갇힌 자 송경동 시인도 희망을 걷는다

[발가락이 쓴다](3) 재능교육에서 쌍용차까지, 뚜벅이 셋째 날

어제 눈밭에 희망을 찍으며 걸었던 신발들이 꽁꽁 얼었다. 영하 13도의 맹추위와 함께 희망 뚜벅이의 셋째 날이 밝았다. 여민 옷깃에 칭칭 두른 목도리를 뚫고 찬바람이 살을 엔다. 아니 뼛속 깊숙이 한기가 몰려든다. 과천 경마장 입구에 자리한 숙소의 수도도 얼었다. 온수는 아예 존재하지 않았다. 그런데 양치질을 할 수도꼭지가 얼어붙어 찬물조차도 주어지지 않았다. 커피포트에 물을 데워 녹이기를 거듭하자 꼭지가 돌아가고 물이 나온다. 아침 식사도 물론 김밥 한 줄이다.

뼛속까지 스미는 추위를 맞으며 거리에서 보내야 한다는 생각을 하니 2000년 12월 13일 칠천 명의 노동자가 한날 함께 정리해고 된 한국통신 계약직 노동자들이 떠오른다. 그해 겨울은 삼십년의 폭설과 이십년만의 맹추위가 들이닥쳤다. 천막도 없이 눈밭에 비닐 한 장과 침낭에 의지한 채 분당 한국통신 본사 앞에서 계약직 노동자들은 517일을 거리에서 싸워야 했다. 한 노동자는 집회 중 쓰러져 현재도 불구의 몸이다. 한쪽 다리가 접힌 채 몸이 마비된 노동자는 다행히 생명은 건졌으나 몸 반신이 자유롭지 못하고 말을 제대로 하지 못한다.

[출처: 오도엽]

노동운동을 한다는 사람들조차 비정규직이 무엇인지 모르던 시절이었다. 한국통신의 정규직 노동조합의 단체협약에는 계약직 노동자도 조합에 가입하게 되어 있었는데 이를 거부했다. 그해 1750명의 정리해고가 있었던 대우자동차 노동자들에 대한 노동운동권의 연대에 비해 이보다 다섯 배나 되는 7천 명의 노동자가 일터에서 쫓겨난 한국통신 비정규직에 대한 연대는 정말 초라했다.

당시 상급단체인 민주노총 공공연맹의 임원이었던 이는 당시 비정규직의 문제에 대해 너무 몰랐고, 그래서 힘이 되어주지 못했다는 부채감으로 지금도 살아간다고 말한다. 한국통신 계약직 노동자들은 눈물과 분노로 517일의 외침을 접고, 노동조합의 깃발을 내렸다.

어제 쌓인 눈이 고스란히 인도를 메우고 있다. 셋째 날 발걸음은 십년 전 한국통신 계약직 노동자와 그때의 추위로 불구가 된 노동자를 가슴에 품고 내딛는다.

재능교육에서 평택 쌍용자동차까지 자동차로는 채 두 시간도 걸리지 않을 거리를 왜 300 킬로미터를 돌아 걸어서 가는지 내게 묻는다. 왜 빠른 방법 대신 느린 걸음으로 직선 길을 두고 곡선에 곡선을 그려가며 걷는 걸까?

희망을 꿈꿨던 송경동 시인은 지금 부산구치소에 갇혀 있다. 내게는 거의 유일한 동갑내기 친구인 송 시인의 2차 공판은 다음 주(2월 7일)에 있을 예정이다. 1차 공판 때 모두진술을 마친 친구가 나와는 다른 출구로 나가려고 할 때 소리쳐 불렀다. 그 출구는 진정 꿈꾸는 자만이 갈 수 있는 감옥의 길이었다. 손을 내밀며 뭔가 말을 건네려고 했지만 내 입술은 굳고 말았다. 그저 친구의 손에서 전해지는 꿈만을 전달받았다.

송경동 시인이 있었다면 분명 정리해고와 비정규직이 없는 세상을 향한 희망 뚜벅이와 함께 했을 것이다. 경찰이 막아서면 소리를 지르며 온몸으로 항의했을 것이고, 누구보다 앞장서서 걸으며 구호를 외쳤을 것이다. 동료 선배 문인들에게 전화를 해 함께 걷자고 권유했을 것이며 연대의 마음을 담은 글을 써달라고도 했을 것이다.

