행사 뒤치다꺼리가 힘들다고 전문가에게 돈을 주고 해결하니 이런 게 자본주의적 발상 아니고 뭐란 말인가.
물론 이런 의견에 발끈할 사람도 있을지 모른다. 노동문화라고 맨날 아마츄어에 머물면 되냐. 전문화하고 직업화하는 게 왜 나쁘냐, 그런 게 발전 아니냐. 그래서 열린음악회처럼 고급화하자고까지 한다.
조합원의 관심과 참여도를 높인다는 목적은 같아도 방법은 천지 차이로 달라질 수 있는 이유가 여기 있다. 하지만 여기서 이 문제를 왈가왈부할 마음은 없다. 그럴 자리도 아니거니와 그럴 처지도 아니다. 의견은 각자에게 맡기고, 여기서는 다만 R지회 투쟁문화제를 통해 진정한 문화제의 감동을 전하고 싶을 뿐이다.
R지회의 조합원 평균 나이는 50이다. 아랫배가 나오고 행동이 굼뜨기 시작하는 중년들이다. 그런 조합원들을 동원해 직접 몸으로 뛰게 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런 걸 조합원에게 요구하는 노조집행부는 간 큰 집행부다. 다음 번 집행부선거에 출마하지 말거나, 아님 선거에서 질 각오를 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R지회는 이런 50대 아저씨들을 행사장 도우미로 활용하는 것도 모자라, 아니 한 수 더 떠서 직접 무대에 출연해 노래하고 연주하고 춤추게 했다.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난 것이다.
맨 처음 요란한 징소리에 맞춰 풍물패가 등장했다. 열 댓명 남짓한 남녀 조합원들이 장구에 소고에 북을 들고 길놀이를 펼쳤다. 10분 공연을 위해 한 달 이상 연습했단다. 그것도 낮에는 일하고 퇴근한 뒤 밤늦게까지 매진했단다.
그 말을 듣고 보니 새삼 솜씨가 그럴 듯하다. 물론 자세히 들어보면 박자도 안 맞고 손짓 발짓 몸짓도 제각각이고 가끔 북채나 장구채를 떨어뜨려 어쩔 줄 몰라 당황해한다. 그래도 이만하기가 어딘가. 박수소리가 요란한 걸 보니 지원부대가 대단한 것 같다.
남자 조합원만 열 댓명으로 구성된 기타패는 청바지에 흰 티셔츠를 똑같이 맞춰 입고 등장했다.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부르는 솜씨가 제법 일품이다. 안치환보다 더 잘 부를 자신이 있다며 능청스럽게 안치환의 노래를 편곡해서 부르는 걸 보니 절로 입가에 미소가 떠나지 않는다. 가만히 눈을 감고 듣고 있자니 볼쇼이 합창단이 떠올랐다.
그만큼 수준이 높다는 얘기가 아니다. 왠지 나에게만은 그렇게 들렸다는 말이다. 희끗희끗한 머리를 휘날리면서 기타를 치며 부르는 아침 이슬을 듣고 있으려니까, 장중한 민주화의 세월이 거센 강물이 되어 흐르는 것 같았다. 나도 모르게 팔에 소름이 돋았다.
이것만이 아니다. 늙은 노동자들이 무대 위로 올라왔다. 굵은 주름살 위에 허옇게 분가루를 바르고서, 머리에는 얼굴보다 더 큰 새빨간 종이꽃을 꽂고서, 그리고 흰 저고리에 새까만 깡통 치마를 입고 하얀 종아리를 드러낸 채, 북한 노래 ‘반갑습니다’의 빠른 박자에 맞춰 깡충깡충 앙징맞게 뛰어다닌다.
객석 여기저기서 휙휙 휘파람 소리가 날고 환호성이 쏟아진다. 다들 좌로 가는데 혼자만 우로 가기도하고, 때론 급히 따라하다가 넘어지기도 한다. 순서가 틀려 동작이 엇갈릴 때면 관객들 모두가 박장대소하며 배를 잡고 대굴대굴 굴렀다. 실수투성이에, 또 실수를 연발하는데도, 너무 재밌다. 요절복통이다.
