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을 싫어하게 된 소설가의 변명

[특별기획 : 노동문학? 있다 없다](1) - 포크레인 운전하는 소설가 안재성


민중언론 참세상은 잊혀지거나 몰랐던, 하지만 아직도 살아있는 노동문학 작가들의 삶과 문학의 솔직한 고백을 '특별기획 : 노동문학? 있다 없다'의 제목으로 연재한다. 앞으로 연재될 글들은 지난 7월 8일 '인천남구 학산 문화원'의 주최로 스무 명의 노동문학 작가가 참여하여 진행된 '노동문학 작가대회-노동문학의 회고와 전망'의 자리에서 발표된 글이다. 이번 기획은 민족문학작가회의 자유실천위원회의 도움을 받아 진행합니다. - 편집자 주




1. 나는 가끔, 공개하기 부끄럽도록 단순하고 유치한 주장을 하곤 한다. 정치문제, 여성문제, 문학의 문제까지 도무지 지성적이지 못한 해석과 냉소적인 처방으로 친구들의 핀잔을 듣는다. 친구들은 나의 이 단순무식이 십여 년 세월을 포클레인 기사로 막노동판을 누비고 다닌 탓이라 변호해주지만, 사실은 그것이 나의 본질적인 한계이자 때로는 장점이 되기도 한다는 것을 나 자신은 잘 알고 있다.

거짓말이란 게 훤히 들여다보이는 소설을 쓰느니 사실에 근거한 역사 다큐멘터리를 쓰겠다는 선언은 그 중에서는 상당히 합리적인 결정에 속한다.

소설가라는 사람이 소설을 우습게보게 된 사연에 별다른 논리나 철학이 있던 건 아니다. 알량한 소설 두어 편 펴낸 이후로는 욕심에 맞는 수준의 글이 써지지도 않고 억지로 쓴 책들마저 평단과 독자들의 냉대를 받을 때부터 소설이 싫어지기 시작했다.

여기에 90년대 들어 한국문단을 주도한 새로운 경향의 소설들이 불만을 누적시켰다. 이들 소설들 속에서 80년대까지 때로는 교조주의 도식처럼 소설의 주제가 되었던 인간의 문제, 정의의 문제, 이타적인 희생의 가치 따위는 비웃음거리로 치부되었다.

불륜을 토대로 한 온갖 뒤틀리고 비틀어진 연애담, 독자로부터 동정도 감동도 불러일으키지 않는, 소위 쿨한 사랑과 결혼, 이혼 이야기들, 정 쓸 게 없으면 소설가 이야기를 쓰다 못해 엽기적인 소재들을 들춰내는 소설들이 도무지 내 취향에 맞지 않았다.

고등학교 시절에 몰래 읽었던 포르노보다도 더 노골적이고 적나라한 성행위 묘사가 필수처럼 되어, 한때 민중주의적인 문학을 했다는 후배들의 작품들 속에서도 없어도 되는 양념이 되어 참맛을 버리는 것도 우스웠다.

새로운 작가들의 섬세한 심리묘사와 감칠맛 나는 문장들은 글 못 쓰는 소설가의 질투를 불러일으킬 만도 했다. 그러나 끝까지 읽어본 책이 거의 없을 정도로 역겨운 작품이 더 많았다. 아무리 훌륭한 문장과 감성을 갖추었더라도 사적인 감정을 다루었을 뿐인 ‘사소설’에 재미를 느낄 수 없었다. 꼭 남의 일기를 훔쳐보는, 그것도 세련된 가식으로 포장된 가짜 일기를 훔쳐보는 기분이 들뿐이었다.


벗어나기 힘든 80년대 경험의 한계에 갇혀 고지식한 주의주장과 직설적인 문장의 한계에서 벗어날 능력도 없고 그러고 싶지도 않은 나는 도저히 그들의 풍부한 감수성과 현대적 감각을 따라갈 수 없다고 판단했다. 나아가 그런 글들에 매달리는 출판문화와 처녀독자들의 독서취향이 싫어졌다. 소설이 싫어졌고 소설가들이 싫어졌으며 독자들마저 경멸하게 되었다. 물론 아무것도 쓰지 않게 되었다.


포클레인 기사로, 복숭아 과수원과 소규모 한우 농장을 하면서 십년 가까이 문학을 멀리하던 끝에 내가 선택한 방식은 소설의 수법을 차용해 보다 읽기 좋게 만든 다큐멘터리였다. 2년 전 발간한 <경성트로이카>와 이번에 출판되는 <이관술 1902-1950>이 그것이다.

