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장과 국가 권력이 합작한 신종 검열, 인터넷내용등급제

현대의 감시 기술은 강제적이고 억압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진다기 보다는 감시에 대한 자발적인 참여(!)를 요구한다는 점에서 교묘하다. 우리의 일상이 이미 그렇다. 우리의 말과 행동은 은행, 거리, 직장에서 익명의 CCTV들에 의해 녹화되고 스마트카드에 기록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에 반대하기 보다는 - 불쾌하기는 해도 - 범죄를 대비한다는 명분에 수긍하고 자발적으로 감시에 협조한다. 작업장 감시도 마찬가지다.

노동 통제의 본질은 변한 점이 없지만 최근의 작업장 감시는 자율이라는 이름을 쓴다. 이는 최근의 노동 조직이 유연화하고 노동 과정 역시 '책임자율성' 등의 이름으로 유연화하고 있는 것과 관련이 깊다. 노동의 유연화는 성과가 높은 20%에게 연봉 1억을 주겠다고 호언하지만 80%에게는 가차없는 정리해고 통지서를 보낸다. 살아 남은 이들은 다시 정규직과 비정규직으로 철저하게 갈린다. 여기서 유연적 조직과 책임자율성을 강조하는 최근의 노동 조직은 관료제적 통제보다 노동자의 자유재량을 늘인 듯이 보이지만 이들의 자율은 극단적인 생존 조건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비인간적인 경쟁 체제에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데에 한정된다. 무엇보다, 조직이 유연해졌다고 하여 통제가 유연해진 것은 아니다. 오히려 더욱 철두철미한 통제가 이루어진다. 여기에는 기술의 역할이 크다. 노동자 개개인의 성과가 초단위로 기록되며 세밀하고 정확하게 관리되고 있다. 통제의 빈곳은 사라졌다.

현대 기술의 편집증은 조그마한 범죄적 행위도 놓치지 않으며 일체의 숨을 곳을 박탈한다. 그렇지만 이런 감시가 억압적으로 강제되는 것이 아니다. 철권 통치는 기술로 인해 부드러운 얼굴로 바뀌었다. 그러나 이 "벨벳 장갑은 철권을 숨길 수 있다"는 점에서 더욱 무섭다. 숨겨진 철권은 주체가 규율을 내면화하도록 하면서 복종을 끌어낸다. 신자유주의적 권력의 속성이 규제를 완화하면서 통제의 빈 부분을 '책임자율성'이나 '성과급'과 같은 심리적인 통제와 자발적인 참여로 메꾸고 있다고 한다면 현대 기술은 그 천생연분인 것이다.

이런 사실들은 인터넷내용등급제라는 신종 검열이 등장한 맥락과 정확히 일치한다.

사적 검열의 등장, 통신질서확립법

1997년 미 연방대법원은 인터넷에서 유해하고 위험한 내용을 형사처벌한다는 내용의 통신품위법(Communications Decency Act)에 대하여 위헌 판결을 내렸다. 유해하고 위험하다는 개념이 모호하여 표현의 자유를 침해한다는 것이다. 위헌 판결 이후 미 의회는 다시, 내용 규제를 정당화시키는 고전적 패러다임이라고 할 수 있는 '청소년 보호'를 정면에 내세워 제2의 통신품위법이라 불리우는 '어린이 온라인 보호법'을 제정한다. 골자는 청소년들에게 유해한 내용을 상업적으로 제공하는 웹사이트 운영자를 형사처벌할 수 있도록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에 대하여 펜실바니아 연방지방법원은 이 법이 말하고 있는 '어린이에게 위험하다'는 개념의 모호성이 표현의 자유를 침해할 가능성이 있다고 하여 이 법을 집행 정지시킨다. 여기서 주목할 부분은 '사적 검열(privatized censorship)' 논란이다.

