쇠고기에 발목 잡힌 한미FTA 조기 비준

참여정부의 한미FTA 유산, 초기 집행 좌초되나

노무현은 파병, 이명박은 쇠고기

노무현 대통령은 2003년 5월 첫 한미정상회담에서 ‘미래지향적 한미동맹’을 표방했다. 코리아소사이어티가 워싱턴에서 마련한 만찬 연설 도중 "만약 53년 전 미국이 우리 한국을 도와주지 않았다면 저는 지금쯤 정치범 수용소에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고 말해 발칵 뒤집어진 적이 있었다. 그러나 미래지향의 실체는 부시의 이라크 파병 요청에 대한 화답이었다.

5년이 흘러 정권이 바뀌고, 이명박 대통령 역시 한미정상회담을 위한 첫 미일 순방길에 나섰다. 이명박 대통령은 '21세기 전략적 동맹'을 표방했다. 이명박 대통령은 “자유와 민주주의, 인권, 시장경제의 가치와 신뢰를 바탕으로 세계 평화에 기여하는 21세기에 맞는 동맹 관계”임을 천명했다. 그리고 그 실체를 보여주기라도 하듯, 하루 전날 쇠고기 협상을 타결했다.

노무현 대통령은 이라크 파병을, 이명박 대통령은 쇠고기 협상 타결을 선물로 준비했다. ‘미래지향적 한미동맹’이 ‘21세기 전략적 동맹’으로 이름만 살짝 바뀌었는지 모르지만, 그 5년의 세월에는 한미간 초국적 자본공동체 실현을 위한 참여정부와 이명박 정부의 부단한 노력이 있었다.

쇠고기 협상 타결 소식이 전해진 시각, 이명박 대통령은 미 상공회의소가 주최한 'CEO(최고경영자) 라운드테이블'에 참석하고 있었다. 이명박 대통령이 타결 소식을 전하자 박수 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명박 대통령은 “이 자리에 계신 여러분들이 '한미FTA가 반드시 체결돼야 한다'는 강한 집념을 보여주고, 또 지지를 보내줬기 때문에 양국 대표들이 어떻게든 (쇠고기 문제를) 해결하려 했고 그래서 합의가 됐다”고 소감을 피력했다. 아무리 일정을 맞춘 게 아니라고 해도 곧이곧대로 들리지 않는 정황이었다.

당시 청와대 관계자는 "쇠고기 협상이 타결돼 박수를 친 것이 아니라 한미FTA 타결 가능성이 한층 높아져 박수를 친 것"이라고 해명아닌 해명을 했다. 쇠고기 협상이 쇠고기 자체의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 미국이 처음부터 내세운 한미FTA 4대선결조건의 하나였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확인시켜주는 대목이다.

  참세상 자료사진

쇠고기 협상 타결의 원죄는 이명박 정부가 아니라 참여정부에 있다. 2005년 9월 대외경제장관회의의 이름으로 된 문건이 공개됐고, 미국산 쇠고기 수입 재개가 한미FTA 4대선결조건이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2006년 1월에는 30개월 미만 뼈 없는 살코기 수입을 합의했다. ‘30개월 미만 뼈없는 살코기’ 수입 합의는 미국이 요구한 4대선결조건의 수용을 의미했고, 여기서 탄력을 받은 한미FTA 협상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참여정부는 협상 시작 14개월 만에 한미FTA를 체결했고, 2007년 9월 7일 한미FTA 비준동의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당시 한덕수 총리는 “미국 의회가 조속히 처리하도록 촉구하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조처는 최대한 빨리 처리하는 것이 한미FTA로 인한 독점적 지위를 누릴 수 있는 시간을 가질 수 있다”며 제출 이유를 설명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어떤 가시적인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다. 미 의회를 장악하고 있는 민주당은 자동차 분야 재협상과 쇠고기 시장 전면 개방을 요구하며 의회 비준을 반대해온 터였다.

참여정부의 유산을 물려받은 이명박 정부

이명박 대통령이 미국을 항하며 생각한 21세기 전략적 동맹관계의 포인트는 한미FTA 조기 비준이었다. 이미 체결된 한미FTA의 양국 의회 비준은 ‘초국적 공동체’의 국제법적 효력 발생을 의미한다. 이명박 대통령은 “한미FTA 비준은 초국적 공동체를 이루는 데 필수적인 요소로 이를 통해 두 나라의 동반자 관계를 한 단계 격상”시키겠다고 호언하기까지 했다. 한미FTA 의회 비준을 앞당기기 위한 해법, 쇠고기 협상 타결은 수순이었다. 한미정상회담을 하루 앞두고 양국 대표는 새벽까지 협상을 벌였고, 미루지 않고 타결했다.

쇠고기 협상 타결내용이 공개됐다. 일각에서는 굴욕적 협상 결과라는 평가이지만 협상단, 협상력의 문제만으로 설명하기에는 곤란한 문제가 많다. 6일 끝장토론에 나온 민동석 농업통상정책관(미국산 쇠고기 협상 대표)의 발언과 태도를 보면 ‘협상 타결의 불가피함’이 곳곳에서 엿보인다.

민동석 정책관의 말이다.

