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속 지키기 위해 현장으로 돌아가고 싶었던 기아차 비정규직 노동자 고 윤주형 조합원

[연정의 바보같은사랑] (73) 재능교육지부 ‘기아 해복투’ 거리강연에서 고 윤주형 조합원(2)

지금 민주노조 현실을 정확하게 보여주는 구호

윤주형 씨가 울먹이자 청중들이 힘찬 응원의 박수로 보내준다.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이동우 씨에게 넘어온다. 이동우 씨는 투쟁의 과정에서 정견과 그에 따른 결과가 다를 수 있지만, 그 속에서 자신이 피해를 보았다고 해서 누군가를 ‘찝어서’ 분노하는 것이 좋지는 않은 것 같다고 했다. 그는 실제로 좌우파를 막론하고 기존 정규직 집행부가 하는 것을 보면서 분노를 그쪽으로 모아갔던 경험이 있기도 하다. 그렇게 분노를 모아가는 것이 어떤 의미에서 그 시간을 살아가는 데는 도움이 될 수 있지만, 또 다른 동지들에게 칼날로 다가서기도 하기 때문에 최대한 그러지 않으려고 노력을 하고 있단다.

“처음에는 대단히 쑥스러웠습니다. 제가 여태까지 투쟁을 하면서 누구는 어떻게 해달라는 얘기를 한 번도 한 적이 없습니다. ‘비정규직을 철폐하자, 정규직화 쟁취하자, 민주노조 사수하자’ 얘기를 했지. 이동우를 구하자는 내용이잖아요. 본인의 이름을 처음에 윤 동지가 그 구호로 외쳤을 때 저 팔뚝질도 하지 못했어요. 쑥스러워가지고. 제 이름을 제 얼굴을 알고 있는 동지들이 쳐다볼까 봐 그 구호를 외칠 때는 고개를 푹 숙였던 생각들이 납니다.”

  7월 22일, ‘울산 현대차 포위의 날’ 윤주형(왼쪽), 이동우 조합원

나는 이동우 씨를 비정규직지회 활동할 때부터 알고 있지만, 그가 2.3차 하청노동자이고 그것 때문에 조합원 자격을 인정받지 못한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얼마 안 된다. 아마 ‘희망뚜벅이’와 ‘희망광장’ 때 윤주형 씨가 외친 구호를 통해 확실히 인지하게 된 게 아닐까 싶다. 그전에는 들었어도 그냥 흘려보냈을 가능성이 많다. 재능교육 유명자 지부장은 “내가 알고 있고, 내가 외쳤던 구호 중에 가장 처절한 구호” 라는 이야기를 하기도 했단다. 이동우 씨는 아직도 그 구호를 들을 때마다 절반 정도는 쑥스러움이 남아있단다.

“개인의 문제를 떠나서 민주노조에 들어가고 싶은데, 노동조합으로 보호받지 못하고 조직되지 못하는 문턱에서부터 막혀 있는 지금 남한의 민주노조 현실을 정확하게 보여주는 구호라고 생각해요. 이 구호가 조직되지 못하는 2.3차 하청 노동자들과 계약직 노동자들에게 실질적인 구호가 될 수 있는 투쟁이 필요하지 않을까.”

정파 간 갈등과 노동조합 관료주의, 그리고 인정투쟁

“다 같이 한번 힘차게 구호를 외쳐봤으면 좋겠습니다. 아까 외쳤던 구호가 아니고요. 새로운 다른 구호입니다. 김수억은 우리 동지 우리 대의원이다!”

김수억 씨 역시 자신의 이름이 들어간 구호를 직접 들으니 “이동우 동지가 이런 느낌이었구나”를 실감하겠다고 한다. 김수억 씨는 선거를 통해 선출된 대의원임에도 불구하고 사측이 대의원 자격을 인정하지 않았다. 해고된 대의원이라는 이유로 회사가 노사협의에 나오지 않은 것이다.

