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법부의 쓸개 빠진 판결이야 어떻든 성균관대학은...

[석궁연속기고](3) - 김명호 교수 ‘석궁사건’에 붙여

호소무처의 완전한 사회적 고립

전 성균관대 수학과 김명호 교수가 석궁을 지니고 사건담당판사를 찾아가 재판의 부당성을 항의하는 와중에 석궁이 발사되어 부상을 입힌 사건을 접하고 김교수를 개인적으로 조금이라도 알고 있는 한 사람으로서 착잡하고 괴로운 심경을 금할 수 없어 이 글을 씁니다.

이 사건은 대한민국 사립대학과 사법제도의 치부를 한 눈에 드러낸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그것은 진리와 정의를 외면한 권위주의적 보수주의 그리고 폐쇄적 집단이기주의에서 비롯된 사건입니다. 사법부의 권위주의, 보수주의, 집단이기주의에 대해서는 다른 분들의 더 정확한 분석이 있을 터이니 저는 사립대의 문제에만 국한해 얘기해 볼까 합니다.

이번 사건의 핵심은 피해자로 신문지상에 등장한 담당판사가 자신의 판결문에서도 인정했듯이 성균관대학이 십여 년 전의 입시출제 오류사건에서 대학 측의 잘못을 인정하기를 거부하고 그 오류를 폭로한 김교수를 보복차원에서 해직시켰던 데서 비롯한 것입니다.

당시 김교수는 부교수 승진 재임용심사에서 해교행위 및 품위 면에서 교수자질부족 등의 이유로 재임용 탈락이 되었고, 그 뒤 호소무처(呼訴無處)의 완전한 사회적 고립 속에 던져진 가운데 외롭게 싸우다가, 이번에 최후수단으로 사회적 관심을 불러일으키기 위한 극단적 방법을 택한 것 같습니다. 김교수가 그간에 겪은 고통과 절망을 생각해 볼 때 오죽하면 이 지경까지 오게 되었는가 하는 동정과 공감을 금할 수 없습니다.

과연 이 방법 밖에는 길이 없었던가 생각해 보면 유감스러운 면이 없는 것도 아닙니다마는. 그러나 학교 측이 당시 해직의 이유로 제시한 교수품위와 자질의 문제는 백보양보해 보더라도 구실에 불과하며 근본이유는 괘씸죄에 걸린 보복적 조처인 것이 제삼자의 눈에도 분명해 보입니다. 여기에 동료교수들이 합세하여 부당한 학교 측의 행위에 침묵하고 나아가 부추겼던 것이 이 사건의 본질인 것입니다.

녹피에 가로 왈자나 이현령비현령 격

도대체 교수의 승진이나 재임용에서 약방의 감초 격으로 등장하는 교원으로서의 품위유지라는 개념은 녹피(鹿皮)에 가로 왈자(曰字) 나 이현령비현령(耳懸鈴鼻懸鈴) 격으로 가져다 붙이기 나름이므로 도저히 객관적 기준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기왕의 숱한 사례들이 증명하듯이 이 기준은 학교에 대해 특히 학사업무의 정상화나 개선을 위해 직언과 비판을 아끼지 않은 교수들을 보복적으로 제거하는 데 사용되어온 전가의 보도 같은 것입니다.

사실 본고사 출제의 오류를 지적한 김교수는 드물게 용감한 사람이고, 지행합일과 학행일치를 추구해야할 지식인의 모범사례라 할 만 합니다. 교수직의 해임이라는 최악의 처벌이 기다리고 있을지 모르는 일 앞에서 한 번 눈감고 외면하면 될 일을 구태여 폭로하는데 따르는 내면의 결단과 용기의 준열함은 솔직히 이 글을 쓰는 저로서도 부러운 일입니다.

당시 학교는 출제오류를 흔쾌하고 떳떳하게 인정하고 해당시험문제를 없던 것으로 처리함으로서 학생들에게 불필요한 피해가 없도록 하는 것이 마땅한 일이었고, 또 그렇게 함으로서 학교의 위신과 권위는 추락하기는커녕 더욱 높아질 수도 있는 일이었습니다. 이 세상에 무오류의 인간이 없듯이 대학도 마찬가지입니다. 스스로의 잘못을 정정당당하게 시인하고 즉각 교정하는 자세야말로 진리의 전당인 대학다운 모습입니다.

그러나 성대의 동료교수들과 학교당국은 잘못 출제된 문제를 극구옹호하고 정당화하는 데 급급하였을 뿐만 아니라 급기야 김교수를 제거하는 것으로 사건을 마무리하였습니다. 아마도 앞으로도 그런 식으로 ‘해교행위’를 하는 자에게 표본으로 삼자는 일벌백계의 의미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기 위하여 인성을 문제 삼는 예의 품위기준을 동원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번 사건의 배석판사인 이모 판사도 ‘한겨레신문’ 기자와의 통화에서 김교수는 실력 있고 성실한 교수였고 해임되기에는 아까운 분이라는 사실을 인정하였습니다.

