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줌마의 반란은 시작됐다

[인터뷰]달맞이꽃을 닮은 염선애의 미싱을 더듬다

봄. 카메라 가방을 어깨에 걸고 나선다. 골목과 계단이 끊임없이 이어진다. 창신동. 끝없는 골목과 힘겨운 언덕길처럼 이곳에 모인 사람들의 삶은 창신동을 꼭 빼닮았다.

봄. 햇살 가득한 곳을 찾아, 꽃을 찾아 떠나고 싶다. 하지만 문을 열고 들어선 곳은 꽃은커녕 한줌 햇살도 없다. 미싱과 실패들만이 기다란 형광등 불빛 아래 피어있다. 만약 그를 만나지 않았으면, 나의 봄은 우울했을 것이다.

염선애. 보글보글 아줌마 파머에 검정색 반팔티셔츠, 엷은 베이지색 반바지. 아직 꽃샘추위가 겨울을 보내지 않았는데 반팔에 반바지라니. 겨울 잠바를 입고 들어선 내가 외려 민망해진다. 하지만 왜일까? 그의 옷차림은 전혀 어색하거나 추워보이지를 않는다. 오히려 건강함을 느낀다.

화장도 하지 않은 맨얼굴을 들여다보니 주름살이 하나도 없다. 눈도 코도 입도 욕심이라고는 하나도 없어 보인다. 누구와 쌈 한번 하지 않고 무던하게 살아온 듯하다. 고생이라는 단어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얼굴이다. 물론 이 생각은 그의 목소리를 듣기 전까지 유효했다.

꽃을 찾아 떠나고 싶은 봄날

내가 처음 놀란 것은 그의 나이를 들었을 때다. 그리고 그의 삶을 들었을 때, 내가 사람을 보는 눈이 영 엉망이라는 것을 깨우치며 놀랬다.

55년 생. 쉰셋이다. 아버지가 변변한 직장도 돈벌이도 제대로 하지 못했지만, 호적에 생일만은 정확하게 올렸다고 한다.

염선애, 그는 열한 살 적에 고향인 전북 고창에서 서울로 올라왔다. 동백꽃이 너무도 아름다운 선운사와 가까운 곳에서 태어났다. 염 씨들이 마을을 이루고 사는 동네다. 너도나도 서울로 올라올 때에 그의 가족들도 상경하여 창신동에 자리 잡았다.

“처음에 올라오니 복작복작하고, 정신이 없어요. 어찌나 골목이 많고, 길이 어렵던지, 길을 잃어 집을 찾아오지 못한 적도 있었어요. 말씨도 서울말이 잘 안 되잖아요. ‘그랬어라우’하며 사투리를 쓰니까 사람들한테 주눅도 들고 ….”

2남2녀의 장녀인 염선애의 첫 번째 서울 집은 시골집보다 형편없이 못했다. 방 한 칸에 여섯 식구가 세를 들어 살아야 했다. 아궁이는 마루 밑에 있었고, 부엌은 따로 있지 않았다. 마당에서 밥을 해먹어야 했다.

“시골집이 더 좋았죠. 여러 집이 세 들어 살았고. 넘의 집에서 넘들과 같이 살아야 하고, 물도 길어 먹어야 했어요. 물 몇 통 길어다 놓고 일 나가고는 했어요. 공동 화장실 쓰지 않은 것만도 다행이죠.”

서울에 올라와서는 학교에 다니지를 않았다. 딸이라고 부모가 보내지 않아서는 아니다. 공부하는 게 무척이나 싫었다. 열네 살 때 평화시장의 남방을 만드는 집에 취직을 했다. 잔심부름을 하다가 일손이 딸린다고 해서 시다 생활을 시작했다.

열네 살의 시작은 끝없이 계속되고

“일이 어렵다거나 힘들다는 생각은 하지 안했어요. 공부는 하기 싫으니 기술이라도 배워야지 하는 마음으로 일을 했어요. 남하는 것 보면서 따라한 거죠. 몇 평 되지 않은 공장에 다락방을 만들어 2층을 만들어놓았으니 그 높낮이가 어떻겠어요. 저야 집이 서울이니 도시락을 싸서 집에서 다녔지만, 시골에서 올라온 애들은 거기에서 일을 하고 먹고 자고 했어요. 겨울에는 전기도 없으니 추운데서 그냥 자야 하고요.”

