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이름은 발렌티나 팔마 노보아

멕시코 아텐코 마을에서 일어난 일

최근 멕시코시티 외곽의 아텐코 지역에서는 월마트가 들어서는 것을 저지하기 위한 현지주민과 영세노점상들의 대규모 시위가 진행되고 있다. 마르코스의 사파티스타도 적극 결합하면서 이 시위 소식은 멕시코의 주요 뉴스가 되고 있다.

이 시위 과정에 현장에 있던 칠레 출신 다큐멘터리 감독, 발렌티나 팔마 노보아가 겪은 추방체험기를 참세상이 입수했다. 발레티나 팔마 노보아가 직접 쓴 이 체험기에는 다큐멘터리 감독으로 아텐코 지역에서 촬영을 하다 멕시코 경찰에 연행되어 구타와 성폭력을 당하고, 강제 추방되기까지의 생생한 기록이 담겨 있다. 발렌티나 팔마 노보아는 칠레와 멕시코 변호사의 지원을 받으며 항의시위를 계속 하고 있지만 심한 구타로 인한 후유증으로 병원 치료를 받고 있다. - [편집자 주]



칠레, 산티아고. 2006년 5월 9일 화요일

나의 이름은 발렌티나 팔마 노보아이다. 나는 30살이며, 11년간 멕시코에서 살아왔다. 나는 (멕시코) 국립 인류학 및 역사학 학교(ENAH)를 졸업했으며 현재는 (멕시코 국립) 영화교육센터에 있는 영화학교 4학년에 재학 중이다.

나는 FM3(거주) 학생 비자를 가지고 있다. 지금부터, 2006년 5월 4일 목요일 산 살바도르 아텐코 마을의 폭력사건 중에 내가 목격한, 멕시코로부터 부당하고 근거없는 추방을 당한 것으로 끝맺음 지어진 사건을 이야기하려 한다.


1.

5월 3일 수요일, 텔레비전 뉴스에서 14살 소년의 죽음 소식을 들었다. 인류학자로서 그리고 영화감독으로서 나는 소년의 죽음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래서 나는 산 살바도르 아텐코 마을로 가서 그 마을의 진실을 보기로 결졍했다.

그날 밤, 그곳에서 마을사람들이 세워둔 감시인들을 촬영하고 인터뷰하고 있었다. 매우 추운 밤이었다. 나는 마을사람들이 피워놓은 모닥불에 가까이 다가가서 촬영을 하고 있었다. 새벽의 여명이 새로운 날의 시작을 알리고 있었다. 5월 4일 목요일.

오전 6시였을 것이다. 산 살바도르 아텐코 교회의 종소리가 딩동 딩동하고 계속해서 울릴 때, 경찰이 마을을 습격했다는 소식이 확성기를 통해 울려 퍼졌다. 자전거가 달리고 교회 옆의 빵집은 벌써 문을 열어 신선한 빵의 따뜻한 내음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는 마을 사람들의 자전거와 함께 거리를 채우고 있었다. 죽을 파는 상인이 나에게 조심하라고 말했다. 경찰이 온다는 것은 “정말로 짜증나는 일이라고” 했다.

나는 감시소 쪽으로 갔다. 그곳에서 마을사람들이 멀리서 보이는 경찰들의 움직임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줌인해서 촬영을 했다. 그리고 나는 그들이 굉장히 다수이며, 방패 안에 숨어 수가 적은 척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나는 두려워졌다. 그들은 다수이며 무장되어 있었지만 마을사람들은 수도 적고 비무장이었다.

카메라의 뷰파인더를 통해서 경찰 한명이 우리를 향해 무언가를 조준하고 쏘는 것을 보았다. 그것은 최루탄이었다. 방금 전까지도 향긋했던 빵 굽는 냄새는 최루탄 냄새로 바뀌어졌고, 좁은 거리는 전쟁터가 되었다.

종이 더욱 크게 울리는 가운데 숨을 쉬기 어려워진 나는 마을 광장으로 도망을 쳤다. 거리를 내려다보니 경찰들이 전진해오고 있었다. 마을 사람들이 미약하게 저항을 하기 시작했고, 공격을 받은 경찰들은 사람들에게 폭력을 가하기 시작했다. 나는 카메라를 끄고 남은 사람들과 가능한 한 빨리 도망을 치기 시작했다.

