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사회-운동의 문화정치적 쇄신을 위하여(1)

노동운동-시민운동 절합, 새로운 사회운동의 패러다임을

1. 한미FTA 협상개시 정세와 '87년 민주화 이후 민주주의 체제'의 종식

구정을 앞둔 1월 26일 한덕수 부총리는 스크린쿼터 73일 축소방침을 발표했다. 94년 이래 미국이 제안했던 한미투자협정, 한미자유무역협정의 최대 걸림돌이 되어왔던 스크린쿼터에 대한 미국 측의 50% 축소 요구를 한국정부가 드디어 수락함으로써 협상 개시의 길이 열리게 된 것이다. 곧 이어 2월 2일 양국 정부는 한미FTA 협상을 5월부터 시작 2007년 3월까지 마무리하겠다고 발표했다. 미국정부는 한미FTA가 <100%전면개방+경제와 정치군사안보를 포괄하는 협정>이 되기를 요구한다고 한다. 이로써 93년 김영삼 정부 이래 시작되었던 한국식 신자유주의가 미국적 틀에 자신을 끼워 맞추는 단계로 본격 전환하는 움직임이 공식화된 셈이다.

문화관광부 장관은 쿼터 축소로 인한 영향을 최소화하기 위해 향후 5년간 4000억원의 영화발전기금을 마련하겠다고 발표했지만 영화인들은 41개 단체와 연대하여 단식농성에 돌입했고, 스타 배우들의 1인 시위와 대규모 항의 시위를 번갈아 가며 거세게 항의하기 시작했다. 여기까지는 이미 98년 이래 수차례 경험한 내용의 반복이자 2004년 6월 이창동 장관의 쿼터 축소 예고 발표가 있었던 터라 그다지 놀랄 일이 아니다.

그러나 이전과는 전혀 다른 두 가지 조건 변화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 하나는 이제까지 한미FTA 체결의 가장 큰 걸림돌이 되어 온 농업 협상과 스크린쿼터 협상 중에서 전자의 걸림돌이 지난 해 12월 쌀 협상 비준 동의안이 국회를 통과하면서 상당 부분 해소되었다는 점이다. 다른 하나는 미국 정부가 100% 예외 없는 초강력 개방 요구와 함께 경제협상 만이 아닌 정치군사적 안보협상을 협상 안건으로 제시하고 있다는 점이다. 물론 전자는 완전히 해소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큰 불씨를 내포하고 있다. 2005년 12월 국회 앞에서 경찰과 격돌한 수 만 명 농민들의 분노에 찬 투쟁과 홍콩에서의 반세계화 투쟁을 주도했던 농민들의 힘에서 확인했듯이 향후 한미FTA 협상과정에서 농민들의 거센 저항이 있을 것이기에 협상이 순조롭지 않을 것임은 분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난해 국회에서 쌀 협상 비준 동의안이 통과되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이는 아무리 강력한 저항이 있어도 현 국회가 미국이 주도하는 세계화 전략을 찬성한다는 사실을 확인해 준 것이기 때문이다. 스크린쿼터 축소가 농민투쟁과 영화인 투쟁을 결합시켜 예측불가능한 대 폭풍을 몰고 오리라는 사실은 충분히 예상 가능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한미FTA 협상 개시를 과감하게 발표한 노무현 정부의 뱃심의 근거가 아마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하지만 여당 지지율이 바닥에 떨어져 있는 상황에서 곧 닥쳐올 지방선거를 앞두고 대정부 투쟁의 불길에 기름을 끼얹는 이런 선택은 국내정치의 상례에 비추어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다.

한국영화가 몇 년간 점유율 50%를 넘고 있기에 이제는 국익을 위해 쿼터를 줄여도 좋지 않느냐는 여론이 과거에 비해 높아졌다는 점을 정부가 과대평가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영화인들의 투쟁으로 한미FTA의 전체적인 실익이 불투명한데 반해 한국영화 경쟁력의 필요조건인 쿼터를 50% 축소할 경우 한국영화산업이 급격히 위축될 것이며 그 여파로 한류의 흐름도 크게 위축될 것이라는 사실이 널리 알려질 경우 반대 여론이 쉽게 급등할 수도 있기에 정부가 현재의 막연한 여론에 기대어 그런 결정을 쉽게 내렸다고 생각하기는 어렵다.

그렇다면 상식을 초월한 이런 결정의 근거는 무엇인가? 이런 궁금증을 풀어 줄 열쇠는 바로 부시 정부가 공표한 정치군사적 협상 부분에서 찾을 수 있다고 본다. 물론 이 열쇠는 복잡하게 꼬여 있기 때문에 그 실체를 알려면 현 세계정세의 복잡한 흐름을 꼼꼼히 따져보아야 한다.

