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주노동자 명동성당 농성장에서 만난 여성농성자 소하나

농성에 끝까지 남는 일은 자신에게 믿음 보여주는 일

▲소하나씨는 농성단에 합류할 때도 '소하나 미쳤다'라는 말을 수없이 들었다고 했다. 민중가수 지민주씨와 함께


이주노동자 명동성당 농성자 중 유일한 여자라는 소하나를 만나기 위해 농성단 쪽으로 전화를 했다. 돌아온 답변은 아무때나 오라는 것이었다. 아뿔사 명동성당을 함부로 벗어날 수 없는 불법체류자 신분인 것을. 성당 안 들머리 광장에 도착하니 이주노동자들은 여럿이 모여 자원활동가에게 한글을 배우거나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노랗게 쏟아지는 햇살 아래 소풍을 나온 것이었으면 좋았으련만. 어쨌든 이들의 명동성당 들머리광장으로의 소풍은 125일을 넘기고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옹기종기 모인 사람들 틈에서 유일한 여자인 소하나는 쉽게 눈에 띄었다.

한겨울을 꼬박 넘긴 긴 농성으로 소하나의 손등은 다 터 있었다. 그러나 표정은 건강하고 활기찼다. 소하나는 아무 얘기나 편히 하라고 했다. 유일한 여자라고 그동안 인터뷰 같은 것은 (거짓말 조금 보태) 수십번도 더 했다는 것이다. 평등노조 이주노동자 지부 안에 여자조합원은 자기 혼자뿐이었고 농성단에 합류할 때도 '소하나 미쳤다'라는 말을 수없이 들었다고 했다. 하지만 농성단에 들어올 때에는 이미 그런 말쯤은 한귀로 듣고 한귀로 흘릴 정도가 되어 있었다고 한다. 혼자 외떨어져 마음 졸이며 지내는 것보다 농성단에 합류해 믿을 수 있는 사람들과 매일 함께 지내는 것이 훨씬 낫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소하나는 우리나이로 32세인 인도네시아 인이다. 산업연수생 자격을 얻기 위해 94년 신청한 뒤 2년을 기다려 96년에 우리나라에 들어왔다. 그때 60여만원이 들었고 우리나라에 들어오고 나서 나머지 돈 130만원을 10개월에 걸쳐 갚았다. 그리고 3년의 연수생 제도를 마치고 99년 출국 후 다시 연수생 신분으로 들어올 수밖에 없어 250여만원 정도를 다시 썼다. 그때 서류를 새로 꾸미느라고 얻게 된 이름이 소하나이다.

예전에 네팔 이주노동자인 찬드라가 행려병자로 몰려 무려 5년 동안 시설과 정신병원을 전전한 사실을 영화로 찍은 것을 본 적이 있다. 5년의 전전 끝에 찬드라는 네팔로 돌아가게 되었고 그곳의 푸른 벌판의 시골공동체 안에서 전통의상을 입은 채 단아한 모습으로 카메리 앞에 다시 선 찬드라는 비로소 안정된 모습을 되찾은 듯 싶었다. 하지만 그런 찬드라라도 다시 돈을 벌기 위해 그토록 평화롭게 보이던 고향을 등져야 할지도 모른다. 찬드라와 다른 소하나는 그렇다면 어떤 이유로 고향을 등지고 우리나라로 오게 된 것일까?

89년 이후 가족들 모두 전세계로 흩어져

소하나가 서울에 올 무렵 당시 집안에서는 아무도 돈을 버는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아버지가 하던 과일사업이 망한 것이 열살무렵이다. 그 이후 어머니가 근근이 돈을 벌어 노모, 남편과 자식 삼형제까지 먹여살렸다고 한다. 그러나 생활이 도저히 어려워 가족이 뿔뿔이 흩어지기 시작한 것이 89년도부터라고 했다. 더 이상 가족부양능력을 상실한 아버지를 대신해 어머니가 89년도에 외국으로 나갔고, 이어 오빠가 사우디로 갔다. 그리고 96년부터 소하나가 우리나라로 들어왔으며 마지막으로 올해 여동생이 말레이시아로 돈을 벌기 위해 나갔다. 89년을 시작으로 가족모두가 함께 모여 살아본 기억이 없는 것이다.

그러나 어머니는 외국에서 일한 덕분에 병을 얻어 곧 인도네시아로 돌아왔고 오빠도 일을 견디지 못해 집으로 돌아왔다. 그러니 그동안 가족생계의 공백을 소하나가 맡아온 것이다. 소하나는 가족부양능력이 없는 오빠롤 대신해 돈을 벌며 오빠를 결혼시켰고 오빠의 아이인 조카에게 필요한 돈까지 이곳에서 벌어 부쳤으며 여동생을 고등학교까지 공부시켰다. 그러나 여동생은 언니에게 더 이상 짐지우는 것을 견딜 수 없어 대학진학을 포기하고 지금은 언니를 대신해 말레이시아에서 돈을 벌어 집으로 부친다.

