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전환자 성별변경 제도적으로 보장해야”

51개 단체 ‘성전환자 성별변경 관련 법 제정을 위한 공동연대’ 발족


지난 2002년 말 가수 하리수 씨는 법원에 낸 호적정정 신청이 받아들여져 호적상 성별을 남성에서 여성으로 변경할 수 있었다. 이에 따라 ‘1’로 시작하던 하리수 씨의 주민등록번호 뒷부분 첫 자리도 ‘2’로 변경되었다. 당시 하리수 씨에 대한 법원의 결정은 각 언론에 크게 보도되었고, 이후 성전환자의 호적상 성별변경 문제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높아지기도 했다.


그러나 하리수 씨와 같이 특수한 경우가 아니라면 아직까지 한국 사회에서 성전환자들이 법적으로 규정된 성별을 바꾸기란 쉽지 않다. 또 생물학적 성과 정신적인 성의 불일치로 고통을 겪고 있다고 하더라도 경제적 능력이 없는 이들의 경우에는 많은 비용이 드는 성전환 수술 자체가 먼 나라 이야기다. 때문에 지난 2000년-2004년 기간 동안 법원에 호적정정 신청을 낸 사람은 81명에 불과했고, 이들 중 41명에게만 정정 결정이 내려졌다. 또 법원은 하리수 씨에 대한 결정이 있기 직전인 2002년에서야 최초로 호적정정 결정을 내린 바 있다.

이제는 스타가 돼 호적상 성별이 정정된 하리수 씨도 그 이전인 2000년 12월 브로커를 통해 불법으로 여성호적을 취득한 사실이 알려져 논란이 되기도 했다. 이는 성전환자들에게 있어 호적상 성별변경이 그만큼 중대한 문제이지만, 법적으로는 전혀 보장이 안 되고 있다는 반증이다. 따라서 지금까지 성전환자들은 자신의 성정체성과는 다른 법적으로 규정된 성별을 부여받아야 했고, 또 외모로 보여지는 성별과 공부상 성별 불일치는 성전환자들에 대한 온갖 혐오범죄와 인권침해로 이어져 왔다.

“성별변경, 판사 자의적 재량 아닌 제도적으로 보장해야”

이 같은 상황에서 12일 성소수자 단체를 비롯해 51개 인권·사회단체들로 구성된 ‘성전환자 성별변경 관련 법 제정을 위한 공동연대’(공동연대)가 안국동 느티나무 카페에서 발족 기자회견을 열고 ‘성전환자의 성별변경 및 개명에 관한 특례법(안)’(성별변경특례법) 제정을 위한 본격적인 활동에 들어갔다.

공동연대 공동대표를 맡은 이석태 변호사는 이날 기자회견에서 자신이 실제로 진행했던 성별변경 소송을 소개했다. 그는 “두 명의 성전환자들의 성별변경 소송을 진행한 적이 있었는데, 운이 좋게도 그분들의 경우 수술비 마련 등 경제적 여건이 뒷받침되어 승소할 수 있었다”며 “그러나 대부분 성전환자들의 경우 법적 성별변경이 쉽지 않을뿐더러 그에 따라 인권의 사각지대에 놓여지게 된다”고 설명했다.

이석태 변호사는 이어 “현재는 성전환자들의 성별변경이 전적으로 법관의 개인적인 판단에 맡겨져 있다”며 “판사들의 자의적인 재량에 따라 성별변경 여부가 결정되는 방식이 아니라 제도화된 법적 기준이 필요하다”고 법적 성별변경에 대한 일관된 법 기준 마련의 필요성을 제기했다.

“스웨덴, 성전환 고민 단계부터 국가가 지원하는 시스템 마련”

그는 이번 성별변경특례법 제정 움직임과 관련해 “성전환자 문제는 보편적 인권의 문제이자 이미 한 차례 관련 법 제정 논의가 진행된 바 있다”며 “늦은 감이 있지만, 이번에 공동연대에서 법안이 마련되면 분명히 통과될 수 있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이미 지난 2002년 김홍신 전 한나라당 의원 대표발의로 '성전환자의 성별변경에 관한 특례법안'이 발의된 바 있으나, 회기 만료로 법안이 폐기된 상태다.

최현숙 공동연대 운영위원장은 성별변경과 관련된 해외 사례를 소개했다. 그는 “스웨덴의 경우 성전환을 고민하는 이들에게 일단 다른 성별로 살아갈 수 있는 기회를 준 후 이후 본인과 주변 사람들이 스스로의 삶에 만족하면, 국가의료보험을 통해 성전환 수술을 받을 수 있도록 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스웨덴의 경우 단순히 성별변경을 법적으로 보장하는 것이 아니라 개인이 성전환을 고민하는 단계에서부터 국가적 지원시스템이 마련되어 있다는 게 최현숙 운영위원장의 설명이다. 최현숙 운영위원장에 따르면 스웨덴뿐만 아니라 독일, 네덜란드, 이탈리아, 터키 등의 국가들이 특별법 등을 통해 성별변경을 제도적으로 보장하고 있다.

“성전환 수술 여부 관계없이 트랜스젠더에 포함되어야”

한편, 이날 기자회견에는 성전환자 당사자들로 구성된 ‘성전환자인권모임’(지렁이) 한무지 활동가도 참석했다. 국내에서 최초로 결성된 이 성전환자인권모임의 명칭은 특이하게도 ‘지렁이’였다. 단체 이름을 ‘지렁이’로 정한 이유에 대해 한무지 활동가는 “지렁이는 암수한몸인 자웅동체이다. 또 징그럽고 안 좋은 이미지를 가지고 있지만, 흙에는 꼭 필요한 동물”이라며 “성전환자에 대한 사회적 시선이 지렁이와 비슷하지만, 우리도 사회에서 꼭 필요한 사람들이라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 상징적으로 ‘지렁이’로 정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그는 ‘지렁이’ 활동과 관련해 “성전환 수술 여부와 관계없이 성주체성 장애를 가진 모든 이들이 트랜스젠더에 포함될 수 있어야 한다”며 “성소수자들이 각자의 성적지향에 의해 차별받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사회가 되도록 노력하겠다”고 밝혔다.


“성별변경특례법 제정, 성전환자 인권 보장 위한 최소한의 장치”

공동연대는 이날 발족선언문을 통해 “성전환자들은 여성과 남성으로 견고하게 이분화되어 있는 사회에서 어떤 곳에서도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최소한의 ‘권리’를 그리고 ‘권리의 행사’를 생각해 볼 수 없을 정도로 척박한 환경 속에서 견뎌왔다”며 한국 사회에서 성전환자들이 처한 현실을 지적했다.

이들은 이어 “특히나 한국 사회는 주민등록증이 과도하리만큼 일상적이고 무의식적으로 사용되는 만큼 성전환자들이 받는 억압과 차별은 매우 견고하다”며 “성전환자들의 인간으로서의 권리이자 다르게 살 수 있는 권리를 최소한 보장하기 위해서는 성전환자의 성별을 변경하기 위한 법은 반드시 제정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공동연대는 향후 성별변경특례법안 마련을 위한 공청회와 토론회 등을 거친 뒤 오는 9월 중 법안을 입법발의할 예정이다. 이와 함께 공동연대는 성전환자 인권보장을 위한 전문가 토론회와 인권실태조사 등의 사업을 진행할 계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