미국은 94년 캐나다, 멕시코와 북미FTA를 체결한 이래 몇 개 약소국들과 FTA를 맺었지만 이는 FTA 대세론을 퍼뜨리기 위한 선전용이었을 뿐이다. 그러나 세계 경제 11위를 차지하고 더 큰 성장잠재력을 지닌, 강력한 군사동맹국이기도 한, 한국과의 FTA는 미국의 경제적, 정치군사적 힘을 확장하는 데 결정적인 관건이 된다. 더구나 급부상 중인 중국과 인도, 러시아와 아시아 시장에서 한국의 점증하는 경제적, 문화적 영향력(한류)을 계산할 때, 또 급속히 확산되는 세계적인 반미 흐름을 고려할 때 한국과의 경제안보통합은 미국으로서는 '가뭄의 단 비'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우리 입장에서 미국과의 경제통합은 어떤 이득을 가져올 것인가?(1)

대외정책연구원은 협정이 체결되면 국내성장률은 0.42~1.99%, 수출은 12.1~15.1%가 늘고, 일자리도 10만 3천 곳 정도 늘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그러나 미국무역위원회 2001년 보고서에 따르면 협정이 체결되면 한국의 대미수출은 21% 증가하는 데 반해 미국의 대한 수출은 54% 증가할 것이라고 한다. 정부는 수출의 주력품인 자동차와 전자제품 중심으로 수출증대를 전망하고 있으나, 현재 미국의 자동차 관세가 2.5%에 불과하고 현지생산 물량이 늘고 있어 FTA의 효과는 별로 없을 것으로 예상된다. 또 고용증대를 예상하는 서비스 분야에서는 비정규직 저임금 직종이 많다는 점에서 고용의 질 악화가 예상된다.(한겨레신문 기사 참조, 2006년 1월 31일)


현재로는 농업 분야를 제외하고는 정확한 비교가 나오지 않고 있어 확실히 알 수 없으나 상식적으로 두 가지 추론이 가능하다고 본다. 그 하나는 98년 이후 지난 8년간 확인된 자본시장 개방의 득실표를 통한 추론이다. 외환보유고가 3000억 달러에 달한 것은 분명한 이득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국내 금융과 주식 시장의 60% 이상이 해외자본에 잠식당하고 있고, 환율 상승압박으로 수출에 적신호가 켜진 것은 문제가 아닐 수 없다. 게다가 해외자본의 직접투자보다는 단기 수익을 노리는 포트폴리오 투자가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어 국내 산업 발전 상 실익은 거의 없고, 국부의 해외유출(국민의 정부 기간 동안 80조원 규모)은 점증하고 있다.

나머지 산업 전반에 미치는 영향은 단순한 비유를 통해서 추론이 가능하다고 본다. 1차 산업과 3차 산업에서 한국과 미국의 경쟁력은 통계 비교 없이도 동네 구멍가게와 초대형 메가마트의 차이만큼 큰 격차가 있다. 2차 산업에서 미국에 대해 경쟁력이 있는 분야는 자동차와 조선, 반도체를 포함한 IT 산업의 일부로 확인되고 있다. 이 세 분야는 현재 국내 4대 재벌이 독점하고 있다. 대충 계산해도 한미FTA가 체결되면 국내 4대재벌의 매출과 수익률은 급증하나 농업과 서비스업, 중소기업 등 대다수 산업은 문을 닫아야 한다는 얘기다. 그렇다면 이렇게 삼척동자도 알 수 있는 명백한 손익 분석 앞에서 왜 노무현 정부가 앞장서서 한미FTA 체결을 서두르는가?

그 답은 군사안보 협상이라는 대목에서 찾을 수 있다. 결국 남북 관계를 흥정의 고리로 걸겠다는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 노무현 정부가 모든 경제적 손실을 감당하면서 FTA 체결을 마무리해낸다면 북핵 압박과 경제봉쇄를 풀겠다는 것이고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북한에 대한 군사적 압박을 강화하겠다는 협박에 다름 아니다. '을사늑약'에 준하는 경제-안보적 종속을 감당하면서 남북긴장 완화와 남북경협 확대라는 대가를 얻어낼 것인가? 경제종속을 거부하는 대가로 점증하는 군사적 긴장, 나아가서는 전쟁위기조차 감당할 것인가? 결코 쉽지 않은 양자택일이다.

IMF 경제위기를 탈출했던 국민의 정부 5년간 최악의 경제조건에서도 한미FTA 보다 한 단계 낮은 수준의 한미투자협정(BIT)조차 체결하지 않았던 우리 정부가 현재 잘 나가는 한국의 영상산업 전체는 물론 농업과 대다수 산업 기반 전체를 파괴함과 아울러 범국민적 갈등과 투쟁을 야기할 가능성이 매우 높은 최악의 선택을 할 수밖에 없는 그 외의 또 다른 이유를 상상할 수 있을까?

물론 정부가 주장하듯이 한미FTA가 최대 GDP 2%, 중장기적으로는 고용 29만 명 증가효과가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경제규모 전체가 성장한다는 것이 국민 다수의 이익과는 무관하다는 것을 IMF 경제위기 이후, 국민의 정부와 참여정부 두 정부가 이미 실증적으로 입증하고 있다. 고용 없는 성장, 내수시장과 무관한 수출 증대, 정규직보다 더 많은 비정규직, 점증하는 사회적 양극화와 급속한 범죄증가율 등이 바로 그것이다. 이런 양극화 과정에서 가장 많은 혜택을 본 자들이 바로 '삼성'과 4대 재벌, 강남의 부자들이다. 그래서 민주화의 가장 큰 수혜자가 자본이고, 한국은 '삼성공화국'이라는 말이 공공연하게 인구에 회자되는 것이다.