“처음 제시한 입장이 있고, 마지막까지 관철돼야 할 입장도 있다. 처음 입장을 최종까지 가져가야 하면 그게 무슨 협상인가”
“우리는 협상에서 분명 입장과 기준을 가지고 나선 것이다”
“지난해 3월 말 노무현 전 대통령이 미국 대통령에 전화했고, 담화를 통해서도 국민에게 알렸다. 협상에 성실하게 임하겠고, 국제수역사무국(OIE)의 기준에 따르겠다고 했다. 여러분 이게 무슨 의미인지 아나. 그때와 지금과 무슨 차이가 있나”

쇠고기 협상 내용이 공개되고 네티즌의 반발이 확산되자, 정부와 여당은 6일 당정 협의를 통해 재협상 검토와 사후 대책까지 내놓았다. 재협상은 불가하다는 입장이다. 그런데 재협상 불가는 쇠고기 수입 재협상 자체가 안 되어서가 아니라 한미FTA 추진에 상당한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한미 쇠고기 협상 타결에 따른 고시는 4월 22일 입안예고가 됐고, 공고기간이 20일로 5월 13일이면 고시가 끝난다. 이 기간 동안 양국의 의견 수렴 절차와 협의를 거쳐 최종 고시가 된다. 송기호 변호사는 “이번 협상의 합의문 부칙 1항을 보면 새 수입조건은 우리 정부의 고시가 있어야만 고시일로부터 유효하다고 명시돼 있다”며 “현재 새 수입조건이 입법예고 중이고, 고시가 되지 않은 상태인만큼 재협상은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설명이다.

그러나 정부는 “재협상 문제는 국제기준이 변경되거나 미국이 국제기준상의 지휘가 박탈당하든지 변경이 될 경우에 가능하다”는 입장으로, 기존의 입장에서 후퇴할 가능성은 크지 않아 보인다. 이명박 정부의 입장에서 쇠고기 협상 타결은 부시 임기 내 한미FTA 의회 비준을 위한 ‘선결조건’을 충족하는 조치라는 점에서 재협상 카드 자체를 꺼내들기 어려운 형편이기 때문이다.

한미FTA 회기 내 비준 불투명, 자본프렌들리 초기 구상 좌초하나

이명박 대통령은 17대 국회 회기 내 비준안 처리를 강하게 어필했고, 이는 이명박 정부의 자본프렌들리 초기 구상의 핵심이었다.

이명박 대통령은 미일 순방을 앞둔 4월 13일 기자회견을 갖고 공공부문의 변화, 한미FTA 조속 비준, 공정거래법개정안 처리, 교원평가제도 법제화 등을 요청했다. 한미FTA를 근간으로 하는 자본친화정책, 즉 사유화 구상이 구체적으로 제시된 시점이다.

이명박 대통령은 4월 28일 4대 재벌을 비롯 재계 대표를 초청, 투자활성화와 일자리 창출을 위한 민관합동회의를 가졌다. 이 자리에서 조석래 전경련 회장은 수도권 규제완화와 출자총액제한제 폐지, 상속세제 완화 등 신속한 규제개혁과 한미FTA 조기 비준을 위한 정부의 적극적인 대책을 요청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어 30일 개최된 FTA민간대책위원회 전체회의에서 공동위원장들은 제17대 임시국회 회기 내 한미FTA 비준동의안을 처리해줄 것을 거듭 촉구했다. 조석래 전경련 회장은 "우리 나라 경제가 도약할 수 있는 기회이기 때문에 국회에서 조속히 비준해 달라는 것이 업계의 입장"이며 "이번 국회에서 비준이 돼야 미국 의회에서도 올해 비준안을 통과시키도록 미국측에 로비할 시간적 여유가 생긴다"고 말하기도 했다.

쇠고기 협상 결과에 대한 국민의 반발이 커지고 여야 정치권 내부에서도 논란이 되자 안상수 한나라당 원내대표는 한미FTA 비준동의안의 5월 임시국회 회기 내 처리 여부에 부정적 영향을 줄 가능성에 대해 우려를 표시했다. 안상수 대표는 "한미FTA는 노무현 정권에서 체결한 협정으로 일자리 창출과 교육 확대, 경제 살리기 등 국익에 도움이 되는 것인 만큼 이번 국회에서 통과되도록 협조해달라"고 거듭 촉구했다.

그러나 쇠고기 협상 결과를 놓고 여권 내부에서 정부의 협상력과 지도력을 둘러싼 논란이 일고, 재협상을 둘러싼 정치권의 이해가 요동을 치는 데다, 건강권을 근간으로 한 사회구성원들의 저항이 확산돼, 현재로서는 한미FTA 회기 내 처리 여부가 불투명해 보인다.

쇠고기 수입 문제는 2005년 말 미국 측이 한미FTA 4대 선결조건의 하나로 내놓은 요구였다. 그 쇠고기 협상 결과가 2년 반이 지난 지금 한미FTA 비준의 발목을 잡을 줄은 누구도 쉽게 예상치 않은 일이다. 14개월간 8차례에 걸친 협상을 통해 합의에 도달한 한미FTA, 그러나 오늘 이명박 정부를 향한 시민의 저항은 한미간 초국적 자본공동체, ‘21세기 전략적 동맹’으로 가는 길이 결코 쉽지만은 않을 것임을 보여준다. 이명박 대통령의 잠 못 이루는 밤이 당분간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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