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르과이 정부는 다자간서비스협정(TiSA, 티사) 체결을 앞두고 지난 5일 협상 탈퇴를 선언했다. 남미 전문 언론 <아메리카21>에 따르면, 이날 우르과이 정부 대변인 릴리안 케히히안 관광장관은 티사 협상에서 탈퇴하겠다는 대통령의 입장을 알리며 공식 철수하겠다고 밝혔다.
▲ 우르과이 전국노동총연맹(PIT-CNT)이 지난 4월 23일 티사 협상 탈퇴를 요구하면서 시위를 벌이고 있다. [출처: MONTECRUZFOTO.ORG] |
한국 정부도 참가하고 있는 티사 협상은 2012년 미국 주도로 시작해 현재까지 3여 년에 걸쳐 진행되고 있다. 애초 교착 상태에 빠진 세계무역기구(WTO) 다자간 무역협정 도하개발아젠다(DDA)의 후속 조치로서 서비스분야의 무역장벽을 제거해 사유화를 촉진한다는 목표를 가지고 시작됐다. 주요 쟁점 분야는 금융, 보건, 교통과 같은 서비스 항목이며, 현재까지 미국을 비롯해 유럽연합, 호주 등 50여 개국이 비밀리에 추진하고 있다. 선진국 중심으로 추진되면서 개발도상국 다수는 참가하지 않고 있다.
우르과이 정부는 이러한 티사 협정이 국가 발전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입장이다.
이미 집권 중도좌파연합 프렌테 암플리오(FA)는 지난달 5일 티사가 우르과이 사회의 전체적인 발전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협상 참여에 대한 가부안을 표결에 부치고 찬성 117표, 반대 22표라는 압도적인 우위로 탈퇴안을 가결시켰다.
우르과이의 티사 협상은 호세 무히카 전 대통령 시절 시작되긴 했다. 하지만 그동안 무히카 전 대통령이 주도한 민중참여운동(MPP)은 티사 협상 참가에 반대 입장을 개진해왔다. 우르과이 전국노동총연맹(PIT-CNT)도 티사 탈퇴를 요구하면서 지난 4월 23일을 비롯해 여러 번에 걸친 파업 시위를 진행했었다.
우르과이 각 부처에서도 반대 의견이 쏟아졌다. 특히 산업광산에너지부는 티사가 국내 통신정책을 위태롭게 할 수 있다고 제기했다. 우르과이는 1992년 제정된 사유화법을 국민투표로 폐지한 뒤 통신사, 전력생산과 배급, 정유와 상수도 전체를 국영회사로 운영하고 있다. 더구나 국영은행은 우르과이 국내 계좌의 4분의 3을, 국영 보험회사는 약 절반을 관리하고 있어서 시장이 개방될 경우 큰 타격을 받을 수 있는 상태다.
일례로 우르과이 국영 통신회사도 사기업의 2배에 달하는 이용자를 보유하고 있는데, 시장이 개방돼 산업이 사유화될 경우 이윤 추구와 불필요한 경쟁 속에서 얼마나 자국의 통신 환경이 발전할 수 있을지는 회의적이라는 태도다. 우르과이에서는 국가가 운영하는 통신 환경 아래 거의 모든 지역과 공공시설의 네트워크가 100% 연결돼 있고, 모든 어린이는 “어린이 1명 당 1개의 랩톱” 정책을 통해 인터넷을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는 상태다.
“티사에 대한 공개적인 토론, 기록적인 일”
우르과이 노동사회안전부는 티사 조항 일부가 국제노동기구(ILO)의 규범에 맞지 않는다는 점을 지적하기도 했다. 농림부는 기존 자유무역협정으로 인한 가축 신원과 감시 제도로 인해 수출가격이 높아졌을 뿐이라며 회의적인 반응을 냈다. 관광은 이미 모두 자유화됐기 때문에 추가적인 손익은 없을 것이라는 의견도 나왔다.
외무부나 경제부처는 티사에 대해 긍정적인 평가를 내놓지만 크게 주목되지 않았다. 티사에 참가할 경우 자유무역에 관한 타국의 경험을 모을 수 있다거나 국내 소프트웨어산업에 이득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르과이에서 소프트웨어산업이 국가소득에 기여하는 비중은 2%일 뿐이다.
표결 뒤 사회주의자 로베르토 치아싸로 FA 의원은 “티사가 공개적이고 전체적으로 토론된 것은 (세계에서) 첫 번째 사례”라며 “매우 기록적인 일”이라고 밝혔다.
우르과이는 1994년 세계무역기구(WTO) 출범의 도화선이 된 우르과이라운드(UR)로도 유명하다. 우르과이라운드는 2차 대전 이후 40년 동안 국제무역질서를 이끌었던 ‘관세 및 무역에 관한 일반협정’(GATT, 가트) 체제 내에서 수행된 8번째 다자간협정으로 1986년 우르과이 푼타델에스테에서 시작해 1993년 12월 타결됐다. 우루과이라운드 타결로 한국은 쇠고기, 돼지고기, 고추 등 농축산물 14종의 전면 수입 자유화를 결정했다. 그 뒤 WTO는 2001년 다자간협상을 위해 도하개발아젠다를 시작했으나 2005년 공식적인 데드라인 내의 합의에 실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