세계 경제의 30% 이상을 차지하면서도 세계에서 가장 높은 사회 양극화의 '모범'을 보이는 미국과 100% 개방(우리 정부 발표로는 90% 개방이라고 해도) FTA를 체결하는 것이 이런 흐름에 휘발유를 붓는 격이라는 사실을 잘 모르겠다고 생각하는 것은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지 않는 이상 불가능한 일이다.(2)

2000년 기준 미국의 지니계수는 0.357로 OECD 1위인데 반해 한국은 0.317이다. 부시 정권 기간 군사비 증가에 비례하여 사회복지재정이 감소한 점을 고려하면 이 격차가 크게 줄었다고 보기 어렵다.(한겨레신문, 2006년 1월 24일자) 지난 5년간 양극화 하의 한편 2005년 미국 대기업 CEO의 연봉은 일반 근로자의 475배로 22배인 영국, 15배인 프랑스, 11배인 일본과는 비교조차 안 될 정도이다. (한겨레신문, 2006년 1월 21일자)
결국 국민 다수가 아니라 대자본의 국익을 위해 FTA가 필요하다는 얘기에 다름 아니다.

현재 중국과 러시아의 급부상, 유럽연합의 확장은 미국과 일본을 초조하게 만들고 있다. 나아가 미국은 자신의 뒷마당으로 생각해온 중남미 지역에서 좌파정부가 확산되는 현실변화로 인해 당황하고 있다. 또 대량살상무기가 발견되지 않아 결국 정당성 확보에 완전히 실패한 이라크 전으로 국제적 망신을 당함과 아울러 국내에서는 베트남 전 때와 비슷한 파급효과가 나타나자, 화살을 이란과 북한 등지에 돌리기 위해 고심 중이다.

또 중국에 대한 압박을 강화하기 위해 주한 미군에게 동북아시아 지역에서의 기동타격대와 같은 이동성을 허용하는 “전략적 유연성” 부여를 위해 노력했고, 최근 노무현정부가 이에 동의했다는 사실 역시 결코 간과할 사안이 아니다. 이는 클린턴 시절의 미국-중국 간의 전략적 동반자 관계가 부시 2세 시기에 이르러 전략적 적대 관계로 급변하고 있음을 입증해주는 대목이다.

그밖에도 최근 들어 미국 헤게모니가 급속히 약화되고 있다는 징후는 수없이 많다. 헤게모니가 약화되면 대개 무리수를 두기 시작한다는 것이 역사의 교훈이다. 일본의 급속한 우경화 역시 같은 맥락에서 이해해야 할 것이다. 정치군사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미국과 일본에 종속되어 온 한국사회가 87년 민주화 이후 어느 정도 종속상태를 벗어나 자립의 길을 개척한 것 같이 보인다고 해서 현상적 자립이 구조적 종속을 능가할 것이라고 오해해서는 안 될 것이다. 삼성 X파일 파동에서도 확연히 드러났듯이 국내 재벌에게조차 가엾게 휘둘리는 참여정부가 미국의 총체적 압력을 견딜 수 있으리라고 보는 것은 정말 착각을 넘어 환각에 빠진 것에 다름 아닐 것이다.

이렇게 서론이 길어진 것은 현재 우리 사회의 진보적 미래를 꿈꾸기 위해서 진정으로 고심해야 할 부분이 바로 현 정세에 대한 다음과 같은 질문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만일 앞서 개괄한 것 같이 87년 민주화의 실익이 자본에게 돌아가 있고, 한국사회의 현재가 철저하게 재벌-관료연합에 의해 유린당하고 있다면, 또한 한미경제안보통합을 통해 21세기의 '을사늑약'이 성큼 목전에 다가오고 있다면, 한국의 사회운동세력은 이에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가?

87년 민주화 이후 세 번의 문민정부를 거치는 동안 한국은 세계에서 가장 역동적인 변화를 겪으면서 다양한 사회운동이 분출한 사회라고 자타가 평가해 왔다. 80년대의 전투적 노동운동을 기반으로 탄생한 민주노총과 전교조, 90년대 10년 사이에 아시아 최대 규모로 성장한 환경운동, 여성부 설립과 호주제 폐지를 이끌어낸 여성운동, 다양한 차원에서 정책과 제도 개혁을 이끌고 있는 수많은 시민운동단체들, 이들이 만들어낸 2000년 총선시민연대와 같은 괄목할만한 활동, 80년대에 비해 급격히 숫자는 줄었으나 <맑스꼬뮤날레>와 같은 유례없는 행사를 만들어낸 수백 명의 좌파지식인들과 실천적 노동운동가들의 연대 노력 등이 그러하다.

