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희생..남은 사람들의 남은 과제

[2005참세상이슈](8) - 농민의 죽음으로 얼룩진 2005년

2005년의 시작은 노무현 정권의 ‘개방형 통상국가 구현’ 전망 제시였다면, 끝맺음은 숨 가쁘게 달려왔던 농민투쟁이 단숨에 정리되는 것을 의미했다. UR의 농업시장 개방의 직격타를 맞은 농민들은 WTO로 대표되는 신자유주의 세계화가 어떻게 농민들의 삶을 파탄내고 식량 산업을 상품화 하는지에 대해 직시할 수 있었다.

2005년 진행된 농민 투쟁은 바로, 거만한 세계화에 맞선 민중들의 항쟁, 그 상징적 투쟁이었다. ‘10년투쟁’이라 불리는 ‘쌀투쟁’은 해를 넘기면서 그렇듯 분절되었다.

전용철, 홍덕표 두 농민의 사인이 경찰의 과잉진압에 의한 것이라는 국가인권위의 발표도 있었다. 이후 노무현 대통령이 대국민사과문을 발표했고, 허준영 경찰청장도 사퇴했다. 그러나 기만적이었다. 앞선 두 사람의 액션은 ‘쌀협상국회비준 무효’을 요구하는 농민들 입막음을 위한 하나의 수단이었다. 이미 지난해 11월 23일, 국회 본회의에 상정된 ‘쌀 관세화 유예협상에 대한 비준동의안’은 국회를 통과했고 그러므로 노무현 정권의 살농정책은 여전히 유효하다.


밀실 협의...불씨 제공

쌀 재협상 국회비준안을 6월 국회에서 기필코 처리하겠다는 강한 의지를 보이던 정부 여당은 민주노동당을 비롯한 한나라당, 민주당 등 야당으로부터 ‘밀실협상’의 의혹을 받았다. 당시 여당의원 6인은 “국내 농업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충분한 검증과 이에 근거한 치밀한 대응전략 없이 협상을 진행한 것”과“ 협상과정에서와 협상과정에서 부가합의 사항에 대해 국회와 국민들에게 충분히 알리거나 동의를 구하지 않은 것”에 대해 문제를 제기했다.

농민단체는 정부의 이면합의 쌀협상에 대해 “국민을 속인 쌀 협상 무효”라며 허상만 전 농림부 장관과 김현종 통상교섭본부장을 고발할 것을 촉구했다. 또한 농민들은 초유의 ‘농민총파업’에 나서고 ‘대책없는 쌀협상 국회비준저지 비상대책위원회’ 대표단들이 단식 농성에 들어가는 등 2005년 하반기 투쟁은 이때부터 시작이었다.

심의, 의결...불을 당기다

결정적인 것은 이후 10월 27일 국회 통일외교통상위원회(통외통위)에서 전체회의를 개최 ‘쌀협상비준동의안’을 심의, 의결한 것이다. 농민들의 투쟁은 불을 당겼다. 이날 임채정 통외통위 위원장은 질서유지권을 발동해 민주노동당의 회의장 점거를 사전에 차단하기도 했다.

이후 ‘쌀비준동의안’ 본회의 통과를 저지하기 하기 위해 농민들의 시위가 전국에서 산발적으로 벌어졌다. 충남 부여에서는 농민 400여명이 군청 앞에서 농민대회를 진행하고 군청 안으로 들어가 천막농성을 벌이는가 하면 경기도 평택에서는 시청 앞에 천막을 치려던 농민들이 경찰의 진압으로 20여 명이 연행되기도 했다. 전농에 의하면 10월 29일 하루, 전국 96개 시·군 농민 15만 명에 의해 시군청 등 주요건물 앞에서 적재된 벼가 무려 50만 가마를 넘어선 것으로 알려졌다.

이것이 농민 15만 명이 결의한 이른바 2차 농민총파업이었다. 전농은 28일 국회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농촌의 현실을 외면한 채 사상 유례 없이 경호권을 발동하며 반만년 민족의 역사를 지켜온 농업과 국민의 식량주권을 송두리째 내던지고야 말았다”며 “정권 퇴진을 불사하는 농민대투쟁을 선포한다”고 밝혔다.