소하나는 현재 종종 동생하고만 연락을 취한다. 그러나 집으로는 더 이상 전화하지 않는다. 집에 돈을 부칠 수 없는 한 가족에게 연락을 하는 일은 서로의 마음을 더 아프게 할 뿐이기 때문이다. 엄마는 이곳 사정을 모르고 계속 생활비를 요구하는 아버지와 오빠를 대신해 소하나에게 돈 얘기를 한다. 소하나는 아버지와 오빠 사이에서 곤란을 겪는 엄마 목소리를 듣는 것조차 이제는 가슴 아프다고 했다.

소하나도 인도네시아에서는 고등학교를 졸업한 고학력이다. 그러나 국내에는 일자리가 없다고 했다. 그나마 있는 일자리들은 대부분 인맥으로 분배된다고 했다. 그러니 대학을 나온다해도 인맥이 없는 한 일할 수 있는 보장이 없는 것이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소하나가 고등학교에서 선택한 과목은 자본주의 경제와 사회였다. 근대교육기관은 인도네시아에 이미 다 들어와 있어서 자본주의 체제의 논리를 교과서를 통해 내면화하게 되지만 정작 졸업 후 이들을 흡수할 수 있는 산업화된 시스템은 전혀 갖춰져 있지 않은 것이다. 이들이 교과서에서 배운대로 근대적 산업체계 안에 편입하고자 한다면 이들은 어쩔 수 없이 고향을 등지고 산업화된 나라로 일자리를 찾아 떠나야만 한다.

인도네시아도 우리나라와 마찬가지로 근대적 교육체제를 통해 농업과 같은 일차 산업은 미천한 일로 취급당하며 그 일로는 생계를 유지할 수조차 없다. 그렇게 그들은 전세계의 가장 싼 노동력으로 전락할 수밖에 없는 구조 속에서 한 가족이 뿔뿔이 찢어진 채 전 세계를 떠도는 신세가 되는 것이다. 소하나가 아는 한 자기나라 국민의 10명 중 3명은 외국에 나가 돈을 번다고 했다.

그러니 소하나는 지난 7월 30일 고용허가제가 발표되고 난 뒤 이주노동자로 등록할 수 있는 신분이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주노동자에게 허용된 4년이라는 기간이 내년이면 끝이 나는데 소하나는 그동안 가족을 부양하느라 아직 자기에게 필요한 돈은 하나도 모으지 못한 것이다. 소하나는 지금의 농성을 통해 자기는 인생에서 처음으로 희망을 만들어가고 있는 것이라고 했다.

이야기 도중 서른두살의 노처녀로 돈 한푼 벌지 못한 불법체류자로서의 불안한 심정을 간간이 내비치기도 했지만 그런 푸념 끝에라도 소하나는 꼭 "인생이란 게 원래 앞날을 미리 다 정해놓고 사는 것이 아니지 않느냐"며 특유의 넉살좋은 웃음을 지었다.

소하나는 왠만한 고생은 그리 두려워하지 않는다. 가세가 기운 10살 이후 엄마를 대신해 오빠와 동생을 돌보고 집안일을 도맡아 하며 이미 힘든 일이 몸에 배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한국에 와 불법체류자가 되었을 때 힘들게 고생하고도 돈을 떼인 일들은 아무리 낙천적인 성격이어도 피하고 싶은 기억이라 했다.

소하나는 한국에서 기계부품처럼 일했다고 한다. 비너스 스타킹을 만드는 봉제공장에서 빨리 돌아가는 기계에 맞춰 옷감을 계속 늘여야 하는 일은 지금 생각해도 끔찍하다고 했다. 앞사람으로부터 일을 받아 뒷사람에게 전해주기 위해서는 꼼짝없이 한 자리에 앉아 4시간 동안 똑같은 동작을 반복해야 했다. 화장실에 갈 수 없음은 물론이고 그렇게 일을 하고도 사장들은 월급을 처음에는 15일 뒤에 주고 다음달은 16일 뒤에 주고 다음달은 하루 더 뒤에 주는 식으로 해서 결국 회사를 그만둬야 할 때는 점점 더 많은 금액을 떼이게 되었다는 것이다.


연행된 친구가 나의 멈추지 않는 힘

하지만 넉달이 넘어가는 천막 농성도 더하면 더했지 고생스럽기는 마찬가지가 아닐 것인가. 소하나에게 힘들지 않느냐고 슬쩍 마음을 떠보았다. 그랬더니 이렇게 멋진 천막도 있는데 이제 힘든 것 없다고 천연덕스럽게 말한다. 2003년 11월 처음 농성을 시작했을 때는 찬 겨울에 광장 맨 바닥에서 잠을 잤다는 것이다. 그렇게 농성의 첫밤을 보내고 난 아침에는 목소리가 나오지 않을 정도로 심한 감기에 걸려있었다고 한다.

그래도 치사스러운 질문을 더 던져 보았다. 밖에 나가면 마음은 불안해도 돈은 벌어 집에 부칠 수 있지 않겠어요? 그랬더니 한참을 머뭇거린다. 그러더니 결국 배신감이라는 단어를 입밖에 꺼냈다.

