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은 2중 2층의 콘테이너 뒤, 빼곡히 들어찬 경찰 이동차량 사이로 색색가지 물대포를 쏘아댔다. 하늘에 뜬 헬기는 현장 체증을 위해 연신 저공 비행을 하며 집회 참가자들을 압박했다. 그러나 그들이 믿었던 방패가 무너지기 시작하면서 그들 또한 얼마나 당황했을까. 외신의 보도를 보고 다른 나라 민중들 또한 놀라지 않았을까. 물대포를 맞아가며 줄을 잇고, 합심으로 줄을 끌며 콘테이너를 하나 둘씩 무너뜨리는 우리들의 개미 작전에.
어차피 벡스코 강건너에서 진행된 집회는 '강 건너갈 배'를 준비하지 않고서는 이미 한계가 노정된 전술이었다. 어차피 벡스코 진입이 최종 목표는 아니었던 바 '반대'의 의사를 명확히 전달하고, 왜 반대하는지를 선전하기 위한 집회였던 만큼 현실의 투쟁은 그 범위 안에서 충실히 진행됐다.
올 하반기 내내 준비되던 아펙 반대 투쟁은 정상회의 폐막과 함께 막을 내렸다. 아펙 투쟁을 마무리 하고, 이것 저것이 성과라고 떠들어 대는 선전들을 들으며 남는 아쉬움. 아펙투쟁의 현장에서, 투쟁을 조직하는 과정에서 많은 활동가들이 정파를 뛰어넘어, 이견을 절충해 가며 지금까지 왔다. 열심히 최선을 다한 그들의 활동을 폄하할 생각은 없다. 그러나 남는 아쉬움.
기자 개인이 가진 반미, 반부시 투쟁에 대한 알레르기 반응이 아니다. 부산에서 투쟁에 참가하며, 또한 그 투쟁이 준비되는 과정을 함께 겪으며 아쉬운 부분에 대한 정리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그 소회를 조금은 두서 없이 나열해 본다.
이상하게, 소외된 좌파
이번 반아펙 투쟁을 되돌아 보면 주체단위를 세 단위로 구분된다. 전체적으로 큰 축을 이룬 것은 전국단위에서 구성된 '아펙반대 부시반대 '국민행동'과 부산 지역 단체들을 중심으로 구성된 '부산시민행동'이다. 그리고 작은 규모지만 나름의 활동을 한 '아펙반대부산투쟁위원회'라는 현장조직 중심의 활동단위이다.
국민행동의 경우 9월 공식 출범에 이르는 무수한 논의들이 있었다. 기조, 현재 정치 정세적 조건 등. 그러나 실무 책임을 제외한 결정단위에서 좌파 활동가들은 이상하게도 자리를 잡지 못했다. 초기 집행위원장 선임 과정에서도 활동단위들이 '민중연대' 소속단위 임을 강조하며 민중연대로 소급하려 했던 과정을 감안한다면 사실 좌파활동가들이 실무선에 머물렀고, 아펙 투쟁에서 몸대주기 이상 성과를 얻어내기 어려운 한계가 이미 전제되어 있는 상황이었는 지도 모른다.
한 예로 '10만 조직 전국행진'이 진행됐다. 전국 시,도, 군, 읍까지 들어가며 진행된 국민행동 공식 사업으로 정광훈 공동대표와 오종렬 전국연합 공동의장을 주축으로 2진을 구성해 진행됐다. 그러나 행진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이 사업이 '아펙 투쟁을 위한 10만 조직'의 과정인지, '반미 전사들의 양성' 과정인지, '민중연대의 조직 강화 방안'인지가 모호해지고 있다는 평가들이 제기됐다. 행진 사업을 주도하는 주체들의 경향이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친다는 것을 전제하더라도 현장조직, 현장활동가들과의 직접적인 만남이라는 '자리의 유의미성'에도 불구하고 적극적으로 결합하지 못한 채 '맡겨놓은' 꼴이 됐다.
이런 상황은 부산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논의는 비슷한 시기 시작했으되 외연을 넓혔던 부산시민행동은 이미 부산시내 활동에서의 우위를 점했다. 민주노동당을 비롯해, 지역 민중연대, 지역본부 등과 함께 조직을 구성한 부산시민행동은 지속적으로 문화 마당 및 게릴라 선전전, 이슈 파이팅을 해 나가며 전국적인 '반(反)아펙 투쟁'의 채널을 시민행동으로 고정시켰다.
반면 부산 거점 현장 조직 12개 단위와 1명의 개인 활동가로 구성된 '부산투쟁위원회'는 시민행동 중심의 반아펙 투쟁이 민족주의적 한계를 지니고 있다는 점, 대중과 괴리된 상층 중심이라는 점, 이슈 파이팅의 한계 등을 지적하며 활동을 시작했다. 문제 지적은 유의미했으나 활동의 폭이 현장 선전에만 집중되거나 단위 역량에 부딪혀 제대로 된 사업이 되지 못한 아쉬움이 남는다.
