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신

[워커스] 워커스 사전

혁신(innovation)이란 말은 새로운(novus) 것을 향해(into) 낡은 것을 허물며 변화 발전해간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단어로만 보면 수구·보수의 반대말 같다. 뭔가 ‘혁명적인 쇄신’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래서 진보교육감이 혁신교육을 내세우고 진보시장이 혁신파크를 만드는 것처럼 진보라 하는 이들도 혁신이란 용어를 즐겨 쓴다. 그 사이 혁명도 진보도 점점 낡은 개념이 됐고, 그 자리를 혁신이란 단어가 대체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자본가와 기득권 세력도 이 혁신이란 말을 사랑한다는 점이다. 보수도 혁신을 정권의 구호로 내세운다. 4대강사업도, 창조경제도 혁신사업이었다. 국가혁신은 진보와 보수의 공통어다. 세상이 바뀌어야 한다는 것은 지난 촛불에서 드러났듯 뿌리의 민심도 말하고 있는 것이지만 과연 그것을 ‘혁신’이란 단어에 담을 수 있는 것일까. 혁신이란 단어의 탄생과 부활, 그리고 한국사회에 유입된 경로와 이념적 사용법은 혁신이란 말이 사전적 의미 이상의 사회적 개념어라는 것을 알려준다. 중요한 것은 진보의 말도 보수의 말도 될 수 있는 이 말은, 노동자의 말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은 애초 자본의 영토에서 태어난 말이었다.

[출처: 사계]

1942년 조지프 슘페터는 흥미로운 가설을 제안한다. 경제발전의 동력이 기술혁신에 있다는 주장이었다. 기술혁신의 주체는 이윤 추구를 위하여 새로운 생산방법과 새로운 상품개발 등을 추구하는 기업가다. 이런 혁신 과정을 통해 자본주의 경제는 활력을 얻고 새로운 단계로 끊임없이 자기 창조를 해나간다는 것이다. 그러나 자본주의적 세계의 창조는 파괴를 필수적으로 수반한다. 그것은 자본주의 경제의 생리이기도 하다. 그는 그런 혁신과정을 ‘창조적 파괴’라 하고 기업가들이 그런 파괴를 감행하면서 혁신을 추구해나가는 정신을 ‘기업가정신(entrepreneurship)’이라고 불렀다. 슘페터의 주장은 당대의 상황에서는 쉽게 받아들여지기 힘든 것이었다. 2차 대전은 이성과 기술 진보에 대한 서구 사회의 믿음에 깊은 회의를 불러일으켰기 때문이다. 슘페터가 혁신의 예언자로 부활한 것은 신자유주의가 도래하면서였다. 복지국가 및 공공부문의 비효율성을 공격하며 시작된 우파의 구호는 ‘시장의, 시장에 의한, 시장을 위한’ 정치와 경제였다. 모든 사회문제를 시장에서 해결하게 하라는 요구는 곧 자본주의적 모순을 자본주의적 혁신으로 해결하라는 것이었다.

이 혁신의 이념은 경제 영역만이 아니라 사회 전 영역으로 확산됐다. ‘혁신하라!’는 구호는 기업의 기술혁신, 경영혁신만이 아니라 공공부문 혁신, 교육혁신, 도시혁신, 사회혁신 등 모든 곳에서 울려 퍼진다. 혁신의 전도사를 자임하고 있는 ‘여시재’ 같은 자본주의 씽크탱크는 노골적으로 “당신은 혁신의 편인가?”라고 묻는다. 혁신의 편이 아니라고 하면 뭔가 구태, 적폐, 낡고 고답적인 사람이 되어버리는 것 같다. 반대로 혁신은 진보와 보수의 진영논리에서 벗어난 새로운 시대의 이념인 듯하다. 그들이 말하듯 정말로 혁신은 새로운 시대의 새벽을 여는 종소리인가. 어쩐지 혁신의 종소리는 ‘잘 살아보세’를 외치던 70년대 새마을운동의 경제발전 구호를 떠올리게 하지 않는가.

