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헨티나 민중항쟁의 주역, ‘실업자운동[MTD]’

아르헨티나는 90년대 중반까지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모범국가로 미국에 의해 칭송받았다. 신자유주의 교과서대로 거의 모든 공기업과 국가기간산업을 해외자본에 매각하고 상시적인 대량해고로 엄청난 실업자를 만들어 냈다.

신자유주의 무너뜨린 민중항쟁의 주역은 실업자 운동

그러나 아르헨티나에 돌아온 것은 완전한 경제 파탄이었다. 특히 노동자 민중의 삶은 극단적으로 피폐해졌고, 더 이상 참을 수 없게 된 민중들의 분노는 마침내 거대한 항쟁으로 폭발했다. 2001년 말부터 2002년 초에 걸쳐 전개된 아르헨티나 민중들의 폭발적인 항쟁은 1주일 사이에 대통령을 네 명이나 갈아 치우며, 신자유주의 정책을 포기하겠다는 선언을 받아냈다. <본지 41호 6면 참조>
아직 아르헨티나의 상황이 개선되고 있다는 소식은 없다. 이미 파탄지경에 이른 경제는 금융공황의 양상마저 나타난다니 수습조차 쉽지 않은 듯하다. 그러나 거대한 민중항쟁으로 신자유주의 정책기조가 더 이상 지속될 수 없게 된 만큼, 시간이 지나면 새로운 소식들이 들려올 것이다.
그런데 10년 이상 지속되어 온 신자유주의 정책기조를 무너뜨린 아르헨티나 민중항쟁의 주역은 누구였을까? 놀랍게도 그것은 (노동조합운동이 아니라) 실업자 운동이었다.

아르헨티나 실업자 운동의 배경

민영화된 공공부문을 중심으로 엄청난 대량해고가 계속됨에 따라 아르헨티나에서는 지역에 따라 30~80%에 달하는 노동력이 실업 혹은 불완전고용 상태에 빠졌다.
수도인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는 16~18% 수준이던 공식 실업률 수치가 불과 2년만에 30% 수준으로 뛰었다.
노동계급 다수가 살고 있는 도시 인근지역에서도 실업률이 30~50% 정도까지 뛰었으며, 어디에서나 압도적 다수의 가정들이 최소빈곤선 이하의 생활로 전락했다.
대다수 임금 노동자들 또한 임시직 등 언제 쫓겨날지 모르는 고용상태에 놓였다.
5년 동안 도로점거로 일자리 쟁취하며 조직력 성장
개별화되기 쉬운 실업자들을 강력한 투쟁조직으로 묶어세운다는 것은 어느 나라에서나 대단히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아르헨티나 실업자운동[MTD]’은 이것을 성공적으로 해냈다.

97년 무렵부터 활성화되기 시작한 ‘실업자운동’은 실업자들을 조직하여 정부를 상대로 격렬한 투쟁을 벌여 최소 생존권과 공공의 일자리를 확대해 왔다. 효과적인 투쟁방식으로 투쟁에 참여한 실업자들에게 가시적인 성과를 안겨주는 데 성공하면서 급속하게 확대된 ‘실업자운동’은 2001년에 이르러 마침내 나라 전체로 확산되었다.
‘실업자운동’의 투쟁방식은 사실 간단했다.
고속도로와 같은 주요 간선도로를 집단적으로 점거하여 물품수송과 교통을 마비시킨 후 현장으로 정부 관계자들을 불러내서 자신들의 요구사항을 놓고 협상을 벌이는 식이었다.
그러나 이런 투쟁방식이 힘을 발휘할 수 있기까지 실업자운동은 많은 희생을 치러야 했다. 경찰이 도로점거시위를 강제해산하려고 하면 인근 지역의 실업자들까지 총동원하여 격렬하게 저항했다. 이런 투쟁 속에서 수없는 사람들이 체포되고 2001년에 아르헨티나 북부지방에서만 5명이 사망하는 등 목숨까지 잃는 실업자들도 속출했다.
하지만 경찰력으로는 도로점거시위를 굴복시킬 수 없다는 것이 분명해지자, 결국 정부 관계자들은 협상에 임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시위 현장에서 직접 협상하고 집단적으로 결정