통신품위법과 어린이 온라인 보호법에서 특기할만한 점은 정부가 직접 규제에 나서기 보다는 무거운 형사처벌을 피하기 위해 사업자가 자체 검열을 하도록 유도하고 있다는 것이다. 대법원은 사업자의 자체 검열은 표현의 자유가 위축시키며 아무리 짧은 기간동안 표현의 자유가 상실되더라도 이것은 곧 '회복 불가능의 피해'가 된다는 논리를 들어 위헌임을 인정한 것이다.

지금 인터넷내용등급제와 통신질서확립법(현 '정보통신망이용촉진및정보보호등에관한법률', 애초 정부의 법률개정안 제목이 '개인정보보호및건전한정보통신질서확립등에관한법률'이었던 데서 유래한 별명)을 둘러싸고 우리 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논란에서도 주목할 부분은 자율과 사적 검열에 대한 것이다. 특히 이 정부는 인터넷내용등급제라는 기술적 방식이 '자율적'인 방식이며 규제의 중립성을 보장할 것이라고 강조해오고 있다.

그러나 이미 '자율적 규제'의 허구는 지금까지 정부가 인터넷을 규제해온 방식에서 잘 드러난다. 전기통신사업법 제53조에 의한 정보통신윤리위원회의 '시정 권고' 자체가 '자율'의 외피를 입고 이루어져 온 것이다. 정부의 주장대로 정보통신윤리위원회의 '시정권고'에는 형사처벌이 없다. 정보통신윤리위원회의 위원들은 또한 모두 민간인이며 정부와 직접적인 관련이 없다. 형식상 자율이다. 그러나 어째서 정보통신윤리위원회의 시정권고는 그토록 막강한 효력이 발휘되는 것인가? 이것이 바로 전기통신사업법의 묘미이다. 전기통신사업법에 의하면 정보통신윤리위원회의 시정권고 자체에는 형사처벌이 없지만, 정보통신윤리위원회의 시정권고를 거절했을 경우 정보통신윤리위원회는 이 사업자의 서비스를 취급 또는 거부하도록 정보통신부 장관에게 '건의할 수 있다'. 이 장관의 취급거부명령에 따르지 않을 경우에는 2년 이하의 징역 또는 2천만원 이하의 벌금이라는 형사처벌을 받게 된다. 정보통신윤리위원회의 위원들은 모두 민간인이지만 장관에 의해 위촉되며 위원장은 장관에 의해 승인받아야 한다.

이러한 자율적 규제의 등장은 뉴미디어의 특성상 어쩌면 필연적이다. 특히 인터넷은 공권력이 과거와 같은 사전 검열을 할 수 없는 새롭고도 강력한 미디어 환경을 등장시켰다. 그래서 그들은 '자율적 규제'를 발명해 냈다. 여기서 자율은 사적인 방식, 그리고 시장의 방식을 의미한다. 그러나 자율적 규제는 자율적이지만 '검열'이다. 사업자의 뒤에 형사 책임 - 철권을 숨긴 정부가 숨어 있다. 그래서 이것은 과거보다 더욱 교묘하고 강력한 검열이다.

정부는 통신질서확립법을 통해 이러한 경향을 더욱 강화했다. 정부가 처음 발표했던 통신질서확립법안에는 특히 이런 점이 잘 드러나 있다. '사업자 인지책임'이 이를테면 그런 것이다. 이 법안에서는 정보통신서비스제공자가 "내용을 인지하고, 정보의 제공 또는 유통을 방지하는 것이 기술적으로 가능하며, 그것이 기대 가능한 경우"(당시 제 36조)에 형사 책임을 지도록 하고 있다. 그러나 인터넷 서비스의 특성상 정보 제공자이건 서버제공자이건 회선제공자이건 간에 과연 '기술적으로 내용 차단이 가능하고, 그것이 기대 가능하다'는 조건에서 벗어날 수 있는 사업자가 존재할 수 있을까.