그러나 지난 십수 년간 이렇게 다양한 사회운동세력들이 열심히 싸워왔음에도 민주화의 실질적 혜택이 재벌-관료연합에게 돌아가 버렸다면 그간의 운동 목표와 방식에 대해 근본적인 반성이 필요한 것이 아닌가? 아시아 최대 규모로 성장한 환경운동이 새만금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또 비정규직 문제와 지도층의 부패비리로 가속화된 노동운동의 총체적 위기 등은 기존의 사회운동이 이제 임계점에 이르렀음을 시사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개혁적 문민정부라는 슬로건 아래 실제로는 재벌-관료 연합이 주도하는 신자유주의적 흐름이 사회를 잠식해가는 동안 다양한 사회운동은 각개 약진하여 자기 운동 영역을 확대하는 데 주력한 나머지 현상의 다양함에 눈이 멀어 <10:90 위험사회 체제>로의 거시적 전환이 급속히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간과했던 것은 아닌가?

물론 사회적 양극화가 극에 달해 있고 약체 정부는 미국과 자본의 공세에 휘둘리고 있는 한심한 상황에서 최소한의 실천적 희망의 담지체라 할 사회운동마저 전반적으로 무력해지고 있다면 어쩌자는 말인가라는 반문이 가능하다. 그러나 사회운동의 주체와 방식이 역사적으로 고정된 형태를 갖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상기하자.

사회운동의 주체가 먼저 있고 그들이 그때마다 새로운 문제들을 풀어내는 것이 아니라, 시대적 상황이 새로운 문제를 제기할 때마다 새로운 사회운동이 탄생하는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물론 낡은 문제가 폐기되고 새로운 문제가 나타나기보다는 낡은 문제도 해결되지 못한 상황에서 새로운 문제가 파도처럼 겹친다고 보아야 한다. 작금 우리 사회가 당면하고 있는 문제적 국면이 바로 이것이다. 그렇다면 어떤 대안이 가능할까?

2. 노동운동-시민운동을 절합하는 새로운 사회운동의 패러다임

1970년대 우롱당하기 시작하여 1990년대에 이르면 거의 사장되어 버리다시피한 맑스를 칸트와 대조하며 칸트로부터 맑스를 읽고, 맑스로부터 칸트를 읽는 방식으로 맑스로부터 실천적 실마리를 끌어내려 40년간 노력해 왔던 일본의 사상가 가라타니 고진은 2001년 그 결과를 『트랜스크리틱』이라는 저술에서 다음과 같이 기술한 바 있다. 다소 길지만 인용해 보기로 하겠다.

"내가 트랜스크리틱(transcritique)이라 부르는 것은 윤리성과 정치경제학 영역의 사이, 칸트적 비판과 맑스적 비판 사이의 코드 변환(transcoding), 즉 칸트로부터 맑스를 읽어내고 맑스로부터 칸트를 읽어내려는 시도이다...

19세기 이래 칸트와 맑스를 결부시키려는 사상가는 적지 않았다. 일반적으로 그들은 맑스주의라고 불리는 유물론에 결여된 주체적-윤리적 계기를 찾아내고자 했다. 사실 칸트는 결코 부르주아적인 철학자가 아니다. 도덕적=실천적이라는 것은 칸트에게 선악의 문제가 아니라 '자유'(자기원인적)라는 것, 또 타자를 '자유'로서 대하는 것을 의미한다. 도덕법칙이란 너의 인격과 타자의 인격에서 인간성을 결코 수단으로서만이 아니라 동시에 항상 목적으로 대하라'는 것이다...

칸트는 이를 역사적인 사회 속에서 점진적으로 실현해야 할 과제로 생각하고 있었다. 구체적으로 그것은 상인자본주의적 시민사회에 비해 독립소생산자들의 어소시에이션을 목표로 한 것이었다... 칸트의 생각이 추상적이기는 해도 훗날 몽상적 사회주의자나 프루동 같은 아나키스트의 생각을 선취한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내가 젊었을 때 읽은 '국민경제학 비판'이라는 부제가 달린 『자본론』이라는 책에 품었던 경탄은 해를 거듭하면서 사라지기는커녕 오히려 점점 더 깊어갔다...나는 그 '비판'이 자본주의나 고전경제학에 대한 비판이라기보다 자본의 욕동과 한계를 밝히는 것이고, 나아가 그 근저에서 교환(=커뮤니케이션) 행위에 불가피하게 따라다니는 난점들을 찾아내는 것이라는 사실을 서서히 인식하기 시작했다.

『자본론』은 자본주의로부터 손쉽게 벗어나는 출구를 보여주지 않는다. 오히려 손쉬운 출구가 어째서 있을 수 없는지를 밝힘으로써 오직 자본주의에 대한 실천적 개입 가능성을 시사하고 있다...이것이 내가 맑스와 칸트를 결부시키게 된 이유 가운데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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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수이성 비판'과 '정치경제학 비판'을 '비판'이라는 코드를 통해 '트랜스크리틱' 하려는 고진은 '비판'이 비난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작동 가능성과 조건을 해명하고 정당한 권리와 월권을 구별하고 이율배반에서 나타나는 '가능성의 중심'을 철저히 규명하려는 인식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보면서 다음과 같은 가능성을 찾아내고 있다.