내일 모레 정년을 앞둔 늙은 노동자에겐 마지막 무대 출연이 될지 모른다. 춤이 끝나자 모두 뒤로 돌아 치마를 훌떡 젖힌다. 엉덩이에 한자씩 새긴 ‘20주년을 축하합니다’ 라는 글자가 선명하게 드러난다. 박수와 환호성과 휘파람이 뒤엉켜 한동안 분위기는 열기의 도가니탕을 이룬다.
나도 모르게 콧마루가 찡하면서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린다. R지회를 위해 바친 그들의 청춘을 생각하다가 문득 마창지역에서 보낸 나의 시간들이 떠올라 회한에 젖은 모양이었다.
곧이어 R지회의 20년 역사를 담은 영상화면이 무대 전면을 가득 채웠다. 20년 세월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났다. 객석 맨 앞에 나란히 앉은 일곱 명의 역대 노조위원장들이 영상화면을 뚫어져라 바라본다. 조합원과 그 가족들도 화면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그 눈에서 심란한 노조역사가 그대로 읽힌다. 어찌 맑고 좋은 날만 있었겠는가. 비오고 바람 불고 태풍 불던 날이 더 많았다. 영광과 승리보다는 수치스럽고 비겁하고 패배로 얼룩진 날들이, 웃는 날보다 억장이 무너지던 날들이 더 많았으리라. 그 엇갈리는 애증을 생각하니 가슴이 먹먹해졌다.
물론 나는 R지회를 비난하는 여러 목소리를 결코 잊은 적이 없다. 한마디로 요약하면, “저 혼자 등 따습고 배부른 노조”라는 비난이 그것이다. 비정규직 투쟁에는 뒷걸음치면서 자신들의 고용과 임금에는 죽기 살기로 매달리는 이기주의자들이라느니 하는 비난들은 충분히 일리가 있다. 본인도 부정하지 못할 것이다. 나 역시 그 점을 비난한 적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은 칭찬을 아끼고 싶지 않다. 문화제를 위해 집행부와 조합원들이 서로를 믿고 따르는 모습에 박수를 쳐주고 싶다. 또한 무엇보다 조합원들이 직접 자신들의 노조역사 20년을 영상으로 만든 것에 대해, 아직 미완성 상태긴 하지만, 그 용기에 힘껏 격려를 보내고 싶다.
어느 새 텅텅 비어있던 객석의 의자가 거의 다 채워졌다. 운동장 위쪽 나무 밑이나 스탠드에 앉아 있는 조합원들까지 합치면 거의 1500여 명에 이를 것 같다. 아이들과 함께 나란히 앉아 활짝 웃고 있는 조합원 부부의 모습도 상당수 눈에 띄었다. 전체 조합원 2천명 중 삼분의 이가 화기애애한 행사장 분위기를 즐겼으니 제법 성공한 행사라고 봐도 될 것 같다.
H자동차 계열 노조들은 올 봄에 산별노조 전환 투표에서 압도적 지지로 전국금속노조로 전환했다. 아마 이번이 R노조로서 치루는 마지막 문화제일지도 모른다. 이 때문에 참여 숫자가 많아졌고, 그래서 성황을 이룬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사람들이 행사에 이토록 열광한 것은 그들이 가장 잘 아는 동료이자 동지가 무대에 출연하고 화면에 나왔기 때문이 아니었나 싶다. 관객들은 한 시도 한눈을 팔지 않고 무대를 주시했고 공연에 집중했다. 진심어린 박수와 갈채를 보내며 뜨겁고 열렬하게 환호했다.
