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가 피시방에 게임 하러 가면 어린애 혼자 남아 집 지키기다가 세상이 버려 놓은 슬픈 노래에 팔 묶여 거칠게 성폭행 당합니다.”
▲ 영화 피에타의 한 장면 |
잔혹극에 버금가는 영화 <피에타>에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노래가 스크린에 비탄스러운 주름을 만든다. 자연의 바닷소리가 아이를 재우던 목가적인 노래가 주인공 강도의 엄마가 부르는 비탄스러운 노래로 변한다. 노래 내용은 목가적이고 낭만적이나 영화 속에서 울려 나오는 노랫소리 안은 비탄으로 충만하다.
피에타는 ‘저들을 구원하소서’란 뜻도 있지만 비탄, 슬픔을 뜻하기도 한다. 누가 강도와 강도의 엄마를 구원할 것인가. 누가 비탄에 더 잠겨 있는가. 강도인가 강도의 엄마인가. 비탄의 강도를 가늠하기 어렵다. 슬픔이란 단어로도 견딜 수 없는 슬픔을 비탄이라 해야 하는지 모르겠지만, 무엇이 강도로 하여금 엄마를 능욕하고 강도를 죽게 만들었는지 모르겠다.
성범죄를 통해 잠자던 안전이라는 단어를 깨워 이데올로기로 악용하는 시절이다. 성범죄 전문가들이 말하듯 요즘 따라 성범죄가 빈발했던 것도 아닌데 갑자기 사람들이 몸의 안전을 생각하기 시작했다. 우리의 상상력이 미치지 못할 정도로 현실이 공중 화장실의 장기 매매 광고 문구처럼 잔혹해지기 시작한 것이 어제오늘의 일이던가.
백주대낮에 시지노인병원 노동자들을 남자든 여자든 아랑곳하지 않고 웃통이 벗겨진 채로 혹은 팬티만 입은 채로 대구 중부 경찰서에 개 끌려가듯 끌려가는 세월 아닌가. 비탄의 강도를 가늠하긴 어렵다. 인간 백정, 악마 같은 고리대금 사채업자 강도 때문에 손을 잘라 빚 3천만 원을 갚아야 하는 삶이 비탄스러운 것인지 임금 체불한 것을 돌려달라는 시지노인병원 노동자들의 삶이 비탄스럽고 잔혹한 것인지 강도를 가늠하긴 어렵다.
영화 <피에타>에 나오듯이 돈이 무엇인가, 삶이, 그리고 죽음이 무엇이던가. 돈이 시작이자 끝이라면 죽음은 삶의 끝이고 삶은 죽음의 시작 아니던가. 그러나 분명한 것은 자본이 노동을 능욕한다는 사실이다. 강도가 “내가 이리로 나왔다고? 그러면 이리로 들어가면 되겠네”라며 친엄마를 능욕한 것처럼 자본은 지금도 노동자들을 능욕하고 있다. 여성노동자의 벗겨진 몸을 그대로 방치한 채 경찰서로 연행하는 국가 권력의 능욕 행위나 용산과 쌍용차의 서민과 노동자를 죽음으로 능욕하는 것이나 무에 다를 바 있으랴.
강도를 낳고 무서워 핏덩이를 버리고 떠난 엄마가 돌연 나타나 악마로 변한 강도를 용서할 수 없다고 했을 때 엄마는 과연 누구에게 복수하고 있는 것인가. 돈 3백만 원에 한 가정의 가장을 병신으로 만들어 놓고 허접한 집도 아니고 하우스 안에 기어들어가 살게 한 강도, 잘린 손목으로 애한테 기타를 들려주라며 기타를 던져 주고 가는 강도, 애초부터 돈은 빌렸지만 갚을 생각이 없었다며 강도가 찾아오자 청계천 어느 옥상에서 65세의 노인네 노동자가 자발적으로 몸을 던지게 한 강도에게 엄마는 목숨을 요구하고 있는 것인가.
강도는 죽어도 싼 개새X이긴 하지만 무엇이 강도를 야수로 만들었는가. 피에타! 강도를 구원하소서! 영화의 스토리는 복수를 중심으로 움직이지만, 엄마의 부재가 강도를 인간 백정으로 만들었던 것은 아닌가. 그런 엄마가 홀연히 나타나 인간 백정으로 변한 강도를 용서할 수 없어서 강도를 죽게 만들었다면 세상에 대한 강도의 복수, 그 복수 탓에 죽어간 빚쟁이들, 자신이 짠 스웨터를 강도의 생일에 주지 않고 아무 이유 없이 죽어간 빚쟁이 무덤에 같이 묻어 주며 속죄를 구하던 엄마는 과연 구원받을 수 있는가.
