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 총기사건, 민족적 틀 못 깬 언론, 민족과잉 지적에도 여전

추모 촛불을 들자더니..'사과' 말라니 우선 거두자네

버지니아에서 울린 총성은 태평양을 건너 핵바람으로 일어났다. 이번 사건 관련 컨텐츠는 포털에서 용량을 초과한 것인지 4천여 건 이상 검색이 되지 않지만, 대략 5,6천여 개 가까운 컨텐츠가 생산되었고, 될 것이라 예상된다. 용의자가 한국계 학생인 것으로 밝혀진 17, 18, 19일 모든 뉴스는 ‘버지니아’에 의해 잠식되었다. 노무현 대통령의 개각과 정부가 발표한 비정규직 법안 시행령안에 대한 언론의 견제 및 여론화는 완패였고, 허세욱 열사의 죽음에는 거침없이 무관심을 보였다.

이번 버지니아 사건에서 언론에 ‘오버’라는 비난이 곳곳에서 제기되었다. 전규찬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는 한 인터넷언론에 기고한 글에서 “현재로서는 범인의 국적·인종·민족이 사건의 핵심이라고 볼 어떤 근거도 없다. '우리' 모두가 사태에 연루된 것처럼 호들갑을 떨거나, '우리' 모두가 책임져야 한다는 묘한 죄의식으로 사건의 본질을 '한국인 대 미국인'의 이분법적 틀로 왜곡하는 것은 금물이다. 불안감만 증폭시키고, 진실과의 대면을 방해할 따름”이라고 언론의 행태를 비판했다.

분위기를 파악한 방화범 언론은 긴급히 진화에 나섰다. 추모의 촛불을 들자던 언론은 이제 “사과를 거두라”고 종용한다.

범인은 한국계 왕모씨?? 아니면 조승휘??

우선 사건을 돌아보자. 장소는 버지니아 공대 현지시각으로 16일 어느 낮, 이 학교 학생 조승희는 인명을 겨냥해 100발의 총을 난사했다. 범인을 포함해 33명이 사망했고, 60여 명의 사상자를 냈다. 미국 언론은 이번 사건 앞에 ‘미국 역사상 최악의 총기 난사 사건’, ‘911 테러 이후 최고의 충격’이라는 수식어를 달았다.

이 사건이 한국에 첫 보도된 것은 17일 새벽 1시경, 17일 오전까지 보수언론을 중심으로 ‘미국에 또다시 충격적인 총기사건이 발생했다’고 보도되었다. 용의자가 중국인일 가능성이 있다는 미국 언론 보도가 나오자 한국 언론들은 ‘희망어린’ 추측을 서슴치 않았다.

쿠키뉴스 17일 <미 버지니아 공대 총격사건 용의자 중국인 남성>
한국일보 17일 <중 유학생이 범인>
매일경제 17일 <미 버지니아공대 총기난사 범인은 중국계 추정>


한국일보는 17일 ‘중 유학생이 범인’이라는 기사에서 “아직 공식 확인되지는 않았지만 시카고선타임스의 보도와 대만 출신 재학생인 첸 치아 하오씨의 증언에 따르면 범인은 지난해 8월 이 대학에 유학 온 중국 학생이며, 사건 동기는 여자친구와 관련됐을 가능성이 높다”며 “경찰이 입장 발표를 미루고 있는데, 이번 사건이 자칫 미국 사회에서 아시아인과 관련된 인종문제로 비화할 위험을 누그러뜨리려는 시도일 가능성도 없지 않다”고 밝혔다.


문제는 이것. 한국 언론들이 미국 경찰 등 미 당국의 발표내용을 근거로 한 것이 아니라 미 언론의 보도 내용을 근거로 보도 했다는 점이다. CNN 등 미 언론은 목격자 증언 등의 증언과 몇 가지 정황을 근거로 범인이 아시아인 중 중국인일 가능성을 거론했는데, 한국언론도 이를 가감 없이 받아 적었다. 범인이 한국계인 것으로 밝혀지자, 중국당국에서 미국언론의 오보에 강력히 대응하겠다고 나섰으니, 한국 언론 역시 이에 대한 책임이 없다고 할 수 없겠다.

민족적 감수성을 자극하는 소재로

한편 용의자가 ‘아시아계’라는 미국 언론 보도 이후, 범인의 국적이 초미의 관심사로 부상한다. 한국계 학생이 가능성이 현실로 드러나자 언론들의 오버는 극에 달한다.


