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슬이 모여 흐르는 강, ‘달내’

[김하돈 시인의 경부운하 不可紀行] 이 강산 아직 죽지 않았으니 ④달래강

길에서 살아온 날들이 점점 쌓여가면서 사람들에게 제일 많이 듣는 질문 하나가, “가장 아름다운 곳 한 군데만 추천해 달라”는 말이다. 궁여일책, 나는 말을 돌린다. 지금 내가 어느 한 곳을 딱 집어 가장 아름다운 곳이라 들먹이면 서운하여 냉큼 돌아앉을 이 땅의 풍광이 어디 한 두 군데이겠느냐고. 당신은 많은 벗들을 앞에 놓고 그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벗 한 사람을 골라낼 수 있겠느냐고.

산천이 그와 같다. 우리 강산, 다니면서 보면 볼수록 정녕 아름다워 눈물 난다. 험하고 궁벽하여 어지간한 발길은 좀체 가 닿을 수 없는 오지도 있고, 잘나고 예뻐서 늘 사람 발길에 몸살을 앓는 천하절색 명승지도 있다. 굽은 길도 있고 곧은 길도 있다. 높은 산 깊은 강이 하나같이 그처럼 저마다 터를 잡고 앉아 유장한 산천을 이룬다. 사람도 자연도 맨 처음 본래면목은 모두 그리 어여뻤으리라. 적어도 사람들이 제 멋대로 자연을 인공의 세상 속으로 옮겨 놓기 전까지는.

조선 제일의 물, 달천과 삼파수

  달래강은 속리산 천왕봉에서 발원하여 충주 탄금대에서 남한강에 합류하는 아름다운 강이다. 청천, 미원, 괴산 등지에서 생활하수가 흘러들고, 괴산댐에 갇혀 탁한 물빛이 되기도 하지만 충주에 이르기 직전 하류의 물빛은 유리알처럼 맑다. 전체 길이 120km 가운데 110km 지점 하류의 물이 이렇게도 맑다는 사실이 그저 놀라울 뿐이다.

달래강은 속리산 천왕봉에서 시작하여 삼백 리 길을 북쪽으로 흐르다가 충주 탄금대에서 남한강에 흘러드는 아름다운 강이다. 달래강의 물은 예나 지금이나 조선 최고의 물로 꼽는 데 손색이 없을 만큼 여전히 맑디맑다. 물이 맑으니 그 맛 또한 청량하고 미묘하여 일찍이 성현(成俔, 1439-1504)이 지은『용재총화』에 기우자 이행(李荇, 1352-1432)의 말로 옮겨 적기를, “우리나라 물맛은 충주 달천수가 으뜸이며, 오대산 우통수가 두 번째, 속리산 삼타수가 세 번째로 좋다”고 하였다. 삼타수는 곧 달래강 상류 속리산의 삼파수(三派水)가 변한 말이니 결국 조선의 물맛 품평회에서 달래강이 금메달과 동메달을 동시에 석권한 셈이다. 그런 탓인지 최근에도 전국에서 팔리는 생수 가운데 무려 90퍼센트를 바로 달래강 유역에서 뽑아 올렸다.

  옛글에 달래강의 발원지로 적은 속리산 문장대. 그러나 금강, 낙동강, 한강이 나뉘는 삼파수는 문장대가 아니라 천왕봉이다. 문장대의 물은 모두 달래강으로 흘러 남한강이 된다.

오죽하면 여울을 ‘달내’라 불렀을까. 달래강 인근 지명에 아직도 남아있는 ‘달천’, ‘단월’, ‘단호’, ‘감물’ 등은 모두 그 물맛이 달다는 뜻으로 달래강에서 말미암았다. 그 물길의 발원에 대하여 『신증동국여지승람』은 이렇게 적었다. “속리산 산꼭대기에 문장대가 있는데 천연암벽이 하늘로 치솟아 그 높이를 알지 못한다. 사람 3천 명이 앉을 만한 넓은 암반 한 가운데 가마솥만한 샘이 나서 가물어도 줄지 않고 비가와도 늘지 않는다. 그 물이 세 갈래로 나뉘어 공중으로 쏟아져 내리는데 한 줄기는 동쪽으로 흘러 낙동강이 되고, 한 줄기는 남쪽으로 흘러 금강이 되고, 한줄기는 북쪽으로 흘러 달천이 되었다가 금천(金遷, 남한강)으로 들어간다.”

