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무부가 “헌법 및 국제 인권규범의 이념을 실현하고, 전반적인 인권 향상과 사회적 약자.소수자의 인권보호를 도모하겠다”는 취지로 제정을 추진 중인 차별금지법안을 둘러싼 논란이 뜨겁다.
지난 달 2일 법무부는 성별, 장애, 학력, 성적지향 등 총 20개 항목을 제시하며, 이를 이유로 고용 등에 있어서 개인이나 집단에 대한 차별 행위를 금지하는 것을 골자로 한 차별금지법안을 입법예고했다.
당시 법무부가 제시한 차별금지 항목은 △성별 △장애 △병력 △나이 △출신국가 △출신민족 △인종 △피부색 △언어 △출신지역 △용모 등 신체조건 △혼인여부 △임신 또는 출산 △가족형태 및 가족상황 △종교 △사상 또는 정치적 의견 △범죄 및 보호처분 전력 △성적 지향 △학력 △사회적 신분 등 총 20개였다.
기독교계와 재계 “동성애는 죄악”...“기업현실에 부담” 반대
법무부가 이 같은 차별금지법을 예고하자, 일부 기독교 단체와 재계가 법안에 포함된 ‘성적지향’, ‘학력’, ‘출신국가’ 등을 문제 삼으며 법무부를 압박하고 나섰다.
특히 대한민국국가조찬기도회, 성시화운동본부, 한국기독교총연합회 등 일부 기독교 단체들은 이번 차별금지법안을 ‘동성애차별금지법’으로 규정하고, 지난 달 22일 ‘동성애차별금지법안저지의회선교연합’(의회선교연합)을 출범하고 동성애반대운동을 전개하고 있다.
의회선교연합을 총괄하고 있는 장헌일 사무총장은 차별금지법안에 대해 “동성애차별금지법(차별금지법안)은 동성애를 정상으로 공인하고, 확산을 막으려는 모든 건전한 노력을 금지시킨다”며 “동성애가 사회에 확산되고 나면, 피해자가 생기며 사회병리현상들이 심화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또 “동성애는 분명한 죄악이라는 것을 가르쳐야 한다”며 “동성애를 정상으로 인정하려는 세상의 흐름에 휩쓸리지 않도록 동성애는 하나님이 금지한 죄악이라는 것을 가르쳐야 한다”고 밝히기도 했다.
한국경영자총협회 등 재계 역시 차별금지법이 ‘기업현실에 큰 부담으로 작용하고, 노동시장의 경직성을 심화시켜 국가경제 발전에 저해 요인이 될 것’이라며 반발하고 있는 상황이다. 이미 경총과 전국경제인연합회 등 재계는 지난 4월 공표된 장애인차별금지법 제정 과정에서도 줄곧 반대 입장을 견지해왔다.
이 같은 기독교 단체들과 재계의 반발을 의식했는지, 법무부는 애초 원안을 수정해 법안을 법제처로 넘겼다. 법무부는 당초 20개의 차별금지 항목 중 △병력 △출신국가 △성적지향 △학력 △가족형태 및 가족상황 △언어 △범죄 및 보호처분 전력 등 7개 항목을 삭제했다.
“보수 기독교계와 재계 그리고 법무부 3자 합작 결과”
법무부가 기독교 단체와 재계의 의견을 수용해 성적지향 등의 항목을 삭제하자 성소수자 단체를 비롯한 인권단체들은 “이빨 빠진 차별금지법이 됐다”며 반발하고 있다.
동성애자인권연대, 인권운동사랑방, 한국게이인권운동단체 친구사이, 한국레즈비언상담소 등 87개 인권.성소수자 단체들은 8일 세종로 정부종합청사 앞에서 공동기자회견을 열어 “법무부가 성적지향 등 7개 항목을 삭제해 차별금지법이 차별조장법이 됐다”며 현재의 차별금지법안을 전면 거부한다고 밝혔다.
인권단체들은 이날 기자회견에서 성적지향 등 7개 항목이 삭제된 것과 관련해 “이는 일부 보수 기독교계의 동성애 혐오증과 인간을 상품으로만 보는 재계의 경제제일주의, 그리고 인권을 장식품으로만 아는 법무부, 3자 합작의 결과”라고 주장했다.
인권단체들은 법무부에 대해 “일부 보수 기독교계의 광기 어린 마녀사냥과 재계의 경제제일주의에 편승해 인권을 포기해 버렸다”고 맹비난했다.
“차별금지법이 아니라 차별조장법이 됐다”
인권단체들은 ‘성적지향’이 삭제된 것과 관련해 “사회적 편견 때문에 성소수자들이 차별을 받는 것인데, 그런 편견을 가진 종교 집단의 요구에 응해 성적지향을 차별금지 사유에서 삭제하겠다는 것은 기독교계의 편견이 없어질 때까지 성소수자들의 인권은 없다고 확인한 것에 다름 아니다”고 비판했다.
이들은 또 ‘학력’과 ‘출신국가’ 항목 삭제와 관련해 “노동력을 마음대로 착취하고 차별하려는 재계의 경제제일주의 때문에 출신국적이 다른 이주노동자나 능력은 있어도 대학을 나오지 못한 노동자가 착취 받고 차별받는 것”이라며 “그럼에도 재계 요구를 그대로 받아들여 출신국가와 학력 등을 삭제한 것은 인권은 경제보다 뒤에 있다고 선언한 것에 다름 아니다”고 주장했다.
이날 기자회견에 참석한 노회찬 민주노동당 의원도 “법무부는 애초 입법 취지를 삭제하는 만행을 저질렀고, 차별금지법은 차별조장법이 되었다”며 “이 법안이 이대로 통과될 경우 참여정부는 출신국가, 학력, 성적지향 등을 이유로 인간을 차별해도 좋다는 선언을 하게 된 셈”이라고 말했다.
한편, ‘기독교 단체와 재계의 압력에 굴복했다’는 단체들의 주장에 대해 익명을 요구한 법무부 인권정책과 관계자는 “기독교 단체와 재계의 반발이나 요구를 수용한 것이 아니다”며 “세계적으로도 13개 항목 정도를 차별 사유로 규정하고 있고, 국가인권위법과도 중복되는 부분들이 있어 이를 고려해 수정한 것”이라고 해명했다.
현재 법제처에서 심의 중인 차별금지법안은 빠르면 다음 주 중 국무회의에 상정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