조선일보 17일 <버지니아공대 총기난사 범인 24세 중국 유학생>
한겨레 17일 <“아시아계 청년, 기숙사서 여자친구와 다툰 뒤 총쏴”>
머니투데이 17일 <“총격사건 범인 한국계 유학생”>
YTN 17일 <“총격범은 아시아계 남학생”>
MBN 17일 <미 대학 총기난사 “범인은 아시아계 남학생”>
오마이뉴스 17일 <워싱턴포스트 “1984년생 한국계 교포”>
한국일보 17일 <“총기난사 범인은 한국계 가능성”>
경향신문 18일 <미 버지니아 공대 총기난사 범인은 한국인 학생>
노컷뉴스 18일 <“범인은 한국계” 중국 언론도 긴급 타전>
중앙일보 18일 <“범인은 한국 국적 조승희, 버지니아 공대 4년”>


경향신문은 18일자 <미 버지니아 공대 총기난사 범인은 한국인 학생>에서 “미국 영주권자는 영주권을 갖고 기간 제한 없이 거주할 수 있지만 ‘외국인 거주자(a resident alien)’로 분류돼 국적은 한국인”이라며 “미국 사상 최대의 교내 총격 사건의 범인이 한국 교포학생으로 드러남에 따라 미국 한인 사회는 엄청난 충격에 빠졌으며 한국 외교통상부와 미국 주재 한국대사관도 비상 상황에 돌입했다”고 밝혔다.


이번 사건의 범인으로 한국계 학생이 지목되자, 경향신문은 ‘한국인 학생 미 총기참극’이라는 말머리까지 달며 집중보도에 나선다. 다른언론도 마찬가지다. 오마이뉴스도 이번 사건을 핫이슈로 분류해 보도했고, 조선일보를 비롯한 보수언론은 ‘미 현지 버지니아공대 한인학생 회장’, ‘한인학생회 지도교수’와의 인터뷰까지 실으며 관심을 보였다.


태평양 건너온 사건에서 추측보도로 인한 오보는 필연적이었다. ‘84년생 한국인 왕모씨’가 범인이라는 둥, ‘한국계 범인은 조승휘’라는 등의 오보가 속출했다. 또한 국적에 대한 강조가 민족적 감수성을 자극하는 소재로 이어지는 것 역시 필연. 범인이 한국계 학생이라는 것이 알려지자, 미국 내 교민사회와 한국사회의 분위기로 카메라가 돌아가는 것이 한국언론의 과제로 다가왔다. 한국언론은 ‘보이지 않는 공포’를 실물화했다.


한겨레 17일 <한-미 관계 악영향 미칠까…비상체제 돌입>
한겨레 17일 <“해코지 걱정…아들 당장 왔으면”>
YTN 17일 <교민사회, 당혹감과 충격에 빠져>
오마이뉴스 17일 <“충격에 빠진 한국유학생들이 떨고 있다”>
노컷뉴스 17일 <버지니아 총기난사..한국사회 충격 “한국인인게 부끄럽다”>
이데일리 17일 <‘한국인이 총기 난사’..한미FTA 걸림돌 되나>
경향 18일 <‘혹시..’하던 교민들 경악, 충격>


‘보이지 않는 공포’는 한미동맹에 대한 우려로까지 나아갔다. 한겨레신문 및 몇몇 신문은 ‘한미FTA’ 타결 국면에서 이를 직접 연관시킨다.

이데일리는 17일 <‘한국인이 총기 난사’..한미FTA 걸림돌 되나>에서 “미국 버지니아 공대에서 발생한 총기 난사 사건의 피의자가 한국계로 확인되면서 한미 관계의 부정적 영향은 물론 지난 2일 타결된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에도 큰 걸림돌로 작용할 전망”이라고 밝혔다.


개혁성향의 신문 한겨레신문도 비슷한 논조다. 한겨레신문은 <한-미 관계 악영향 미칠까…비상체제 돌입>에서 “정부는 특히 이번 사건으로 재미동포, 유학생 등 현지 한국인의 신변에 위해가 가해질까 우려하면서, 한-미 관계와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미국 비자면제 프로그램 가입 문제 등의 현안에도 영향을 끼칠지 모른다는 전망이 나오고 있다”고 밝혔다.

이러한 언론의 공포감 조성에 한국사회 및 정치권은 즉각 반응했다.

YTN 18일 <노대통령, 추가 애도 표명>
뉴시스 18일 <반기문 “있을 수 없는 일”>
중앙일보 18일 <주미 한국대사관, 총기 난사 사건 관련 희생자 애도 공식성명>
조선일보 18일 <외교부, 교포들 테러 가능성 우려..>
오마이뉴스 18일 <“부끄럽다, 머리 숙여 용서를 구한다”>
연합뉴스 18일 <워싱턴 총영사 “재미 교포 사회 차분히 대처해야”>


오마이뉴스는 <“부끄럽다, 머리 숙여 용서를 구한다”>에서 한국사회의 분위기를 빠르게 읽을 수 있는 인터넷 네티즌들의 반응을 살피며 “대부분 네티즌들은 이번 사건으로 숨진 33명의 피해자들에게 애도를 표하면서도 미국 내 반한 감정의 재발로 인한 교민사회 피해를 우려했다”고 보도했다.