▲ 영화 피에타의 한 장면 |
하지만, 영화에서 “미안해”를 되뇌던 엄마를, “피에타”, “구원하소서.” 하지만 영화는 구원의 불가능성을 이야기하고 있는 듯하다. 하우스 안에서 짐승 같은 강도에게 사납게 대들던 아낙네가 강도 때문에 팔 병신이 된 남편 무릎에 손바닥만 한 밥상을 차려 주는 모습을 본 강도의 몸이 밥상 건네주고 이른 새벽 밥벌이를 하러 용달차를 몰고 가던 그 뒤로 긴 핏자국을 남길 때 강도는 과연 구원되었는가. 본인의 죽음으로 구원되었는가. 고요한 새벽녘 용달차를 몰던 아낙네가 전혀 눈치를 채지 못할 정도로 새벽녘 고속도로 차가운 아스팔트 위를 덮은 절대 고독 속에서 죽어간 강도는 구원되었는가.
강도를 만난 날 엄마가 사 온 장어를 뿌리쳤을 때 아파트 계단을 휘저으며 미끄러져가던 장어처럼 엄마가 부재하던 30년 동안 강도는 장어의 생명력을 흡수해 살았으리라. 그 생명력이 엄마의 부재를 극복하기 위해 주어진 것이었다면 엄마의 부재가 엄마의 귀환으로 인해 강도의 생명을 자살로 이끌었다면 과연 누가 누구에게 복수한 것이고 누가 구원을 받은 것인가. 그 질긴 장어의 생명력이, 알파요 오메가인 돈이 없어 빚쟁이가 된 사람들의 생명을 끊어 놓는 부정적임 힘으로 작동하긴 했지만 강도가 죄를 지은 것인가, 아니면 자식을 버리고 간 엄마가 죄를 지은 것인가. 영화 속에서 엄마가 강도에게 부탁해 물가에 심어진 소나무가 “잘 자랄까” 미심쩍어하던 강도의 말처럼, 소나무는 성장을 멈추고 엄마도 강도도 삶의 성장, 생명의 성장을 멈추었는지 모른다.
돈이 알파요 오메가로 변한 세상, 알파요 오메가인 절대자의 위치로 등극한 세상에서 돈이 없는 것이 죄라는 말은 곧 돈이 악마라는 뜻과도 같다. 그래서 ‘악마의 금전’이라는 노래가 있지 않은가. 자본주의 세상에서 구원은 불가능하다. 영화가 사악한 고리대금업자의 현실, 이자에 이자를 산처럼 쌓으며 연 3~40%의 이자를 갈취하고 빚쟁이의 삶을 뭉개버리는 현실을 잔혹한 장면들로 과대 포장했다고 말할지 모르겠지만, 빚쟁이들의 마음과 영혼은 이미 바짝 말라 있다. 우리들의 마음을 바싹 마른 건어물처럼 만드는 것이 어찌 사채업자들뿐이겠는가.
사채 같은 제3금융권 말고도 제2, 제1금융권 또한 노동자 서민들의 목줄을 죄고 있지 않는가. 김기덕 감독의 영화는 늘 스크린을 대하기가 거북하다고 말하지만, 영화 이전에 우리들의 삶이 그렇다. 자본주의하에서 우리들의 삶은 국가 권력에 의해 그리고 자본에 의해 늘 처참하게 능욕당하고 있다. 용산의 일반인들을 태워서 죽이는 국가 권력 아니던가. 쌍용차 노동자들의 영혼을 절단해 버리는 자본 아니던가.
노동자들도 쉬어야 하는 토요일, 두 눈으로 대하기 어려운 영화 이야기를 꺼내 송구스럽지만, 오늘날 노동자들의 비탄스럽고 비통한 삶은 두 눈으로 마주하고 피하지 말아야 한다. “피에타!”, 노동자를 구원하는 것은 노동자 자신일 뿐이다. 고리대금업자 강도에게 불가항력이되 대들고 저항하던 영화 속 빚쟁이들을 기억하자. 목발을 짚고 자식에게 수없이 강도의 만행을 기억시키던 아버지처럼 국가와 자본의 만행에 분노하자. 그것이 “피에타”, “저들을 구원하소서”라는 비탄스러운 외침에 우리가 보낼 수 있는 유일한 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