결국 이것은 모든 사업자가 게시판에서, 서버에서, 회선에서 제공되는 내용에 대한 형사 책임을 지라는 말이다. 특히 이 법안에서는 정보의 불법성 여부가 사법기관의 재판에 의해서가 아니라 행정기관인 정보통신윤리위원회가 '불법 정보라고 판단할 수 있는 상당한 이유가 있는 경우'에 일방적 고지에 의해 결정되는 구조를 보장하고 있다.

이 교묘한 조항이 초래할 결과는 이렇다. 불법 내용물을 사후에 '인지'한 사업자는 이미 범죄자가 되어 버리기 때문에 사전에라도 그런 통지를 받지 않도록 조심할 수밖에 없으며, 그래서 자체 검열을 수시로 하더라도 어쩌다 잘못해서 통보를 받게 되면 형사책임을 지기 때문에 결국 사업자는 불안으로부터 자유롭기 위해서라도 정보통신윤리위원회의 심의 기준을 철저히 따를 수밖에 없고, 이용자에 대해서는 물론이고 연동되는 다른 사업자들에게도 과도한 상호내용통제를 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러한 과도한 규제가 결과적으로 불법 정보가 아닌 정당한 정보까지도 광범위하게 걸러낼 수 있는 결과를 초래할 것은 명약관화하다. 결국 이 법은 이용자를 제외한 모든 서비스 관련 사업자를 행정기관의 선택에 따라 쉽게 형사범죄자로 만들 수 있는 위험천만한 구조를 통해 사전에 사적 검열 기관의 역할을 수행하도록 뒤에서 강요하는 것이라고 밖에는 볼 수 없다. 이는 헌법에 보장된 표현의 자유를 위축시키는 것일 뿐 아니라 죄형법정주의에도 위배되는 것이었다. 그래서 이 법은 처음부터 사업자를 규제하기 위한 목적에서 만들어졌다는 비판을 받아 왔다. (방석호, 2000)

사회단체들과 네티즌들의 격렬한 반대 활동 끝에 결국 이 법안은 대폭 축소되어 지난해말 국회를 통과했지만 이러한 경향은 잔존해 있다. 법 제44조(정보의삭제요청 등)가 그런 것이다. 이 법에서는 어떤 이용자가 법률상 이익이 침해되었다고 주장하는 경우 사업자는 이에 삭제 등 필요한 조치를 즉각 취하도록 하고 그렇지 않을 경우 민사상의 손해배상 책임을 지도록 보장하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언급하고 있는 사업자의 의무는 사법기관의 판단을 갈음하고 있을뿐더러 형법 등 다른 법률의 논리도 파괴하고 있다. 예를 들어 '명예훼손'의 경우, 형법에서 인정되고 있는 공익성, 진실성에 입각한 위법성조각사유가 인정되지 않는 것이다. 이는 결국 사업자의 규제를 통한 방식으로 결국 정부의 행정 규제 권한을 확대하는 것이다. (정영화, 2001)

인터넷내용등급제가 이루어지는 방식도 이러한 것이다. 법에는 '청소년들에게 유해하지 않은 홈페이지만 유통하라'는 노골적인 문구는 없으며 단지 '청소년에게 유해한 홈페이지는 픽스(PICS) 등급을 달것'만을 요구하고 있다. 다만 지난 9월부터 음반·비디오물및게임물등에관한법률에 따라 전국의 모든 피씨방에 음란물차단소프트웨어를 설치하도록 의무화되었고, 청소년보호법에 의해 청소년이 출입하는 장소인 학교, 도서관에는 청소년에게 유해한 홈페이지로부터 청소년의 접근을 차단하기 위한 차단 소프트웨어가 설치되어야 한다. 문제는 이 차단 소프트웨어가, 정부 말에 따르면, '민간의 자율적인 선택'에 의해 픽스라는 특정한 방식을 주로 따를 것이라는 데 있다. 그리고 이 차단 소프트웨어들은 등급이 표시되지 않는 홈페이지를 차단하는 것을 기본값(default)으로 하고 있다. 물론 이 기본값은, 정부 설명에 따르면, 선택사항(option)이다.