  달래강이 남한강으로 흘러드는 충주 탄금대 합수머리. 남한강의 충주댐 하류에 있는 조정지댐에 갇혀 수주팔봉의 유리알 같이 맑은 물빛은 이내 탁하게 변하고 만다. 아무리 맑은 물도 가두면 썩는다는 진리는 어느 곳을 가보아도 변함이 없다.

세 강물이 나뉘는 삼파수를 설명하는 위의 기록은 문장대가 아니라 천왕봉이 옳다. 옛날에야 산의 높이나 강의 길이를 구체적으로 잴 수 없었으니, 다만 그 산이 상징하는 주요 봉우리로 산을 대표하여 그리 적었을 것이다. 분명한 것은, 문장대에 내리는 빗물은 모두 흘러 달래강으로 가고 세 강의 물길이 나뉘는 봉우리는 오직 천왕봉 한 곳뿐이라는 사실이다. 천왕봉 바로 아래에는 수리의 둥지같이 오만한 신라적 암자 상고암(上庫庵)이 걸려있고, 그 암자에는 어지간한 속병은 씻은 듯 고쳐내는 신비한 약수가 하나 있다.

  맑고 깨끗한 달래강은 예부터 물맛이 좋기로 유명하다. 한때 국내에서 생산되는 생수의 90%가 달래강 유역에서 나왔다

상고암의 팔공덕수가 바로 달래강의 발원 샘이다. 몇 해 전쯤, 백두대간 산사람 몇이랑 상고암과 천왕봉 사이를 오가며 팔공덕수 보다 위에 있는 달래강 발원 샘을 찾아 헤맨 적이 있었다. 천왕봉 바로 아래에서 마침내 샘을 찾았는데 여름에는 물이 있었으나 건기에는 마르는 샘이었다. 그 샘 조금 아래에도 상고암에 닿기 전에 흠씬 젖어있는 고산습지가 있으니 찾아보면 또 다른 샘이 있을 법도 했다. 다만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늘 마르지 않는 샘의 조건’을 갖춘 상고암 약수를 달래강 발원지로 꼽는다.

문장대 용화온천의 비화

속리산 계곡의 물을 모아 흘러내린 달래강은 법주사를 지나 북쪽으로 흐르다가 청천 남쪽에서 한 줄기 지류를 받아들인다. 그 여울의 상류가 바로 한때 세간을 떠들썩하게 했던 ‘속리산 문장대용화온천’ 지역이다. 백두대간의 상주 화령 일대는 일찍이 신라를 따르던 전통이 고스란히 내려와 유역은 비록 금강과 한강유역일지언정 지금도 여전히 상주시의 행정구역을 따른다. 비극은, 달래강이 되고 남한강이 되어 서해로 흘러가는 물길의 최상 발원지에 경북 상주시에서 온천 지구를 개발하겠다고 나서면서 시작되었다.

기나긴 대립과 시련 속에 결국 한강유역의 주민들이 모두 들고 일어나 개발계획 자체가 백지화되긴 했지만 이 온천 소동은 여러 가지 측면에서 씁쓸한 뒷얘기를 남겼다. 만약 한강유역의 지자체에서 개발 계획을 세웠더라면 결과가 어찌되었을까 하는 추측이 나올 법하기 때문이다. 문제는 간단하다. 사람에게도 나이와 시기에 따라 하지 말아야 할 일이 있듯, 물줄기에게도 그 시기에 따라 하지 말아야 할 일이 있다는 점이다. 즉, 백두대간처럼 모든 여울의 최상 발원지에는 결코 대형 관정을 뚫거나 댐을 막는 일 따위를 해서는 안 된다.

