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 새로운 질서를 여는 지각변동의 서곡

[기고] 2.13베이징 합의의 의미와 전망

북한이 엘바라데이 국제원자력기구(IAEA) 사무총장을 초청하면서 북핵문제 해결을 위한 이행조치가 빨라지고 있다. 북한과 IAEA 간 관계가 단절된 지 4년 만에 이뤄지는 엘바라데이 총장의 방북은 북한과 IAEA의 관계가 정상화되는 의미가 있다. 이는 2.13합의 이행 및 검증에 대한 북한의 진정성을 확인하는 자리가 될 것이며, 이를 통해 국제사회로부터 신뢰성을 인정받게 될 것이다. 이는 합의문 2조 1항의 “… IAEA와의 합의에 따라 모든 필요한 감시 및 검증 활동을 수행하기 위해 IAEA 요원을 복귀토록 초청한다.”라는 조치를 이행하기 위한 수순에 불과하다.

이에 대해 미국은 정말로 좋고 긍정적인 신호라고 평가했다. 북핵 문제 해결을 위한 초기 조치의 이행에 불과할 뿐인데, ‘긍정적인 신호’라고 평가한 것은 그 동안 미국의 북한에 대한 불신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말해준다. 그래서 북한의 행동이 국제사회가 제공하기로 약속한 반대급부 이행을 더욱 확실하게 요구할 수 있는 사전 조치로 이해되기도 한다. 반면 미국의 긍정적인 반응은 상호간 신뢰회복과 문제 해결에 대한 전망을 밝게 해주는 의미가 있다.

이와 함께 힐 차관보, 라이스 국무장관, 부시 전 대통령 등의 방북설이 나돌면서 2.13합의 이행이 급물살을 탈 것으로 보인다. 이들의 방북이 성사될 경우 한반도 평화 안정 구축에 획기적인 계기가 될 것임이 확실하기 때문이다.

모드전환의 가능성, 배틀에서 평화로

2.13합의는 ‘행동 대 행동’의 원칙에 따라 이행하기로 했기 때문에 북한의 태도는 지극히 정상적인 것이다. 이제 북한과 미국은 ‘지울 수 없는 과거의 기억’으로 되돌아가지 않으려는 노력을 지속할 것이다. 그래서 2.13합의는 기대이상의 성과다. 북핵 문제 해결을 위한 첫걸음 치고는 보폭이 넓다. 제거해야할 장애물도 많으며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2.13합의의 주요 내용을 보면, 향후 60일 이내에 북한은 영변 핵시설의 폐쇄․봉인(shut down and seal)하고 IAEA와의 합의에 따라 모든 필요한 감시 및 검증활동을 수행하기 위해 IAEA 요원을 복귀토록 초청하기로 했다. 그리고 모든 핵프로그램의 목록을 6자회담 참여국과 협의, 북미양국은 국교정상화를 위한 양자대화의 개시, 미국의 북한에 대한 테러지원국 지정으로부터 해제 과정 개시, 미국의 북한에 대한 대적성국 교역법 적용의 종료 과정 진전, 북일 양국의 관계정상화를 위한 양자대화 개시, 6자회담 참여국들의 북한에 대한 경제․에너지․인도적 지원 협력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와 관련하여 초기단계에서 북한에 대한 중유 5만 톤 상당의 긴급 에너지 지원의 운송을 최초 60일 이내에 개시하고, 다음 단계에서 북한이 모든 현존하는 핵시설의 불능화 조치(disablement)를 취하면 참여국들은 최초 선적분인 중유 5만 톤 상당의 지원을 포함한 중유 100만 톤 상당의 경제․에너지․인도적 지원을 제공하기로 하였다.

참가국들은 이어 초기조치를 이행하고 공동성명의 완전한 이행을 목표로 ‘한반도 비핵화’, ‘북미 관계정상화’, ‘북일 관계정상화’, ‘경제 및 에너지 협력’, ‘동북아 평화․안보 체제’ 분야의 문제를 다룰 5개 실무그룹(Working Groups)을 설치하고, 모든 실무그룹 회의를 향후 30일 이내에 개최하기로 하였다. 실무회의 가운데 비핵화는 중국, 경제 및 에너지 협력은 한국, 동북아 평화․안보 체제는 러시아가 각각 의장을 맡기로 했고 나머지 두개 실무회의는 관련 양국이 상의해 운영하기로 했다.