교회 앞에는 공공건물이 있었고 문이 활짝 열려 있었다. 나는 그 안에 들어가 바보같이 이 소란이 지나가기를 바랬다. 그곳에는 나 말고도 젊은이 두 명이 경찰의 공격으로부터 대피해 있었다. 우리 셋은 서로 두려움에 고통스러워하고 있었다.

조심스럽게 거리를 본 나는 약 5명의 경찰들이 쓰러져있는 한 노인을 무자비하게 곤봉으로 때리고 발로 차고 있는 것을 보았다. 공포에 질린 나는 안으로 들어가 다른 두 사람에게 더 좋은 곳으로 숨어야 한다고 말했다. 우리가 있는 곳은 숨을 곳이 없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숨을 곳을 찾기 위해 지붕 위에 올라갔지만 날파리처럼 하늘을 날고 있던 헬리콥터에 의해 발견되었다. 한 남자의 위협적인 목소리가 들렸다. “지붕 위에 있는 놈들, 다 내려와.”

젊은 이들이 먼저 내려갔다. 나는 그들이 경찰들에게 얹어 맞는 것을 보았다. 두려워진 나는 도저히 내려갈 수 없었다. 경찰이 나를 지목하며 다시 소리를 질렀다. “내려와, 이년아. 지금 당장”

나는 경찰들이 두 명의 젊은이들을 곤봉으로 내려치는 모습을 떠올리며 천천히 내려갔다. 경찰 두 명이 나를 잡고 앞으로 밀었다. 그리고 다른 경찰들이 곤봉으로 나의 가슴, 등, 다리를 내리쳤다. 누군가가 나에게 이름을 물었다. 구금자 명단에 적기 위해서였다. 고통에 울부짖으며 대답했다. “발렌티나, 발렌티나 팔마 노보아예요.”

한 경찰이 나에게 입을 다물라고 소리쳤고, 다른 경찰 하나가 나의 가슴을 때렸다. 한 남자가 내가 맞고 있는 모습을 다른 목격자들이 보지 못하도록 방패 속에 나를 감추라고 명령했다. 그들은 교회 옆에 멈추었고, 그곳에서 나에게 다른 구금자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아서 손을 목 뒤에 하라고 명령했다. 그들은 우리를 계속해서 구타했다.

내 핸드폰이 울리자 책임자로 보이는 사람이 경찰들에게 내 가방을 뒤지라고 명령했다. 내 가방 안에는 카메라와 핸드폰, 신분증과 500페소(약 45달러)가 든 지갑이 있었다. 나는 머리채를 잡힌 채 끌려갔다. “트럭에 타. 이년아.”

나는 간신히 움직일 수 있었지만 그들은 나에게 서두르라고 말했다. 그들은 나를 상처투성이에 피투성이인 사람들 위로 던졌다. 그리고 피가 고인 바닥에 얼굴을 묻고 있으라고 명령했다. 나는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지만 경찰의 검은 군화발이 나의 머리를 바닥에 짓눌렀다. 트럭이 출발했고 많은 경찰들이 나의 몸을 더듬었다. 나는 눈이 가려지고 입에는 재갈이 물린 채 최악의 상황이 오지 않기만을 바랐다.

나의 바지가 내려졌다. 트럭이 멈추고 그들이 나에게 내리라고 명령했다. 나는 비틀거리면서 나왔다. 경찰 한명이 말했다. “이년을 여기에 두자.” 그리고 그는 두 손으로 나의 귀를 때렸다. 나는 넘어졌고, 넘어진 나를 경찰 두 명이 나의 뒷덜미를 잡고 버스로 잡아끌었다. 버스에서 한 경찰이 나에게 이름을 물었고 다른 두 명이 나의 가슴을 잔인하게 때리고 나를 피투성이 얼굴을 한 노인의 몸 위에 던졌다. 나의 몸이 떨어지자 그 노인은 고통에 비명을 질렀다. 나는 발길질이 멈출 때 까지 몸을 움직였다. 내가 비명을 지르자 그도 신의 이름을 부르며 비명을 질렀다.

한 여자가 나에게 버스의 뒷 계단통에 있는 장소를 찾으라고 명령했다. 나는 그곳에서 다른 구금자들의 피투성이 얼굴과 바닥에 흥건한 피를 볼 수 있었다. 나는 피를 흘리지 않았지만 나의 손과 옷은 다른 사람들의 피로 흥건히 젖어 있었다. 내 옆에는 움직이지 못하고 신음소리만 내는 사람들이 있었다. 더 많은 사람들이 잡혀와서, 구타와 비명 속에 구금자 명단을 채워나갔다. 얼마나 많은 시간이 흘렀는지 모른다. 버스는 문이 닫힌 채 움직이기 시작했다.