염선애는 그 시절 그 친구들이 지금은 어찌 살고 있을까 생각을 한다. 팔자 핀 사람이 몇이나 되겠냐고 묻는다. “있는 사람, 높은데 앉아있는 사람이 상상이나 하겠어요?”하며 내게 묻는다.

퇴근 시간이 없었다. 버스를 타고 가야하는 사람은 막차 시간이 퇴근시간이었다. 염선애는 집이 평화시장에서 가까운 창신동이라는 이유로 11시 40분이 되어서 퇴근을 했다. 통금에 걸리지 않게.

“제품공장 다니는 게 챙피하거나 부끄럽다고 생각하지 않고 극성스럽게 다녔어요. 그 때 월급이 2천원이었어요. 한 달을 결근하지 않으면 2백 원을 보너스로 줬어요. 그 2백 원을 받으려고 아프고 힘든 것도 모르고 다녔죠. 그 때는 2백 원의 가치가 컸어요.”

추석이나 설을 앞두면 철야를 한 달에 보름씩 하기도 한다. 새벽 여섯 시까지 일을 하고, 한두 시간 자고, 아침 여덟시부터 다시 일을 시작한다. 잠이 오지 않는 약이라는 타이밍을 먹으면서.

“저는 잠이 참 많아요. 며칠 씩 철야를 하면 죽겠지요. 여자 수영복 만드는 공장에 시다로 일할 때에요. 다우다 원단으로 만드는데 허리에 실 고무줄을 스무 개씩 넣어야 해요. 미싱을 할 때 앞에서 잡아줘야 하는데, 계속 조는 거예요. 졸고 있으면 미싱사 언니가 미싱판을 탁 쳐요. 깜짝깜짝 놀래서 깨었다가 또다시 졸고 그랬어요.”

40년이 훌쩍 지난 지금은 웃으면서 이야기를 한다. 하지만 열서너 살적 쏟아지는 잠을 참아야했던 이야기를 듣는 나는 함께 웃을 수가 없다.

쏟아지던 잠, 이제는 웃으며 말하지만


쉬는 일요일이 있는 토요일은 반드시 철야를 했다. 일요일에는 뭘 했느냐는 말에 그냥 집에 있었다고 한다. 철야를 하고난 일요일이 어찌 휴일이겠는가? 물어보는 내가 어리석을 뿐이지. 아침 여덟시에서 밤 열두시가 다 되도록 일을 하고, 토요일에는 철야. 염선애에게 휴일은 없다. “무얼 배워야겠다, 어딜 가야겠다는 생각은 해보지를 않았어요.”

물론 집에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여름에는 제품공장이 비수기가 있다. 이럴 때는 딸기밭에도 가고, 포도밭에도 가고 했다. 산에도 놀러 가고.

일을 하며 수다도 떨기도 하지만 서로 이름도 모르며 공장생활을 하며 지내기도 한다. 길을 가다가도 이름대신 ‘몇 번’하며, 번호를 부른다.

“아무개야, 해야 할 텐데, 길을 가다 몇 번, 하고 불러요. 챙피한 줄도 모르고. 오야 미싱에 번호가 붙어 있거든요. 그 번호를 부르는 거예요.”
언니들이랑 수영장을 가서 서로 몇 번, 몇 번하며 부르니, 아저씨들이 다가와 물었다고 한다. 어느 술집에 있냐고, 한번 놀러가겠다고.

“서로 번호를 부르니, 호스티스인 줄 안 거죠.”

우스개로 넘기기에는 참 씁쓸한 이야기다. 하루 열서너 시간 이상을 함께 일하면서, 별명도 아닌 번호를 불러야 하다니. 누가 번호 부르는 걸 만들었을까? 재단판에도 번호가 있었을까? 재단사나 재단보조를 번호로 불렀다는 말은 아직 들어보지 못했다. 여기에도 남성과 여성이라는 굴레가 있지 않을까? 하는 불순한(?) 생각이 든다.