  충주는 남한강과 달래강이 굽이치는 아름다운 산간 도시이다. 깊은 물 높은 산에 가로막혀 개발이 늦어지고 있다는 생각에 경부운하에 대한 기대가 크게 일었지만, 운하야말로 충주가 지닌 미래의 아름다운 자연자원을 송두리째 앗아가는 재앙이 될 것이다. 최근 운하에 반대하는 시민들의 목소리가 점점 커지고 있다.


발원지에서 시작한 작은 여울은 강의 나이로 보면 유년기의 강이다. 그런 곳에 관정을 뚫는 일은 갓난아이에게 헌혈을 강요하는 행위와도 같다. 그 어린 것에게 무슨 뽑을 것이 있다고 관정의 빨대를 들이댄단 말인가. 더구나 더욱 깊숙한 곳으로부터 온천수를 뽑아 올린다면 작고 어린 여울, 즉 어린아이를 한증막 속에 집어넣는 일과도 같을 것이다. 한때 ‘백두대간 맥주’라는 광고 카피가 매체를 장식한 적이 있었다. 한반도 모든 여울의 발원지인 백두대간에 관정을 뚫어 거기서 끌어 올린 물로 맥주를 만들었다는 광고였다. 땅에 대한 이해와 관심, 즉 생태적인 인식이 아직 이 땅에 자리 잡기 이전의 일이었다.

대형 관정을 뚫거나 댐을 막는 일들은 적어도 강이 청년기를 지나 제법 성숙한 꼴을 갖추는 중류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유년기나 소년기에 벌써 감당할 수 없는 성인의 삶을 강요받았다면 그 사람이 정상적으로 성장하는 것을 기대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모든 산천의 섭리를 일거에 무너뜨리면서 백두대간에 2500톤급 바지선이 떠다니는 운하를 만들겠다는 발상을 맨 처음 해낸 사람은 대체 누구였을까?

강물은 흘러야 한다!

달래강 최고의 명승 가운데 하나인 화양동(華陽洞)에서 흘러온 물줄기를 거느리고 괴산에 닿기 전에 강물은 이내 흐름을 멈추고 잠시 맴돌이를 친다. 1957년 우리나라 기술로 만든 최초의 수력발전소라는 화려한 명성과 함께 등장했던 괴산댐에 가로막혔기 때문이다.

댐에 갇히면 강은 이제 더 이상 강이 아니다. 흐르면서 맑아지고 굽이치면서 깊어지는 강의 풍모를 잃고 온 몸에 곰팡이가 피는 주검처럼, 속절없이 썩는다. 발전 전용 댐인 괴산댐에서 방류되는 물은 상류 달래강의 물과 확연히 다르다. 그 탁한 물이 다시 이화령에서 흘러온 쌍천을 받아들여 저 유명한 벽초 홍명희(1888-1968)의 고향 제월대(霽月臺) 앞을 지나면, 또 맑아진다. 제 아무리 더러운 물도 흐르면 이내 맑아진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암자, 설악산 봉정암에는 사월 초파일 하루에만 수천 명이 다녀간다. 거기서 흘러내린 폐수는 골짜기 심산유곡을 흘러내리면서 다시 유리알처럼 맑아진다. 자연의 위대함은 곧 섭리의 힘이다. 흐르는 물은 결코 썩지 않는다.

  경부운하 조령터널이 시작되는 수주팔봉. 일제 때 농지개간을 목적으로 달래강변에 걸린 아름다운 8개 봉우리를 일컫는 팔봉의 중간을 끊어 물길을 돌렸다. 이 아름다운 강변에 갑문을 막고 리프트를 세워 조령터널을 만들 계획을 세운 것이다.