“이상하게 기아차동차 해고자들은 다 ‘인정하라, 인정하라’ 입니다. 현장에서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 것 같은데요. 기아차 비정규직 투쟁은 아마 여기 계신 모든 동지에게 상처도 있지만, 죽을 때까지 자존심으로 갖고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비정규직지회였다면 윤주형 동지가 노동조합의 지침을 따르지 않았네 따랐네 이딴 얘기를 절대 듣지 않았을 겁니다. 아마 노동조합이 함께 싸웠을 것이고, 함께 승리했을 것이란 얘기를 감히 해봅니다. 비정규직지회가 그러한 폭력적이고 노동조합적이지 않은 노동자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통합이 안 됐더라면 아마 이동우 동지는 노동조합의 조합원으로서 부지회장으로서 활동가로서 누구보다 열심히 싸우고 있었을 거라 생각합니다.“

2010년에 해고된 윤주형 씨는 당시 기아자동차지부(21대 지부장 김성락) 내에서 ‘정당한 조합활동으로 인한 해고’ 문제로 계속 논란이 되다가 당시 대의원대회를 통해 임기 내에 복직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하였으나 집행부의 미온적인 태도로 끝내 복직하지 못했다. 당시 집행부는 ‘대의원 대회 결정사항으로 금속노조 신분보장 기금 신청을 요청한다’고 하였으나 윤씨는 금속노조 신분보장기금을 받지 못했다.

요구 안건을 금속노조에 올리는 것부터 곡절이 많았던 신분보장기금 승인 심의 과정에서 윤주형 씨는 ‘동네 동사무소보다 더하다, 이게 진짜 관료구나. 결국엔 대공장 권력이 금속노조 안에서 강하게 움직인다’는 것을 느꼈다고 한다. 윤주형 씨는 자신이 당한 해고의 원인을 정파 간의 갈등과 노동조합의 관료주의라고 보았다. 그 배경에는 온갖 모략과 협잡이 있다고 생각했다. 신분보장기금 승인 처리를 계속 연기하자 윤주형 씨는 동료들과 함께 서울 금속노조 신분보장기금심의위원회에 항의를 하러 간 적도 있다. 당시 금속노조 신분보장기금심의위원회 김현미(금속노조 부위원장) 위원장은 윤주형 씨에게 ‘여기서 아무리 떠들어봤자 승인 불승인 결정을 못 내리니까 기아차지부하고 사이좋게 정리하고 와라. 그래야 정리된다’는 말을 했다고 한다. (사회주의노동자신문 'The_FocuS'[기획대담]기아차 해고자를 만나다, 2011년 11월)

다음 집행부(22대 배재정 지부장)에 들어와서도 마찬가지였다. 2012년 대의원대회에서 윤주형, 이동우 씨의 복직 요구안조차 올라가지 못했다. 해고자들은 기아자동차지부가 좌우파를 막론하고 어느 집행부든 해고자 문제, 특히 비정규직 해고자 문제에 대해서는 일방적으로 재단하고 해고자 내부를 갈라치기 하는 등 비슷한 입장을 견지해왔다고 이야기한다. 2011년에는 김수억·이상욱 씨만 대의원대회 요구안으로 올리자는 제안에 대해 수감 중이던 김수억 씨가 그럴 거면 올리지 말라고 하는 일도 있었다.

김수억 씨는 수년간 노동자 투쟁이 어떻게 가야하는지를 일깨워주면서 함께 싸웠던 자신들의 자긍심이었던 노조가 해산되면서 현장이 어떻게 파괴되는지, 열심히 싸웠던 노동자들이 어떻게 되는지가 적나라하게 드러난 것이 ‘기아 해복투’라고 이야기한다. 그즈음 기아 해고노동자들은 많이 힘들다고 했다. 장기간의 해고 생활이 주는 고단함과 복직 요구안조차 올릴 수 없는 현실 등 힘든 점이 많았을 것이다. 네 명의 해고자 모두 힘들고 지쳐 서로의 아픔을 보듬어줄 여력이 없었을 거다. 김수억 씨는 ‘힘들다고 감히 말을 할 수 없는 상태’가 자신의 상태라면서 곧 있을 수련회에 가서 고민을 나눌 거라고 했다.