내용이 다소 모호하고 구체적이지 않아서 앞으로 수많은 논란과 갈등을 낳을 것으로 보이지만, 이번 2.13합의는 9.19공동성명을 이행하는 장치로서 비핵화의 새로운 장을 여는 의미가 있다. 북핵 문제 해결의 실제적이고 실천적인 방법을 분명히 했다는 점에서도 의미가 컸다. 또한 동북아시아의 분단을 끝내는 전환점이라는 의미도 지닌다. 물론 미국이 그 방향으로 완전히 돌아설지 의문이지만 말이다. 일단은 북핵 문제의 평화적 해결을 위한 중대한 진전으로 평가된다.

그 동안 북미 관계는 고수들 간의 긴박감 넘치는 1 대 1 대결을 통해 우승자를 가리는 ‘비보잉’이나 링 위에서 극한 대결을 펼치는 K-1, 프라이드 등 이종 격투기와 유사했다. 그들은 경쟁과 대결의 틀 안에서 자라났기 때문에 경쟁을 익숙하게 받아들였으며, 적대적 의존관계를 통해 자신과 상대방 모두 발전한다고 인식하고 있다. 그런데 갑자기 방향을 바꾸어 잠시 대결을 중단한 것이다. 잘 하면 그 동안 가동된 대결 프로그램을 평화 프로그램으로 전면 교체해야할 상황이 올수도 있다.

권위적인 유저 미국의 변화

이번 합의에서 주목할 것은 미국의 변화다. 미국이 처음부터 북과의 관계 개선에 의지가 없었다는 것은 9.19공동성명 이후 드러났다. 하지만 작년 11월 중간선거 이후 북한에 대한 태도를 바꿨다. “북한과 직접 대화하는 일은 절대 없다”, “악행에는 보상이 없다”던 부시 행정부가 결국 올해 1월 아무도 예상치 못한 베를린에서의 북미 양자회담을 통해 모종의 합의를 만들어냈으며, 이를 2.13합의로 이끈 것이다.

부시 행정부의 변화 조짐은 2005년 9월 라이스 국무장관의 측근인 필립 젤리코(Philip D. Zelikow) 자문관이 작성한 보고서를 통해서였다. 이 보고서에는 이미 북한 핵 문제와 평화협정 체결을 동시에 논의하는 것이 포함됐었다. 당시 나온 용어가 ‘광범위하고 새로운 대북 접근법’이었는데, 이때부터 미국의 태도 변화 조짐이 있었던 것이다. 이 방안은 그러나 북한이 먼저 모든 핵시설과 무기를 완전히 폐기하지 않는 한 어떠한 양보도 절대 안 된다는 입장을 고수하는 강경파 딕 체니 부통령에 의해 계속 거절되어 왔다. 하지만 2006년 5월, 이란이 북한의 전철을 밟을 것을 우려하는 백악관이 다시 한 번 이 문제로 격론을 벌였고(David E. Sanger, “U.S. Said to Weigh a New Approach on North Korea”, May 18, 2006, The New York Times), 며칠 후인 5월 21일, 미국 NBC 방송의 ‘Meet the Press’라는 시사 프로그램에서 라이스 장관은 북한과의 평화협정이 언젠가는 매우 중요해질 것이라는 발언을 하였다(“at some point in time it's going to be very important to talk about the context -peace treaty- on the Korean Peninsula”).

