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정 VS 불공정’이라는 틀에 갇힌 대한민국

[워커스 미디어택]한국사회에서 가장 중시할 가치는 ‘공정’인가

“1~2년 단위로 집을 옮겨야 한다면 한 발 뒤로”
“4대 보험을 못 받는다면 한 발 뒤로”
“가족 때문에 친구들에게 놀림을 당했다면 한 발 뒤로”
“결혼 혹은 출산으로 경력 단절이 두렵다면 한 발 뒤로”
“공공장소에서 조롱이나 시선을 받지 않고 애인과 스킨십 할 수 있다면 한 발 앞으로”
“근처 어떤 화장실이든 자유롭게 쓸 수 있다면 한 발 앞으로”

같은 선상에서 손을 맞잡고 있는 21명의 청년들. 위와 같은 질문 56개가 주어졌다. ‘나이 때문에 무시당한 적이 있다면’, ‘내 식생활을 구구절절 설명한 적이 있다면’, ‘자신의 성별·장애·신체 등이 미디어에서 희화화된 적이 있다면’, ‘나의 가족 상태를 사람들에게 종종 설명해야 한다면’, ‘공과금을 연체해본 적이 있다면’, ‘휴학하고 등록금을 벌어야 한다면’ 등의 질문에 따라 누군가는 앞으로 나왔다. 그리고 또 누군가는 뒤로 이동했다. <스브스뉴스>의 ‘당신은 [어디에 선] 청년인가요?’라는 실험내용이다.


한국 사회를 뒤덮고 있는 ‘공정’의 가치

한국사회에 언제부턴가 ‘공정-불공정’이라는 말들이 홍수처럼 쏟아지고 있다. 최근 조국 법무부장관 딸의 부정입학 논란도 마찬가지다. 고려대 촛불집회 집행부는 <연합뉴스> 인터뷰에서 “조국 장관 임명이라는 작은 구멍은 결국 우리 사회 가치에 혼란을 가져오고, 공정·원칙·정의라는 둑을 무너뜨릴 것”이라는 입장을 밝혔다.

공정성 논란, 생각해보면 참으로 많았다. 2018 평창동계 올림픽 당시에도 여자 아이스하키 남북 단일팀 구성을 문제로 그 논쟁이 붙었다. 정부는 남북관계 개선을 전 세계에 드러내고자 단일팀 구성을 제안했다. 그것이 평화와 화합이라는 올림픽 정신에 부합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곧바로 ‘공정하지 못하다’는 평들이 쏟아졌다. 스포츠라고 하는 것은 개인의 신체적 능력으로만 평가받아야 하는데, 그 원칙에서 벗어난다는 지적이었다.

현재 한국사회에서 드러나고 있는 여러 갈등에도 ‘공정’이라는 원칙이 자주 언급된다. 학교비정규직(급식조리 및 방과후 교실, 도서관 사서 등) 노동자들이 지난 7월 총파업에 나설 때도 그랬다. 노동자들은 교육 공무직의 법제화를 통한 정규직화와 임금인상(9급 공무원의 80% 수준 및 정규직과 동일한 근속 등 각종 수당) 등을 요구했다. 그러자 곧바로 ‘특혜’라는 말이 나왔다. 공무원을 준비하는 많은 공시생들이 밤낮없이 공부하고 있는데 그에 비춰보면 ‘공정한 룰이 아니다’라는 얘기였다. 공직에 민간 전문가들을 경력 채용하는 제도에 대해서도 같은 문제제기가 등장하곤 한다. 거칠게 이야기하면 “공무원되려면 너네도 시험 봐서 통과하라”는 주장이었다.

‘입시’에 있어서도 비슷한 구조의 논쟁이 벌어진다. 19대 대통령선거에서 학부모들의 요구는 수시모집 축소였다. 최근에는 ‘학생부종합전형 폐지’ 요구가 들끓고 있다. 숙명여고 교무부장이 쌍둥이 자녀에게 시험지와 답안지를 유출한 의혹이 제기되면서 그 같은 목소리는 더욱 커졌다. 입시와 관련해서는 세월호 참사를 겪은 단원고 학생들의 특례입학을 둘러싼 논쟁도 있었다. 여기에 농어촌특별전형도 폐지하라는 말까지 나오고 있다.