하늘 보면서 목욕할 수 있다니 노천탕이 너무 좋은 거에요

“내가 김수억 동지보다 많이 아프고 차별받았다 얘기하는데, 김수억 동지한테 유일하게 이긴 게 있습니다. 2년 6개월 빵(교도소) 생활 하는데, 저는 가석방으로 50일 먼저 나왔습니다. 가석방으로 나왔을 때 대단히 기뻤습니다.”

행복하고 즐거웠던 때를 이야기하는 시간에 이동우 씨는 해고 기간 직접적으로 기뻤던 일이 하나도 없다고 했다. 좌절 하거나 아니면 ‘내가 팽 당하는구나’하는 느낌이 들 때가 많았다. 그나마 비정규직지회 당시 파업할 때와 석방된 이후에 했던 ‘희망뚜벅이’와 ‘희망광장’을 하면서 많은 연대동지와 함께했던 것이 가장 기뻤던 기억이란다.

윤주형 씨의 차례가 왔다. 사회자가 윤주형 씨도 기분 좋은 게 별로 없다고 하자 윤씨은 “있어요. 왜 없다 그래? 있는데.”라며 이야기를 시작한다.

“해복투 결성하는 과정에서 저희가 수련회를 갔죠. 노천탕에 갔어요. 노천탕이 너무 좋은 거에요. 태어나서 그런데 처음 가봤거든요. 앉아 있는데 위에서 폭포가 떨어지지 않나. 그때가 최근에 가장 기뻤던 때 중의 하나구요. 정말 기뻤어요. 하늘 보면서 목욕할 수 있다니. 하늘에서 물이 떨어지다니.”

김수억 씨는 2005년도에 노조 깃발 띄우고 처음 공장 세운 날 조합원들과 많이 울었는데, 그때가 인생에서 손꼽을 수 있는 가장 기분 좋은 날이었던 것 같다고 했다. 최근에는 노동자 계급정당 건설을 위한 활동과 ‘공동투쟁단’에서의 활동이 즐겁다한다. 김씨는 사회자가 ‘금지어’로 지정한 ‘동지’ ‘연대’ ‘투쟁’ 등의 단어를 계속 쓴다.

“공동투쟁단에서 새로운 동지들을 많이 만났습니다. 제가 승리 얼짱 4조의 조원인데요. 거기에 있는 JW지회 OOO동지가 여기 와계시더라고요. 내일 그 4조 조원들이 전부 콜트 콜텍에 가는데 단체복으로 몸빼바지를 입는답니다. 어떻게 그걸 입고 싸울까 걱정은 되지만, 새롭게 투쟁하는 동지들의 혈기 왕성하고 신나는 열기들 때문에 요새 가장 기분 좋고 내일 기대됩니다.”