당시 부시 행정부는 이라크전의 여파로 지지율이 급전직하로 추락하면서 갈팡질팡 헤매고 있었고, 이후 중간 선거에서의 패배로 인해 대북강경책을 고수할 수 있는 정치적 동력을 상실하였다. 그리고 최근에는 이라크 무장 세력의 배후로 지목된 이란과의 한판 승부를 위해 북한에게 힘을 쏟을 여력이 없다. 수렁에 빠진 이라크와 이란 핵문제의 복잡성을 생각할 때, 북핵 문제는 상대적으로 쉽게 때문에 승부를 걸 만하다. 올해 2007년을 ‘이란의 해’라고 여기고 있는 것처럼, 미국에게는 북한보다 이란 문제가 훨씬 중요하다. 이것은 미국이 세계의 에너지(석유, 가스 등)원을 통제해야 하고, 이란이 바로 세계 에너지원의 중심에 있는 나라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점에서 북한에 대한 외교적 해결 합의가 부시 행정부의 전반적 전략 수정이라기보다는 대북정책의 부분적 변화라고 보는 것이 적절할 것이다.

미국의 태도 변화를 불러온 또 다른 요인으로는 북한의 핵실험 성공이다. 북한의 핵실험 성공은 네오콘 주도의 대북제재 정책이 실패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당시 북한의 핵실험은 그 위력에 관계없이 미국 내에 북핵 문제의 심각성과 위기감을 새롭게 인식시키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한반도의 위기지수를 최고조로 끌어올림으로써 미국이 적극적인 협상에 나서지 않을 수 없도록 강제한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이라크 문제로 인해 국내의 광범위한 반전 여론에 직면한 부시 행정부로선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실질적인 핵보유국으로서의 북한의 존재는 세계적인 차원에서의 핵확산금지조약(NPT) 체제를 붕괴시킬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절박감 속에서 부시 행정부는 정권교체론에서 북핵 문제 해결론으로 초점을 옮기면서 대북정책을 달리하기 시작했다. 양자접촉을 시작했고 보상조치에 합의했다. 네오콘적 근본주의에서 탈피해, 현실적 접근방식을 채택한 것이다.

결과적으로 북한의 핵실험이 한반도 비핵화 프로세스를 추동하는 기제가 된 것이다. 실질적인 핵보유국으로서의 북의 존재는 미국에게 대북 군사압박을 약화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핵실험이 북미 관계를 대결에서 평화공존으로 나아갈 수 있는 구조적 요인을 조성해 주었다. 그렇다고 협상카드로서 핵실험의 효용성을 인정할 수는 없다. 한반도 비핵화의 관점에서 볼 때 그것은 사후적인 설명의 논리에 지나지 않는다. 결과가 좋다고 해서 모든 수단이 정당화되는 것은 아니지만 특히 핵실험이라는 수단을 결코 정당화할 수는 없다. 북한의 핵실험이 6자회담을 타결 짓는 데 영향을 준 것은 사실이지만 사태가 다른 방향으로 전개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또한 이번 6자회담 타결은 한반도 비핵화로 가기 위한 초기단계일 뿐이다. 앞으로의 협상 과정도 지난하기 때문에 결코 낙관할 수 없는 상황이다.

부시 행정부는 중간선거 이후 예상했던 대로 북한에 대한 태도를 바꿨다. 불가항력이었으며, 변화의 필요조건이 발생한 것이다. 중동정책이 혼미해지면서 북핵 문제에서라도 가시적인 성과를 얻으려는 의지가 강했던 것이다. 또한 중간선거에서의 패배로 더 이상 대외정책의 독주가 허용되지 않게 되었다. 한반도의 긴장을 높이는 기존의 대북강경책은 미국 내의 점증하는 반전 여론에 반하기 때문이다.

베를린 회담에서 미국은 북한이 2.13합의를 가능할 수 있도록 조건을 만들었다. 그것은 30일 이내에 방코델타아시아(BDA) 관련 미국의 대북 금융제재 문제를 해결하기로 한 것이다. 그동안 줄기차게 북한의 선차적인 양보만을 요구하던 미국의 예전 태도와는 완전히 달라진 정책이었다. 이 자리에서 북한은 위조화폐와 돈세탁 문제에 대해서 재발방지와 국제기구 가입, 제조자 처벌 등을 설명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으며, 미국 쪽에서는 BDA 동결 북한계좌의 조사를 조기에 종결하고 합법계좌와 불법계좌로 분리해 합법계좌는 풀어주겠다는 입장을 피력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래서 2.13합의는 내용적으로 참가국들이 베를린 합의안을 추인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서 부시 대통령이 정책결정에서 네오콘를 비롯한 강경파들의 입지를 약화시키고, 라이스 국무장관-힐 대표로 연결되는 국무부 라인에 협상의 전권을 위임하였다. 또한 재무장관도 BDA 문제와 관련하여 힐 대표에게 협상의 전권을 위임하였다. 이는 부시 행정부가 북한에 대해 압력과 제재가 아닌 대화와 협상을 통한 인센티브 제공 등의 문제 해결적 접근방법을 취하게 되었음을 말해준다.