"언제든 이곳을 떠날 수 있지만 그래도 배신감은 지워지지 않을 거예요."

이 농성장에서 바라는 것은 자신에 대한 믿음을 간직하는 것이라고 했다. 자기가 만약 농성장을 벗어나 불법으로 일을 하다가 강제 연행돼 구속이 되면 스스로에게 말 못할 배신감을 느끼게 될 것 같다는 것이다. 자신에 대해 느끼는 배신감이라니 선뜻 이해되지가 않았다.

그래서 이번에는 4개월이 넘는 농성기간을 이어가도록 이끌어 준 가장 큰 힘이 무엇이었냐고 물었다. 그랬더니 이런 말을 해도 되는지 모르겠다며 한참 머뭇거리더니 친구 이야기를 꺼냈다. 힘들거나 아플 때 늘 힘이 되어주는 친구가 농성장에 있었다는 것이다. 처음 농성을 시작한 뒤 혼자 여자이기도 해 적응이 어려웠는데 그때 식사때가 되면 꼭 밥을 먹었냐고 물어주기도 하고 자칫 남자들 틈에서 감춰지기 쉬운 자신을 계속 기억해 준 친구가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힘이 되어주던 친구가 덜컥 연행이 되버렸다는 것이다. 농성단의 대표인 샤말타파가 바로 그 친구였다. 소하나는 그렇게 친구가 덜컥 연행되고 나서야 절대 힘이 빠지면 안되겠다고 이를 악물었다고 한다. 그 친구가 연행된 뒤 농성을 그만두겠다는 생각은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다는 것이다.

농성단의 여러 분과 중 힘들다고 소문난 마임팀을 시작한 것도 그 친구가 연행되고 나서다. 소하나에게 샤말타파는 농성단을 이끄는 대표라기 보다는 어려울 때 힘이 돼준 친구로 깊이 남아 있었던 것이다. 소하나는 샤말타파를 걸고 자기자신과 굳게 약속한 것 같았다.

소하나는 자신이 원하는 것은 노동비자가 아니라 이주노동자의 인권이라고 했다. 그리고 언제나 숨죽여 자신들을 지켜보고 있는 40만 이주노동자와 앞으로 계속 다른 나라로 들어가게 될 자신같은 이주노동자를 생각한다고 했다.

농성이 장기화될수록 소하나는 점점 개인에 대한 생각을 뛰어넘어 함께 있는 사람들과 강하게 결속되어 가는 것 같았다. 거꾸로 그런 연대의식으로 묶인 이들이기에 120여일이 넘어선 농성을 꾸리고 이끌어갈 수 있을 것이다.

소하나는 이야기를 하다말고 갑자기 주머니를 뒤졌다. 좀전에 어떤 활동가가 전해준 명함을 잃어버린 듯 했다. 그런데 한참 이야기를 주고받은 뒤에도 그 명함을 잊지 못하고 주위 자리를 뒤적거렸다. 전화번호야 다시 물어보면 되겠지만 혹시나 그 사람이 함부로 나뒹구는 자기 명함을 발견하면 속이 상하지 않겠느냐고 그 명함을 꼭 찾고 싶다고 했다. 장기화되고 있는 농성장에서 만난 사람들의 마음이 어떤 것인지 알기에 종이 한 장 업수이 여길 수가 없었을 것이다.

시계를 보니 이야기를 시작한 지 세시간 정도가 지난 것 같았다. 마임으로 힘들 것 같은 소하나를 그만 놔주어야 할 것 같았다. 소하나는 그제서야 화장실이 급했다고 털어놓았다. 예전 작업장에서 화장실 가고 싶은 것도 참으며 일했다는 말이 떠올랐다. 소하나는 서울에도 엄마가 있다고 한다. 예전 신도림에서 일할 때 알게 된 서울엄마라고 했다. 그러나 그 엄마에게도 인도네시아의 엄마에게도 농성장에서 지낸다는 말은 하지 못했다고 한다. 둘 다 마음 아파할 것은 똑같기 때문이다.

가진 것 아무것도 없는 소하나가 긴 농성에도 그토록 건강한 모습을 간직할 수 있는 것은 소하나의 이런 마음때문인 듯 싶었다. 먼 타국까지 와 돈을 벌 수 있게 한 힘도, 그래도 이곳에서 만난 사장님들이 다 좋은 사람들이었다고 말할 수 있게 하는 힘도, 그리고 찬 시멘 바닥에서 겨울을 보낸 고생에도 더 많은 사람들과 깊은 마음으로 결속될 수 있었다면 소하나의 농성은 이미 절반은 성공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는지...
농성장을 찾은 일본 노동네트워크의 손님으로 제대로 작별인사도 못 나누고 농성장을 나섰다 하지만 소하나에게 말해주고 싶었다. 소하나의 싸움은 이미 이긴 것이나 다를 바 없지 않겠느냐고...

태그

로그인하시면 태그를 입력하실 수 있습니다.
남화선의 다른 기사
관련기사
  • 관련기사가 없습니다.
많이본기사

의견 쓰기

덧글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