지난 이야기를 쉽게 말하는 염선애에게 오늘의 이야기는 쉽지가 않다. 자랑스럽게 이야기해야 할 미싱 경력을 떳떳하게 말하기가 부끄럽다고 한다. “줄일 수 있다면 경력도 나이도 줄이고 싶어요.” 제품 공장 40년, 일류 미싱사 염선애, 왜 자랑스럽게 말하지 못하는 것일까?

그는 보증금 천만 원에 달세 오십만 원을 내는 삶터이자 일터인 창신동 한 건물 2층에서 세를 들어 산다. 95년도에 미싱을 해서 번 돈으로 단국대학교 앞 지하에 호프집을 내서 장사를 했지만 5년 만에 다 털어먹었다. 빈손으로 빚만 남은 채 미싱 앞에 다시 앉아야 했다.

미싱에서 ‘외도’, 결국 빚만 남고

다시 돌아와 열심히 밟았다. 빚도 갚고, 하나 뿐인 아들을 제대로 가르치고 싶어 밤낮 모르고 일을 했다. 하지만 시장은 만만치 않았다.

“두산타워가 들어서고, 젊은 층을 겨냥하며 저가경쟁이 시작되잖아요. 중국에서 물량을 가져다 융단 폭격을 하는 거죠. 동대문 상권을 다 잡아먹기 위해.”

40년 된 기술자가 재단만 된 남방을 가져다 단품부터 완성품까지 미싱을 하루 꼬박하면 40장을 만든다. 예전에는 3천 몇 백 원하던 공임이 이제는 2천 몇 백 원으로 떨어졌다. 아침 8시에서 밤 11시까지 꼼짝하지 않고 미싱에 달라붙어 있어야 십만 원이 될까 말까다.

30일을 꼬박해야 3백만 원이 된다. 여기에 공장 달세를 비롯하여, 전기세 가스비 등 운영비가 한 달에 백만 원이 들어간다. 40년 기술자가 밤 11시까지 한 달 30일일을 꼬박 일을 해 버는 돈이 2백만 원이다.

더 난감한 것은 액수의 많고 적음을 떠나 일감이 30일이 되지 못하는데 있다.

“옛날에는 미싱 중간이 날씬하게 생겨가지고, 나무에다 조립하여 발판을 밟으면 찌르륵찌르륵 앞으로 나가며 미싱을 했거든. 이제 차츰 차츰 발전해 미싱에 컴퓨터까지 달려 나왔잖아요. 경력도 늘고, 기계도 발전하고, 모든 게 좋아졌는데, 모든 게 업이 되는데, 왜 공임만, 인건비만, 업 되기는커녕 다운이 되냐고? 국회에 나가 목소리를 내던지 해야지.”

‘제품 일’ 하는 사람 지지만 받으면 국회에 나가지 않겠냐고 한다. 공임이 바닥으로 치닫는 고통을 이야기하면서도 염선애는 우스개를 덧붙인다. 뼈가 있는 우스개를. 결혼 3년 만에 신랑을 사고로 잃고, 홀로 아들을 키우면서도 얼굴에 주름살이 가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 같다.

제품일하는 사람 지지 받아 국회의원이라도 되야지

“일감이라도 끊기지 않으면, 밤을 새서라도 벌고, 빚도 갚고, 아들 공부도 편안히 시켜주겠구만…. 예전엔 철야를 해도 노동의 대가를 온전히는 아니어도 어느 정도 받을 수 있었잖아요. 지금은 발버둥을 쳐도 힘들어요.”

염선애는 욕심이 없다. 임대 아파트라도 하나 갖는 게 소원이다. 호프집을 하다 날려먹었지만 거기에 연연하지는 않는다. 오로지 할 줄 아는 미싱 일을 가지고 빚이라도 갚으면 그만이다. 그의 욕심이라면 이뿐이다. 하지만 이 소박한 바람도 싶지가 않다.

염선애는 좌절하지 않는다. 좌절할 여유조차 없다. 오십이 넘도록 일을 했지만 노후는커녕 당장의 삶마저 팍팍하게 만드는 돈에 절망은 하지만. 가끔 ‘내가 돈 관리를 못해 그러나’하는 반성은 하지만 돈 앞에 비굴하지는 않다.