우리는 두세 시간 동안 원을 돌고 있었다. 고문이 시작되었다. 나는 눈을 붙이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내 옆에 있던 노인의 신음소리 때문에 잠들 수 없었다. 그 노인은 이렇게 말했다. “내 다리, 내 다리. 신이시여. 제발.”

나는 내 바로 옆에서 죽었던 사람을 생각하며 울었다. 나는 아주 잠시 동안이었지만 그의 다리를 주무르며 그를 안정시키려 했다. 경찰들은 나의 손을 곤봉으로 때리면서 위협을 했다. 나는 몸짓으로 그들에게 나를 때리지 말 것을, 자비를 요청했다.

나는 그의 이름을 물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만약 내가 죽더라도 울지 마시고 나를 위해 파티를 열어주세요.” 나는 조용히 울었다. 다른 구타당한 시체 속에서 혼자임을 느끼면서, 경찰들이 우리를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데려가 우리를 죽여서 실종자로 만드는 최악의 상황을 생각했다.

잠시 동안 나는 잠이 들었다. 그러나 피와 죽음의 악취가 나를 깨웠다. 눈을 떴을 때, 나는 감옥의 벽을 보았다. 버스가 멈추고, 어떤 목소리가 우리에게 뒷계단을 통해 나오라는 명령을 했다. 그들이 나에게 서있으라고 말했다. 문이 열리자 눈물자국 가득한 나의 얼굴이 본 것은 정렬해 있는 경찰들이었다. 나는 한 번 더 두려움을 느꼈다.

아래에서 목소리가 나와 문을 닫고 죄수들을 얼굴을 가리고 이동시키라는 명령을 내렸다. 경찰들이 내 자켓을 얼굴 위에 뒤집어 씌웠다. 그리고 문이 다시 열렸다. 한 경관이 한손으로는 내 바지를 잡고 다른 손으로는 내 머리를 잡아 내렸다. 경찰이 나를 때리기 시작했고 다른 죄수들은 줄을 섰다.

감옥의 문이 열리고 경찰들이 좁은 통로로 우리를 밀어 넣었고, 그동안에도 계속해서 폭행을 가했다. 등록 테이블에 도착하기 전에, 나는 실수로 머리를 들어 한 경관과 눈을 마주쳤다. 그러자 그는 나의 배를 주먹으로 때렸고 나는 한동안 움직일 수 없었다.

테이블에서 나의 이름과 나이, 그리고 국적을 물었다. 그 후 나는 작은 방으로 끌려갔고, 그곳에서 한 뚱뚱한 여자가 나의 옷을 벗겼다. 그녀는 내가 맞아서 잘 움직이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빨리빨리 움직이라고 요구했다. “이보세요. 저는 굉장히 많이 맞았어요. 좀 봐주세요.” 나는 그녀에게 말했다. 그녀는 나를 검사했고 나는 다시 옷을 입었다. 그리고 그들은 다시 나의 자켓을 머리 위에 뒤집어 씌웠다.

나는 방을 떠났다. 경찰들은 여자들을 줄을 세우고 머리를 숙이고 감옥 안마당으로 나가도록 했다. 다음에 나는 그곳을 톨루카의 도시에 있는 “알몰로이타”라고 부르는 것을 들었다.

우리가 감옥 시설 안에 들어갔을 때가 5월 4일 오후 2시 경이었을 것이다. 그들은 우리를 식당 안으로 데리고 가서 남자와 여자를 나누었다. 한쪽 구석에서 울던 우리 여자들은 우리가 당했던 신체적 학대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한 10대 소녀가 나에게 찢겨진 속옷과 머리 위에 난 피투성이의 상처를 보여주었다. 또 다른 여성은 두 대의 픽업트럭 사이에서 폭행을 당하면서 다음과 같은 얘기를 들었다고 한다. “너희 창녀들을 죽일 것이다.”

