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의 끝’에서 부는 피바람

[칼럼] 제국주의를 제국주의로 막은 버마의 비극

버마의 수도 랑군(버마말로 ‘양곤’)은 ‘전쟁의 끝’이라는 뜻이다. 다시는 지긋지긋한 피의 전쟁을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버마 민중의 의지다.

1962년 3월 2일 새벽, ‘30인의 지사’ 중 한 사람인 네윈 장군의 병사들이 ‘극히 험악한 상태에 빠진 국가 정세를 수습하기 위해’ 쿠데타를 결행했다. 네윈, 세인르윈, 소우 마웅, 탄쉐로 이어지는 버마 45년 군사독재의 시작을 알리는 서곡이다. 네윈은 비슷한 시기 쿠바 혁명의 전철을 밟지 않았다. 더 비슷한 시기에 일어난 박정희의 5.16 군부 쿠데타의 길을 따랐다.

제3세계 나라가 그러하듯 버마 민중도 오랜 민족해방 투쟁을 벌였다. 1886년 제국주의 영국은 인도인 지주를 이용해 버마 농민을 지배하는 이중구조의 식민지를 버마에 심었다. 인구 70%의 버마족과 수 십 개의 소수민족 간 대립도 조장했다.

1930년대 타킨당을 중심으로 민족해방투쟁이 드셌다. 영국 식민지 버마에 군침을 흘리던 일본의 공작이 시작됐다. 일본은 타킨당의 민족해방 세력을 비밀리에 지원했다. 타킨당 역시 해방을 위해선 기술과 무기가 필요했다. 1940-41년 사이 30명의 정예 타킨당원이 일본으로 건너가 군사훈련을 받는다. 이른바 ‘30인의 지사’다. 버마 독립의 아버지로 추앙받는 아웅산(아웅산 수치 여사의 아버지)과 네윈도 들어있었다. 일본은 태평양 전쟁 당시 버마로 진격해 영국군을 몰아냈다. 그러나 버마 민중에게 바뀐 건 없었다. 지배자가 영국에서 일본으로 바꿨을 뿐이다. 속았다고 느낀 타킨당은 다시 영국군과 연합해 총부리를 일본군에게 돌렸다. 결국 일본을 물리쳤다. 아웅산과 네윈 장군은 48년 1월 영국연방에서 벗어나 독립국가를 선포했다.

둘 다 민중으로부터 추앙받았던 아웅산과 네윈은 이제 대를 이어 원수가 됐다. 마치 이승만과 김구의 차이만큼 벌어진 두 사람은 민중 그 자체는 아니었다. 첫 단추를 잘못 끼운 타킨당 민족주의 세력의 한계가 지금 버마 비극의 현재로 이어지고 있다. 민중이 없는 지식인들의 독립은 종잇장처럼 빈약했다. 제국주의 영국을 내몰기 위해 제국주의 일본을 끌어들이는 순간 버마의 미래는 엉망으로 꼬여갔다.

쿠데타에 성공한 네윈의 사회주의 계획당은 버마내 외국 자본을 모두 국유화했다. 밖으로는 어떤 블록에도 가담하지 않는 엄정 중립외교 노선을 택했다. 혼란에 시달리던 버마 민중들은 네윈의 정책을 적극 지지했다. 네윈의 ‘버마식 사회주의’는 한때 다른 나라들로부터 자력갱생 모델이라는 점에서 많은 관심과 기대를 모았다. 1974년 민정 이양이 이뤄졌지만 군부 지배는 변함없었다. 네윈은 각종 정보기관을 강화해 독재정치를 시작했다. 균형 있는 외교정책으로 주권을 지켜냈던 초기 업적은 무색해지고 심각한 경제 정체를 낳았다.

민중들은 1988년 가을 네윈과 그 후계자인 세인르윈 타도를 외치며 일어났다. 3천명이 피살된 88년의 피바람에도 군부는 건재했다. 또 얼마의 피를 먹어야 랑군이 제 이름을 찾을까.
덧붙이는 말

이정호 님은 전국공공서비스노동조합 교육선전실장으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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