소설도, 논문도 아닌 애매한 형식이 되다보니 어느 쪽에서도 인정받기 어려운 처지가 되어버렸지만 적어도 역사와 사회에 관심이 있는 이들을 숨겨졌던 진실에 쉽게 접근할 수 있게 해준다는 데 의미를 두었다.

물론, 나의 단순명쾌한 해법이 다른 작가들에게는 전혀 생경하게 받아들여질 수도 있음을 알고 있다. 며칠 전, 절친한 친구가 퍽이나 조심스럽고 진지하게 말하는 것이었다.

“이런 말 한다고 서운해 하지 마라. 이런 말하기 미안하지만, 내가 보니까 너는 소설보다 다큐에 더 어울리는 것 같아. 너의 문장이나 관심이 그래. 이런 말 한다고 충격 받는 거 아니지?”

관념주의적인 작가도 아니고 노동문학으로 시작해서 지금도 전업 작가로서 노동자와 농민, 도시빈민 이야기만 쓰고 있는 녀석의 말이야말로 나를 무척 놀라게 했다. 소설보다 다큐에 어울린다는 평가가 왜 서운하고 미안하고 충격이란 말인가?

인터넷 서점의 집계에 따르면 <경성트로이카>의 주된 독자는 신문방송기자요 다음이 역사학자, 노동운동가들이었다. 내가 쓴 책이 사실을 중시하는 이들에게 가장 인기가 있다는 데 상당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소설이 아니라서 가치가 떨어진다는 식의 평가를 듣다니 어리둥절할 지경이었다.

여기서 나의 그 무지막지한 말버릇이 또다시 발동하는 것을 어쩌랴? 소설가들이여 네 주제를 알라! 어설픈 거짓말로 너 자신을 포장하려 하지 말고 타인의 이야기와 역사적 사실을 각색해 보라, 안되면 차라리 있는 그대로 사실만을 써라. 그러면 모든 것을 얻게 될지도 모른다.

2. 누구로부터 배웠는지는 알 수 없으나 언제부터인가 내 의식 속에는 소설가의 기원이 광대라는 인식이 박혀 있었다. 지배자들의 유흥 장소에서, 아니면 시장바닥에서 행인들을 상대로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주고 잔돈을 챙기는 어릿광대들로부터 소설을 포함한 문학이 시작되었다고 생각해 왔다.

소설, 혹은 소설가가 대중들로부터 존경의 대상이 되고 지도적인 위치를 갖게 된 것은 불과 1,2백 년 전 계몽주의 시대 들어서라고 말이다. 빅토르 위고, 톨스토이, 헤밍웨이 같은 대가들이 당대의 사회상을 그리고 인류가 나갈 길을 제시함으로서 존경을 받게 되었다고 말이다.

내가 소설을 좋아하게 된 것 역시 계몽주의 시대의 작품들 때문이었다. 세계문학전집을 통해 만난 작가들은 재담이나 들려주는 광대가 아니라 선생이요 학자요 지도자였다.

하지만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서양의 소설가들은 계몽가의 직함을 버리고 새로운 지위를 추구하게 된다. 한국의 경우는 90년대 들어 변화가 시작되었다. 광대도 선생도 아닌 이 새로운 위치를 딱히 표현할 수 있는 말은 생각나지 않지만 본인들이 인식하든 말든 또 다른 특권층이라는 점은 확실하다.

문제는 오늘의 소설가들이 중세 이전의 광대들은 물론 계몽주의 시대 소설 선생님들보다도 더 인기가 없고, 존경도 받지 못한다는 점이다. 한국의 계몽주의 시절인 7,80년대는 소설가가 존경도 받고 책도 제법 잘 팔렸다. 웬만하면 수십만 권씩 팔렸으니까.

90년대 이후로는 그런 재미가 없어졌다. 유명하다는 작가들조차 1만부 팔기가 어렵다는 말이 나오니 말이다. 개봉 보름 만에 1천만 관객을 자랑하는 진짜 ‘괴물’같은 영화들이 등장하는 시대에 불과 수천 독자를 얻기가 힘드니 안쓰러운 정도가 아니다.