‘혁신’이 해체하는 ‘노동가치설’

무엇이 문제인걸까. 혁신이 발전을 추동한다는 이 논리는 지금까지 우리의 사회적 관념을 지탱해온 한 가지 중요한 기본 전제를 해체한다. 그 전제는 세계의 모든 부가 자연과 노동에서 나온다는 ‘노동가치설’이다. 노동가치설은 마르크스주의 정치경제학뿐만 아니라 고전경제학의 기본 전제이기도 하다. 그런데 혁신주의자는 노동보다 혁신에서 새로운 부가 창출되고 거기서 이윤이 나온다고 한다. 이는 노동가치설을 정면 부인하는 혁신가치설이라 할 만한 것이다. 노동이 아니라 혁신에서 ‘미래 먹거리’가 나온다는 이 가설을 누가 좋아할까. 당연히 혁신의 주체인 자본가들이다. 그리고 자본가 외에 혁신을 주장하는 또 하나의 무리가 있다. 소위 ‘창조계급’에 속한 사람들이다. 혁신은 지식, 정보, 기술의 혁신과 창의성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그것을 담당하는 과학자, 기술자, 지식인, 문화예술인, 인문학자 등 무형의 가치를 생산하는 집단은 아이디어에서 돈이 나온다는 ‘비물질 자본주의’ 이론 속에서 중요한 가치를 획득한다. 전통적인 노동자계급은 가치의 생산자란 의미가 지워진 채로, 비용절감의 대상이자 경영혁신 대상으로만 남게 된다. <파괴적 혁신>에서 ‘혁신을 위한 혁신’을 비판한 뤽 페리는 현대 예술과 자본을 융합시키는 키워드가 ‘혁신’과 ‘창조’라고 설명한다. 그래서 혁신경영은 동시에 창조경영이라고 불리며, 지식경영, 예술경영이라고 불린다. ‘창조경제’와 ‘혁신경제’도 마찬가지다.

한국 사회에서 혁신경영을 선진적으로 도입한 기업은 삼성이었다. 1992년 이건희 삼성회장은 ‘신(新)경영’을 선언하고 “마누라만 빼고 다 바꿔라”면서 전 그룹적 차원의 혁신을 주문했다. 이후 혁신은 삼성전자의 모토가 되었고, 다른 기업들도 차례로 혁신을 내세웠다. 2006년 이건희는 ‘창조경영’을 다시 모토로 내걸었다. 시장이 열광하는 혁신제품을 내놓으라고 독려했다. 노무현 정부는 대통령 직속 기구인 ‘국가혁신위원회’를 만들어 혁신을 전 국가적 과제로 삼았다. 이건희의 창조경영 철학은 그 아들에게 이어져 박근혜 정권에서 ‘창조경제’를 탄생시켰다. 문재인 정부는 국가혁신의 과업을 ‘4차산업혁명위원회’에 맡겼다.

이러한 상황은 노동자들에게는 가히 ‘혁신의 공격’이라 할 만큼 위협적이다. 창조적 파괴의 과정에서 파괴되는 가장 대표적 존재가 노동계급이기 때문이다. 혁신에는 경영 혁신과 인사관리 노무관리의 기술혁신도 포함된다. 자본이 정리해고제나 근로자파견제 같은 대담한 혁신을 추진할 때마다 파괴되는 것은 노동자의 삶이었다. 비정규직 불안정 노동을 ‘자유노동(free worker)’라고 부르고 일용직 노동자를 ‘긱 워커(gig worker)’라고 부르는 것은 얼마나 예술적인 언어 기술이며 언어의 혁신적 사용인가. 자본과 예술, 자본과 지식, 자본과 기술이 융합하는 이 혁신적 계급 융합 또한 노동계급에 대한 치명적인 위협이다. 노동자에게 혁신은 진보의 대체어도 혁명의 대체어도 될 수 없다. 혁신(革新)의 신(新)은 신자유주의의 신(新)과 완벽한 동의어이기 때문이다.[워커스 3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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