한 젊은 여성은 나에게 아마도 임신한 것 같다는 이야기를 했다. 그녀는 우리의 동정어린 손길을 꽉 움켜쥔 채로 흐느끼고 있었다. 여성들은 충격을 받은 상태였다. 남성들은 우리 여성들이 잔인한 구타로 피를 흘리고 얼굴이 엉망이 되는 사이에도 자기들끼리 잡담을 하고 있었다. 그때 한 여성이 우리에게 다가와 몇몇의 이름들을 부르기 시작했다. 우리가 그룹으로부터 떨어져 있기를 요구한 것이다.

그 명단에 크리스티나, 마리아, 사만사, 발렌티나 등 우리들 넷의 이름이 포함되어 있었다. 우리는 마리오라는 이름의 남자와 함께 있게 되었다.

우리 다섯은 외국인 억류자였다. 교도소장처럼 보이는 남자가 다가와 우리에게 여기서는 안전할 것이며, 아무도 우리를 때리지 않을 것이고, 감옥에 오기 전에 있었던 모든 일들은 자신과 아무 관계가 없다고 마치 감옥 안에서는 우리가 폭행 당하지 않은 것처럼 말했다. 우리는 전화기를 쓸 수 있도록 요청했으나 거절당했다.

가장 심하게 부상을 입은 사람들이 분류도어 감옥의 한두 명 밖에 없는 의료팀에게로 보내졌다. 백명 이상의 억류자 중에서, 심하게 다친 사람들은 40명이었다. 가장 처음 떠난 사람은 버스에서부터 죽어가던 늙은이였다. 우리는 그를 다신 보지 못했다.

우리의 의료검사 차례가 돌아왔다. 나는 가슴과 등, 어깨, 손가락, 대퇴부, 다리에 타박상을 입었다. 나에게 호흡곤란 증세가 있자 X레이 촬영을 권고했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간호사와 의사는 진찰하면서 나와 내가 입은 상처들에 무관심했다. 나는 의료실을 나와 크리스티나와 마리아, 사만사, 마리오의 검사가 끝나기를 기다렸다. 불성실한 의료 검진이 끝나고 그들은 진술서를 받기 위해 우리를 방으로 데리고 갔다.

“진술서를 쓰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그것은 당신의 권리이니까요. 하지만 당신에게 일어났던 일들을 공식적으로 진술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한 여자가 말했다. 우리가 공식적인 진술서를 만들고 있는 동안, 넥타이를 메고 좋게 차려입은 한 무리의 사람들이 잡담을 하며 들어왔다. 그들은 우리에게 우리가 누구이며, 왜 아텐코 마을에 왔는지, 그리고 아덴코 마을 사람들이 얼마나 위험한 사람들인지 아느냐는 따위의 질문을 했다.

비가 내리기 시작했고, 그들은 우리를 다른 억류자들과 함께 식당으로 옮겼다. 그들은 우리를 앉게 했다. 우리는 멕시코인 억류자와는 접촉할 수 없었다. 화장실을 이용할 때에도 허가를 맡아야 했다. 연방 인권국 직원들이 우리의 신상명세서와 우리 상처를 찍은 사진을 가지러 왔다. 그들은 기계적으로 일했으며, 흥미있는 것처럼 꾸미는 모습은 없었다.

그들은 우리에게 지문을 찍을 것과 정면 사진, 프로필 사진을 요구했지만 이것이 범죄 목록이 아니라 필요한 기록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우리가 새벽이 되기 전에 풀려날 것이라고 했다. 차가운 커피와 롤빵이 우리의 저녁식사였다.

자정 쯤 되었을 것이다. 나는 딱딱한 나무 의자에 누어 잠을 청했다. 하지만 도저히 잠들 수 없었다. 너무 추웠고 덮을 이불이라곤 하나도 없었다. 남자 감방에서 길게 땋은 머리를 한 남자가 내가 잠을 이루지 못해 초조해하는 것을 보았다. 우리는 감방을 사이에 두고 바디 랭귀지로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그때, 간수가 나타나 외국인 5명의 이름을 불렀다. 우리는 일어나서 작은 목소리로 다른 억류자들에게 이별인사를 하고 그곳을 떠났다.

그들은 우리를 어딘가의 체크아웃 방으로 데려가서 몇 개의 소지품을 돌려주고 트럭에 태웠다. 그리고 우리를 톨루카에 있는 이민국에 데려간다고 말했다. 감옥 바깥에서 나는 내 이름을 부르는 친숙한 목소리를 들었다. 나는 빗장을 통해 바깥을 살펴보았고, 내가 잘 있는지를 묻는 친구들을 발견했다. 나는 친구들에게 이들이 나를 톨루카에 있는 이민국에 데려간다는 말을 했다.