나는 송경동 시인처럼 몸싸움을 하지도 구호를 외칠지도 모른다. 누군가에게 함께 하자고 전화질도 하지 못하고, 연대 행사를 기획하지도 못한다. 아픈 이의 곁에 있어야 할 친구는 갇혀 있고,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나는 식당에서 먹고 싶은 음식을 골라 먹고 있다.

송경동 시인에 대한 미안함이나 죄책감 때문에 희망 뚜벅이와 함께 걷는 것은 아니다. 그저 친구가 지금 있을 곳이 어딜까를 생각하며 친구가 갇힌 동안 내 발바닥을 대신 친구에게 전하고 싶었을 뿐이다.

눈밭 위에 뚜벅이들의 발자국이 찍을 때마다 때론 비명처럼 때론 아우성처럼 발자국 소리가 난다. 뽀드득 뽀드득이 아니라 ‘배고파서 못 살겠다’ 구호가 되다가 ‘비정규직 철폐가’ 노래가 되어 울리기도 한다.

과천 경마공원 앞에서 출발한 희망 뚜벅이들이 지하철 4호선 과천정부청사 역 앞에 도착하니 오전 11시 45분. 아침에 정성껏 만든 피켓을 들고 지나가는 이들에게 정리해고 없는 세상, 비정규직 없는 세상을 외친다.

이곳에는 코오롱 본사가 있다. 지난 2005년에 코오롱은 600명에 이르는 직원을 퇴직시키고, 이어 78명을 정리해고 했다. 정리해고된 노동자는 8년째 복직투쟁 중이다. 최장기 투쟁사업장이라는 결코 명예스럽지 못한 기록을 세우고 있지만 노동자들은 희망을 포기할 수 없어 싸우고 있다. 내게는 가슴 스린 기억이 있는 곳이기도 하다.

2006년이었다. 당시 코오롱 노동조합 위원장이었던 최일배는 회사가 대화에 응하지 않자 본사 로비로 뛰어 들어가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회장실로 들어가려고 했다. 하지만 용역 경비들이 그와 정리해고자를 가로막았다. 그 순간 그는 칼을 꺼내 자신의 손목에 들이댔다. 취재 중이던 나는 카메라를 놓고 칼을 쥔 최일배의 손을 잡았다. 왜 그랬는지는 모른다.

최일배 당시 위원장을 희망 뚜벅이에서 다시 만났다. 아직도 투쟁 중인 그를 보며 잊고 지냈던 시간이 죄책감으로 밀려왔다.

코오롱 본사 앞에서 코오롱 정리해고자들과 희망 뚜벅이들은 3차 투쟁 선포식을 갖고 오늘의 최종 목적지인 안양역으로 향했다. 눈 쌓인 길과 눈 녹으며 질퍽한 길을 번갈아 마주하며 뚜벅이의 발자국을 찍었다.

인덕원 사거리에 이르자 ‘열렬히 응원합니다’라고 적힌 펼친막을 든 시민들이 모여 있다. 행진해온 뚜벅이들에게 차와 간식을 건넨다. 안양지역 시민들이다. 뚜벅이들은 행진을 하면 할수록 사람들이 늘어난다. 오늘 아침 과천에서 출발할 때 정보과 형사를 포함해서 30명 남짓이었는데 어느덧 백 명이 훌쩍 넘어섰다. 희망은 이렇게 시민들의 연대의 발길을 모으며 커져간다. 이 걸음이 평택에 닿을 쯤에는 숱한 희망의 열매로 맺으리라.

잠시 뒤 오후 6시 30분부터는 안양역 앞에서 안양시민들과 함께 촛불문화제가 열릴 예정이다.

2월 2일인 내일은 안양역에서 뚜벅이의 발걸음이 시작되어 기아자동차 소하리 공장을 거쳐 광명사거리역에서 선전전을 진행하고, 성공회대에서 영화제와 강연회를 갖은 뒤 밤에는 부천역으로 갈 예정이다. 잠시라도 발걸음을 함께 내디딜 이가 간절히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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