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노숙인을 게으르다 말하는가

2004 여름빈민현장활동 꼬지 체험기

꼬지도 노동이다     

정확히 새벽 5시 10분에 회현역에 도착했다. 무언가 활동을 하기엔 낯선 시각, 낯선 공간에, 나에게는 매우 낯선 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그다지 넓지 않은 공간에 10여 명의 노숙인이 박스를 깔고 저마다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중간중간 보이는 샛노란색은 노숙 체험에 나선 빈활대 사람들이었다.



내가 속한 빈활대의 꼬지 체험팀을 책임질 김종언 씨는 벌써 일어나 "일찍 나왔네요"라며 나를 맞이했다. 노숙 생활을 하다가 지금은 일용직 노동을 하며 쪽방에 거주한다는 그는, 여름빈활을 위해 특별히 오늘 하루 꼬지를 나가기로 한 것이다.

3, 4분쯤 지났을까. 사람들이 하나 둘 눈을 뜨기 시작했다. 이부자리 대용으로 쓰는 박스를 정리하고 빨랫줄도 걷고 주변을 정리하고 있으니, 청소용역 아주머니도 출근하고, 공익근무요원도 출근했다.



5시 20분. 셔터가 열림과 동시에 대부분의 노숙인들이 지하철 역 안으로 우르르 몰려간다. 짐을 사물함에 차곡차곡 넣고, 화장실에서 세수를 하고, 매표소에서 표를 구해 가지고는 다들 어디론가 떠날 채비에 바빴다.

이 날 첫 목적지는 사당동 남성교회. 6시 반쯤 급식이 이루어지는 교회 식당 안으로 들어갔는데, 이미 50여 명에 이르는 노숙인들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들어오는 순서대로 빈자리 없이 채워 앉으며 나머지 공간이 가득해지길 기다리길 몇 십분. 어느 덧 200여 명의 노숙인들이 모여들었고, 곧 '예수님 안에서' '예수님 찬양' 같은 찬송가 부르는 시간이 이어졌다. 박수를 치며 노래를 따라 부르는 이들이 제법 많은 걸 보니, 그간 많이도 따라 불렀던 모양이다. 박수치느라 손바닥이 빨갛게 아파올 무렵, 이번에는 목사님의 설교가 시작된다. 조는 사람도 많고, 귀기울여 듣는 사람도 종종 눈에 띄었다.

한 테이블에는 4명씩 앉았는데, 2가지 반찬이 2벌씩 나왔다. 이 날의 메뉴는, 밥이 들어있는 북어국과 김치, 그리고 멸치고추 볶음. 꽤 오래 기다려 겨우 먹게 된, 많다 싶은 밥인데, 5분도 안 되어 일어나는 사람들이 많았다. 옆자리에 앉은 아저씨에게 물어보니, 역이나 지하철에서 누가 볼세라 빨리 먹는 것이 습관된 사람들이라 그렇단다. 주는 대로 먹는 사람들이랬다. 늘상 국과 밥은 한 그릇에 담겨져 나오고, 그래서 더 빨리 먹을 수 있으니, 그들의 위는 버릴 대로 버렸겠다.

제각기 돌아다니는 행로가 다른 모양인지, 사람들은 이내 삼삼오오 짝을 지어, 누군가는 홀홀단신으로 뿔뿔이 흩어졌다. 우리 일행은 남성 교회 근처에 있는 관음사라는 절을 향했다. 듣자 하니 무슨 요일 어느 교회에 가면 얼마의 구제금을 받을 수 있는지, 노숙인들은 그런 정보를 꿰고 있어서, 월요일을 제외하고 일주일에 6일을 이렇게 구제금을 받기 위해 서울 시내며 그 근방을 돌아다닌다고 했다. 그리고 이렇게 교회 등 복지지원처를 돌아다니며 구제금을 받는 경제활동을 꼬지라 부른다. 두 다리로 걸을만한 사람들은 돌아다니며 꼬지를 하고, 그조차 어려운 사람들은 자리에 앉아서 꼬지를 하고, 어쨌든 거리의 사람들은 자신이 활용할 수 있는 최대한의 자원을 활용해서 스스로의 삶을 책임지기 위해 애쓰고 있었다.



선배 노숙인들은 후배들을 데리고 다니며 그러한 생존의 정보를 나누며 훈련시키고, 후배였던 이들이 선배가 되어 그들의 후배 노숙인들이 살아남을 수 있도록 도왔다. 지하철 티켓은, 장애를 가진 노숙인이나 고령 노숙인의 보호자로 가서 2장씩 얻어다가 쓰고, 쓰다가 남으면 다른 노숙인들에게 준다고 했다. 지하철 셔터가 올라가는 새벽부터 오후 3-4시까지, 교회마다 정해진 시간에 맞추어 경보에 가까운 발걸음으로 빠르게 돌아다니면, 대략 5천원에서 운좋으면 1만원까지 벌이가 된단다. 하루에 2, 30군데는 돌아다닌다.

