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경제적 격변과 여성운동의 흥망성쇠

[베네수엘라와 여성](1) - 베네수엘라 혁명, 여성에게도 혁명인가?

풍족한 자원으로 고통 받는 베네수엘라

아름다운 경관 때문에 1498년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은총의 땅’이라 이름붙인 베네수엘라는 코코아, 커피, 면화, 사탕수수 등 자원이 풍족한 나라다. 특히 베네수엘라는 풍부한 석유 자원으로 급속한 경제성장과 발전을 이루었다. 1882년 첫 유전(油田)이 가동하기 시작한 이후 인구가 3배 증가했고, 국가 예산은 100배 증가했다. 남미에서 가장 발달된 고속도로를 건설하였으며, 베네수엘라 부유층은 미국이나 유럽 부유층의 부러움을 살 정도였다.

그러나 베네수엘라는 남미에서 가장 빈곤한 나라이기도 하다. ‘검은 금’ 석유로 벌어들인 막대한 이윤이 특히 미국 소유의 초국적 자본 그리고 소수 민족 자본가들의 주머니를 돈독히 해주는 사이, 베네수엘라 아동 절반 이상이 학교를 가지 못하고 거리를 배회하거나 노동을 착취당하고 있으며, 인구 70%가 빈곤에 허덕이고 있다. 우루과이 출신 유명한 작가 에두아르노 갈레아노가 남미를 두고 “풍족한 땅 때문에 생겨난 인류의 빈곤”이라고 한 바 있는데, 이 표현은 베네수엘라에 가장 걸맞는 표현이다.

부유하지만 가난할 수밖에 없는 이런 역사적 아이러니는 실제로 벌어지고 있다. 이는 400여 년 간의 식민 통치, 독립 이후 새롭게 부상한 지배계급에 의한 수탈, 초국적 자본과 국제금융기구(IMF, 세계은행, WTO 등)들이 강제한 신자유주의 정책의 필연적 결과이다.

1821년부터 1839년까지 진행된 독립전쟁 끝에 베네수엘라는 400여년에 걸친 스페인 식민통치에 종지부를 찍었다. 그러나 베네수엘라에서 전쟁과 제국주의 지배는 끝나지 않았다. 석유가 개발되지 않았던 20세기 초기까지는 제국주의의 유산인 대농장(latifundio)을 둘러싼 권력분쟁과 피착취계급에 대한 수탈이 지속되었으며, 20세기 초 석유 개발이 시작된 이후에는 이 ‘검은 금’ 때문에 또 다른 비극이 시작됐다.

막대한 토지를 소유함으로써 정치를 장악한 독재자 후안 비센떼 고메스(Juan Vicente Gomez; 1908∼1935년)는 본격적으로 석유 개발에 나섰고, 기존의 농업경제에서 특히 석유 등 천연 자원을 기반으로 한 개발주의 경제로 전환하였다. 고메스와 베네수엘라 지배계급, 그리고 미국 자본가들이 석유로부터 벌어들인 부와 권력을 나눠가졌다. 상황이 그렇다보니 스페인으로부터 독립은 했어도 미국의 새로운 식민지나 다름없는 상태였고, 고메스와 미국 석유자본은 배를 불릴 수 있었지만 민중은 굶어죽는 상황이었다.

그 이후 이사이아스 메디나 안가리따 (Isaías Medina Angarita; 1941∼1945년) 정권이 들어서면서 비로소 외국 석유기업 수익에 대한 세율을 50%까지 인상하는 석유법이 제정되었으나, 석유에 대한 이런 ‘개혁’은 1952년 군부 쿠데타로 탄생한 마르꼬스 뻬레스 히메네스(Marcos Perez Jimenez; 1952∼1958년)의 독재정치에 의해 좌절되었다. 히메네스는 80만ha의 토지에 대한 석유채굴권을 외국 자본에게 부여해줌으로써 국내외 석유자본의 주머니를 돈독히 해주었고, 정경유착과 부정부패, 민중의 빈곤화는 갈수록 더해졌다.

형식적 민주주의의 도입과 새로운 억압의 시작

1958년, 히메네스 독재정권이 막을 내리고 형식적으로나마 자유민주주의가 도입됐다. 그러면서 토지개혁 등 불평등의 문제를 해소하려는 움직임도 조금씩 일어났다. 석유를 통해 국가재정의 안정화가 이루어졌고 다른 남미 국가는 끊임없은 군부 독재로 괴로워하는 동안 베네수엘라는 그 중 가장 안정된 국가로 평가받았다.

