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 퍼거슨, “국가 폭력이 거리의 폭력을 만든다”

[해외] 시위대 폭도 취급은 본질 무시한 것...“폭동은 계급적 행위”

1966년, 마틴 루터 킹은 시카고에서 인종 차별에 반대하는 투쟁을 시작했지만, 그의 노력은 폭력적인 군중과 교활한 시장에 의해 좌절됐다. 루터 킹은 시카고 기득권층에 하찮은 존재로 무시당했고, 전략과 원칙 모두로써의 비폭력은 지지자들 사이에서 약해져만 갔다. 그는 “많은 사람들이 기성 제도에 대한 믿음을 잃었다. 그들은 민주적 과정 그리고 비폭력에 대한 신뢰를 잃었다. 평화적 혁명을 불가능하게 하는 자들이 폭력 혁명을 불가피하게 한다. 우리는 이를 중단시켜야 한다. 나는 도움이 필요하다. 나는 승리 그리고 양보가 필요하다”고 말했었다.

마틴 루터 킹은 그러나 이를 결코 얻어내지 못했다. 이듬해 미국에서는 미니애폴리스에서 탬파까지 전국에 걸쳐 150번의 폭동이 일어났다.

  경찰의 인종주의와 폭력에 맞선 시위 중 맥도날드를 접수한 퍼거슨 청년들 [출처]가디언 화면캡처

경찰이 최근 미국 미주리 주 퍼거슨 세인트루이스 교외에서 무장하지 않은 채 길을 가던 한 흑인 남성을 사살한 후 상황이 고조되는 동안, 많은 이들은 분명히 신뢰를 잃고 있다. 통행금지가 내려진 첫날, 수백 명의 경찰은 폭동진압 장비를 착용하고 최루가스, 연막탄과 고무탄을 사용하며 거리를 휩쓸었고 사람들의 분노를 더욱 자극했다. 18일 오전에는 주지사가 주 방위군도 배치했다.

시위대는 경찰의 행동이 정당하지 않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경찰은 총격, 화염병과 약탈 그리고 중요하게는 경찰 지휘부로 사용하고 있는 장소에 대한 공격 시도 때문에 임무에 나섰던 것이라고 말한다. 지역 치안과 상황 진정을 담당한 로널드 존슨 경찰 당국자는 지난주, 상황에 대해서는 공감을 그리고 해당 지역 경찰에 대해서는 실망감을 나타내면서 사람들의 기대를 모았었다. 그러나 그는 이제 “계획적인 범죄 행위”라고 비난하며 상황은 다시 한번 양극화되고 있다.

존슨은 거리 사람들이 경찰을 도발했다며 “우리는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기 위해 임무를 수행해야 했다”고 말했다. 제인 닉슨 주지사는 주 방위군 배치 계획을 알리며 “고의적이며, 조직화한 폭력행위가 심화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닉슨 주지사는 “오늘, 일부 개인과 외부 세력이 조직적인 폭력 범죄 행위에 나서 희망, 기도와 평화로운 시위를 침해했다”며 “이들은 퍼거슨 주민과 기업을 위험 속으로 밀어 넣었다”고 말했다.

“시위에 대한 폭도화, 문제의 본질과 원인 무시”

그러나 이러한 성명은 문제의 본질과 규모 그리고 원인을 무시하는 것이다. 18세 청소년이 대낮에 거리 한복판을 팔을 올린 채 걸어가다가 총에 맞았을 때, 그리고 주 당국이 살인자를 마을 밖으로 재빨리 내보냈을 때, 이전부터 “계획적인 범죄 행위”의 “위험”에 처했던 이들은 바로 퍼거슨 주민들이었다는 것은 분명했다. 경찰 당국이 마이클 브라운을 쏜 경찰의 이름을 밝힌 바로 그 날, 이 절도 용의자가 총에 맞을 아무런 이유도 없던 상황에서, 그가 담배를 훔쳤다고 주장하는 비디오를 공개한 것보다 더 “의도적”이며 “조직된” 것은 무엇이 있을 수 있었을까(심지어 그러한 혐의가 있었다 한들 언제부터 경찰이 도둑에 대해 즉결 처형을 가할 수 있었단 것인가?).