언급된 기사에서도 보여지듯 한겨레신문, 오마이뉴스, 경향신문 등 소위 개혁성향 언론으로 분류되는 개혁언론들도 이번 사건에 주목, 보수언론과 보조를 맞췄다. 이 와중에 오마이뉴스는 미국의 총기문화에 초점을 맞추고, 이번 사건을 계기로 논란이 일고 있는 범인의 인종과 국적에 대한 논쟁으로 비교적 균형을 맞추려는 노력을 보였다.

보수언론을 중심으로 이번 사건에 민족적 색채를 입혔고, 이 가운데 개혁성향의 언론들 비교적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 선방했지만, ‘한국’언론이라는 정치적 지형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한국계 미국인’이 저지른 사건에는 속수무책 같은 기사들만을 되풀이되었다.

이러한 보도는 범인의 국적이 사건의 본질과 무관함에도 이를 외면하지 못했고, 사건을 꼼꼼히 되짚기에 앞서 민족적, 인종적 틀로 왜곡하면서 오히려 갈등을 부추기거나, 불안감만 조장하는 결과를 낳았다.

여전히 민족적 프레임 못 깼다

주말을 지나면서 언론의 대응은 약간의 변화를 띤다.

주간한국 23일 <버지니아 쇼크..한미 반응 온도차>
문화일보 23일 <‘과잉 애도’ 뒤에 ‘민족 과잉’ 자성>
헤럴드경제 23일 <“범인 국적보다 美언론 보도 집중 논쟁” “동요했던 한국 유학생들 다시 학교로”>
이데일리 23일 <미참사 1주일..범행동기와 총기규제에 ‘초점’>
동아일보 23일 <“사과해야할 쪽은 오히려 미국인데..”>
SBS 23일 <미국인 90% “총격 참사, 한국 책임 없다”>


<“범인 국적보다 美언론 보도 집중 논쟁” “동요했던 한국 유학생들 다시 학교로”>에서 헤럴드경제는 “이번 총기 난사 사건과 관련해 미국 대학 내에서는 다양한 형태의 토론이 이뤄지고 있다. 하지만 토론 과정에서 범인의 인종이나 국적(ethnic background) 등은 거의 언급되지 않고 있다”며 “오히려 ‘NBC 방송이 범인의 동영상 테이프를 여과 없이 내보낸 것이 타당한 것이냐’, ‘방송이 버지니아공대 총기 난사 사건을 과도하게 내보내고 있는 것 아니냐’ 등이 내용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대표적인 보수언론 조선일보는 ‘총격사건이 남긴 것’이라는 말머리를 붙이고 24일 3개의 기사를 내보냈다. 조선일보는 그 첫 번째 기사인 ‘미국사회 성숙한 대응’에서 “심지어 일부 미국인들과 미국 언론들은 ‘집단적 죄책감’에 빠져 낙담하고 있는 한국에게 한국의 책임이 아니다라고 위로.격려하며 상처치유를 강조하는 ‘성숙한 모습’이 대세를 이뤘다”며 “ 이번 사건 범인이 한국출신 영주권자인 것으로 드러나자 국내 일각에선 지난 2002년 ‘주한미군 탱크 여중생 압사사건의 미국판 비극’이라며 파장을 우려했다”고 보도했다. 조선일보는 미국내 여론조사 결과를 토대로 미국이 “현실적 대응 모색에 주력”하는 모습이라고 전했다.


언론은 냉정을 찾으며 미국에서 날아온 한국인의 집단의식을 지적하는 태도를 보이는 듯 하지만, 여전히 민족적 프레임을 유지했다는 측면에서 별반 다르게 보이지 않는다.

그런 면에서 동아일보가 실은 ‘인콰이어러’ 20일자 ‘한국에 보내는 편지-당신들의 사과에 담긴 교훈’이란 제목의 사설은 한국과 미국사회에 시사하는 바가 커보인다. ‘인콰이어러’는 이 사설에서 “제발 사과를 멈춰 달라. 그러나 우리는 9·11테러 직후 일부 무지한 사람이 미국 내 시크교도들이 쓰고 있는 터번만 보고 알 카에다와 관련 있을 것이라는 어처구니없는 믿음에서 그들을 공격한 걸 기억한다. 분명히 우리는 우리의 행동과 국제적 이미지를 바꾸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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