내 친구들은 나에게 그들이 나를 따를 것이며, 나를 버리지 않을 것이라고 말해주었다. 나의 고모인 모니카는 나에게 내 출입국 문서가 담긴 봉투를 건네주었다. 그리고 나의 스승이자 멕시코에서 어머니와 같은 존재였던 마리아 노바로는 나에게 따뜻한 잠바를 주었다. 그리고 나는 차에 올라탔다. 차문이 닫히고 차는 우리를 태우고 빠르게 출발했다. 우리는 몇 가지 행정적인 절차를 위해 톨루카에 있는 이민국에 멈추었다. 그리고 그곳을 떠나 우리는 멕시코시티에 있는 “라스 아구하스”라고 알려진 출입국관리기관으로 갔다.

우리가 최종적으로 도착한 시간은 새벽 3시였다. 다시 한 번, 나의 부상 상태를 증명하기 위해 무성의한 의사에게 진찰을 받았다. 사무실이 문을 열지 않은데다가 직원들도 그리 많지 않아 우리는 잠깐 잠이 들었다. 오전 7시에 도우미들이 시리얼과 우유를 가져다주었다.

그리고 그들은 나의 말을 들었다. 나의 신상정보에 대한 질문들 이외에 나에게 “사파티스타 민족해방군에 대해 아는가?”라던가 “당신은 유니버시티 시티(UNAM, 국립 대학)에 있었는가?”, “세계 물 포럼에 참가하였는가?”, “다른 외국인 구금자들을 알고 있는가?” 따위의 질문을 해댔다.

나는 나의 출입국 서류, 대학의 학과로부터 온 편지, 나의 스승인 마리아 노바로의 편지, 여권, 칠레주민등록증, 국제학생증 등이 첨부된 진술서에 서명을 했다. 그리고 나는 멕시코시티의 칠레 영사로부터 나의 이름과 칠레 주민등록번호, 그리고 멕시코시티에 친척이 있는지 등에 대해 묻는 전화를 받았다. 그는 나에게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모든 일들이 관계법에 따라 진행될 것을 보증하는 것이라고 말해주었다.

나는 공식적인 진술서를 만들기 위해 돌아왔다. 그리고 그들은 사파티스타 민족해방군, 마르코스 부사령관, 그리고 아텐코에 대한 질문들을 반복했다. 그러는 동안 출입국 센터 바깥에서는 나의 친구들과 가족들이 모였다. 그러나 나는 그들과 연락할 수 없었다. 몸짓과 손짓을 통해 그들과 연락해보려고 했지만 당국자들은 그런 것까지도 못하게 했다.

그들은 나를 방 안으로 안내했다. 세 명의 남자가 나를 도와주러 왔다고 말했다. 그들은 더 많은 얼굴 사진과 증명사진을 찍고 대화를 기록했다. 그들은 나의 이름이 무엇인지, 다른 가명이 있는지, 사파티스타 민족해방에 대해 들었는지, 라콘돈 정글에 가본 적이 있는지, 다른 사람들의 이름을 말해줄 수 있는지, 내가 만들었던 다큐멘터리들이 어떤 것들이었는지 등에 대해 질문했다.

그들은 내 친구 아메리카 델 발레가 나에 대해 걱정하고 있다고 말해주었다. 왜냐하면 아텐코에서 탈출할 때, 나와 헤어졌기 때문이다. 칠레에 도착하기 전까지, 나는 그녀가 아텐코의 지도자이며 현재 경찰에 의해 수배중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심문이 끝나고, 그들은 컴퓨터와 연결된 정교한 기계를 이용하여 나의 지문을 채취해갔다. 그들은 나를 다른 방으로 데려갔다. 그곳에는 국가인권위원회 사람 세 명이 기다리고 있었고 스페인 여성 구금자 두 명이 있었다. 그들은 끈질기게 변호사를 불러서 혹시 있을지도 모르는 강제추방에 반대하는 소송을 걸도록 충고했다. 상황은 이미 긴박해졌다.

그래서 내가 위원회 변호사 한명에게 펜과 종이를 부탁해서 “변호사”라는 글을 써서 창문을 통해 친구들에게 보여주려 생각했을 때, 이민국에서 한 사람이 들어와 내가 쓴 글을 보고 다음과 같이 물었다. “변호사가 필요하십니까? 내가 변호사입니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나는 그에게 항의 소송을 원한다고 말했다.