"맑스에게 꼬뮤니즘은 칸트적 '지상명령', 즉 실천적(도덕적)인 문제다. 이러한 점에서 맑스는 평생 변하지 않았다. 나중에 꼬뮤니즘이 실현되어야 할 역사적이며 물질적인 조건을 중시했다고 해도 말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맑스주의자는 이러한 도덕성을 바보 취급하고 역사적 필연이나 '과학적 사회주의'를 표방한 결과 바로 노예제 사회를 '구성'하고 말았다. 그것은 '이성의 월권행위'에 지나지 않는다. 만일 꼬뮤니즘에 대한 불신이 널리 퍼져 있다면, 그 '모든 불신의 원천'은 이러한 유의 맑스주의에게 있다고 해야 한다.

우리는 20세기에 꼬뮤니즘이 초래한 비참한 귀결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리고 그 오류를 그저 우연한 것으로 간주해서도 안 된다. 우리는 결코 순진하거나 적극적으로 이념을 말하도록 허락받지 않았다. 그것은 스탈린주의를 부정해온 신좌익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그 결과 꼬뮤니즘을 비웃는 것이 '시대의 유행'이 된 오늘날 그것과는 다르지만 마찬가지로 '심하게 독단론'적인 사고가 번성하고 있다. 또 지식인이 '도덕성에 대한 불신'을 표명하고 있는 사이에 세계적으로는 말 그대로 다양한 '종교'가 융성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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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진이 칸트를 통해 맑스를 재해석해내는 지점은 단순화하자면 다음과 같은 것이다. 자본과 국가를 단지 부정하는 것만으로는 불충분한 이유가 자본이나 국가는 어떤 필연성(칸트가 말하는 일종의 초월론적인 가상)에 뿌리를 내리고 있기에 단순히 무력으로 폐기한다고 없앨 수 있는 것이 아닐 뿐만 아니라 그럴 경우 오히려 더욱 강력하게 부활한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칸트가 이성의 정당한 권한과 월권행위를 구분하는 비판을 수행했듯이 자본과 국가에 관한 깊은 통찰(비판)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5)

이런 점에서 현실정치에서 자본과 국가에 대한 ‘정치경제학 비판’은 철학에서 경험주의와 합리주의에 대한 ‘순수이성 비판’과 상동적인 구조를 지닌다고도 볼 수 있다. 그렇다면 꼬뮤니스트로서의 맑스는 자본과 국가에 대한 대안을 무엇으로 보았는가?

고진은 맑스가『자본론』에서 협동조합의 ‘어소시에이션(association)’을 대안이라고 보았고, 주식회사가 자본주의 내부의 '소극적 지양'이라면 협동조합의 '어소시에이션'은 '적극적 지양'이라고 보았다는 점에 주목한다. 물론 맑스는 후자가 자본과의 경쟁상태에 방치되어 패하든가 아니면 스스로 주식회사로 전화해버릴 운명에 놓여있다는 점에서 그 '한계'를 보았다. 하지만 고진은 자본주의 경제 속에서 그것에 대항하는 비자본주의 생산과 소비의 형태를 만들어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고, 실제로 엥겔스도 레닌도 이를 가볍게 여겼지만, 맑스는 거기에서 꼬뮤니즘의 가능성을 보았다는 점을 재확인한다.

그렇다면 실제로 이 가능성을 현실화할 수 있는 열쇠를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 고진은 『자본론』의 잉여가치 실현 문제를 다루는 가치형태론에서 그 열쇠를 찾을 수 있다고 제안한다.(6)

『자본』이 분석한 자본주의 시스템 하에서 주체 문제는 부차적이다. 주체는 화폐-상품-화폐, 상품-화폐-상품, 생산-유통-재생산이라는 시스템적 관계의 장에 의해 규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본가는 '자본'이라는 장에 서게 되면 능동적이 된다. 화폐를 지니고 생산수단과 노동력을 구매하는 한에서 능동적이게 된다.

한편 노동력이라는 상품을 팔아야 하는 노동자는 생산의 장에서는 수동적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노동자가 유일하게 능동적 주체로 나타날 수 있는 장이 있다. 소비의 장이 바로 그것이다. 소비의 장은 노동자가 임금으로 받은 화폐를 가지고 자본가가 생산한 상품을 사는 입장에 서는 곳이기 때문이다. 자본가가 아무리 많은 잠재적 잉여가치를 생산과정에서 착취했다고 해도 그것을 실현할 수 있는 곳은 소비의 장이며, 이곳에서 자본은 소비자의 의지에 종속되게 된다. 자본은 바로 그곳에서 "목숨을 건 도약"을 행해야 하는 것이다. 소비자가 소비를 하지 않으면 자본의 목숨은 끊어질 수밖에 없다.

화폐경제에서는 생산과 소비, 판매와 구매가 분리되어 있다. 이 분리는 노동자와 소비자를 분리시키고 마치 기업과 소비자가 경제 주체인 것처럼 보여주고 있다. 이런 양상이 노동운동과 소비운동 역시 분리시킨다.