미국이 변하면 북한도 변한다

북한의 태도 역시 과거와 달라졌다. ‘선결조건’으로 내걸었던 금융제재 문제를 핵폐기 논의와 분리하는 것을 수용하고 핵 ‘폐쇄’에 중유 5만 톤 지원이란 ‘양보’를 받아들이는 등 북한의 변화도 합의의 주된 원인이었다.

아마 핵 보유국이라는 여유도 있었겠지만 핵실험으로 인한 제재와 내부의 어려움이 가중됐을 것이다. 핵실험을 했으니 협상 테이블에서도 손해 볼 게 없으니 과감한 양보도 가능한 것이다. 또한 미국의 태도 변화를 활용하지 못한다면 장기적으로 대북제재가 부활할 수밖에 없다는 판단도 한 것으로 분석된다. 북한으로서는 베를린 회담처럼 미국이 양자대화를 수용하고 나오면 합의에 반대할 이유가 없다. 주변 국가들이 모두 유엔 대북 제재결의에 동참한 것도 심리적인 압박이 되었을 것이다. 결국 미국이 변했기 때문에 북한도 변한 것이다. 북한의 입장에서는 변화된 국내외 정세를 활용해 6자회담을 유리하게 이끌고 나가려고 한다. 따라서 이번 2.13합의는 북한의 요구가 중심을 이룬 합의문이 되었다.

경제적인 이익을 노린 계산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북한이 ‘폐쇄’로 얻을 수 있는 것은 겨우 5만 톤의 중유다. 중유 100만 톤에 상당하는 실질적 지원을 얻기 위해서는 핵시설 불능화 조치를 취해야 한다. 60일 이후 불능화를 빨리 하면 할수록, 그만큼 경제적 실리도 빨리 얻을 수 있다. 제네바 합의 때는 핵시설 동결만으로 매년 50만 톤씩 중유를 지원받았다. 8년 동안 북한이 받은 중유는 총 365만 톤이다. 그에 비하면 이번 지원은 매우 적은 편이다. 남한의 대북지원이 재개된다 해도 과거의 수준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못한다. 다음 단계에서 얼마만큼의 상응 조처를 제공할지는 실무그룹에서 논의를 하겠지만 경제적인 이익은 부차적이다.

중요한 것은 불능화가 핵시설을 더 이상 쓸 수 없게 만드는 조치라는 것이다. 그래서 이번 2.13합의가 제네바합의와 그 내용과 성격이 다르다. 제네바합의의 주요 내용은 경수로가 건설될 때까지 영변 핵시설을 동결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미국은 경수로 건설기간을 10년으로 잡으면서 그 이전에 북한 정권이 붕괴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불능화는 제네바 합의처럼 봉인을 뜯어내고, 시설을 재가동할 수는 있는 것이 아니다. 불능화 조치는 핵심부품을 뜯어내 핵시설을 다시는 가동할 수 없도록 사용불능 상태로 만드는 것으로 영구 폐기의 직전 단계로서 돌이킬 수 없는 것이다. 60일이라는 기간은 가동을 중단하고, 연료봉을 분리해서 폐쇄하고 봉인하며, IAEA 사찰 준비에 들어가는 기술적 시간이다. 그래서 북한은 불능화를 하기 위해 필요한 ‘폐쇄’ 조치를 미룰 이유가 없고, 불능화 조치를 지연시킬 이유도 없다. 북한이 폐쇄에 5만 톤, 불능화 조치에 100만 톤을 합의한 데에는 이미 불능화 조치를 하겠다는 의지가 내포되어 있다. 다시 말해 추가적인 플루토늄 생산능력을 폐기하는 불능화 조치까지는 내달릴 수밖에 없는 구조다.