그는 항의 소송에는 도움을 줄 수 없다고 했다. 또 한 달 동안 입출국 구치소에 머물러야 하며, 어쨌든 곧 모두 자유롭게 될 것이라고 했다. 인권위원회의 여성들은 이에 반대했으며, 그가 바깥에서 나를 기다리는 사람들 중 한명과 내가 얘기할 수 있도록 해줘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이를 허용했으며, 나는 베레니체와 얘기를 했다. 나에게 주어진 시간은 5분이었다. 나는 그녀에게 항의 소송이 필요하다고 말했고, 그녀는 그것이 이미 진행 중이라고 말해주었다. 우리의 짧은 만남은 갑작스럽게 끝났다. 그리고 그들은 나에게 잠시 동안 의료 검진을 하도록 했다. 한 남자가 갑자기 들어와 검진을 중지시키고 나를 다른 곳으로 이동시킬 것이라고 말했다. 나는 그에게 나를 어디로 데려갈 것인지를 물었으나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의료 진찰에서 떠날 때, 나는 인권위원회 사람 중 하나에게 달려가서 바깥에서 기다리고 있는 친구들에게 내가 다른 곳으로 옮겨갈 것이라 전해달라고 말했다. 나는 그 남자에게 다시 나를 어디로 데려갈 것인지를 물었고, 그는 “이민국 주 사무실”로 갈 것이라고 대답했다. 그들은 나의 질문을 막고 나를 개인 차에 태웠다. 차에는 나의 칠레인 친구인 마리오도 있었다.

내가 차에 타자 3명의 경관이 함께 탔다. 그들은 문을 닫고 창문을 올렸다. 출입국 센터의 문이 열리고 마치 도망치듯 차가 출발했다. 우리는 심하게 정체된 고속도로를 누비듯이 시속 100km 이상으로 달렸다.

나는 그들에게 어디로 가는지를 물었지만 그들은 대답이 없었다. 곧 나는 우리가 공항을 향해 가고 있으며 차 두 대가 우리의 차를 따라오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 차 중 한 대에는 독일 여성인 사만사가 타고 있었으며 다른 차에는 스페인 여성들인 마리아와 크리스티나가 타고 있었다. 이렇게 부당하게 추방당하고 있는 절박한 상황에 맞서서 나는 아무 것도 하지 못했다. 단지 눈을 감고, 이를 악물면서 “이건 또 다른 폭력이야”라는 생각밖에 할 수 없었던 것이다.

공항에 도착한 시간은 약 6시 정도였다. 그들을 우리를 차에서 내리게 하고는 사방이 하얀 방으로 데리고 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우리는 1시간 이상을 구금되어 있었다. 그 후 그들은 우리를 공항 대기실로 데리고 가서 감시를 했다. 맨 처음 사만사의 비행기가 출발했다. 우리는 계속 기다렸다. 그동안 나는 아무 것도 하지 못한 채 그저 울고만 있었다. 나는 몸이 안 좋아져서 일어나 복도로 가려고 했다. 그러자 이민국 안내원 한 명이 다가와 자리에 계속 앉아있으라고 했다.

“몸이 안 좋단 말이에요.”
나는 그에게 말했다. “제발 좀 놔둬요. 도망가지 않을 거예요.”

나는 계속 울고 있었다. 경찰관 한 명이 다가와 이렇게 말했다.
“그만 하세요. 그런 행동은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당신은 추방되는 게 아니에요. 단지 잠시 이 나라에서 쫓겨나는 겁니다. 언제든 다시 돌아올 수 있어요.” 순진하게도, 나는 그의 말에 진정을 했다.

우리가 굉장히 불안해하자, 그들은 우리를 공항의 바에 데리고 가서 담배를 필 수 있도록 했다. 그들은 밤 11시 란 칠레 항공을 통해 떠날 것이라고 말했다. 그들이 나와 마리오를 불렀다. 우리는 마리아와 크리스티나에게 포옹을 하며 작별인사를 했다. 그리고 우리는 비행기에 탑승했다.

비행기 안에서, 승객 한 명이 나에게 나가와 친구들의 편지를 살짝 전해주었다. 그들은 바깥에서 이 부당한 추방을 막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했다. 나는 내가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느끼며 눈물을 흘렸다. 내 옆에 앉은 이민국 안내원이 나에게 무슨 일이 있나고 물었다. 나는 그녀에게 나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 내가 멕시코에서 11년을 살았다는 이야기, 이 나라에서의 나의 인생,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절대 말하지 않았다는 이야기, 모든 과정들이 불법이었으며 경찰에게 폭행을 당했다는 이야기들을 했다.