어려움 속에서 낙관을 찾고, 자부심을 잃지 않게 해준 일이 있다. 지난해 염선애는 패션쇼 무대에 모델로 서서, 조명을 받으며 힘찬 워킹을 했다. 어떤 모델도 할 수없는 창신동 아줌마의 경륜이 실린 워킹.

그의 유일한 기술인 미싱 기술을 가지고 옷을 직접 만들어 입었다. 카메라 플래시가 터지고, 방송 인터뷰도 하고 텔레비전에도 나왔다. 창신동에서 미싱을 하는 사람들이 직접 옷을 만들고, 모델이 되어 패션쇼를 하였다.

반란의 아줌마, 그 당당한 워킹

“국회의원, 장관들과 나란히 서서 무대에 선 날을 잊을 수가 없어요. 그 날 하루 내 자신이 스스로 즐거웠다는 게 좋았어요. 언제 내가 주인공이 되어 그 많은 사람 앞에 서보겠어요. 자신감을 얻었고, 행복했어요. 이제야 묵묵히 다락방에서 우리 경제를 일으킨 주인이 나라고 외친 거잖아요.”

조심스레 ‘50대 아줌마들의 반란’을 꿈꾼다고 말을 한다. 7-80년대 한국 산업의 중추였던 의류업이 이제 한물간 대접을 받고 있지만, 반란은 7-80년대 타이밍을 먹으며 미싱을 배웠던 50대 아줌마의 힘으로 다시 일어날 것이라고 낮은 목소리로 이야기를 한다.

인터뷰 내내 미싱은 한순간도 멈추지 않았다. 녹음이 제대로 되지 않을까 걱정이었지만, 미싱을 멈춰달라는 소리를 하지 않았다. 머리가 나쁘고 받아 적는 솜씨가 없어 녹음에 의지하며 인터뷰를 하지만, 차마 목소리를 담지 못해도, 그보다 소중한 40년 경력의 미싱 소리는 살아있지 않겠냐는 생각에. 미싱은 쉴 새 없이 돌고, 염선애의 목소리도 멈추지를 않는다. 촛불을 끄고 떡을 써는 한석봉의 어머니처럼.

그 사이에 소매를 박음질 하고, 부품을 달고, 칼라를 잘라 심을 박고 박음질을 한다.
누구도 그들을 기억해주지 않는다. 하지만 아직도 창신동 언덕 곳곳에는 미싱 소리가 멈추지 않는다. 수천의 공장이 있고, 수만의 사람이 일을 하고 있다. 옷을 만드는 대로 팔려나가던 지난날은 두산타워의 꺼지지 않는 네온사인 불빛 아래에서 찾을 수 없지만 형광등 불빛 아래 염선애의 삶은 힘차게 달음박질을 하고 있다. ‘50대 아줌마의 반란’을 꿈꾸며.

“이제는 가게 하는 사람들이 옷이 팔리지 않으면 받지 않으면 그만이에요. 재단에 시아개에 미싱에 마무리까지 서너 집 거쳐야 제품이 가게에 나가요. 가게 하는 사람들은 원단 값만 손해 보면 끝이다, 라고 생각하죠. 공장에는 가게에 나가지 못한 완성품이 쌓여 있어도. 그 가게만 보고 하청을 하는 사람은 재단에 공임에 공장 운영비에, 고스란히 떠안아 손해가 막심하죠. 공장들 팡팡 무너져요.”

누구도 그들을 기억해주지 않지만

창신동 아줌마의 반란, 그 시작은 ‘참여성노동복지터’에서 기획한 ‘수다공방 패션쇼, 창신동 아줌마 미싱에 날개를 달다’였다. 세계 제일을 자랑하는 기술력을 바탕으로 고부가가치의 제품을 가지고 경쟁력 있는 시장 확보였다.