포클레인 기사의 무지막지한 시각으로 보건데 이는 명백히 자업자득이다. 누가 돈을 주고 남의 사생활 일기를 사보려 하겠는가? 안네프랑크의 절박한 일기도 아니고 한량한 소설가의 고충이니 연애담이나 늘어놓은 느끼한 문장의 일기를 돈 주고 사겠는가?

기름을 처바른 듯 감각적이고도 난해한 문장, 줄거리조차 불명확한 지루한 이야기들, 주인공의 이름도 외우기 힘든 외국 배경의 소설들을 읽어가기가 얼마나 힘든지, 작가 본인은 알고나 있는지 모르겠다. 문학적으로는 새로운 시도라 칭송받겠지만 나 같은 단순무식한 독자들을 설득하기는 쉽지 않다.


남을 즐겁게 하고 눈물과 웃음을 던져주는 전통적인 의미의 광대에서 타인을 가르치고 계몽하는 사상가의 반열까지 올랐던 소설가들의 변신은 그다지 성공적이지 못했던 것이다. 문학의 죽음은 이제 공공연한 화두가 되어 버렸다. 어떻게든 대중의 사랑을 받아보려고 이리 기웃, 저리 기웃해 보지만 존재마저 위태로운 처지가 되어 버렸다. 존경도 인기도 잃어버린 가난하고 외로운 존재들이 되어버린 것이다.

3. 거름더미 속의 지렁이 떼를 들여다보듯 살아남으려 버둥대는 소설가들의 몸부림을 내려다보고 있노라니 남의 일 같지만은 않다. 일시적으로 다큐작가로 변신하기는 했으나 언젠가는 다시 소설의 세계를 기웃거릴 처지를 생각해 냉소를 거두고 진지하게 몇 마디는 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어차피 깡무식을 자처한 마당에 잘 팔리는 영화들과 고전문학의 공통점을 나열해 보고 싶다. 고귀하고 수준 높은 문학을 하고 싶은 이들에게는 다분히 폭력적인 진단으로 보이겠지만 나의 태생이 그런 걸 어찌 하겠는가?

내가 보건데 수백만의 관객이 몰리는 영화들과 수많은 경쟁을 뚫고 살아남은 고전문학의 첫 번째 공통점은 연애 혹은 사랑이 차지하는 비중이 상대적으로 매우 낮다는 점이다. 혹은 ‘괴물’이나 ‘한반도’처럼 아예 없는 경우도 있다.

반면, 순수한 연애영화는 수십만 관객을 끌어들이기도 어렵다. 관객들이 진지하지 않아서만은 아니다. 우리를 몰입시키게 만든 대부분의 세계명작이나 한국의 7,80년대 소설들에서 연애이야기는 극히 부수적인 장치에 불과하다는 것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이들 소설이나 영화의 주된 이야기는 사회와 역사의 모순을 극복하기 위한 투쟁과 희생, 이타적인 사랑과 정의 같은 것들이다.

두 번째 공통점은 매우 사실주의적이라는 점이다. 역사물은 물론 공상영화조차도, 눈만 뜨고 있으면 줄거리를 이해할 수 있고 의문을 품을 여지도 없이 가공의 현실에 흡입되고 만다.

뒤틀리고 엽기적인 심리영화 내지 실험적인 영화들, 혹은 기본적인 사실주의 기술에 미치지 못하는 단편영화의 관객이 매우 제한적이라는 것과 비교가 된다. 인간의 말초적인 본능이나 분노 같은 것들을 엽기적인 줄거리를 통해 보여주고자 하는 김모 감독은 한국영화 관객들의 저질성을 비난하며 다시는 한국에서 영화를 개봉하지 않겠다고 선언까지 했다는데, 본인이야말로 가장 저질적인 상업영화 제작자일 수 있다는 사실은 깨닫지 못하는 것 같다.

수많은 독자를 열광케 하던 제2차 세계대전 이전의 서양문학과 80년대 이전의 한국문학이 극히 사실주의적인 줄거리와 표현방식을 사용하고 있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이니 실험정신 따위는 학교에서나 배우고 나와서는 싹 잊어버렸으면 좋겠다.


셋째, 눈물이 있으되 타인을 위해 희생하는 이들에게 바쳐지는 감동이라는 점이다. 누구나 사랑하는 연인이 헤어지는 장면에 눈물을 흘릴 수 있지만, 자신이 아닌 타인을 위해 희생하는 등장인물에게 바치는 감동의 깊이와 같을 수는 없다.