그러나 이런 ‘안정’은 외피에 불과했다. 독재정권이 무너지면서 민주행동당(AD)과 기독민주주의 성향의 독립정치조직위원회(COPEI) 두 당은 자유민주주의를 구축한다는 목표 하에 푼또피호협약1)을 체결했는데, 이는 철저히 배타적인 양당 정치 체제였다. 민주주의의 탈을 쓴 양당 독재 정치 체제는 오히려 위기를 더욱 증폭시키는 역할을 했으며, 푼또피호협약은 전국민을 석유로 혜택을 받는 자와 고통을 받는 자로 양분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러나 여성운동을 비롯한 소위 조직적 시민운동이 발달한 것도 바로 이 시기 이후부터이다. 한편으로는 형식적 민주주의가 도입되면서 시민사회단체들이 생겨 활동할 수 있는 길이 열렸지만 동시에 어렵게 획득된 민주주의가 푼또피호협약으로 억압당하자 ‘민주화 이후 민주화’를 요구하는 투쟁이 광범위하게 일어난 것이다.

한편, 베네수엘라 여성들이 공식적인 정치적 권리로서의 참정권을 획득한 것은 1947년이었지만 이후에도 여성의 삶은 크게 개선되지 않았다. 사회 모든 부문에서 여성의 권리는 여전히 전무했다. 정치적인 배제는 물론이거니와 형법, 민법, 노동법 상에서도 극히 제한적인 권리만을 가졌다. 1980년대 초 여성 관련 법률들이 제정될 때까지 결혼을 했거나 남성과 동거하는 여성은 자기 일을 가질 수 없었고, 아이․일․재산에 대해 어떠한 결정도 하지 못했다. 심지어 혼인신고서를 제외한 어떠한 공문서에도 서명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래서 이런 불평등한 법과 제도가 여성운동의 일차적 공격 대상이 되었다.

경제성장과 민주화 투쟁에서 성장한 여성운동

여성들은 푼또피호주의에 대응하고 여성들의 권리를 쟁취하기 위한 운동을 시작했다. 여성들은 1960년 헌법 개정을 통해 남성과 여성이 법 앞에서 평등하다는 평등권을 법안에 기입하게 하는 성과를 얻어냈다. 그러나 이런 성과도 곧 사장되고 만다. 개정된 헌법은 다른 법률과 상충하면서 실효성을 거두지 못했고, 민주화 투쟁에 적극 가담했던 여성들도 여전히 정치적으로 주변화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성들은 형식적 민주주의가 열어준 틈새를 이용하여 보다 강한 목소리로 여성 관련 정책을 요구하였다. 여성들은 스스로 조직화하면서 계급과 계층을 뛰어넘어 광범위한 전선을 형성했고, 여성 관련 정책을 얻어내기 위해 다양한 투쟁과 캠페인을 지속했다.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베네수엘라 여성들에게 성과가 돌아오기 시작했다. 이런 성과를 얻어내는 데 베네수엘라 여성운동의 강화된 주체적 역량이 한몫을 하긴 했지만, 이를 가능하게 했던 객관적 정세도 존재했다. 즉, 석유 붐으로 인한 경제적 안정과 여성에 대한 지원 확충, 그리고 복지 확대가 그것이다.

1960년에 출범한 석유수출국기구(OPEC)가 1970년대에 유가 통제를 한층 강화하고 유가 폭등을 유도하면서 베네수엘라 경제가 재정흑자와 상대적 안정을 이룰 수 있게 되었다. 남미 국가 중 가장 높은 GNP를 자랑하던 이 시기에 집권한 까를로스 안드레스 뻬레스(1973-1978) 대통령은 석유로 벌어들인 재원의 상당부분을 사회복지 기금으로 내놓았고, 그 일환으로 1974년 여성 관련 첫 국가 기관인 ‘대통령 직속 여성위원회(COFEAPRE)’가 탄생했다. 또한 급속한 경제성장과 새로운 일자리 창출은 여성노동력을 필요로 했고, 이에 따라 여성들이 노동시장에 대거 유입되는 한편, 교육과 취업 기회 역시 증가하였다.