그나마 10월 30일 있었던 부산 걷기 대회 사업의 경우, 자체 유인물 제작 및 조직확대를 통해 대중 사업의 의미성을 갖지만 그 이후의 자기 활동을 풀어내는 성과로 이어지지는 못했다. 이 또한 자체적인 여론화도, 부산시민행동에 결합을 통한 문제의식 전달도 못한 채 고립된 소수의 지역운동으로 남았다는 평가는 피하기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물론 지역내 좌파단위의 연대투쟁의 경험을 만들어 낸 것, 전국단위 좌파들이 부산민중포럼을 계기로 반등을 기도하며 대안세계화와 지역사회운동이라는 의제를 던진 시도나, 그 단위들이 18일 사전 독자 집회를 것이 최선의 선택이었음이 이해되나, 이런 현실적 조건에 의해 한정된 한계가 아쉬울 따름이다.
이런 저런 측면에서 현실 좌파들이 부산 아펙 투쟁을 전개하는 조직구성과 운영에 있어서 철저히 소외된 단위였다는 것은 개인적인 느낌만은 아닐것이다.
의제 선점의 중요성
그리고 이런 소외는 결국 의제 설정과 선전의 미흡함으로 이어졌다.
부산에서 구호를 외쳐본 참가자라면, 반아펙 투쟁을 관심있게 지켜본 사람이라면 '왜 이리들 부시 타령을 하는지' '넘쳐나는 부시 선전물은 이리 많은지', '반아펙 투쟁이 반부시 투쟁인건지', '왠지 모를 답답함'을 느끼지 않았는가? 대중에게 외쳐지는 구호, 대회의 슬로, 의제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절실히 느낄 수밖에 없었다.
아펙반대국민행동과 부산시민행동은 몇 개월에 걸쳐 참가단위의 전체 논의를 통해 '빈곤과 전쟁을 양산하는 아펙반대 부시반대'라는 의제를 선정하고, 주요 구호들을 결정하며 투쟁 기조의 상을 잡았다.
그 과정에서 맞아 떨어진 부분은 '아펙반대, 부시반대'라는 슬로였다. 전쟁을 반대하는 단위에서는 '전쟁의 생산자'인 부시에 대한 타격을, 반미를 주장하는 단위에서는 '반미 반제의 상징인' 부시에 대한 타격을 주장했고 절묘하게 그 부분이 맞아 떨어졌다. 그리고 지역 구조조정과 노무현정권에 대한 타격이 제기 됐으나 논의 과정에서 이 부분은 사라졌다.
이후 '전쟁과 빈곤을 양산한다'는 모토를 바탕으로 전쟁의 부시, 빈곤과 사회양극화의 아펙이라는 기구를 상징화 시키고자 했다. 그러나 집회 현장에서 만들어진 선전물과 부산 현지에서 진행된 투쟁은 '반 부시' 투쟁으로 일괄 매몰 되며 반 부시로 상징화시키며 전면화됐다. 선전적, 개념적 측면에서 보면 반아펙 투쟁은 반-부시로 상징되는 반미 투쟁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또한 이런 측면은 '인간안보' 개념 '테러 방지'등의 아펙 의제와 맞물려 전쟁에 대한 반전 의제들과 맞물려 '아펙'의 본질은 부차화되고, 아펙과 관련한 정부의, 정권의 이데올로기 지형을 '부산에 도움되는 경제효과 미비'라는 축소된 부분에만 매몰되게 만들었다.
아펙 개최로 인한 정권의 수혜, 제주-부산지역 뿐 아니라 전국토에서 진행되고 있는 시장화의 구조조정, 업종과 영역을 뛰어넘는 자발적 자유화 조치 등 정책적, 정권에 대한 정치 투쟁들은 완전히 방기 된 채 아펙 투쟁은 진행됐다.
아마 이런 아펙 투쟁의 가장 큰 수혜자는 노무현정권이 아닐까. 의장국으로 WTO DDA 특별성명 논의를 제시하고, 북핵 문제의 미끼를 던지고, 그들의 표현대로 원활한 외교를 펼치며 자유무역의 장벽을 깨 나가는 역할을 톡톡히 했다. 특수 경찰과 장갑차를 부산에 깔고, 산해진미 사다주고, 색색 가지 두루마기 입히주며 각국 정상들에게 '봐 난 이렇게 하잖아'의 모범을 보여줬으니.
이번 반아펙 투쟁의 경우 WTO를 위시로 한 자유무역의 허실,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기구로의 아펙에 대한 아펙의 본질, 의장국인 노무현정권이 아펙을 통해 취하고 있는 정치적 이점들에 대한 폭로와 타격이 사라진 채 반부시, 반미 투쟁으로 만 한정 된 투쟁이었다는 평가를 벗어나기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는 '아펙반대, 부시반대'라는 초기 의제설정 과정에서 이미 예정됐던 문제의식이다. 과연 이 슬로건 아래 좌파적 담론이 무엇인가에 대한 고민들도 있었다. 그러나 이에 대한 대응과 적극적 논의가 미흡했다. 그나마 민중포럼과 포럼준비팀을 주축으로 한 대안세계화와 지역사회운동을 통한 아래로부터의 조직화를 고민한 흐름만이 유일하게 그 목마름을 채웠을 뿐이다.