  2012년 3월 25일 경복궁, ‘희망광장’에 참여한 ‘기아 해복투’ 윤주형(오른쪽에서 다섯 번째), 이상욱(왼쪽에서 다섯 번째) 조합원

값있는 동지라는 부름을 일깨워준 기아 해복투

윤주형 씨는 조직통합 이후, 해고되는 과정까지 ‘멘붕’이었다고 했다. 그동안 꿈꿔왔던 민주조노조에 대한 꿈과 기대가 짧은 시간에 산산이 무너졌다. 해고된 후에는 해고투쟁을 안 하려고 한 달 동안 잠수를 타기도 했었다. ‘여기에서 내가 뭔가 씨앗을 만들 수 있을까? 희망을 일굴 수 있을까? 안될 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측이 윤주형 씨의 복직을 막기 위해 현장 조합원들을 회유하면서 그가 현장과 유기적으로 싸우기 힘든 조건이 형성된 것도 그에게는 큰 어려움과 고통이었다. ‘기아 해복투’ 결성 전에 윤주형 씨는 ‘사회주의노동자신문’ 'The_FocuS'(2011년 11월) 인터뷰에서 “심정적으로 많이 힘들다. 예전에는 어디에 딱 속해서 내 위치와 자리가 있고 내가 해야 할 일이 있으니까 바쁘고. 야, 고생한다. 그런 얘기도 들었는데. 요즘은 외롭게 동떨어져서 혼자 고민하고. 앞으로 어떻게 살 거냐부터 해고투쟁을 어떤 관점으로 보고 할 거냐. 생각을 많이 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했다. 또, 이 인터뷰에서는 처음에는 윤주형 씨가 가지고 있던 정파적인 캐릭터가 있지만, 해고된 이후에 현장에서 같이 투쟁했던 동지들로부터 느낀 배신감과 인간적인 서운함 때문에 이후 해고투쟁에 대한 전망을 별로 세우지 못했다는 이야기도 했다. 그는 주변 사람들로부터 자신이 ‘전국회의’ ‘자주노동자회’ ‘기노회’와 연관이 있는데, 왜 그렇게 황당하게 해고가 되었느냐는 말을 듣는다고 했다. 자신과 연관 있는 현장조직들로부터도 제대로 보호받지 못했음을 의미하는 말일게다. 빈소에서 만난 사람들 중에는 그것이 어느 조직에 속해 있든지 속해있지 않든지 간에 ‘할 말은 하는(입바른 소리 하는)’ 윤주형 씨의 스타일 때문일 거라 이야기하는 사람도 있었다.

윤주형 씨는 1차 하청 노동자이고 기아차지부 현직 대의원일 당시에 해고됐음에도 조합원 시비가 있었다. 윤주형은 정확하게 기아차 조합원이라는 게 확인이 안 되니 분회장 선거 투표를 할 수 없고, 금속 대의원에 출마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금속대의원 출마를 못한다고 하자 그는 금속노조에 자신이 어디 조합원인지 알려 달라고 했다. 자신이 경기지부 조합원이라면 경기지부로 가겠다고 했다.

“이렇게 얘기해도 금속노조가 기아차지부에 말을 못했습니다. 그때 ‘아, 정말 절망이다. 에이 젠장.’ 이러고서 땅바닥을 치고 있는데. 그때 이 세 동지들(이동우·김수억·이상욱)이 함께 목소리를 내고 현장을 조직하고 항의하는 과정 속에서 멘붕에 빠진 이후로 걸레짝처럼 아무 쓸모 없던 ‘동지’라는 부름이 그 날 값있게 불려졌던 기억이 있어요. 그날 함께 했던 투쟁의 기억이 있고, 이상욱 김수억 이동우 동지에게 ‘동지’라는 값있는 표현을 했어요. 정말 같이 할 수 있는 동지라는 표현. 그날 너무 행복했던 기억이 두고두고 마음에 남아 있어요.”

  왼쪽부터 ‘기아 해복투’ 이상욱, 이동우, 윤주형 조합원

윤주형 씨는 가장 좋았던 때가 해복투 수련회 때 목욕탕 갔을 때와 자신의 문제로 지금 ‘기아 해복투’에서 함께 하고 있는 세 명의 해고노동자들이 함께 싸워주었을 때라고 이야기했다. 해고 이후 윤주형 씨는 이상욱 씨와 함께 기아차 구속노동자를 지원하는 ‘구속동지 석방·해고자 원직복직·고소고발.손배가압류 분쇄 현장대책위원회(준, 이하 ’석방대책위‘)’ 활동에 열심히 참여 한다. 그는 구속자 면회와 편지·기사·트위터 출력한 것을 보내주는 문서수발 작업 등을 1년 정도 즐겁게 했다. 감수성이 풍부한 윤주형 씨는 경직된 조직·노동조합 문화에 문제의식을 갖고 있었다. 그는 자유로운 토론과 자발적인 투쟁을 좋아했다.