20세기 후반 선진국에서는 노동운동의 쇠퇴와 형해화에 따라 소비자운동이 환경보호, 페미니즘, 소수자운동 등 다양한 형태로 활성화되었으며, 이런 운동들은 일반적으로는 '시민운동'이라는 형태를 취하고 있다. 그러나 이 운동들은 노동운동과 연결을 가지고 있지 않거나 부정적이다.

이런 상황은 90년대 이후 한국의 사회운동에도 적용될 수 있다. 그러나 고진의 말 대로 대부분이 노동자이기도 한 소비자들의 운동은 사실 입장을 바꾼 노동자 운동이며 그런 한에서 중요하다. 또 노동운동은 소비자의 운동인 한에서만 개별 기업이나 공장이라는 국지적인 한계를 벗어날 수 있다. 노동력 재생산 과정이라 할 소비 과정은 육아-교육-보건의료-여가와 오락 등을 포함해 생활세계의 광범위한 영역에 걸쳐 있기 때문이다.(7)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잉여가치의 생산은 노동과정에서 나타나지만 그것의 가치 실현은 오직 소비과정, 노동력 재생산과정에서만 가능하다는 점이다. 소비자들에게 상품이 소비되지 않는다면 잉여가치는 실현되지 않는다.

이런 맥락에서 고진은 맑스를 인용하면서 노동조합 운동은 임금-노동조건을 개선하는 데 크게 기여하긴 했지만 궁극적으로는 교환 계약의 조건을 바꾸는 경제투쟁에 불과한 것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그 때문에 자본의 운동에 제대로 대항하기 위해서는 노동자 운동이 소비자 운동과 결합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실제로 불과 10%의 총불매운동도 자본에게는 치명적이다. 자본과 국가는 노동자의 총파업이나 무장 봉기를 억제할 수는 있지만 결코 불매 운동을 억제할 수는 없다. 고진은 그것이 바로 비폭력 대항운동이라고 말한다.(8)

자본의 자기증식 운동을 그치게 하는 것은 화폐-상품-화폐라는 회로 밖에서 생산과 소비가 결합된 새로운 형태를 창조하는 것이다. 고진은 그것이 바로 생산-소비 협동조합이라고 말한다. 고진은 그런 생각이 칸트에서 프루동으로 이어지고 맑스로 이어짐을 역사적 맥락 속에서 논증한다. (9)

"자유롭고 평등한 생산자들의 연합"(어소시에이션)에서는 임금노동이나 자본주의적 소비가 없다. 그러나 이런 생산-소비 협동조합이 몇몇 개인들의 차원을 넘어서 지역적, 전국적, 국제적으로 확대되기 위해서는 자본으로 전화되지 않는 화폐, 즉 이자를 갖지 않는 화폐에 기초한 결제 수단이나 자금 조달 시스템이 형성되어야 한다. 고진은 자본으로 전화하지 않고 교환을 원활히 할 수 있는 이런 화폐 시스템을 1982년 린턴(Michael Linton)이 고안한 LETS(Local Exchange Trading System: 지역교환거래제도)에서 찾는다.(10)

LETS는 참가자가 자신의 계좌를 가지고 자신이 제공할 수 있는 재화나 서비스를 목록에 자발적으로 올려 교환하고, 그 결과가 계좌에 기록되는 다각 결제 시스템이다. LETS 통화는 중앙은행에서 발행하는 현금과 달리, 재화나 서비스를 제공받는 사람이 그때마다 새롭게 발행하게 되어 있다. 그리고 모든 참가자의 흑자와 적자를 합하면 제로가 된다.

LETS의 특징은 공동체에서의 호혜적 교환과 자본주의적 화폐경제와 비교하면 분명해진다. LETS는 서로 모르는 사람들 사이에서 광범위하게 교환된다는 점에서 시장적이지만, 자본으로 전화되지 않으며 전체로서 제로섬 게임에 기초한다는 점에서 자본주의적 화폐와는 다르다. 이로 인해 화폐/시장/상품이 존재한다와 존재하지 않는다는 이율배반이 해결될 수 있다. 고진은 이런 맥락에서 LETS가 "자유롭고 평등한 개인들의 연합"이라는 맑스적 꼬뮨의 원리와 일치한다고 주장한다.

그것은 단지 경제적인 것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윤리적인 원리이다. 개인들은 언제든지 그만둘 수 있고 복수의 LETS에 속할 수도 있다. 국가에 의한 단일 통화와는 달리 LETS는 복수적이고 다종다양한 것이다. 더욱 중요한 것은 각자가 (단지 계좌에 기록하는 것일 뿐이지만) 통화를 발행할 권리를 갖는다는 것이다.