북한의 입장에서는 2.13합의에 따라 60일 이내에 이행 조치를 준수해야 에너지 지원 등을 받을 수 있기에 종전보다 적극적인 태도를 보일 것만큼은 분명해 보인다. 그런데 북한으로서는 현실적으로 할 일이 별로 없다. 5MW 영변 흑연감속로를 비롯한 핵시설을 폐쇄, 봉인하는 것은 북한에게 아무런 피해가 되지 않는다. 규모가 실험실 수준이라 북한의 전력 공급에 문제가 생기지 않는다. 또한 이미 북한은 수십 kg의 플루토늄을 확보하였고 이를 핵무기로 전환했을 가능성이 높으므로 더 이상 플루토늄을 추출할 필요도 없다.

예상할 수 있는 쟁점들

이번 2.13합의는 어느 누구의 승리도 아니다. 길게는 6년 짧게는 1년이라는 시간을 잃어버렸다. 물론 부시로서는 너무 값비싼 대가를 치렀다. 오히려 부시 행정부의 대북 압박은 미사일 시험발사, 핵실험, 플루토늄 생산이라는 예상하지 못하고 의도하지 않은 결과를 가져왔다. 압박정책 속에서 부시는 의회 권력을 민주당에 넘겨주었고, 결국 직접대화로 돌아섰다.

그렇다고 북한이 자유로운 것도 아니다. 2.13합의에 대한 손익계산으로 따지면 북한이 미국에 비해 이익이 크다. 하지만 북한이 핵실험을 함으로써 한반도 비핵화 선언을 어겼고, 이는 북한에 대한 국제사회의 불신을 키웠다. 이것이 앞으로 협상을 진전시켜 나가는 데 두고두고 걸림돌로 작용할 수도 있다. 미국의 현실적 접근법이 북한에게는 득도 되지만 그 만큼 부담으로 작용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앞으로 2.13합의는 수많은 논란과 갈등을 유발할 소지가 많다. 핵 프로그램 목록에 포함될 대상을 두고 논란이 일 수 있다. 핵무기는 어떻게 폐기할 것인가. 고농축 우라늄(HEU) 핵개발 문제도 쟁점이 될 것이다. 이와 관련한 증거에 대해서는 다소의 논란이 있으나 중요한 것은 플루토늄의 추가 생산을 막는 일이다. 또한 경수로 건설문제도 논란거리다. 이러한 문제들은 미국이 관계정상화를 결심하는 순간, 모두 실무적인 문제가 된다. 즉 미국이 관계정상화의 과정을 얼마나 압축적으로 진행하는가, 혹은 한반도 평화체제 논의를 얼마나 실질적으로 진행하는가에 달려 있다. 북한이 ‘협상은 산수가 아니라 정치다’라고 말하는 데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핵이라는 억지력이 필요 없는 상황을 얼마만큼 조속하게 이룰 수 있는가가 중요하다. 미국이 어떤 해법을 제시할 지 두고 봐야 하겠지만 시간이 필요한 일이다.

당장은 3월 초 뉴욕에서 열릴 예정인 북미 관계정상화 워킹그룹에서 ‘테러지원국 해제문제’와 ‘적성국교역법 종료’ 문제가 핵심 쟁점이 될 전망이다. 북한의 테러지원국 해제문제는 일본 정부가 납치문제를 들어 미국 정부에 반대 입장을 전달하는 등 사사건건 발목을 잡고 있다. 북한은 1987년 대한항공 여객기 폭파사건으로 테러지원국 명단에 등재된 이후 미국은 일본인 납치문제 등의 미해결을 들어 테러지원국 명단 해제를 하지 않고 있다. 하지만 일본의 지속적인 납치문제 해결주장은 동북아에서의 고립을 자초하고 2.13합의 이행에도 부정적이기 때문에 바람직한 방법이 아니다.

