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라디카 |
이주노동자 노동조합이 주최한 집회에 가던 라디카(34)는 친구인 람부마리(34)가 공장에서 끌려갔다는 소식을 듣고는 어쩔 줄 몰라하고 있었다.
여성 이주노동자들
▲ 람부마리 |
재작년 말 단속추방에 대한 두려움에 한국 체류를 포기하고 남편이 네팔로 돌아간 후, 람부마리는 라디카의 집으로 들어와 같이 살게됐다. 고향 얘기를 나누다 보면 한국에서의 고생스러운 생활이 잠시나마 잊혀졌다. '여자끼리의 아픈 것 어려운 것을 나눌 수 있는 게 얼마나 행운인 지 몰라'
라디카와 람부마리는 같은 처지에 있었지만 생각은 조금 달랐다. 대다수의 이주노동자들이 그렇듯 감시와 단속의 두려움에 람부마리는 한국에 와서 동대문구를 벗어나 본 적이 없었다. 그렇지만 라디카는 이주노동자 스스로가 원하는 곳에 취업을 할 수 없는 '고용허가제'에 반대하며 389일이라는 긴 시간을 명동성당 들머리에서 농성을 했고 한달간 목숨을 건 단식을 벌이기도 했다.
"지금 이 숫자로는 아무리 싸워도 안돼."
"그렇게 생각하면 안돼. 숫자가 무슨 상관이야. 1명이 남아도 우리는 승리할 수 있어."
람부마리는 라디카의 근성과 용기를 좋아하고 부러워했지만 한편으로는 불만이었다. 단식에 들어간 후 골반에 염증이 생긴 걸 알고도 미련하게 30일을 채우고는 6개월 가까이 병원에 다녀야 했던 라디카가 왠지 미련스러워 보이기도 했다. '단식하면 약도 먹을 수 없다는데'
람부마리도 라디카처럼 "Stop! crack down!"(단속추방 중단하라) "Achieve labor rights!"(노동권을 쟁취하자)를 외치고 싶을 때가 있었지만, 그럴 때 마다 가족들 얼굴이 먼저 떠올라 용기를 낼 수가 없었다. "너무 무섭다 라디카, 너 거기에 갔다가 잡혀가면 어떻게 하니"
람부마리는 가족들에게 매여있었다. 물론 라디카도 마찬가지였지만 말하자면 람부마리의 가족들은 다 그녀만을 바라보고 있다. 그녀가 끌려간 사실을 모르는 지금도 아마 그럴 것이다. "아들은 점점 커가는데 남편은 아프고 시어머니도 모셔야하고. 잡혀가면 어떻게 살아야 할 지 몰라" 그녀가 늘 입버릇처럼 하던 말이다.
람부마리는 한국에 와서 몸이 많이 아팠다. 맹장수술을 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람부마리는 또 위장병을 얻었고 벌써 1년 넘게 심한 통증을 느껴오고 있었다. "람부마리, 넌 술담배도 한번 안하는데 아프긴 왜 아프니."
말다툼
오늘 새벽 3시까지 라디카와 람부마리는 얘기를 나눴고 끝무렵엔 언성이 높아지기도 했다. 라디카는 람부마리가 아픈 몸을 이끌고 출근을 하는 게 맘에 들지 않았고, 일주일 전부터 극도로 단속이 심해진터라 걱정이 됐던 것이다.
"람부마리, 단속이 요즘 너무 심해. 공장에 가지마라. 그렇게 잡혀가는 것보다 견디는 게 좋아. 돈은 어떻게든 구해보자"
"라디카 딱 3주만.. 그 담엔 입원할께. 오늘도 우리동네에 출입국 직원들이 오면 사장한테 얘기해서 내일부턴 가지 않을께"
일주일 전부터 극도로 심해진 출입국관리소의 단속은 조그만 집과 공장까지 덮쳐오고 있었다. 열명중 네명은 달아날 수 있었던 예전과는 달랐다. 고용허가제 1년을 앞둔 때문인 지, 출입국관리소는 요즘 공장을 통째로 막고 열이면 열 불법체류자들을 잡아들였다.
비행기 표
하지만 모든게 라디카의 바램대로 되지는 않았다. 집회에 참석하기 위해 여의도로 향하던 라디카는 다급한 람부마리의 전화를 받았다. "(출입국 직원들이)공장을 다 막았다. 나 어떻하냐". 입원 일주일을 남기고 결국 잡히고 만 것이다. 라디카는 "내가 왜 좀 더 말리지 않았나" 자책했다. "마음이 너무 아파요. 이렇게 동물처럼 끌려가는데. 다들 생활고에 쫓기다 끌려간다지만 고작 일주일남았었는데.."
람부마리마저 허무하게 끌려가자 라디카는 무서워진다. 또 혼자 살아야 한다니 안정이 되지 않고 한국생활이 더욱 힘들게 느껴진다. 8년 가까이 혼자 산 게 신기할만큼 람부마리가 없는 방은 생각조차 하기 싫다.
람부마리의 위장병은 어떻게 하지? 라디카는 급하게 해야 할 일이 떠올랐다. '람부마리의 한국생활은 끝난 게 아냐' 비행기 값을 구하지 못하면 람부마리는 기약없이 보호소에 갇혀 있어야 한다. 무엇보다 라디카는 보호소 내에 설치되어 있는 CCTV를 람부마리가 견뎌낼 수 있을까 걱정이 됐다. '보호소 직원들은 전부 한국 남성들이라는데' 샤워도 할 수 없고 화장실에 가는 것조차 왜 남성들에게 감시받아야 할까. '우리는 죄인일까'
라디카는 다시 한번 자신이 람부마리와 너무 닮아있다고 생각한다. 라디카는 달아났지만 역시 갈 곳이 없었다. 동대문에서 살아남은 동료들이 '출입국 직원들이 기다리고 있으니 오지 말라'고 그녀에게 자꾸 메시지를 보내온다.
"어디로 갈 겁니까?"
"어디로 가야 될 지 모르겠네요. 물어봐야죠"라며 웃고마는 라디카의 눈에 눈물이 글썽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