실제로 일어나게 될 일은 이렇다. 나의, 혹은 우리 단체의 홈페이지가 '청소년에게 유해'한 것으로 판정되어 피씨방, 학교, 도서관에서 혹시라도 차단되는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홈페이지 제작자는 자기 검열을 해야만 한다. 홈페이지가 성적으로, 언어적으로, 정치적으로 가지고 있는 의미에 대해 권력이 가지고 있는 기준과 늘 비교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청소년에게 유해하지 않음'이라는 등급을 달고 복창해야 한다. 사고의 틀이 이렇게 제한되는 것이야 말로 규율 권력이 힘을 발휘하는 지점이며 표현의 자유를 위축시키는 억압이 발생하는 시점이다. 바야흐로 '자율'이라는 명분으로 기술적 수단에 의하여 정부의 의도가 '사실상' 관철되는, 새로운 검열 방식이 등장한 것이다.

정부의 통제 의도는 사업자를 통해 충실히 이행될 것이다. 이런 상황을 생각해 보자. 유명 커뮤니티 포탈 사이트인 다음세이(가칭)에서는 개별 웹페이지 뿐 아니라 사이트 전체에 대하여 '청소년에게 유해하지 않음'이라는 PICS 부호를 달았다. 정보통신윤리위원회의 등급 기준을 충실히 따라 행여 일부 PC방이나 학교, 도서관에서 차단되는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그 뿐 아니라 이 등급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사이트 내용 중 일부라도 정보통신윤리위원회로부터 청소년에게 유해하다는 등급을 받지 않기 위해서 자체적인 규제기준을 강화하고 조금이라도 문제의 소지가 있는 게시물은 삭제하고 논란의 여지가 있을 수 있는 동아리는 모두 폐쇄하여 인터넷 '청정구역'을 유지하고 있다. 얼마전 피임과 낙태에 대한 자료가 올라오던 산부인과 간호사 모임을 폐쇄한 이후 네티즌들로부터 항의가 빗발쳤지만 다른 커뮤니티 포탈 사이트들도 비슷한 정책을 취하는 추세이기 때문에 이를 무시하기로 하였다. 시장을 지배하면 지배는 다 이루어진다.

나가며

인터넷내용등급제를 단적으로 '검열'이라고 부르는 데에는 묘한 저항들이 존재한다. 특히 '자율적'인 기술의 명분이 그러하다. 그러나 인터넷내용등급제는 분명 기술 검열이자 신종 검열이다. 이제 도전받고 있는 것은 '검열'은 곧 '사전 검열'이라는 견고한 해석이다. 국경도 없는 인터넷의 수많은 컨텐츠를 '사전에' 빠짐없이 규제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래서 새로운 검열 방식이 등장했다. 따라서 "인터넷에서 무엇이 검열인가"의 해석도 달라져야 한다. 사전/사후의 시점보다는 그 '효과적' 측면을 주목해야 한다.(황성기, 2000) 지금 인터넷의 검열이 가고 있는 방향은 인터넷만큼 진보한 '검열'의 새로운 패러다임이 등장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1997년 미국의 통신품위법의 위헌 판결이 나기 직전에 법학자 로렌스 레식은 [인프라의 폭정]이라는 제목의 글에서 "통신품위법은 나쁘다. 그러나 [통신품위법 이후에 도입될 예정인] 픽스는 더 나쁘다"고 주장했다. 법이 아닌 소프트웨어 코드가 검열을 행하는 것이 중립적이라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지만 그들은 기술이 중립적이 아니라는 것을 모르거나 간과하고 있다. 오히려 픽스는 더욱 손쉬운 검열방법이다. 더욱 큰 문제는, 이 보이지 않는 기술적 검열이 웹 인프라의 일부로 작동하면서 개인이용자, 프록시서버, 인터넷서비스제공자(ISP), 그리고 국가적 수준에 이르기까지 인터넷을 이용하는 방식과 내용을 생산하는 방식, 궁극적으로는 넷의 구조 자체에까지 변화를 가져올 것이라는 점이다. 사이버 공간에서는 때로 법보다도 소프트웨어 코드가 자유의 실질적인 한도를 정한다. 레식은 이런 환경이 과거 '보이는' 국가의 검열과 씨름해 왔던 활동가들을 당황시키고 있다고 지적한다. 그러나 "법처럼, 기술도 중립적이지 않다"는 레식의 말이 옳다. 신자유주의적인 시장과 국가 권력은 자율이라는 이름 하에 결탁했다. 신자유주의는 검열조차 '자율'의 이름이라는 이름 속에 철권을 숨기고 민영화시켰다.