그러나 70년대 여성운동 성장에 더욱 직접적인 원동력이 된 것은 이 시기에 활발해지기 시작한 세계 여성운동의 국제연대와 유엔과 같은 국제기구들의 역할이었다. 1967년 유엔은 여성차별철폐선언을 발표했고, 3년 후 여성 발전을 위한 국제행동프로그램이 발효되었다. 그리고 ‘세계여성의 해’로 선언된 1975년에는 멕시코에서 제1차 세계여성대회가 개최되어 국가적·지역적·국제적 차원의 모든 발전계획과 수행과정에 있어 여성문제를 통합할 것을 목표로 하는 ‘유엔 여성발전 10년(1976-1985년)’이 선포됐다.

이러한 국제적 움직임에 힘을 얻어 1968년에 ‘제1차 베네수엘라 여성 평가 세미나(First Seminar for the Evaluation of Venezuelan Women)’가 개최되었다. 이 회의를 통해 여성들은 참정권 획득 이래 여성의 권리에 관한 어떤 것도 국가 제도로서 자리 잡지 못했고 젠더에 기반한 사회적, 법적 제도 증진이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이런 인식을 기반으로 베네수엘라 페미니스트들은 1975년, 1980년, 1985년 유엔 세계여성대회 등 국제기구에 보다 적극 참여하면서 베네수엘라 여성운동의 성장, 정치 참여, 그리고 여성 관련 정책 도입의 확대를 이끌어냈다. 그리고 1978년 여성위원회를 여성개발참여부로 바꾸고 여성과 남성의 법적 지위가 동등하다는 문구를 삽입하도록 민법을 개정(1982년)하는 데도 성공했다.

1985년에는 나이로비 여성대회를 계기로 26개 여성단체가 여성엔지오연합(Coordinadora de ONG de Mujeres; CONG)을 구성함으로써 베네수엘라 역사 상 가장 광범위한 여성 연대체가 생겨났고, CONG은 1990년 노동법 개정, 1993년 고용평등법 제정과 전국여성회의 출범, 선거후보에 대해 30% 여성할당제를 법제화한 1997년 선거법 개정, 1998년 여성및가족에대한폭력방지법 제정 등 지속적인 법 개정을 이뤄냈다.

경제위기와 여성에 대한 역공

그러나 이 모든 성과는 그야말로 법제도적 변화에 불과했다. CONG이 구성되어 활발히 움직이는 동안 베네수엘라 내외적으로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급속한 경제성장은 과잉축적의 위기로 이어졌고, 여성 관련 정책과 복지를 가능하게 했던 경제적 안정 기반이 이 붕괴하기 시작한 것이다. 베네수엘라의 고속성장은 1972-5년 유가상승 시기까지 계속됐으며, 이후 하강 곡선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1980년대 초 남미 전반에 외채위기가 닥치자 베네수엘라 경제는 곤두박칠쳤다. 1985년과 1986년 사이 유가가 베럴 당 33달러에서 15달러로 50% 하락했고, 1990년대 초가 되자 또 50% 추락했다. 긴축정책이 장기화됐고 베네수엘라를 비롯한 많은 국가에서 자산이 평가절하 됐다. 긴축재정은 공공부문 축소와 대량 해고, 노동자의 비정규직화 등 일반 국민의 고통으로 이어졌고, 자산의 평가절하는 유동 자본 소유자들이 부동산 투기를 하고 막대한 부를 축적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또한 위험한 남미로부터 ‘안전한’ 미국으로 대규모 자본 도피가 일어나면서 악순환의 수렁은 더욱 싶어졌고 베네수엘라 민중의 삶은 다시 암흑기로 접어들기 시작한 것이다. 1991년이 되자 가구 23.5%가 극빈 상태에 처했고, 1997년에는 이 수치가 78%까지 높아졌다. 베네수엘라는 20여년 만에 남미 국가 중 GNP가 가장 높은 국가에서 빈곤율이 가장 높은 국가가 되었다.

이에 따라 급증했던 여성 일자리는 모두 저임금의 비정규직으로 바뀌었고, 여성의 빈곤화가 급속히 퍼졌다. 여성에 대한 차별적 관념은 그대로 유지되는 속에서 경제가 어려워지자 여성은 정치적으로 주변화됐고, 경제적인 착취가 노골화됐다. 그리고 80년대 경제위기 이후 신자유주의 정책들이 급속히 도입되면서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

신자유주의와 여성운동의 한계

경제위기가 닥치고 신자유주의가 전면화되자 여성운동의 한계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70~80년대 여성운동이 얻어낸 각종 법과 정책이 오랜 투쟁의 결과였음에도 불구하고, 한편으로는 여성을 위한 복지혜택 등이 석유를 기반으로 한 급속한 자본주의적 경제 성장에 의존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한계에 봉착했다.

