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훈 당선자님!
한번 인사 나눈 적도 없는데 불쑥 편지를 띄웁니다. 당선 축하의 말을 하는 게 먼저지만 예의에 어긋나게 제가 하고픈 말부터 하겠습니다.
여기 서러운 설을 맞이하는 노동자가 있습니다.
유명자를 아십니까? 재능교육 학습지 선생님입니다. 오늘 아침 그를 만났습니다. 새벽에 눈을 뜨니 비가 오더군요. 가방을 챙겨들고 집에 나설 때쯤 비는 눈으로 바뀌었습니다. 가려던 목적지를 급작스레 바꿔 4호선 혜화역에서 내렸습니다. 역을 나서니 땅에는 비와 눈이 뒤범벅이 되어 엉망입니다. 혜화동로터리를 지나 삼선교 쪽으로 걸으니 바람이 매섭습니다. 눈발이 내 안경알을 하얗게 만듭니다. 왜 목적지를 바꿨냐고요? 그냥 설을 앞둔 설운 노동자를 만나고 싶었습니다. 오늘처럼 날씨가 엉망인 날은 날궂이를 하듯 가끔 목적지를 바꿉니다.
그곳에 눈발을 온몸으로 맞으며 유명자가 방송차를 세워두고 홀로 선전전을 하고 있습니다. 오늘이 며칠 째인지, 인제 날짜 헤아리는 것조차 어려운 노동자입니다. 아시겠지요? 일방적으로 단체협약을 해지하고, 노동조합을 탄압하는 재능교육을. 이 궂은 날 재능교육 선생님은 천막 한 칸 치지 못하고 거리에서 농성을 하고 있습니다. 질퍽한 눈이 범벅인, 아니 눈물범벅인 길바닥에 퍼질러 앉아. 자학이라도 하듯. 그것도 수백 날을.
올해 계획을 물었더니 씩, 웃습니다. 투쟁이 끝나기 전까지 어디 개인의 계획이 있겠냐며. 저는 압니다. 유명자의 개인 소망을. 노동조합이 인정되고, 부당하게 당한 해고가 철회되면, 유명자는 사진기를 들고 제주도로 갈 겁니다. 농성을 시작하고 집안 구석에 처박아야 했던 사진기를 손에 쥘 것입니다. 유명자는 충무로에서 한때 광고사진을 찍기도 했습니다. 돈을 벌어 사진 장비를 구하려고 입사한 재능교육에서 노동조합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사진 장비를 구하기는커녕 십년 넘게 ‘투쟁’을 입에 달고 살아야 하는 노동자가 되었습니다.
당선자님, 유명자의 소망 잊지 마세요. 사진기 들고 제주도 한번 가고픈 너무도 평범한 소망을.
아, 그리고 연제문을 아십니까? 그는 천안에 삽니다. 산업재해로 1년을 요양하고 돌아온 지난해 11월, 그가 다니던 회사는 문을 닫았습니다. 발레오공조코리아. 프랑스 자본의 다국적기업입니다. 지난해 10월 26일 회사 청산을 알리고, 10월 30일, 직원에게 해고 통보를 하고, 한 달 만에 공장을 분해시켜 노동자의 생계를 끊은 악랄한 초국적 자본입니다. 산업재해를 당했던 연제문는 결국 작업복을 다시 입지 못하고 쫓겨난 게 서러워 오늘도 프랑스 대사관 앞에서 농성을 합니다. 잠은 먼지 쌓인 기계들이 죽어있는 천안 공장에서 침낭에 몸을 쑤셔 넣고 잡니다. 벌써 100일이 넘었습니다.
그를 만난 어제도 비가 왔습니다. 서울 도심 빌딩 숲 뒤에 자리 잡은 프랑스 대사관 앞에서 하얀 비옷을 입고 동료들과 교대로 시위를 하는 그를 만났는데, 빗물인지 눈물인지 모르겠는데 얼굴이 흠뻑 젖어있습니다. 붉게 충혈 된 눈으로.
연제문 씨의 소망도 보잘 것 없습니다. 발레오의 상징 빛인 흰색에 연둣빛 희망의 줄무늬가 있는 작업복을 다시 입는 겁니다. 당선자님 연제문의 소망도 잊지 마세요.
김소연은 아시죠? 기륭전자 말입니다. 백일 가까운 단식으로 아직도 사람의 몸이 되지 못한 김소연. 오늘로 농성 며칠 째냐고 묻자, 몰라요 그러며 숫자가 무슨 의미냐는 듯 되묻습니다. 지금 생계를 위해 수익사업을 하느라 바쁘답니다. 엊그제는 한 시간밖에 못 잤답니다. 판매실적은 예년만 못한데, 그래도 물건을 사주는 이가 있어 고맙다며 웃습니다.
올 설날 아침 구로공단, 이제는 헐린 기륭전자 정문 앞 컨테이너에 가면 기륭전자 노동자를 만날 수 있을 겁니다. 설날 특별한 행사가 없냐니까, 그건 농성 처음에나 하는 거랍니다. 천일 하고도 몇 백 날이 지난 자신들은 그저 농성장을 지키며 편히 쉬는 게 투쟁이랍니다.
지금 생각하니 제가 괜한 말을 했네요. 죄송합니다. 당신이 기관사로 얼마 전까지 일하던 철도노조의 어려움이 있는데. 얼마나 이 고통을 잘 아시겠습니까. 당신도 겪었는데. 해고 징계에 손해배상까지, 노동자의 현실을 누구보다도 잘 아실 당선자에게 섣부른 말을 해서 죄송합니다.
요즘 당선자님 사회적 연대를 위해, 민주노총의 강화를 위해 이곳저곳 찾아다니시느라 바쁘다는 것 잘 알고 있습니다. 민주당도 찾아가시고 사회원로님들도 만나시고. 설날 전까지 스케줄 빡빡하시죠. 아직 몇 백 날을 싸우고도 해결 못하는 ‘찌질한’ 노동자 만날 시간은 없으시겠지요?
뻥 파업 하지 않고 앞으로는 투쟁사업장부터 튼튼히 묶어 제대로 싸우시겠다는 당선자의 말씀을 어디선가 들었습니다. 꼭 그렇게 하십시오.
이 곳 저 곳 다니시느라 바쁘신 당선자님! 한 가지만 부탁드립니다. ‘찌질한’ 노동자들의 농성장 찾아가지 않더라도 설운 설을 맞이하는 노동자가 있다는 것 잊지 마십시오. 그리고 혹 시간이 남는다면 잠깐 생각해보십시오. 당신이 당선돼서 누구를 먼저 찾아가 만나야 하는지를. 언론에 나는 곳만 얼굴 먼저 보이지 마시고요.
김영훈 당선자님!
설, 행복하게 맞이하십시오.
이천십년 이월 십일일 설을 코앞에 둔 날, 오 도 엽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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