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속을 비워 속내를 깨끗이 한다

공무원노조 투쟁 지지 1000인 선언에서

바람이 분다
곡기를 끊은 지 열여섯 날이다
햇볕이 따갑다
  직접 쓴 시를 낭송하는 오도엽 시인/이정원 기자
곡기를 끊은 지 열여섯 날이다
노동기본권을 지키려고
아스팔트 위에 앉아 있는 것만은 아니다
해고된 동지를 복직시키려고
곡기를 끊은 것도 아니다
비우려고
비우려고
나를 비우고
철밥통이라 손가락질을 받아야 했던
낡은 과거를 비우고
부정과 비리 앞에 더욱 떳떳하게 말하지 못한
낡은 정신을 비우려고
오늘 숟가락을 들지 않는다

나는 안다
우리가 솔직하지 않았음을
법내냐 법외냐가
  권승복 공무원노조 위원장은 입술을 꽉 깨물었다./이정원 기자
우리의 정체성이 아니었음을
그러기에
저 유월의 햇살 아래 나를 태우고
저 흰 쌀밥 앞에 고개를 돌려야 했다
중요한 것은
법내냐 법외냐가 아니라
우리의 속내였다
우리의 속내였다
이천이년 삼월이십삼일 출범선언문의 첫 구절 아는가
아 얼마나 애타게 기다리던 순간인가
라고 시작한 그 감격을
빈창자 속에 출범의 첫 구절 채우려고 곡기를 끊는다
구십만 공무원노동자의 이름으로 만천하에 선포한다 세상을 바로잡고 나라를 바로세우는 공무원노조가 설립되었음을
으로 끝나는 선언문이 지금도 살아 내 창자 속에 있나
반성하며 길거리에 나앉은 것이다
  기자회견에 참석한 공무원노조 조합원들은 눈물을 감추지 못했다./이정원 기자
공무원노조의 강령이 무엇이던가
관료주의와 부정부패를 청산하여 국민들에게 신뢰받는 민주적이고 깨끗한 공직사회를 건설한다
배창자 속에서는 지방질만이 차지하고
소중한 우리의 강령은 이미 배설되어
낡은 휴지 조각이지 않았나 반성하며
곡기를 끊으며
나를 비운다

그렇다
법내냐 법외냐 보다는
나의 속내
공무원 노조의 속내를
속내를
솔직하게
진솔하게
말하지 못한
속내가 문제이기에
오늘 나의 뱃속을 비우고
다시 첫 마음으로
다시 첫 걸음으로
나를 비우고
너를 채운다
속을 비우고
첫 마음으로 돌아간다

  이정원 기자
이천사년 십일월 십사일 기억하는가
광화문에서 연세대로 한양대로
금호역에서 고속터미널로 종로로 충무로로
뛰었던 동료의 벅찬 숨소리를
내 빈 창자에 채우고
이천육년 사지 질질 끌려가던 동료
못 탕탕 박힌 사무실
소화기와 소방호스 앞에 꺼져야 했던 의리
다시 빈 내 뱃속에 채우고
맑은 속내
밝은 속내로
너에게
동료에게
국민에게
가야한다

오늘 유월의 징그러운 햇살 아래
살을 태우고
배를 비운다

바람이 분다
햇볕이 따갑다
배가
배가 고프다

  이정원 기자
덧붙이는 말

이 시는 오도엽 시인이 공무원노조 투쟁 지지 1000인 선언에 함께 하며 기자회견에서 낭송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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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무원노조 , 시 , 속내 , 오도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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