그 타인이라는 것이 국가일 수도 있고 정의일 수도 있고 가족일 수도 있지만, 이타적인 희생은 가슴속 깊은 곳으로부터 감동을 불러일으키는 가장 훌륭한 재료다. 이 역시 세계명작들의 공통점의 하나임은 물론이다. ‘쿨’이니 ‘세련’이니 하는 용어들은 본인이 연애할 때나 활용하기를 바란다.

그밖에도 이들 영화와 명작들의 공통점은 많은데 굳이 나열하지 않아도 될 만큼 상식적이다. 잘 된 영화는 감독의 시점이 아니라 관객의 시점에서 허점이 보이지 않도록 철저히 완성도를 높인다. 좋은 소설도 작가의 주관적인 시각을 배재하고 독자의 시각에 맞추어 쓰기 때문에 한 번 책을 들면 좀처럼 놓을 수 없을 만큼 흡인력이 높다.

여기서 문학성의 기본이 되는 문장력, 사건 전개의 합리성, 일관성 같은 것들은 논의의 대상이 되기도 어려울 정도의 필수사항이다. 만약 작가라는 사람이 이런 것들이 안 된다 토로한다면 앞으로 한동안 글을 쓰지 못할 게 틀림없다.


소설을 영화처럼만 쓸 수는 없고, 영화가 지고의 가치인 것은 물론 아니다. 소설이든 영화든 많은 사람이 본다고 최고의 작품인 건 더더욱 아니다. 그러나 요즘 영화들이 과거 계몽시대 문학, 말 그대로 문학의 전성시대와 매우 유사한 공통점을 많이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한번쯤 참고할 만하지 않을까? 저 많은 대중이 좋아하는 방식을 유치하다는 한 마디로 평가절하하려는 특권의식부터 버리고 말이다.

4. 문학이 죽어간다는 아우성으로 숨이 넘어가는 판에 계몽주의니 사실주의 문학을 회고해 보라고 떠들다니 시대착오적이란 비웃음이 날아오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요즘 신세대들의 감정을 연구하고 이해해 보라느니, 감각적인 문장기법을 공부하라느니, 새로운 시대에 맞는 주제의식을 설정하라는 소리들도 뒤따라온다.

당신들이 틀렸다. 미안하게도 나는 복고주의자가 아니다. 나름대로 냉철한 현실주의자일 뿐이다. 나야말로 말하고 싶다. 문학으로 자신을 표현하지 말고, 소설을 실험대상으로 삼지 말고, 이 시대에 어떤 이야기가 필요한가를 좀 더 냉정히 생각해 보라고. 당신들이야말로 시대착오적인 소설 좀 그만 쓰라고. 저 단순하고 계몽적이고 사실주의적인 영화에 왜 1천만 명이 몰려가는지 연구 좀 해보라고.

따지고 보면 오늘의 문학 위기는 작가란 사람들이 광대도 아니고 선생도 아닌, 새로운 특권층이 되려다가 빚어낸 현상 아니냐고. 그렇게 귀족이 되고 싶거든 논술선생으로 진출해 돈이나 왕창 벌어 강남에 집을 사라고 말이다.

여전히 희망은 있다는 식의 상투적인 결론으로 맺고 싶지는 않지만, 요즘 우송되어 오는 몇몇 작가들의 신간을 보며 회심의 미소를 짓곤 한다. 그래, 이거야. 이런 작가들이 나와야 해. 장래성이 있어. 좀 더 재미있게 쓰기만 한다면 한국소설의 미래를 담보할 거야. 혼자서 격려하고 기뻐한다.

나와 같은 생각을 하는 또 다른 작가들이 아직도 존재한다는 게 너무 좋다. 그들에게 힘을 합치자고 말하고 싶다. 서로 격려도 하고 현실에 격분도 하고 자료도 공유하며 살자고 제안하고 싶다. 그들의 이름은 비밀이다.
덧붙이는 말

소설가 안재성은 소설 <파업>으로 노동소설의 큰 장을 열었다. <황금이삭>에 이어 <경성 트로이카>를 발표하면서, 그가 살아있음을 알렸다. 최근에 <이관술 1902-1950>을 '사회평론'에서 출간하였다. 노동문학이 '한 물 갔다'고 말하는 이들에게 안재성은 작품으로 이야기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