‘실업자운동’의 각 지역조직들은 모든 회원들이 참여하는 집단회의를 중심으로 운영된다. 정책뿐만 아니라 요구안과 도로점거시위 조직 또한 이 회의를 통해 결정된다. 어떤 고속도로나 주요도로가 선택되면, 회의는 곧바로 실업자 밀집 거주지에서 지지자들 조직에 나선다.
도로점거시위가 시작되면 수백 어떨 때는 수천 명에 이르는 여성, 남성, 아이들이 도로점거에 참여하며 텐트와 간단한 가재도구들을 도로 주변에 세워놓는다. 만일 경찰이 협박하면, 인근 빈민촌에서 추가로 수백 명이 쏟아져 나온다. 만일 정부가 협상하기로 결정을 했다면 시위자들은 “협상은 반드시 도로점거에 나선 모든 시위자들과 함께 해야 한다”고 요구하며, 결정 또한 집단회의를 통해 시위 현장에서 내린다.
경험을 통해, 실업자들은 대표자 몇 명을 보내 정부 관리들과 협상하도록 하는 방식을 신뢰하지 않게 되었다. 과거에 대표자 몇몇이 협상하러 시내에 가게 되면 큰 방에 정부나 노동조합 관료와 함께 앉아 있다가 매수되기 일쑤였다. 그들은 평회원들을 팔아먹고 터무니없는 협상으로 끝내버렸다. 심지어 전투적인 지도자들도 다르지 않았다. 그래서 실업자들은 시위 현장에서 직접 협상하고 시위에 나선 모든 실업자들이 직접 결정하는 방식을 택하게 된 것이다.

요구조건(보통 국가가 지원하는 임시직 일자리 확보)이 관철되면, 일자리 배분은 집단적인 토론에 의해 가족사정이 안좋거나 점거시위에서 얼마나 활동적인 역할을 했느냐 등을 따져 우선순위를 매긴 다음 이루어지게 된다. 보통 시위에 나선 실업자 수보다 적은 일자리가 확보되기 때문에, 일자리는 순번을 정해 순환적으로 분배된다.
흥미로운 점은 실업자 가족 가운데 여성들이 더욱 전투적이며 적극적으로 실업자운동에 참여하고 있거나, 남편들에게 시위에 나가 일자리를 얻어오라고 독촉한다는 점이다. 남편들이 오랜 실업으로 방황 상태에 빠지자 여성들이 가족 생계를 책임지게 된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전국적 조직화에 따라 직접적인 요구를 넘어 ‘신자유주의 철폐’ 요구로 발전

강력한 조직력과 투쟁력을 확보하면서, ‘실업자운동’은 △식량원조품의 분배 △수백명에 달하는 구속된 실업운동투사들의 석방 △식수·포장도로·공공의료기구들에 대한 공공투자 유치 △임시직 일거리를 넘어서서 생활임금을 받을 수 있는 안정된 고용 등 보다 높은 수준의 요구들을 제기하게 되었다.
제네랄 모스코니에서 ‘실업자운동’은 식량과 고용을 늘리기 위해 300개가 넘는 계획을 공식적으로 발표했는데 이중 실업자 밀집지역에 빵 공장, 유기농법, 식수정화처리시설, 응급의료기관 설치 등 몇가지는 성공적으로 수행되기도 했다.
노동계급이 밀집해 사는 몇몇 도시인근지역에서는 ‘실업자운동’이 반(半)독립지역을 만들기도 했는데, 이들이 가진 동원능력이 지방관료들이 가진 능력을 무력화시키거나 최소한 능가했기 때문이다.

2001년 9월 초, 라플라타에서 열린 ‘실업자운동’의 전국대표자회의는 신자유주의 정책 철폐를 핵심으로 하는 요구들을 채택했고, 9월 중으로 두차례 전국적인 도로점거시위를 펼쳤다. 라플라타 회의가 채택한 요구들은 다음과 같았다.
△구조조정 정책과 재정적자 제로정책 분쇄 △고용노동자에 대한 해고 전면 금지 △위법적이고 부당한 해외 부채에 대한 상환 거부 △연금 기금에 대한 공적 감시통제 확보 △은행과 전략산업에 대한 재국유화 △소농의 부채 탕감 및 그들이 생산한 농작물의 적절한 가격 보장 △빈곤만을 양산하는 정권 퇴진.

신자유주의에 애매한 태도를 취해왔던 아르헨티나의 노동조합들은 델라루아 집권 2년 동안 형식적으로 9차례의 총파업을 벌였지만 아무것도 변화시키지 못했다.
그러나 격렬한 기세로 성장한 ‘실업자운동’은 결국 아르헨티나 민중항쟁을 이끌어 냈다. 특히 첫 번째 대통령을 사임시켰던 12월 20일의 역사적인 대규모 시위를 ‘실업자운동’이 주도하던 순간에 대다수 노동조합 지도자들은 시위 참여조차 하지 않아 극적인 대조를 이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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