명확한 투쟁을 조직하는 과정에서 주요 구호, 투쟁의 슬로건이 얼마만큼 중요한 것인가, 그 문구를 놓고 밤세워 싸울 수밖에 없는 이유가 여실이 입증되는 투쟁의 교훈을 얻은 셈이다.
반 부시에 갇힌 반 아펙 투쟁
이런 과정과 전제 하에서 진행된 아펙 반대 투쟁은 그 투쟁이 진행될 수록 그 한계가 명확해 질 수밖에 없었다. 모든 선전물이 NO BUSH, NO APEC으로 통일되고, 모든 선전물에는 희화화되거나 무시무시한 부시에 대한 상징물로 채워졌다. 한반도를 침략하는 부시의 상징물, 미국이 어떻게 한반도를 점령해 왔는가를 보여주는 선전물 등. 남한을 집어 삼킨 미국과 전쟁을 일삼는 부시는 아펙을 위시로 그 패권을 확장하려 하고, 그렇기 때문에 부시와 미국을 반대해야 한다는 공식은 그 외의 다른 주장들을 쳐내며 공식을 공론화 시켰다. 아펙 투쟁의 담론이 여기에 머물러 있었기 때문에 아펙 투쟁에서 반미, 반부시 이상 그 무엇을 얻을 수 없었고, 그 답답한 상황에서의 좌파적 담론은 어디 갔는가에 대해 물을 수밖에 없다.
이는 또 다른 측면에서 '좌파적 담론'이라고만 한정하는 것도 사실 무리가 있을 수 있다. 아펙투쟁 자체가 본질을 폭하고, 국제질서 속에서 투쟁으로 상징화 되지 못한 투쟁 자체에 대한 평가가 될 수도, 잘못된 타격지점을 선정한 투쟁이라는 평가를 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아펙을 두고 다양한 입장과 논쟁들이 제기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실천 주체로서의 현실 좌파들의 역할이 무엇인가에 대한 물음으로 다시 돌아올 수밖에 없다.
공공영역에 대한 시장화, 노무현 정권의 적극적인 통상 외교 정책과 시장화를 마구 들이며 진행하고 있는 자발적 자유화 조치, 신자유주의 세계화가 전 세계적으로 벌이고 있는 '성장을 통한 분배'라는 환상, WTO의 다자무역체계와 FTAA, ASEM 등 지역을 거점으로 하는 블록 기구, 그리고 아펙과 같은 경제협력체까지 얼기설기 엮여 전세계 시장의 거미줄로 채워놓고 있는 이 총체적이고 전면적인 이데올로기를 폭로할 선전은 사실상 생략되거나, 축소된 형태로 나타났다. 과연 이 역할은 누가 해야 했던 것일까.
쪽수 투쟁, 홍콩 투쟁은 그리 가지 말자.
여러가지 이유가 있을 수 있다. 현재 노동 진영의 어려움에서 기인한 좌파 단위의 실질적 어려움, 실 활동가의 부족, 대안 의제 개발의 어려움, 실 조직력과 동원력의 문제 등 기계적이고, 다양한 한계들이 있었다는 것을 이해 못하는 바는 아니다. 그러나 이렇듯 현장 장악력, 동원력 그 실력에 대한 물음을 계속 받으며 스스로 선전, 대안의제에 대한 고민 조차도 구체화 시키지 못하거나, 현실 운동에서 조차도 밀리고 있다는 판단에 기인한 안타까움을 져버릴 수가 없다. 그리고 그렇게 안타깝다고 서로 위안 삼을 상황도 아니다.
이후 이런 저런 단위들의 평가가 있을 것이다. 반아펙 투쟁이 부산 지역 투쟁을 조직하는 전형을 만들어낸 좋은 기회였다지만 아쉬웠다는 평가를 남긴다거나, ASEM투쟁 이후 자본의 세계화에 반대하는 저항 담론을 대중적으로 확산할 수 있는 기회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했다는 등의 평가들이 나올 수 있을 것 같다. 그렇다면 평가에 그치는게 아니라 본격적인 WTO 12월 홍콩 투쟁에서는 좀 달라져야 하지 않을까.
한국참가단에 대한 세계 언론이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는 지금, 속된 말로 어파치 참가자들 내에서 '쪽수로 밀릴 것'이라면 제대로 된 담론 형성, 대항 의제를 생산하는 것에 있어서의 노력이 절실한 상황이다. WTO 투쟁도, 홍콩 가서도 '반부시'만을 외치다 올 것인지, 갇힌 반미 투쟁과 반부시 투쟁으로 그 끈을 이어갈 것인지, 이에 대한 우리의 준비가 무엇이어야 하는가를 '생산'을 위한 공동의 노력이 필요한 시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