11월 23일 ‘쌀비준동의안’ 국회 강행 처리...기름을 붓다

11월 국회 본회의에서 강행처리 될 것이라는 소문이 무성했다. 이미 10월 27일부터 강기갑 의원의 단식이 진행되고 있었다. 11월 본회의는 16일과 23일. 11월 12일부터 19일까지 아펙 정상회의의가 부산에서 진행되었고, 농민이며 민중단체들의 집중 투쟁이 예정되어 있는 가운데 아펙 회의기간 중 ‘쌀비준동의안’을 처리하는 강수는 두지 않을 것이라는 추측들이 여기저기서 쏟아졌다. 그러나 16일 정부의 강행처리 입장이 기정사실화되면서 전농은 11월 9일 성명을 통해 “기어이 농민들의 목소리를 무시하고 쌀협상 비준안을 강행 통과시킨다면, 부산 APEC 회담은 돌이킬 수 없는 사태에 직면할 것”이라고 경고하기도 했다.

16일 국회 본회의를 앞두고 ‘쌀협상국회비준저지 전국농민대회’가 전국에서 모여든 1만여 명의 농민들이 참여한 가운데 여의도 문화공원에서 열렸다. 이날 참석한 농민들은 “정부가16일 본회의에서 쌀협상비준안을 처리한다면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라며 “정부는 즉각 쌀협상국회비준처리기도를 중단하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집회는 짧게 마무리되었고, 농민들은 국회로 진격하기 시작했다.

분노 폭발, ‘11,15 농민결사항전의 날’

  2005년11월 15일, '쌀협상비준동의안 저지 전국농민대회' 당시 상황

영하로 내려간 이날의 추위에도 물대포 등을 동원하여 진압에 나선 수만의 경찰병력은 그야말로 물불 가리지 않고 폭력적 진압을 자행했다. 유난히 고령자가 많았던 터, 부상자가 속출할 수밖에 없었다. 즉 예고된 죽음, 예상된 희생이었다. 경찰의 진압으로 여의도 국회 앞까지 행진을 진행하려던 농민들은 오히려 본대회 행사장이던 문화마당까지 침탈당하다 못해, 문화마당 앞 8차선 도로까지 밀려났다. 심지어 경찰은 집회를 마치고 귀향하려는 전세버스까지 붙잡고 연행하기도 했다.

이날 하루 부상자만 500여명. 전쟁터, 계엄령, 아수라장, 한마디로 야만적이었다. 당시를 기억하는 이들은 그날의 여의도를 “짐승의 시간”, “짐승의 공간”이었다고 회고했다.

  2005년11월 15일, '쌀협상비준동의안 저지 전국농민대회'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 11월 23일 ‘쌀비준동의안’은 국회를 통과했다.

두 농민의 장례식과 기억 속에 묻혀진 농민의 희생까지

2005년 마지막 날이던 31일, 고 전용철, 홍덕표 농민의 장례식이 있었다. 고 전용철 열사는 사망한 지 한 달을 넘긴 37일 만에, 고 홍덕표 열사는 13일 만에 치러지는 장례식이었다. 여의도 문화마당에는 지난날을 기억하고 있는 2000여명이 모인 가운데 합동장례식은 조용하고 차분하게 진행되었다. 11월 15일 농민대회 장소였던 문화마당까지 침탈한 경찰을 밀어내기 위해 이용했던 농구대는 십 여명 남짓한 젊은이들이 차지했고, 불길 속에 타오르던 경찰버스 차량이 있던 자리는 대여를 기다리는 자전거들이 가지런히 놓여있었다.

  2005년 12월 31일 '고 전용철, 홍덕표 농민 범국민장'

이날 장례식에서 강기갑 민주노동당 의원은 “개방농정 선진화로 가려는 이 정권과 WTO 세계화의 바람에 맞아 돌아가신 것”이라며 “경찰 총수는 사퇴할 사안이 아니라는 망언을 했지만 두 분은 이 망언까지 용서하시고 흙으로 돌아가소서. 여기 함께 한 사람들의 다짐과 결의를 가는 두 농민에게 드린다”고 전했다.

큰 희생이 치렀다. 무려 다섯 명의 농민을 잃었다. ‘정용품’, ‘하신호’, ‘오추옥’, ‘전용철’, ‘홍덕표’ 등 알려진 것만 다섯이다. 전농은 이들의 사인을 “노무현정부의 살농정책”이라며 “쌀협상국회비준 중단하고 농업회생을 위한 근본대책을 수립”을 요구했다.

한편 2006년 3~4월께 수입쌀 일부가 시중에 시판된다. 쌀과자 등 가공용으로만 공급하던 수입쌀 물량 중 10%를 쌀밥용으로 시중에 시판해야 한다. 정부는 수입쌀이 시판되더라도 농가소득에 큰 타격을 주지 않을 것이라고 전망했지만 가뜩이나 줄어든 농가소득에 쌀 수입이후 더욱 위축될 농심, 여전히 의제는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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