이렇게 LETS에 기초한 금융시스템이 확대되면 비자본주의적 생산-소비 협동조합이 존재할 수 있게 된다. 노동자는 두 가지 방식으로 자본에 대항할 수 있다. 그 하나는 아우토미아 운동에서처럼 "일하지 않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간디처럼 자본주의 상품을 사지 않는 것이다. 이 둘을 결합한 것이 바로 LETS 시스템을 갖춘 비자본주의적 생산-소비 협동조합이라고 할 수 있다.(11)

그런데 고진은 추가로 다음 사안을 강조한다. 비자본주의적 생산-소비 협동조합은 유통의 장을 거점으로 한 내재적이면서도 초출적인 대항운동이므로 완전히 합법적이고 비폭력적이어서 어떤 <자본제=네이션=스테이트>도 손을 댈 수가 없지만, 그것이 대항운동이기 위해서는 <자본제=네이션=스테이트>의 연합에 대항할 만한 중심과 규모를 갖추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어소시에이션의 어소시에이션>이 될 수 없고 기껏해야 <자본제=네이션=스테이트>의 연합 안에서 국소적으로 반항하는 미미한 운동에 불과하게 되기 때문이다. 1990년대 소련이 붕괴한 이후 현저해진 것이 이런 경향이라는 것이다. 고진은 이런 운동들이 스탈린주의적인 전체화나 대의제적 중심화를 두려워하여 서로 고립되고 분열될 경우 전체 사회에 대한 <자본제=네이션=스테이트>의 통제력이 점증한다는 문제점을 낳고 있다고 비판한다.(12)


실제로 우리 사회에서도 90년대 이후 이런 식의 소규모 자족적 공동체 운동이 확산되어 왔고, 그 중 일부는 들뢰즈/가타리의 논의를 차용하여 자본주의로부터의 "탈주"라고 자칭해 왔다. 하지만 운동이 그렇게 분산되는 사이에 신자유주의는 거침없이 확산되었고, 그 과정에서 노동운동과 시민운동, 소수자 운동의 분열과 대립은 더욱 악화되었다. 그 결과 87년 민주화 체제 이후 민주주의의 실질적 수혜는 재벌-관료 연합에 돌아갔고 사회적 양극화는 몇 배로 증가했을 따름이다.

고진의 말대로, <자본제=네이션=스테이트>의 독재에 반대하는 대항운동이 출발하는 지점은 개인들이지만 그 개인들은 추상적인 공허 속의 개인이 아니라 복잡한 사회적 관계 속에 놓인 개인이라는 점을 직시해야 한다. 개인은 누구나 어떤 형태이든 각기 특정한 젠더, 섹슈얼리티, 인종, 계급, 지역 등의 복잡한 차원에 동시에 속해 있다. 따라서 대항운동은 개인들의 다중 소속을 인정해야 한다.

하지만 대항운동이 분자적인 상태(아나키즘, 무정부주의)로 흩어지지 않기 위해서는 그것들을 다수 차원에서 연결하는 반격자형의 조직화 과정이 필요하다. <어소시에이션의 어소시에이션>은 중앙집중형의 트리형의 조직(아키즘, 국가주의)이 전혀 아니다. 그렇다고 중심을 갖지 않게 되면 서로 고립되고 이산되며 대립하는 것 밖에 남지 않는다.

고진은 이런 양자택일 대신 중심이 있음과 동시에 없는, 역설적인 조직 구성원리로서 <익명의 선거+제비뽑기> 방식의 중앙평의회를 제시한다. 실제로 고진은 이런 원리에 따라 2000년 일본에서 NAM(New Association Movement) 운동을 시작했다.(13)

이렇게 노동운동과 시민운동을 LETS 시스템에 의거한 비자본주의적인 생산-협동조합의 형태로 연결하면서, 그와 동시에 비고정적이고 탈중심화 된 중심을 보다 확대된 차원으로 형성할 수 있는 사회적 연대의 새로운 원리야말로 현재 위기에 처한 우리 사회운동이 하나의 모델로 참조할 만한 것이라고 본다. 이런 모델을 현실의 사회운동에 적용해 보면 다음과 같은 구상이 가능하지 않을까 싶다.

노동자 운동과 소비자 운동의 결합인 생산-협동조합 모델은 모든 운동단위에 적용이 가능하다. 가령 노동운동은 임금 및 노동 조건을 위한 투쟁에서는 노동자 운동이지만 노동자 가족의 생계라는 측면에서 농민단체 및 다른 노동조합(의식주를 생산하는 여타의 노동조합)과 생활협동조합을 함께 구성할 수 있다.

또 노동자 자신 및 가족교육을 위해 전교조 및 민교협, 전국교수노조 등과 대안적 교육공동체를 구성할 수 있다. 녹색운동 단체와 연대하여 공장 안팎의 환경오염 문제나 자전거 타기 운동을 전개할 수 있고, 문화운동단체와 연대하여 생활문화운동과 여가/오락 프로그램을 포함한 문화교육을 시행할 수 있다. 또 보건의료단체 및 여성단체와 연대하여 공동육아나 저렴한 의료서비스 제공프로그램을 공동으로 운영할 수 있을 것이다.

각각의 운동단체들 역시 마찬가지 방식으로 LETS 시스템에 의거하여 생산-협동조합들의 일원으로 참여할 수 있다. 이렇게 하여 노동운동-농민운동-교육운동-문화운동-환경운동-여성운동-보건의료운동 단위들 간의 <어소시에이션의 어소시에이션>이 만들질 수 있다.