제월대에서 수주팔봉까지 흘러가는 강물은 예부터 조선 팔도 제일의 물맛을 자랑해 온 달래강의 면목을 유감없이 보여준다. 크지도 작지도 않고 넓지도 좁지도 않은 강물은 제 갈 길을 정확히 알아 길을 잡고, 그 물길에게 크고 작은 산들은 흔쾌히 한 걸음씩 길을 비켜준다. 돌고 돌아 흐르면서 강은 그 속에 숱한 생명을 품어 기른다. 그 모든 것들이 살아있어야만 강 또한 스스로 살아있음을 아는 까닭이다.

수주 팔봉은 달래강변을 둘러친 그림 같은 여덟 봉우리에서 얻은 이름이다. 그 여덟 봉우리 한 가운데를 뚝 잘라 물길을 돌린 것은 일제였다. 본래 물길이 흐르던 유역을 농지로 개간하려고 팔봉의 산허리를 끊어 물길을 바꾼 것이다. 정여립(1546-1589)이 최후를 마친 전북 진안 금강의 죽도와 생김도 사연도 똑 같다. 수주 팔봉 강변은 지난겨울 내내 경부운하로 말미암아 몰려오는 사람들로 홍역을 치렀다. 운하를 하겠다는 사람들은 장차 그곳에 들어설 거대한 갑문시설과 리프트 따위의 그림을 펼치며 탄성을 질렀을 것이고, 운하를 반대하는 사람들은 저 아름다운 강변에 그런 무지막지한 폭력이 가당치도 않다고 목에 핏줄을 세웠을 것이다. 바야흐로, 난리를 치른 셈이다.

슬슬 뒷걸음질 치는 ‘조령터널’

남한강 지류 달래강에서 백두대간을 향하는 수로 터널이 바로 수주팔봉에서 시작된다. 그곳에서 물길을 바꾸어 댐과 리프트를 통해 해발 110미터까지 고도를 올린 운하는, 중부내륙고속도로와 비끼는 괴산군 장연면 추점리 어름에서 땅 속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전체 25,9km에 이르는 수로 터널 2군데를 통과하여 낙동강 유역으로 넘어간다. 해발 천 미터를 넘나드는 조령산과 백화산, 해발 548미터인 이화령 아래 그 까마득한 땅 속 수백 미터 지점에 2500톤짜리 바지선이 드나드는 물길 터널을 뚫는다.

조령터널 문제는 그쯤하자. 어차피 이쯤 되었고 보면, 실체의 윤곽이 점점 드러나면서 하겠다는 사람들도 말리겠다는 사람들도 모두 그것이 ‘허깨비’에 불과했다는 사실이 얼추 증명이 된 셈이니까. 대선 과정에서 그 실체도 없는 조령터널이 ‘한반도 국운융성’을 위해 얼마나 그럴싸한 ‘4만 불 시대’의 터널 역할을 했던가를 떠올리면 짐짓 슬퍼진다. 아무튼, 그간 숱한 사람들이 이 조령 운하터널의 실체를 까발린 탓에 더는 이 방식을 고집하기 어려워졌다는 사실은 분명 다행한 일이다.

  한반도대운하 계획에 포함된 스카이라인 설계도. 달천갑문에서부터 해발 300미터의 백두대간 늘재를 넘어가는 그림을 그렸지만, 늘재의 실제 해발 고도는 380미터이다. 10년 동안 연구했다는 대운하 계획이 실제 지형과 무려 80미터의 오차를 보이고 있다. 운하의 특성상 80미터는 치명적인 높이가 아닐 수 없다.