그 뿐인가. 때만 되면 등장하는 군가산점제(헌재의 헌법불합치 결정 이후에도) 요구. 로스쿨 제도 폐지 요구, 5·18유공자들에게 쏟아지는 특혜라는 공세들…. 그 중심에 “공정하지 못하다”는 비판들이 놓여있다.

누구를 위한 ‘공정’인가

이렇듯 ‘공정’이라는 가치의 중요성은 문재인 정부가 키운 측면도 크다. “기회는 평등할 것입니다. 과정은 공정할 것입니다. 결과는 정의로울 것입니다”라는 문재인 대통령이 취임 연설을 기억할 것이다. 그 말에 국민들은 열광했다. 촛불정부를 자처한 정부의 취임선서에서 나온 가장 임팩트 있는 문구이기도 했다.

그러나 물음표가 생겼다. 공정이란 무엇인가. 공정함과 불공정을 가르는 기준은 무엇이며 누구에 의해 이뤄지는가. 입시에서 수능 점수를 100% 반영하는 것이 공정인가. 채용 시 ‘블라인드 면접’을 보는 게 공정한 룰인가. 그렇다면 출신학교 및 지역에 대한 차별을 없애기 위해 진행된 ‘블라인드’ 채용 결과 오히려 스카이(서울·고려·연세대) 출신 학생들의 합격률이 높아졌다는 기사를 어떻게 봐야할 것인가. 우리는 이미 알고 있지 않은가. 스카이 입학이 강남 출신에 편중돼 있음을 말이다. 그것이 진정한 ‘공정’일까. 도무지 생각해도 답이 나오지 않는 물음들이다.

조국 장관의 사퇴를 촉구하며 촛불을 드는 사람들을 비판하기 위함이 아니다. 학생부종합전형에 문제가 없다고 이야기하는 것도 아니다. 학교비정규직의 정규직화를 반대하는 이들의 심정을 모르는 바도 아니다. 다만, 다양한 가치들 중에 한국사회에서 현재 필요한 게 ‘공정’일까에 대한 질문을 던져보자는 거다. ‘시험’을 통과한 자가 공무원으로서의 역할을 잘 수행할 것인지 생각해보자는 얘기다. 새로운 시대를 열어야 한다고 모였던 광장의 촛불들의 요구는 ‘공정’이었나. 혹여, 우리가 스스로 촛불의 염원을 ‘공정’의 가치로만 가둔 것은 아닐지 의심해보자는 말이다.

그렇다면, 끔찍했던 한 장면이 떠오를 수밖에 없다. 문재인 대통령이 후보시절 ‘동성애’와 관련해 “반대한다”고 발언한 후 포괄적 차별금지법 제정 시위가 벌어졌을 때 나왔던 말. 마치 떼창을 부르듯 지지자들은 “나중에”라고 외쳤다. 그 ‘나중’은 언제였던가. 문재인 정부 출범 2년이 지났지만 그 ‘나중’은 아직 오지 않은 것인가. 떼창을 불렀던 이들은 뭐라 답할 수 있을까. 그런데, 최근 더욱 암담한 사건이 벌어졌다. 국가인권위원회 최영애 위원장이 총선 때까지 차별금지법에 대해서는 거론하지 말라는 입장이었다는 보도가 나온 것이다.

촛불들의 요구를 ‘공정의 가치’로만 묶을 수 있는 것인가. 200만 개의 촛불이 있었듯 그들의 요구 또한 200만 개였을 것이다. 그 다양한 요구를 모은다고 한다면 그 가치는 ‘공정’이 아니라 ‘다양성’은 아닐까.

“노력한 사람에게 합당한 보상이 돌아가야 한다’는 말이 틀렸다고 말하는 게 아니다. <스브스뉴스>의 실험에서도 보여주듯 출발선 자체가 다른데 단순히 ‘개인들의 능력’으로만 평가하지 말자는 얘기다. 당신은 어디에 서 있나. 당신의 앞에는 누가 있고 그 뒤에는 누가 서 있는가. 누군가의 앞에 서 있는 것이 기쁜 일이기만 할까? 해당 실험 결과, 맨 앞에 서 있던 이는 이렇게 말했다. “막상 맨 앞에 있으니까 오히려 속이 더 답답해진다. 그런데 제 등을 보고 계신 분들은 얼마나 답답할까요….” [워커스 59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