2011년 김수억, 이동우 씨가 석방되면서 ‘석방대책위’는 자연스럽게 해산하게 되고, 그 후 윤주형 씨를 포함한 4명의 원하청 해고노동자들이 ‘기아 해복투’를 만들어 활동하게 된다. 윤주형 씨는 ‘기아 해복투’를 결성하고 수안보로 갔던 첫 수련회가 가장 기쁜 일이라고 했다. 그때 4명의 해고노동자들은 모닥불 피워놓고 이야기하고, 함께 온천욕도 하면서 잊지 못할 즐거운 추억을 만들었다. 다른 해고노동자들의 이야기에 분발할 필요성을 느낀 것일까. 이동우 씨가 추가 답변을 한다.

“생각해보니까 또 하나의 기쁨이 있는 것 같습니다. 빵에 들어가기 한 달 전에 애인 동지를 사귀었는데, 빵에서 나와 지금까지 투쟁을 같이 하면서 여러 가지로 마음 써주고 있습니다. 만나는 시간이 대단히 적거든요. 그 시간 때마다 제 성질 다 받아주는 애인 동지가 있어서 대단히 기쁩니다. 이상입니다.”

북적북적하게 빈소를 메워주셨습니다: 현장으로 돌아가고 싶은 이유

“대공장 안을 속속들이 들여다보면 가슴 찢어지게 아픈 모습들이 많은데, 복직 투쟁을 하려고 해요. 거기로 다시 돌아가려고 투쟁을 하고 있어요. 이 얘기를 들어봤으면 좋겠습니다. 왜 이 공장으로 돌아가려고 하는가? 이 공장은 우리 해고자들에게 어떤 곳인가 라는 얘기를 들어봤으면 좋겠습니다.”

이동우 씨는 해고가 부당하고, 자본이 노동자들을 갈라놓은 것이 부당하기 때문에 현장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했다. 그는 현장으로 돌아가서 함께 공장을 세우고 기뻐하고 울었던 조합원들이 그 투쟁의 정당성을 인정받으면 좋겠다고 했다. 또, 지금 현장에 있는 1800명의 비정규직과 3만 명의 정규직 조합원들이 앞으로 이런 투쟁들을 서슴없이 하기 위해서라도 현장으로 돌아가야겠다고 한다. 하지만, 그 무엇보다 이동우 씨는 수감 생활 중에 모친상을 당해 장례식을 위해 나왔을 때, 조합원들이 보여준 의리를 잊을 수가 없다고 했다.

“개인적으로 현장으로 돌아가고 싶은 이유는 딱 하나입니다. 우리조합원들 보고 싶어서 돌아가고 싶습니다. 제가, 해고되고, 수배생활 하고, 빵에 있었을 때, 우리 조합원 동지들이 보여주셨던 그 의리는 말로 못하는 것 중의 하나일 것 같습니다. 비오는 날 아침이었어요. 운동을 하러 나갔다가 어머니 부고 소식을 듣고 빵을 나왔을 때, 공장에 있는 동지들 중에 몇 명이 춘천교도소 앞으로 달려와 주셨습니다. 그리고 정신없이 가서 장례식장에 딱 들어서는데, 정말 많은 우리 조합원 동지들 함께 투쟁했던 동지들이 북적북적하게 빈소를 메워주셨습니다. 그것 역시 또 하나의 제가 현장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 이유 중의 하나가 아닐까 라는 생각을 합니다.”

이동우 씨는 야근 근무 끝나고 잠을 줄여가면서 차타고 춘천교도소에 와서 면회 15분 하고 돌아가서 바로 출근을 했던 조합원들을 잊을 수 없다고 했다. 이씨는 그 동지들이 있는 곳으로 꼭 돌아가고 싶고, 돌아가서 그 동지들과 함께 노동하고 투쟁하고 싶다고 했다.