물론 지금 인터넷에는 여성에 대한 사이버 성폭력이나 청소년에게 유해한 내용이 존재한다. 그러나 이 내용들은 우리 사회에 여성과 청소년과 같은 사회적 약자에 대한 폭력이 많은 것과 같은 이유에서 존재한다. 즉 그것은 현실 사회의 문제이며 인터넷이나 매체의 문제는 아닌 것이다. 마찬가지로, 인터넷에서 이러 한 내용들을 규제하지 못하는 이유는 현실 사회의 법과 제도가 여성과 청소년과 같은 사회적 약자를 보호하기에 충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여성에 대한 성폭력을 신체접촉과 성기삽입을 중심으로, 그리고 '정조에 대한 죄'를 중심으로 해석할 때에는 실제 신체접촉이 발생하지 않는 사이버 공간에서 여성의 성적 자율성을 침해하는 사이버 성폭력을 규제하는 것이 힘들다.

또한 청소년들에 대한 성착취와 노동착취 문제가 날로 심각해지는 상황에서, 청소년 보호가 '애들이 보지 말아야 할 것'을 지정해주는 것으로 그치면 된다는 매체 규제 위주의 발상은 청소년을 보호하는 것이 아니라 표현의 자유를 침해할 뿐이다. 청소년에게 신체가 노출되거나 성행위가 담긴 표현물을 보여주지 않는 것으로 날이 갈수록 심각해지는 어린 청소년들의 낙태와 미혼모 양산의 문제가 해결될 것인가? 19세 미만까지의 원조교제는 엄단하는 시늉을 하면서 20세 이후의 매매춘은 솜방망이로 처벌하는 현행 법과 제도 하에서 인터넷만 규제한다고 과연 원조교제가 사라질 것인가? 의무교육 이후 방치된 청소년과 공교육이 책임지지 못한 자퇴, 가출 청소년들이 일찌기 노동시장에 뛰어들고 있는데 사회성이 있는 서적들을 청소년에게 유해하다고 하여 접촉을 금지하는 것이 청소년을 보호하는 방법인가? 문제 해결의 방법은 인터넷의 규제에 있는 것이 아니다. 현실 사회의 법과 제도를 정말로 엄격하게 사회적 약자의 입장에 맞추어 검토하고 개선하는 것이 필요하다.


<참고 자료>
방석호(2000), "'통신질서확립법안'에 대한 비판적 검토", {정보통신망이용촉진등에관한법률 개정에 대한 시민공청회}(2000.9.5 / YMCA 등 공동주최).
정영화(2001), "표현의 자유의 규제와 민주주의에 대한 도전", 토론회 {김대중 정권 하에서 과연 '표현의 자유'는 존재하는가?}(2001.7.20 / 민족자주. 민주주의. 민중생존권쟁취 전국민중연대 주최).
황성기(2000), "사이버스페이스와 불온통신규제", {헌법학연구}(2000.11 / 한국헌법학회 제6권제3호)
Lawrence Lessig(1997), "Tyranny in the Infrastructure", WIRED 5.07(Jul 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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