우리를 이끌고 다닌 김종언 씨의 목요일 노선은 사당동과 안산이었지만, 빈활 일정상 사당동만 돌기로 했다. 성광교회 삼광교회 경신교회 이수교회 사당교회 새순교회 삼호교회, ... 김씨에 따르면, 각 교회마다 헌금의 일부를 구제금으로 모아놓고 일주일에 정해진 날에 이렇게 300원, 500원씩 노숙인들에게 나누어 준단다. 예전에는 1, 2천원씩 주는 곳도 많았지만 노숙인의 수가 많아지고 빈곤층 독거 노인들이 찾아오기 시작하면서, 그것도 옛날 얘기가 되어버렸다.



몇 군데를 돌아 제법 규모가 큰 교회에 도착했다. 이 곳에서는 정해진 시각에 500원을 준다고 했다. 잘 알려져 있는 모양인지 줄잡아 100명에 가까운 노숙인들이 모여 들었다. 오가며 서로들 알고 지내는지, '오랜만이다' '너 어디 있었냐' '요새 얼마나 버냐' 형님, 동생 하는 그들은 마치 명절에 모인 대가족 같았다.

한 노숙인은 300원을 받았는데 100원이 하수구 안에 떨어졌다며, 그걸 어떻게든 꺼내려 애를 쓰고 있었다. 주변의 노숙인들도 관심을 가지고 그를 지켜본다. 몇몇은 도움을 주려다가 하수구가 너무 깊으니 포기하라고 하는데도 정작 100원의 주인은 포기하지 않는다. 못 해도 1미터가 넘어 보이는 하수구 바닥은 진흙과 쓰레기 따위로 엉망이었고, 100원짜리는 한가운데 박혀서 약올리듯 반짝거렸다. 가능성은 제로에 가까워 보였지만, 잠시 후, 그는 길다란 우산 2개를 이용해 그걸 꺼내고야 말았다. 100원도 그토록 소중한 그들인데, 김종언 씨는 후하게도 우리에게 자판기 커피를 대접해 주었다.

이 날 벌이는 신통치 않았다. 빈활대가 함께 한 탓에 평소처럼 속도를 내지 못 한 이유가 컸다. 시간을 맞추지 못 해 몇 번 허탕을 치니, 손해가 막심했다. 10여 군데를 돌았지만 다 합쳐서 3000원도 안 됐다. 그래서였을까. 함께 했던 네 분의 노숙인들 중 두 분은, 점심 급식 체험을 위해 서울역으로 가는 빈활대 일행에게 안녕을 고하고, 다른 곳으로 꼬지를 나섰다. 반나절 동안 우리는 한 팀이었지만, 그 순간, 현실감이 밀려왔다. 나에게는 '체험'일 뿐이지만, 그들에게는 생존을 위한 노동이요 이것이 그들의 '일상'이라는 것.



모르고 볼 때는 지하철 구석에서 소주나 마시며 괴로움을 달래고 하릴없이 잠으로 인생을 보내는 사람들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거리에서 지낸다 해도 최소한의 경비는 필요하고, 남들은 무시할지 몰라도 그들에겐 그들 나름의 문화생활이 있다. 그리고 그걸 하기 위해서 그들은 끊임없이 '비공식' 노동을 하고 있다. 어쩌면 지금 이 시각에도.

'노숙인 복지와 인권을 실천하는 사람들'의 문헌준 대표에 따르면, 노숙인들은 대개 불우하고 어려운 가정 생활로 인해 남들이 초등학교, 중학교 다닐 때부터 노동을 시작한다고 한다. 나이가 어리니 저임금 장시간 노동에 시달리게 되고, 그 결과 젊은 나이에 한두 가지 병을 얻게 된다. 교육받을 기회를 놓친 그들은, 한창 열심히 일할 시기에는 일을 하고 싶어도 번듯한 일자리를 구할 수가 없다. 또 다른 노동을 하기에는 몸이 받쳐주지 않는다. 그래서 그들은 단순노무직이나 기능직에 종사하다가 그조차도 못 하게 되면 이렇게 꼬지나 행상, 구걸, 넝마 등 비공식 노동을 통해 생을 일궈가게 되는 것이다.



그런 그들을 과연 누가 게으르다고 흠잡을 수 있을까.

비정규직, 파견직, 파트타이머, 피크타이머 등 불안정 노동의 형태가 점점 더 보편화되고, 사회 제분야가 공공성을 상실해 가는 요즘, 나는 빈곤의 굴레에서 자유롭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까.

과연 빈곤을 더 이상 개인의 탓으로 미루고만 있어도 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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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곤 , 노숙인 , 꼬지 , 비공식 노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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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목록
  • 신희철

    '빈민운동가 카페'에도 올려놨답니다.^^ 그날 죙일 꼬지 체험 따라다니랴 어렵게 취재하시랴 고생많았습니다.

    '빈곤에 저항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