이제 남은 문제는 다른 방법 하나, 이른바 속리산 국립공원을 노천으로 통과하는 ‘하늘 노선’(Sky-Canal 혹은 스카이라인)이다. 선택을 더 이상 미룰 수도 없는 지경에 이르러, 운하의 백두대간 통과 방안이 얼마 전부터 슬슬 스카이라인 쪽으로 기우는 것 같은 발언이 속속 등장하고 있다. ‘운하의 전도사들’로 손꼽히는 몇몇 사람들의 입에서 조령터널의 위험성과 문제점이 고백처럼 스스로 터져 나오고, 이런저런 궁리로 보아 아직은 그래도 실체와 분석이 덜 드러난 스카이라인 쪽에 한 가닥 희망을 걸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나는 한반도 대운하를 10년 동안 연구하고 준비했다는 수백 명의 전문가들이 하루속히 ‘스카이라인’을 선택해 줄 날을 손꼽아 기다렸다. 스카이라인이 안고 있는 ‘허상의 그림자’는 웃지 못 할 코미디 수준이다. 잘라 말하건대, 스카이라인은 결코 세상에 존재할 수 없는 그림이다. 초등학생도 그쯤은 간단히 증명한다.

초등학생도 웃을 ‘스카이라인’

맨 처음 등장하는 스카이라인의 배경은 이랬다. 조령터널의 위험성과 한계를 피해 백두대간의 해발 300미터 고개로 눈길을 돌린다. 경북 상주 지방에서 화령, 지기재, 신의터고개 같은 해발 300미터짜리 백두대간의 고개를 찾아낸다. 백두산에서 지리산에 이르는 전체 백두대간 가운데 해발 300미터의 고개들은 그곳이 유일하다. 문제는 그곳이 한강유역이 아니라 금강유역이라는 점이다. 따라서 백두대간의 해발 300미터라는 높이는 그대로 가져오되, 한강유역과 낙동강유역을 연결하는 백두대간에서 그에 맞춤한 고개를 새로 찾아낸 것이 바로 속리산의 ‘늘재’이다.

그렇게 만들어진 그림이 이른바 스카이라인이다. 달래강 하구에서 아예 강을 피해 내륙으로 인공의 갑문과 댐으로 연결된 수로를 만들어 괴산댐에 이르고, 괴산댐에서 다시 산간 협곡으로 리프트와 인공수로로 연결된 물길을 만들어 백두대간 늘재를 넘어가겠다는 발상이다. 달래강 하구에서 불정갑문, 괴산갑문, 칠성갑문 등을 거치며 고도를 올리고, 괴산리프트에서 두 차례 고도를 올려 해발 300미터의 백두대간을 넘는다. 이렇게 만들어진 스카이라인은 언뜻 조령터널에 비해 제법 그럴듯한 그림처럼 보일 수도 있었다.

  몇 년 전, 3일 동안 헬기를 타고 진부령에서 지리산까지 백두대간 전 구간의 지형을 살펴본 적이 있었다. 그때 찍은 백두대간의 늘재 상공이다. 해발 380m의 길게 늘어진 저 고갯길로 경부운하의 물길이 스카이라인으로 넘어가겠다고 한다. 높이도 80m나 틀렸지만, 백두대간 꼭대기에 그만한 물을 가두어 보겠다는 발상 자체에 실소를 금할 수가 없다.

문제는 늘재의 해발 고도이다. 백두대간 분수령의 300미터라는 높이는 그대로 빌려왔으되, 한강유역과 낙동강유역을 연결하는 백두대간에는 아쉽게도 그런 고개가 존재하지 않는다. 강의 길이나 산과 고개의 높이를 제대로 재주지 않는 이 나라에서 늘재 같은 변방의 고개가 몇 미터인지 정확히 아는 사람은 아마도 드물 것이다. 별 수 없이 재야의 연구가들이 강의 길이를 재고 산과 고개의 높이를 잰다. 그렇게 세상에 떠도는 늘재의 해발 고도는 380미터이다. 한때 백두대간의 교과서처럼 쓰였던 『태백산맥은 없다』의 저자가 측정한 늘재의 높이는 해발 371미터이다. 아무튼, 대략 10여 미터의 오차 범위 안에서도 결코 늘재의 높이는 해발 370미터 아래로 내려가지 않는다.