아내보다 더 오랜 시간을 함께 보낸 옆자리의 동료이자, 가족 못지않게 노조 역사 20년의 희로애락을 함께 나눈 조합원 동지들이 아닌가. 그런 그들이 무대에 나와 노래하고 연주하고 춤을 추었으니, 어느 유명가수나 무용수, 인기배우가 부러울까. 결국 관객들이 아낌없는 박수를 보낸 것은 그들이 바로 나의 동료이자 동지였기 때문이었다.
솔직히 한번도 노동문화제에서 맘껏 웃어본 적이 없다. 자본가에 대항하여 투쟁의지를 고취하는 게 목적 아닌가. 재미와는 거리가 멀 터이고, 당연히 심각하고, 진지하고, 무거울 수밖에 없다. 덕분에 그런 데 갔다 오면 으레 뭔가 잘못한 것 같고, 죄의식을 느껴야 할 것 같고, 그래서 알 수 없는 부채감에 시달리곤 했다.
그날도 행사장에서는 깔깔대며 웃다가 막상 집에 돌아오는 길에서는 내내 편치 않았다. 너무 많이 웃어서 미안했던 모양이었다. ‘왜 웃으면 안 돼?’ 슬그머니 부아가 끓어올라 반항하듯 볼멘소리가 터져 나왔다. ‘왜 맨날 울고불고 화내면서 살아야 하는 거지?’
노동자도 노래 부르고 춤도 추고 그림도 그리고 시도 쓸 수 있다. 그런 노동자들 쌔고 쌨다. 연극배우 뺨치게 끼도 많고 개그맨보다 더 웃기는 재주도 있다. 다만 맞교대 3교대로 밤낮 없이 뺑이 치노라, 해고되기 전에 한 푼이라도 더 벌어두려고 잔업에 야근에 특근에 뺑이 치다 보니까, 끼를 발산할 시간도 없고 여유도 없었을 뿐이다. 맨날 매 맞고 이리저리 쫒기고 잡혀가면서 울고불고 하다가 끼를 발산할 시간도 없고 여유도 없었을 뿐이다.
말하자면 일상적인 평화를 누릴 시간과 여유가 없었다. 항상 전쟁 같은 삶과 투쟁에 쫓기며 살았다. 그래서 진짜 제대로 된 문화제를 열지도 못했고 웃고 즐기지도 못했다. 이게 진짜 노동자고 노동자의 현실이다.
하지만 노동자라고 맨날 용접기 들고 쇳덩이와 씨름하란 법이 있나? 노동조합 한다고 맨날 빨간 머리 띠 두르고 단결투쟁 조끼 입고 돌아다니란 법이 있나?
정년을 앞둔 늙은 조합원도 어느 날 갑자기 화장하고 꽃 달고 깡통치마 입고서 푼수처럼 춤을 출 수도 있는 거고, 밴드 맨처럼 기타를 잡고 한껏 폼을 잡고 멋을 부릴 수도 있는 거고, 북 치고 장구 치면서 사당패 흉내를 낼 수도 있는 거다.
영상 편집기 앞에서 날 밤을 새우며 감독 흉내를 낼 수도 있고, 개그맨 못지않게 좌중을 웃기는 엠씨도 될 수 있는 거다.
나 또한 그들 옆에서 배꼽이 빠지게 깔깔 웃다가 갑자기 돌변해서 복쟁이처럼 제 설움에 겨워 울 수도 있는 거다. 안 그래? 안 되는 게 어딨니? 다 돼!
- 덧붙이는 말
-
소설가 김하경은 1945년 인천에서 태어났으며,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국어교육과를 졸업했다. 1988년 [실천문학] 봄호로 등단했다. 국어교사(1968~1978), 방송작가(1978~1981), 경남도민일보 상임논설위원(1999~2000)으로 일했다. 작품으로 교육평론집 [여교사 일기](1978), 장편 [그해 여름](1991), [눈뜨는 사람](일터와 사람, 1994), [내 사랑 마창노련](갈무리, 1999), 꽁트집 [숭어의 꿈](갈무리, 2004), 그밖에 인터뷰 연재, 르뽀, 엮은 책 다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