다른 한편, 베네수엘라 여성들의 아래로부터의 주체적인 대중운동보다 유엔 등 국제기구를 통해 소수 ‘여성리더’들 - 예컨대 법제도 개혁을 이끌었던 ‘베네수엘라 여성변호사 연맹(Federación Venezolana de Abogadas; FEVA)' - 이 법제도적 개혁을 주도했다는 사실도 한계로 나타났다.

사실 1982년 민법 개정 운동은 전문직 여성 또는 지식인 뿐 아니라 노동조합과 좌파 정당, 빈민여성들이 지역별로 구성한 대중여성써클(Círculos Femininos Populares)도 포괄함으로써 중상류층 여성 뿐 아니라 빈민여성이 함께했었고, 이러한 조직적 확대와 대중적 활동을 기반으로 CONG도 생겨났던 것이다. 그러나 신자유주 구조조정이 여성들을 공격해오는 사이 많은 전문직 여성들이 국가 기관이나 국제기구 편입되자 CONG 내에서 여성운동과 국가 간 관계, 여성들 간 계급적 차이, 보수정당과 좌파정당 간 노선 차이를 둘러싼 끊임없는 논쟁이 벌어졌다.

그리고 이런 논쟁은 1990년 노동법 개정 과정 속에서 표면화됐다. 노동법 개정으로 여성과 남성 노동자 간 대부분의 차별규정이 시정됐고 모성보호 조항이 강화됐지만 가사노동자에 대한 노동권이 제외되면서 많은 단체들이 CONG을 떠났다. 결국 90년대 후반부에 CONG은 소수 여성들만의 단체로 전락했고, 이 때 이뤄낸 여러 성과들은 대중적 투쟁에 기반한 것이었기보다 정치인, 주류 정당과 여성 전문가들 간 ‘로비’에 의한 것이었다. 그리고 이런 활동은 오랜 가부장적 착취라는 구조에 대한 변혁보다 제도개선과 여성의 사회 진출 확대로만 귀결됐으며, 심화된 여성노동의 불안정화와 전체적인 빈곤화에 대처하기엔 역부족이었다.

종합하자면, 경제성장과 형식적 민주주의의 도입은 한편으로 민주세력이 부상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해줬고, 여성들도 이 속에서 일정 정도의 정치적, 경제적 성과를 얻어낼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런 정치적, 경제적 성과는 구조적 변혁이 아닌 제도적 개선에 불과한 것이었고, 경제위기가 도래하면서 그 기반이 무너지자 운동의 한계가 드러나면서 분화의 과정을 밟아가게 되었다.

변호사, 지식인 등 일부 엘리트 여성들은 법제도적 개선을 이어나갔다. 물론, 민법 및 노동법 개정 과정 속에서 광범위한 연대가 이루어지긴 했다. 그러나 결국 빈곤한 대부분의 여성들은 일부 여성들이 쟁취한 제도적 성과에만 기댈 수 없는 노릇이었다. 다른 형태의 여성운동이 필요했다. 80년대에 구성되어 확산된 여성대중써클이 단초가 되었고, 차베스의 혁명과정과 집권이 결정점이 되었다. 경제 위기가 새로운 체제의 기반이 되었듯이, 여성운동 내 논쟁과 분화는 이후 새로운 여성정책과 운동의 기반이 되었다.

이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은 다음 글에서 살펴보도록 하겠다.

1) Pacto de Punto Fijo. 나중에 ‘푼또피호주의Puntofijismo’라는 말까지 탄생시킨 이 협약은 1958년 10월 3개 주요 정당 -AD, COPEI와 민주공화국연합(URD) - 간 체결된 것으로, AD와 COPEI의 배타적 경쟁을 서로 보장해주는 것이다. 이런 절대적 양당 정치는 한편으로 외부로부터의 간섭과 내부 정치 분쟁을 피할 수 있게 해줬지만, 사실상 ‘양당 독재’였다. 푼또피호주의는 이후 진보적 민주주의 세력으로부터 지속적인 공격을 받았으며, 1998년 선거에서 우고 차베스가 푼또피호주의와 단절하겠다는 공약을 핵심 공약 중 하나로 제시할 정도로 베네수엘라 정치를 오랜 기간 규정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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