“그게 어디 한 순간에 되겠어요. 뭐라 뭐라 말들을 하기도 하지만, 저는 이제 시작이라고 생각해요. 앞으로 우리가 어떻게 길을 여느냐에 달려 있는 거죠. 천연염색이 맞냐, 라고 비판을 하는 사람도 있더라고요. 아무튼 낙후된 시장을 활성화 시켜서 삶의 터전을 새롭게 찾아야지요. 공동작업장도 만들어서 좀더 좋은 환경에서 일을 했으면 좋겠고요. 이제 첫 발이니 시행착오는 몇 번 거치겠지요.”

염선애도 미싱을 배우며 손가락 중간에 바늘이 박혀 병원에 가서 뽑아내기도 했다. 이런 일은 다반사라 사고라 생각도 하지 않았다. 미싱을 배울 때, ‘세 번은 되게 바늘에 찔려야 일류 기술자가 된다’는 말을 들었다. 이제 반란은 시작이요, 몇 번의 시행착오 뒤에 결실이 어찌 날지를 봐야한다고 염선애는 이야기 한다.

잠자는 시간 말고는 하루 종일 앉아 있어야 하는 염선애에게 몸이 아픈 곳은 없냐고 물었다. 스트레스 때문에 당은 있으나 다른 곳은 괜찮다고 한다.

“골병이 들어야 정상인데, 제가 건강을 타고나서 괜찮아요. 어려서 자연에서 나오는 것을 먹고 자라서 건강하나 봐요. 어머니가 산에 나무하러 다니며, 칡을 캐서 먹였거든요. 고구마 먹고, 쑥 먹고 이게 보약보다 좋았던 것 같아요. 시골에 살 때 윗목에 옥수수대 쳐 가지고 고구마 올려놓고, 생 거로도 먹고, 쪄서도 먹고 했거든요. 냇가에서 우렁 많이 잡아먹고, 메뚜기 잡아먹고, 사탕수수 심어 놨다가 칠월에는 그걸 꺾어 빨아 먹고. 먹을 것 없고, 군것질꺼리도 없어 먹었던 것이 건강하게 해준 거예요.”

염선애는 시린 기억도 늘 편안하게 받아 안으며 이야기를 한다. 이 또한 그를 아프지 않게 하는 것이다, 물론 돈에 대한 스트레스도 무시할 수 없다. 직장을 다니며 대학공부를 하는 아들을 보면 가슴 한편이 아려온다.

염선애를 아리게 하는 것

홀로 키운 외아들이라고 시어머니 노릇 톡톡히 하는 것 아니냐고 묻자 미싱을 멈추고 손사래를 친다.

“나는 지 여자 친구한테 최선을 다하라고 해요. 특별나게 대해 주라고. 누가 내 아들한테 ‘니 엄마한테 잘 해라’하면 절대 그런 말 꺼내지도 말라고 해요. 장가가서 홀어머니라 문제되면 ‘엄마를 잊어라’ 라고 아들한테 말을 했고요. 니 가정이 중요한 거라고.”

염선애 자신도 남자를 만난다면 나만을 사랑해주고, 다른 사람보다 특별하게 대해 주기를 바랄 거라고 말을 한다. 온전하게 사랑을 차지하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아들 하나지만, 염선애 자신이 그렇듯, 아들도 그렇게 여자 친구를 만나기를 바란다고 한다.

“형제가 많은 집에 장가를 갔으면 좋겠어요. 홀로 살았으니, 장가가서는 북적되고 살았으면 좋겠어요. 처제가 있으면 용돈도 듬뿍 주고. 처가 쪽에 잘했으면 좋겠어요. 아내는 신랑이 처가에 잘하면 자연히 신랑한테 잘하거든요.”

아들은 무던히 잘 자랐다. 문제가 있다면 돈을 잘 벌지 못한 자신이라고 염선애는 고백을 한다. 오십년을 등에 지고 살아온 가난, 착한 것보다 돈이 중요하더라는 생각을 갖게 한다.

“동생은 지금 잘 살아. 예전에 같이 제품 공장을 다녔지. 나는 버는 족족 부모님한테 갖다 줬는데, 동생은 지 것은 야무지게 챙기더라. 참 야무져. 결혼 한 뒤에 공부를 해서 대학도 나왔으니. 나랑 달라.”

인터뷰가 두 시간이 넘어서자 자연스레 말끝에서 ‘요’가 사라진다. 뽕짝을 좋아하는 염선애. 이젠 누가 노래방 가자고 잘 불러주지 않는다고 한다. 연락만 오면 당장 뛰어갈 텐데 하며.