스카이라인이 통과하겠다는 백두대간의 높이 해발 300미터에서 무려 70미터나 높은 고개가 바로 늘재이다. 스카이라인의 그림 속에는 그들이 넘어가고자 하는, 이 땅에 존재하는 실존의 고개 높이 70미터가 감쪽같이 사라져버렸다. 운하의 특성상 70미터는 치명적인 높이이다. 달래강 하구부터 계획된 모든 갑문과 댐과 리프트에 걸쳐 전면적인 수정이 불가피하다. 그 사라진 70미터의 높이를 극복하려면 공사비만 해도 몇 곱이 더 들어갈 터이다. 그림은 또 어떻게 다시 그릴 것인가? 수백 명의 전문가가 10년 동안 연구했다는 경부운하의 그 가장 중요한 핵심인, 한강과 낙동강을 연결하는 방안의 실체가 이 정도 수준이다.

이젠 또 어떤 말로 바꿔 탈까?

대선과정이나 그 이후까지 경부운하를 추진하려는 사람들의 말 바꾸기는 이미 세간의 조롱거리가 된지 오래이다. 조금이라도 실체적인 분석이 나오면 금세 말을 바꾸어 자리를 옮겨 앉는다. 조령터널이 세계적인 웃음거리가 되는 일이 두려워 스카이라인이라는 조랑말로 옮겨 타려는 모양이지만, 스카이라인은 애초부터 ‘꾸어서는 안 되는 꿈’에 불과했다.

무슨 말이 더 남았을까? 본래 그들의 방식대로라면 아주 가볍게 다른 노선으로 옮겨가면 그만이겠지만, 이제 마땅한 대안노선도 없으니 다음이 자못 궁금하다. 혹여 외국의 사례를 끌어들여 그깟 70미터 정도는 다시 설계하면 충분히 극복할 수 있다고 할 것인가? 아니면 세계수준의 토목 절개 기술을 가져다가 70미터쯤 절개하는 것은 식은 죽 먹기라고 우길지도 모른다. 행여나 그럴지도 모르는 일이니 미리 못을 박자면, 늘재는 이름 그대로 ‘길게 늘어진 고개’이다. 우리나라 고개 가운데 ‘진고개, 진재’는 긴 고개라는 뜻이고, ‘늘티, 늘재, 늘고개’는 고갯길이 가파르지 않고 평평하게 늘어진 고개라는 뜻이다. 가파르게 올라갔다가 내려오는 고갯길이 아니므로 70미터의 절개가 불가능한 곳이 바로 늘재이다.

부랴부랴 그림을 다시 그려야만 하는 사람들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행여 해발 370미터를 극복하는 방안을 찾았다고 해도 코미디는 거기서 끝나지 않는다. 왜냐면, 그곳이 백두대간이기 때문이다. 맞춤한 옛말, ‘산 넘어 산’이란 말이 여기에 딱 어울린다. 한번 잘못 끼운 단추는 아무리 억지로 꿰맞추려 해도 결코 제 자리로 돌아오지 못한다. 제발, 이쯤해서 이 터무니없는 억지놀음을 끝내고 정녕 세계의 모든 선진국가가 도달하려고 무진 애쓰는 지속가능한 21세기의 생태국가를 만드는 일에 전념하시기를.

우리들의 아름다운 달래강! 다만 오늘도 변함없이 의연하다. 경부운하라는 저 거대한 공룡이 아무리 으르렁거려도, 그 정도의 엄포와 위협이면 짐짓 겁을 먹을 만도 하건마는 좀체 까딱도 하지 않는다. 만약 경부운하가 만들어지게 된다면 가장 참혹한 피해를 입게 될지도 모른다고 잔뜩 겁을 줘도, 우리들의 달래강은 그저 해맑고 명랑하게 흐른다. 가끔은 출렁거리기도 하고 또 더러는 소용돌이치기도 하지만, 저렇게 맑고 어여쁜 달래강이야말로 분명 우리를 희망이 가득한 세상으로 실어다 주리라! 저 우뚝한 백두대간이, 눈부신 강물이 우리를 그곳에 데려다 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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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운하 , 경부운하 , 달래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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