물론 이런 식의 사회적 연대는 위로부터-아래로부터-동시다발적으로 진행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고 이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선거+추첨>의 방식으로 "탈중심화 된 중심"을 형성하면서 <자본제=네이션=스테이트>의 연합에 대항할 힘을 새롭게 형성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각 운동단체들이 지닌 진보적, 개혁적 성향과 현재 수행하고 있는 일의 과부하, 개인들의 성향 등으로 인해 이런 일이 동시에 일사분란하게 일어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더욱이 이런 <어소시에이션의 어소시에이션>이 일국 내에 그쳐서는 곤란하며 국제적인 네트워크로 발전해가야 하므로 더욱 어려운 일이 될 것이다.

하지만 어렵다고 미리 포기하기에는 현재 다른 뾰족한 대안이 없다고 본다. 특히 정부가 금년에 한미FTA를 강행하여 2007년부터 시행에 들어간다고 한다면 자본-국가에 대한 감시/개혁 요구는 미국 정부와 미국 자본을 동시에 상대해야 하는 일이 되기에 더욱 더 어려운 일이 될 것이다. 싫든 좋든 금년 안에 새로운 운동을 준비-실천-확산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제 막 시작된 한미FTA 협상 자체를 저지-유예하기 위해서라도 현재와 같은 노동운동-시민운동의 분리, 분열, 대립 구도를 극복해야 함은 물론이다.




(1) 대외정책연구원은 협정이 체결되면 국내성장률은 0.42~1.99%, 수출은 12.1~15.1%가 늘고, 일자리도 10만 3천 곳 정도 늘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그러나 미국무역위원회 2001년 보고서에 따르면 협정이 체결되면 한국의 대미수출은 21% 증가하는 데 반해 미국의 대한 수출은 54% 증가할 것이라고 한다. 정부는 수출의 주력품인 자동차와 전자제품 중심으로 수출증대를 전망하고 있으나, 현재 미국의 자동차 관세가 2.5%에 불과하고 현지생산 물량이 늘고 있어 FTA의 효과는 별로 없을 것으로 예상된다. 또 고용증대를 예상하는 서비스 분야에서는 비정규직 저임금 직종이 많다는 점에서 고용의 질 악화가 예상된다.(한겨레신문 기사 참조, 2006년 1월 31일)

(2) 2000년 기준 미국의 지니계수는 0.357로 OECD 1위인데 반해 한국은 0.317이다. 부시 정권 기간 군사비 증가에 비례하여 사회복지재정이 감소한 점을 고려하면 이 격차가 크게 줄었다고 보기 어렵다.(한겨레신문, 2006년 1월 24일자) 지난 5년간 양극화 하의 한편 2005년 미국 대기업 CEO의 연봉은 일반 근로자의 475배로 22배인 영국, 15배인 프랑스, 11배인 일본과는 비교조차 안 될 정도이다. (한겨레신문, 2006년 1월 21일자)

(3) 가라타니 고진 지음/송태욱 옮김,『트랜스크리틱-칸트와 맑스 넘어서기』(한길사, 2005), 15~18쪽.

(4) 같은 책, 22~23쪽.

(5) 같은 책, 50쪽.

(6) 같은 책, 48~50쪽

(7) 같은 책, 481쪽.

(8) 같은 책, 491~2쪽.

(9) 같은 책, 298~307쪽. “실제로 맑스는 프루동파가 이룩한 파리꼬뮨을 격찬했고 거기서 ‘가능한 꼬뮨니즘’의 비전을 얻었다. 맑스는 자유가 혼돈으로 떨어지지 않고, 따라서 권위에 의거하지 않아도 되는 방법을 모색하고 있었다고 해도 좋다...맑스는 아키즘(Archism, 국가주의)과 아니키즘(Anarchism, 무정부주의) ‘사이’에 서서 쌍방을 공격하려고 했다 해도 좋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맑스는 바쿠닌과 라살 사이에 서서 양자를 ‘비판’한 것이다.”(301~304쪽) 고진도 강조하고 있듯이 이와 같은 맑스의 꼬뮤니즘은 엥겔스와 라살, 레닌과 스탈린 식의 국가주의적이고 전체주의적인 꼬뮤니즘과는 전혀 관계가 없다.

(10) 같은 책, 57쪽. “프루동에 의한 무상 신용과 교환은행 이래, 이러한 시도는 많이 있었는데 LETS는 린턴에 의해 원래 아나키즘이 아니라 국제 경제의 동향으로부터 지역경제를 지키기 위해 고안된 것이다. 그는 1930년대 대불황 속에서 시도된 다양한 지역통화-그 대표적인 것으로 게젤이 구상한 ‘스탬프 통화’(마이너스 이자의 화폐)가 있다-를 검토하고 LETS를 고안했다. 현실에서는 캐나다, 영국, 일본 등에서 지역적으로는 상당히 확산되고 있다.”(495쪽)

(11) 같은 책, 498쪽.

(12) 같은 책, 505~6쪽.

(13) 같은 책, 507~8쪽.
덧붙이는 말

심광현 님은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교수이며, 이 글은 문화과학 45호에 실릴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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