그녀는 나에게 자신은 칠레행 비행기에 타기 단지 30분전에 알았으며, 아무도 그녀에게 아무런 이야기도 하지 않았지만 뭔가 이상하다는 느낌을 받았다는 말을 했다. 보통 국외 추방자들은 추방당하기 전에 적어도 한 달은 이민국 보호소에 머문다고 했다.

나의 추방에 대한 진실은 묻혀졌다. 나는 그녀와 잡담을 하였으며, 그녀에게 짧은 시간 산티아고에 머물 장소를 찾을 수 있도록 조언을 해주었다. 극도의 피로와 무력감이 나에게 엄습했다. 나는 잠이 들었다. 그리고 창문 사이로 안데스의 정상이 모일 때 잠에서 깨어났다. 비행기가 착륙했다. 그들은 우리를 국제경찰에게 인도했다. 그곳에서 국제경찰은 우리의 추방 그리고/혹은 국외 퇴거의 이유에 대한 진술서를 받았다.

밖에서는 가족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눈물을 흘리고, 키스를 하고, 껴안았다. 우리는 부상정도를 입증하기 위해 병원으로 갔다. 그리고 빠르게 텔레비전 및 라디오 기자회견을 가졌다. 우리는 추방의 불법성과 우리가 당한 경찰의 무자비함에 대해 비난을 했다.


2.

여기서 나는 여러분들에게 다음에 대한 나의 분개와 분노를 같이 분명히 말하고자 한다.

a) 고문의 도구로서 육체적, 정신적, 성적 폭력의 사용과 여성에 대한 억압
b) 모든 구금자가 당하고 외국인조차 신경쓰지 않는 경찰의 잔인한 만행
c) 나의 추방에서의 두 가지 불법성 : 첫째, 나의 출입국 서류는 틀린 점이 하나도 없었다. 그리고 둘째, 나의 청원은 소송 중에 내가 더 이상 멕시코에 거주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거부되었다. 그러나 사실 나는 그때 멕시코에 있었다.


3.

위와 같은 이유로, 우리는 다음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우리의 행동을 이끌기 위해 변호사와 논의 중이다. :

a) 칠레와 멕시코 정부와 함께 가능한 모든 공식적 방법을 통해 멕시코에서 계속 공부할 수 있는 권리 회복
b) 칠레 주재 멕시코 대사관에 대한 외교적 압박
c) 상해 사건을 일으킨 경찰에 대한 형사 고소
d) 불법 추방을 행한 멕시코 정부에 대한 소송
강간 반대! 여성과 남성을 비인간적으로 다루지 마라!
잔인한 폭력과 고문 반대! 폭력에 대한 정당화 반대!

발렌티나 팔마 노보아

[번역] - 조두영
덧붙이는 말

발렌티나 팔마 노보아 님은 칠레 다큐멘터리 감독이며, 멕시코 국립 인류학 및 역사학 학교(ENAH)를 졸업하고, 현재 멕시코 국립 영화교육센터에 재학 중이다.

태그

로그인하시면 태그를 입력하실 수 있습니다.
노보아(칠레)의 다른 기사
관련기사
  • 관련기사가 없습니다.
많이본기사

의견 쓰기

덧글 목록
  • 꿈돌이

    남 얘기가 아니군요.
    초국적 기업들이 지구 이곳저곳에서 사람 여럿 죽입니다.


  • 더나은 세상을 꿈꾸며

    최초 한국에 대형 마트가 들어 섯을때 과연 시장에서 노점상하시든분 소단위 상점을 여시는분들이 과연 자신의 미래를 보앗을까
    그래도 맥시코는 어느정도 낙후된 사회라지만 자신들이 처할 상황을 알고 시위를 시도 하엿내요 정부와 자본이 민중의 살과 피로서 그자리를 참탈하겟지만...
    현재 우리 나라에 FTA가 다가 오면 현재 대부분의 금융자본이 공공부분 대기업을 떡주무르드시하지만 이잰 아에 멍석깔고 배두들기면서 착취 하겟내 ... 이나라의 노동자 서민들은 그런 날을 보는 시야가 께어 있을려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