또한 테리지원국 해제문제는 북한의 국제적인 지원 및 활동과 직결된다. 북한의 국제금융기구 가입 과정에서 미국이 반대를 하는 이유도 역시 북한이 테러지원국이기 때문이다. 물론 테러지원국이 해제된다고 해서 경제제재가 해제되는 것은 아니다. 북한이 정상교역국이 되고 일반특혜관세를 부여받으려면, 혹은 국제금융기구에 가입하려면, 북한도 개방하고 국제수준에 걸맞은 경제제도를 갖추어야 한다. 그리고 테러지원국 해제 문제는 개성공단과 연결된다. 개성공단 생산품을 한국산으로 인정하지 못하는 결정적인 이유는 북한이 테러지원국으로 지정됐기 때문이다. 북한이 정상교역국이 아니기 때문에 일반특혜관세를 부여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는 상황에 따라서 한미FTA 협상에 영향을 끼칠 수도 있다.

적성국교역법이 종료되면, 북미관계는 더 이상 적대관계가 아니라는 정치적 의미가 있다. 동시에 미국이 동결하고 있는 북한 자산을 동결해제 할 수 있는 법적 근거가 마련되는 실질적 효과도 있다.

그런 점에서 북미 관계정상화를 위한 실무그룹의 운영이 중요하다. 이미 이번 합의문에 적시되어 있지만, 60일 이내에 테러지원국 해제와 적성국교역법 종료를 위한 논의가 시작된다. 테러지원국 해제와 적성국교역법의 종료는 미국의 대북경제제재 해제의 중요한 출발점이고, 관계정상화를 가속화시키는 계기를 부여할 것이다.

테러지원국 해제 문제는 9.11 테러 이후 북한과 미국이 국제 테러리즘에 대한 공동 코뮈니케를 발표한 적도 있고, 북한이 테러리즘 방지 국제 조약 2개에도 가입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해결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적성국 교역법 해제는 미국 의회의 분위기도 있고 법적인 조치라서 시간이 많이 걸릴 것으로 보인다.

아직도 건강하다 - 네오콘의 반발

2.13합의의 이행은 네오콘의 반발, 미국 내부의 복잡한 법과 절차, 부처간의 입장차, 부시 행정부의 의회에 대한 리더십 약화 등의 요인으로 지체될 수도 있다. 북미 상호 불신과 일본의 비협조적 태도도 걸림돌로 작용할 것으로 보인다. 특히 네오콘으로 대표되는 미국 내 강경파들이 이번 합의에 반발하고 나설 경우 또다시 교착에 빠질 우려도 있다.

중간선거 이후 부시 행정부 내 네오콘의 퇴조 현상이 뚜렷하지만 최근 이란 공격을 정당화하는 그들의 움직임으로 미루어 볼 때 강경몰이의 불씨는 완전히 꺼지지 않았다. 이번 합의에 대하여 네오콘의 대부인 존 볼턴 전 유엔 주재 미국대사가 부시 정책의 기본원칙에 위배되는 ‘문제아’라고 비판하고 나섰고, 행정부 내에서 엘리엇 에이브럼스 NSC 부보좌관과 로버트 조지프 국무부 차관 등이 부적절한 ‘사생아’라고 걸고 나선 것을 봐도 알 수 있다.

부시의 입장에서는 네오콘의 의견에 동의하겠지만 그렇다고 다른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니다. 미국이 전쟁을 비롯한 모든 방법을 동원해 북한을 차지하겠다는 전략은 결코 바뀌지 않을 것이다. 미국이 북한 정권 교체의 목표를 완전히 포기했다고 생각지는 않는다. 중동문제에 전념하고자 북한에게 당근을 주고 6자회담에 묶어 두려는 의도를 간과해서도 안 된다. 부시의 입장에서는 시간이 아직 2년이나 남아있기 때문에 충분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다만 현 단계에서 북한의 압박에 밀려 불가피한 선택을 했을 뿐이다.