노동조합이 한번이라도 싸움을 했다면 이렇게 억울하지는 않을 텐데

김수억 씨는 수감 생활 중에 갑자기 찾아온 나이 많은 한 조합원의 이야기를 한다. 1사 1노조 조직통합으로 비정규직지회가 해산되고, 사내하청분회로 넘어간 지 얼마 안 되었을 때다. 비정규직지회 시절 조합원들이 어렵게 싸워 만들었던 정년과 전환배치 관련 합의를 사측이 일방적으로 다 깨버렸지만, 노동조합은 거기에 대한 대응을 하지 못했다.

“노동조합 초기 때부터 싸우셨던 정말 나이 많으신 한분께서 원래 면회 약속들이 다 잡혀 있는데, 갑자기 찾아오셨어요. 강제로 전환배치를 당한 거죠. ‘노동조합이 한번이라도 싸움을 하다가 전환배치를 당하는 것이라면 이렇게 억울하지는 않을 텐데...’ 눈물을 흘리고 가시는 모습을 보면서 생각했습니다. 많은 현장에 특히 대공장이 이제는 더 이상 투쟁 없다는 평가를 받기도 하고, 대단히 어려워합니다. 그러나 출소하면서 결심했던 것은 정말 3년 안에 우리 해고자 동지들과 저희 조합원 동지들이랑 같이 이 기아차 화성공장 반드시 한번 다시 세운다. 그게 제가 현장으로 돌아가야 되는 이유입니다. 이 공장을 뜰 수 없는 이유는 3년 안에 기아차에서 조합원들하고 가슴 뜨겁게 울고 웃으면서 파업투쟁을 다시 한번 해보고 싶습니다.”

해고노동자들이 복직되려면 노조가 민주적 원리로 돌아가야

윤주형 씨는 해고노동자들이 복직되려면 노조가 민주적 원리로 돌아가야 한다는 이야기를 『The_FocuS』 인터뷰에서 했다. 그가 생각하는 민주노조의 원리는 단결, 투쟁, 연대다. 그는 기아차지부에서 이것이 가능해진다면 ‘더 큰 연대’를 내세웠던 주장에 따라 이동우 전 부지회장을 조합원으로 인정하고, 2·3차 하청의 문제는 집행부 내 기구를 설치해 장기전망을 볼 수 있다는 이야기도 했다. 그는 “‘더 큰 연대’가 함께 투쟁한 동지를, 그것도 핵심간부를, 힘없는 약자라 하여 쫓아내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라고 이야기하면서 사내하청 조합원들이 상대적으로 안정된 현실에서 계약직과 2·3차 하청노동자를 바라보는 시선은 기아차지부 민주노조의 정체성을 확인하는 기준이 될 것이라고 이야기했다.(사노신 'The_FocuS'[기획대담]기아차 해고자를 만나다, 2011년 11월)

윤주형 씨는 자신이 복직하고 싶은 이유 설명을 “갈 데가 여기밖에 없어서”라는 말로 시작한다. 그가 대의원으로 출마할 때 조합원들과 했던 약속이 있다고 한다.

“현장에 조합원을 얼마큼 조직할 것이고, 여성조합원들을 추행한 자를 반드시 현장에서 몰아낼 것이고. 그때 기억으로 5가지인가 약속을 했습니다. 일반적으로 출마하면서 내는 공약사항과는 다르죠. 계속 싸워야 되는 문제니까요. 사람들도 지레 겁 먹기도 했고. 그 약속을 거의 다 지켰는데, 아직 한 가지를 못 지켰어요. 첫 번째로 내세웠던 공약은 현장에서 함께 일하는 우리 업체의 비정규직 우리 조합원 아저씨들 형님 아우들 그리고 여성조합원들이 사측 관리자 앞에서 어깨 당당하게 펴고 일할 수 있는 신나는 현장 만들겠다고 약속을 했는데. 여전히 그 약속을 못 지키고 있습니다. 그 약속을 반드시 지키기 위해 현장으로 돌아가고 싶습니다. 그래서 관리자들 앞에서 부당한 것들 앞에서 현장의 노동자들이 신나게 일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현장으로 무슨 일이 있어도 반드시 돌아가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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