뽕짝을 좋아하는, 그리고 노래에 담겨있을

나는 그의 노래를 들어본 적이 없다. 하지만 그의 뽕짝은 심금을 울리리라 생각한다. 그는 가난과 돈을 줄곧 이야기했지만, 마음속으로는 그것의 지배를 거부하며 사는 게 분명하다. 그가 노래를 부를 때야, 그 아픔도 슬슬 배여 나오리라. 웃음을 잃지 않는 그의 삶 너머에 그를 당뇨에 걸리게 한 스트레스의 사연이 있으리라. 굳이 생채기를 후벼 파고 싶지 않았다.

그저, 그냥 듣고만 싶었다. 묻지 않아도 넉넉한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놓는 염선애는 창신동 언덕길과 골목을 빼 닮았으리라. 쉼 없이 제품을 박음질을 하는 미싱의 기계음도 염선애를 닮아 웃고 있다. 그는 입이 아닌 미싱 소리로 인터뷰를 했는지도 모른다. 쉼 없이 풀려나오는 실패의 실처럼. 촘촘히, 촘촘히 내 가슴 속에 염선애가 들어왔다.

‘인터뷰 할 사람 없으면 언제든지 찾아와.’ 하루 종일 미싱과 이야기를 하는 염선애는 사람이 그리웠는지 모른다. “예전 같지가 않아. 지금은 이웃이 없고…, 예전에는 똑같은 음식이지만 서로 나눠주고 그랬잖아.”

돈이 사람의 가치를 정하는 세상에 영원히 돈과 인연이 없이 그는 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돈을 이야기한다 해도 그의 가슴 깊은 곳에는 깊게 흐르는 정이라는 강이 흐르고 있을지 모른다. 자꾸 그의 얼굴을 들여다보면 나도 모르게 누이를 만난 듯 마음이 편해지기 때문이다.

염선애가 일을 하고, 밥을 먹고, 잠을 자는 터에 들어가 10분도 되지 않아 목이 컬컬해져 오는 느낌을 받았다. 남방이라 면이나 솜보다 별로 먼지가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다. 인터뷰를 마치고 돌아와 이 글을 마무리하는 지금까지 목이 컬컬하다.

우리의 70년대 누이는 그럴게 살아온 거다. 먼지를 먹고, 바늘에 찔리고, 타이밍 약으로 철야를 버티며 살아온 것이다. 그리고 아직도 반란을 꿈꾸고 있다. 열서너 살의 꿈을 오십대 아줌마의 꿈으로, 아직도 그렇게 그렇게 창신동을 지키며 살아오고 있다.

창신동 오십대 아줌마의 꿈으로

돌아오는 길 내내, 창신동 골목이 골목 같지 않고, 언덕을 오르는 계단이 계단 같지가 않았다. 한 사람의 몸을 헤집고 걷는 것 같았다. 그리고 숱한 이의 얼굴들이 불쑥 불쑥 골목에서 튀어나오는 것 같다. 바늘에 찔린 상처에 미싱 기름을 발라야 했던 흑백 사진이, 컬러사진으로 2000년대에 다시 찍어야 하는지 밤하늘에 대고 소리를 치며 묻는다.

지금 창밖으로 두타의 높은 빌딩이 환하게 보인다. 발전의 뒤안길 창신동에는 교회의 붉은 십자가가 밤을 밝힌다.

이 밤 다시 가보고 싶다. 아직 염선애의 미싱은 돌아가는지. 햇빛 한 줌 없는 곳에 해를 대신한 형광등이 아직 그의 삶을 밝히고 있는지. 달맞이꽃처럼 밤을 밝힌 염선애가 앉아있다.


덧붙이는 말

인터뷰는 창신동에서 여성봉제노동자들과 함께 하는 (사)참여성노동복지터의 도움으로 이루어졌습니다.

태그

로그인하시면 태그를 입력하실 수 있습니다.
오도엽 기자의 다른 기사
관련기사
  • 관련기사가 없습니다.
많이본기사

의견 쓰기

덧글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