학교 측의 궁색하고 졸렬한 트집 잡기

교수는 실력과 능력의 검증이 비교적 객관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는 연구와 강의라는 두 가지 잣대 이외에는 어떠한 기준으로도 심사될 수 없습니다. 연구는 실적으로 평가하고 강의는 그 내용과 질로서 평가해야 합니다. 김교수의 연구실적은 학교 측의 평가와는 달리 탁월했던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한편 김교수의 탈락사유였던 강의형식과 언술방식은 백인백색일 수밖에 없고 따라서 일반적 기준을 제시할 수 없으며 평가가 불가능합니다. 도대체 언행이 세련되지 못하고 성격이 거칠고 자기주장이 강해 비협조적이고 하는 등등의 사유를 늘어놓는다는 것은 정당한 사유를 제시하지 못하는 학교 측의 궁색하고 졸렬한 트집 잡기에 불과합니다.

경험적으로 보자면 대개 실력을 탄탄히 갖추고 있고 강의에도 자신이 있는 교수가 언행이 거칠고 독선적이며 비사교적이기 쉽습니다. 분명히 인간적으로 아쉬운 결함인 것이 사실입니다만, 이런 교수들은 자신에 대한 자신감이 있기에 그런 결함에 빠지기 쉽고 나아가 외부의 평가에 무관심한 오만함까지 덧붙이게 되는 것이지요. 반면에 스스로 자신에 대한 평가가 낮은 교수일수록 동료교수와 학생들 사이에서의 자신의 인기와 평가에 연연하고 심지어 아첨하기도 하는 법입니다. 김교수가 했다는 “공부하지 않고 시위나 하는 학생들은 자신 같으면 총으로 쏘아죽이고 싶다”는 말은 김교수의 사회의식이나 역사의식의 부족을 보여주는 유감스러운 말이지만, 학업에 전념하지 않고 중뿔나게 사회참여에 관심을 보이는 학생들에 대한 일리 있는 비판의 말일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자신은 “전공교수이지 가정교육을 담당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말도 김교수의 교육관의 한계를 보여주는 안타까운 발언임에 분명합니다만, 오늘날 한국의 대학교수들을 생각해 볼 때 어긋난 말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과연 학생들에게 좁은 전공분야의 지식을 전달하는 학문의 행상으로 자임할 따름이지 전인격적 훈도와 함양도 책임지겠다는 교수가 현재 대한민국에 몇 명이나 있을지 의심스럽습니다.

성균관대학은 김명호 교수를 시급히 복직시켜야

김교수가 언행이 폭력적이어서 교수의 품위에 미달이라는 말은 영어속담에도 있듯이 ‘개에게 나쁜 이름을 붙여주고 난 다음 그 개를 목 매달아라’하는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 돌이켜 보건대 얼마나 많은 교수들이 이런 식으로 대학에서 쫓겨났는지 모릅니다. 언뜻 떠오르는 이름으로 지금은 복직된 동의대의 김창호 교수와 전남대 철학과로 특별채용된 김상봉 교수를 들 수 있습니다. 두 분 다 10년 이상 거리의 학자요 투사로 떠돌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이분들은 아직도 복직되지 못한 그리고 그리될 기회가 앞으로도 거의 없어 보이는 수백 명의 해직교수들에 비할 때 대단한 행운아들입니다.

김교수가 이번에 극단적인 방식으로 자신의 억울함을 세상에 알리기 위해 담당판사를 찾아가 위협하는 행위를 하기까지 절대적 고립과 단절 가운데서 몸부린 친 십여 년의 통한의 세월을 헤아려 볼 때 더욱 그러합니다.

대학은 진리와 정의를 추구하고 세운다는 목적이외의 어떠한 존립근거도 있을 수 없으며, 이것들의 성취와 실현에 도움이 되지 않는 여하한 사유도 그 행위의 근거로 내세울 수 없습니다. 이러한 자명한 사실을 부인하려들다가는 대학의 존립근거를 스스로 허물고 부인하는 결과 밖에 안 됩니다. 학교의 있을 수 있는 잘못을 지적하고 그 교정을 요구한 교수를 구구한 이유를 들이대어 추방해 버린 일은 어떠한 말로도 정당화 될 수 없습니다.

더구나 일본 강압시대뿐만 아니라 이승만 독재치하에서도 결코 무릎 꿇은 일이 없었던 추상열일(秋霜烈日)같은 기개의 상징인 심산(心山) 김창숙(金昌淑) 선생께서 해방 후 총장을 지낸 유구한 전통의 성균관대학에서 이런 일이 벌어졌다는 사실이 슬프고 실망스럽기 짝이 없습니다. 사법부의 대세추종적이고 쓸개 빠진 판결이야 어떻든 성균관대학은 기왕의 잘못을 또 하나의 잘못으로 교정하려한 우(愚)를 이제라도 깨닫고 김명호 교수를 시급히 복직시켜야 마땅할 것입니다.
덧붙이는 말

채수환 님은 홍익대 교수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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