라이스-힐 라인이 2.13합의의 성과를 가지고 강경파들을 설득할 수 있을지가 관건이 될 것으로 보인다. 그래야 이들도 중동문제에 전념할 것이다. 만약 부시 행정부가 강경파들의 내부저항을 극복하지 못하고 북미 관계 정상화 움직임에 지체를 보이면 북은 그에 상응해서 문제를 일으킬 수도 있다. 하지만 정상화 과정이 순탄히 이뤄지면 북한은 조만간 핵 포기 의지의 진정성을 드러내 보일 것이다.

존 볼턴을 비롯한 미국 강경파들과 한국의 강경파들은 북한이 이득만 챙기고 핵 포기를 절대 안할 것이라고 전망하고 있다. 이들의 입장에서는 당연한 것이다. 그래서 미국의 진정성이 중요한 것이며, 미국의 의지에 해결 전망이 달려있는 것이다.

미국의 의지에 달려있다

북미가 베를린에서 대부분의 쟁점에 합의했는데도 불구하고 6자회담장에 와서 문서 합의에 진통을 겪는 것을 보면 여전히 핵심적인 해결 과제는 북미 상호간 불신의 문제다. 가장 중요한 문제는 미국의 의지다. 미국이 수용하면 북한도 수용하고, 미국이 적대적이면 북한도 적대적이 된다.

북한은 21세기 생존과 번영을 위해 미국과의 관계개선을 절박하게 원하고 있다. 미국과의 주고받기 협상이 안 된다면 북한은 핵보유로 갈 것이다. 어차피 60일까지는 문제가 없다. 그 이후 미래 핵에 대한 실질적인 불능화 조치로 나아가느냐가 일단 관건이다. 기존 핵무기 폐기 문제는 북미관계 정상화,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 등 각종 상응조치와 병행되어 ‘행동 대 행동’ 방식으로 진전될 것이다. 북한의 입장에서 이 단계는 미래 핵에 대한 완전한 포기와 과거 핵의 폐기를 예비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에 상응하는 미국의 획기적인 양보조치가 상응하지 않으면 진전이 어렵다. 북한과 관계정상화를 이루겠다는 미국의 의지에 달려 있는 것이다.

그 동안 북미사이의 대화와 합의에는 기대 이상의 성과와 극적인 합의가 많았다. 제네바기본합의(1994.10.24)가 그랬고, 10.12공동코뮤니케(2000)가 그랬고, 9.19공동성명(2005)이 그랬다. 그런데 이들 합의는 대개가 ‘말 대 말’ 합의여서 깨질 공산이 처음부터 농후했다. 또한 이들의 공통점은 미국이 먼저 약속을 파기하고 믿음을 저버려서 깨졌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번에도 불안한 마음을 저버릴 수가 없다.

물론 이번 합의는 2005년의 9.19공동성명과는 달리 미국의 대북정책 변화와 동시에 이루어진 것이라는 점에서 쉽게 ‘되돌아가지’ 않을 것이며, 이를 위한 노력이 지속될 것으로 보인다. 이번 합의는 양자 합의가 아닌 다자간 합의이며, 동시행동 원칙에 따라 진행되기 때문에 양측이 신뢰와 의지만 있으면 계속 갈 공산이 크다. 그만큼 ‘돌이킬 수 없는’ 구속력이 보장된 것이다.

그럼에도 최근 고농축우라늄(HEU)을 둘러싼 논란을 보자니 마치 9.19공동성명 합의 직후 벌어진 북미 ‘위폐공방’의 재연을 보는 듯 하다. 미국의 일방적 주장만 난무하는 ‘진실게임’이 시작된 것이다. 그 동안 북핵 문제를 둘러싸고 위기, 대립, 갈등, 합의, 파행 등을 반복해왔다. 이제 실패한 역사를 되풀이하기에는 여유가 없다. 어쩌면 이번이 협상을 통한 마지막 기회일 수도 있다. 호흡을 가다듬고 인내심이 필요할 때이다. 이제 시작이니까. 북한은 미국의 이행 의지가 확고하다면 이행 방안을 성실히 준수할 것으로 보인다. 정말 말이 아닌 행동을 통해 한반도 및 동북아에 평화체제를 구축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덧붙이는 말

배성인 님은 본지 편집위원으로 한신대 교수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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