예비 부검에 따르면, 브라운은 머리에 2발을 포함해 6번의 총상을 입었다. 가족의 요청에 따라 부검한 뉴욕시 전 수석검시관 마이클 바덴 박사는 “전 뉴욕시 경찰 법의학 심사관으로서 말하자면, 난 ‘당신은 그렇게 여러 번 총을 쏴서는 안 됐었다’고 말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일부의 경우, 경찰은 그들이 생명을 ‘보호’해야 한다는 것을 너무 늦게 깨닫는다. 제임스 볼드윈(인종주의, 동성애, 차별을 소재로 주요 작품을 남긴 미국의 작가)은, “법은 나의 시종이지 내 주인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며 더더군다나 고문자 또는 살인자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고 기록한다. 법과 질서를 외치는 사람들은 배치를 찬 사람들이 불법적으로 행동해왔기 때문에 질서가 지켜지지 않는 것이라는 점을 알아야 한다.

나는 3년 전 런던에서의 폭동 후 이렇게 기록했다. “가담자의 범죄성을 주장하는 것은 그들의 동기와 문맥이 무관하다는 설명과 같은 어리석은 말이다. 범죄성을 강조하는 것은 발생한 일의 정치적 성질을 부인하며 이는 사건을 단지 부분적으로만 설명하겠다는 것을 선택이다. 그들은 도둑질이 아닌 약탈을 한 것이며 경찰의 바퀴 덮개를 훔친 것이 아니라 거리를 통제하는 경찰에 도전한 것이다. 일군의 사람들이 법과 사회적 규칙 모두를 강제하는 데 참가한다면, 그들은 정치적인 행위를 하고 있는 것이다.”

충분한 이유에서, 그러한 반란들의 성질은 많은 이들을 불안하게 한다. 그들은 의롭게 분노한 사람들과 정치적 투쟁가들뿐 아니라 기회주의자, 마초 남성들과 스릴을 찾는 사람들을 끌어들인다. 점령에 대한 저항은 자주 낭만적으로 묘사되긴 하지만 결코 멋진 일만은 아니다. 그리고 주민 대개는 흑인이지만 전체 정치권력 구조는 백인에 속한, 그리고 흑인 아이를 살해한 무장한 경찰이 있었던 퍼거슨은 점령 상태였다.

폭동은 또 양극화되고 있다. 일부는 정부군에 잠재적인 지지를 보내고 강제진압을 요구하면서 운동에 대한 지지기반을 좁히고 있다. 사람들은 묻는다. 폭력 시위가 무엇을 이룰 수 있겠는가? 이는 좋은 질문이다. 하지만 이 질문은 또 ‘평화’ 시위로는 무엇을 이룰 수 있었는지에 대해서도 물어야만 타당한 질문이 될 것이다. 진정을 요구하는 사람들은 제 아들, 형제 또는 애인이 그러한 방식으로 총에 맞아 죽을 수 있을 때 어떻게 진정할 수 있는지에 대해 질문해야 할 것이다.

“폭동은 계급적 행위”

사람들은, 우리가 그들이 행한 모든 방법에 무조건 동의할 필요는 없다 하더라도, 점령에 저항할 권리가 있다.

내가 썼던 것처럼, “이 사건을 과장해서는 안 된다. (경찰에 화염병을 던지고 총을 쏘는 것은) 정치적인 교양을 나타내는 상징이 아니다. 하지만 이는 폭동 또한 아니다. 이는 선택권이 거의 없는 이들의 가장 미가공된 도구이다. 정의에 의하면, 그들은 혼란한 상태에 있다. 부유한 사람들은 폭동을 일으키지 않는다. 그들은 영향력을 행사할 도구가 있기 때문이다. 폭동은 계급적 행위다.”

온전한 마음에서라면 폭력적인 시위를 원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아무도 또 다른 마이클 브라운을 원치 않는다. 그리고 이 두 가지, 국가의 폭력과 거리의 폭력은 연결돼 있다. 마틴 루터 킹은 “폭동”에 대해, “아무도 귀 기울이지 않는 이들의 언어”라고 말했다. 거리 사람들은 누군가의 캠페인을 위해 수천 달러를 기부하지 않는다. 그들은 결정이 이뤄지거나 권력자들이 있는 테이블에 앉지 않는다. 하지만 지난 4주 간 경찰에 의해 4명의 흑인 남성이 살해된 이 나라에서, 그들은 말할 게 너무 많지만 그들이 말할 수 있는 곳은 거의 없다. 지금 문제는 그들의 목소리를 누가 듣고 있느냐이다.


[원문]http://www.theguardian.com/commentisfree/2014/aug/18/ferguson-violence-martin-luther-king-michael-brown
[원제]In Ferguson the violence of the state created the violence of the street
[필자]게리 연지(Gary Younge, 가디언 기자)
[번역]정은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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