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승’과 ‘스승의 날’을 생각한다

[칼럼] 나는 진정 아이들의 배후가 전교조였으면 한다

오늘은 ‘스승의 날’이다. 스승의 날을 맞아 많은 학교들은 가정체험학습일로 하여 휴업을 하거나 단축수업을 한다. 하루라도 교사들을 위로해주기 위해서라면 고마운 일이 아닐 수 없으나 그것이 아니라는 것은 세상이 다 아는 일. 조금이라도 ‘죄’를 짓지 않기 위해, ‘비난’의 소리를 사전에 피하기 위한 고육지책이다.

‘스승의 날’은 교사들에게는 부끄러움과 자괴감을 갖게 하는 날이다. 1년에 한 번씩 이렇게 교사들에게 생각의 시간을 주는 것도 어찌 보면 고마운 일이다. 내게도 이렇게 생각할 시간을 주니 더욱 고마운 일이다.

‘스승’의 사전적 의미를 보면 자기를 ‘가르쳐 주는 사람’을 일컫는다. 따라서 자기를 가르쳐주는 사람은 모두가 스승이 될 수 있다. 그러니 우리의 스승은 곳곳에 있으며 한 번만 돌아보면 모두가 스승이다. 교사만이 스승인 시대는 아닌 것이다. 더욱이 모든 교육이 입시위주인 한국의 상황에서는 제도권 교육내의 교사보다는 오히려 사교육시장의 학원 강사들이 이 시대의 스승인 것이다. 대학입시교육을 누가 잘하느냐가 스승의 기준이 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정부도 무한경쟁을 강조하고 0교시 수업, 야간자율학습, 학교의 학원화, 교육의 시장화를 지지하는 게 아니겠는가? 대학을 많이 보내고 입시에 나오는 것을 잘 가르치는 교사가 이 시대의 스승인 것이다. 따라서 시대에 뒤떨어지게 참교육합네 하면서 인권이나 민주주의, 자유, 평등 같은 거대담론을 말하는 것은 스승의 기준에 한참 모자라는 행위이다.

사전적 의미로만 본다면 누구나 ‘스승’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정말 그럴까? 그렇지 않다. 스승은 아무나 될 수가 없다. 오직 깨우친 자만이 스승이 될 수 있다. 스승이 ‘가르쳐주는 사람’이라고 할 때 ‘무엇’을 가르쳐주느냐가 진정 중요하기 때문이다. 무엇을 가르쳐주어야 스승이 될 수 있을까? 과거 지혜로운 우리의 선조들은 인간됨을 가르쳤다. 짐승과 다른 인간이 될 것을 가르쳤다. 마음속 깊은 심연의 소리에 귀 기울여 양심에 따라 행동하도록 가르쳤다. 지식인보다는 지혜로운 자가, 지혜로운 자보다는 인격자가 되도록 가르쳤다. 그렇기에 학식이 뛰어난 선비일지라도 심성이 착하고 인간애를 지닌 무지렁이한테 배움을 청할 수 있는 것이다. ‘스승’의 의미는 그런 것이다. 사람됨을 가르쳐주는 이가 ‘스승’이다.

지금 한국에 ‘스승’이 있는가? 우리는 아이들에게 무엇을 가르치고 있는가? 끊임없는 경쟁 속에서 친구를 밟고 올라서야 내가 산다. 공동체적 가치는 잊은 지 오래다. 정의가 무엇이며 우리가 지켜야할 가치는 무엇인지 가르쳐주는 이가 없다. 전쟁에서 승리하는 법만을 가르치며 이기는 법을 가르치는 이가 진정한 ‘스승’으로 대접받는다. 우리는 정글 속에서 잡혀먹히지 않으려 발버둥치고 있다. ‘경쟁’은 아름다운 것이라는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혀 우리는 낭떠러지를 향해 달려가고 있다. 그러나 누구도 막으려 하지 않는다. 떨어져 죽어야 그때서야 잠시 정신을 차릴 뿐이다.

최근 ‘스승’을 생각하게 하는 사건이 발생하고 있다. 연일 서울 한복판에서 미친 소 수입반대 촛불시위가 벌어지고 있다. 그런데 참석자 중 중·고교생이 많다고 한다. 이에 교육 당국에서 ‘지도’에 나섰다고 한다. 머리가 희끗희끗한 장학사나 교감 등이 아이들과 실랑이를 하거나 위압적으로 귀가를 종용한다고 한다. 참스승의 모습이다. 부끄러운 참스승의 모습. 둘 중 누가 스승인가? 나는 아이들이 ‘스승’이라 단언한다. 부끄러운 자화상이다. 한국의 교육관료들이 절대로 스승이 될 수 없는 한 장면이다.

보수 세력과 교육 관료는 아이들의 배후가 전교조라 한다. 너무 고마운 일이다. 전교조 교사를 높이 평가해준 일이 아닐 수 없다. 나는 진정 아이들의 배후가 전교조였으면 한다. 전교조 교사들이 아이들에게 삶에 대해 생각하게 하고 나만이 아니라 함께 살아가는 법을 가르친다면 스승의 자격을 충분히 갖췄기 때문이다. 나는 소망한다. 아이들의 배후가 전교조이기를. 이 땅에 한 줌의 스승이 남아 있기를.

나는 스스로 스승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럴만한 능력도 자격도 부족하다. 그러나 노동자로서는 충실히 살아가려 한다. 아이들에게도 노동의 고귀함을 가르쳐야 하지 않겠는가? 일하지 않는 자 먹을 자격이 없다고 하였다. 노동은 생존 하기 위해서 뿐만 아니라 인간을 인간이게 하는 신성한 행위이다. 노동을 천시하는 사회는 천박하며 야수들이 득실 되는 정글에 다름 아니다.

교사는 노동자이다. 따라서 나는 허위적인 ‘스승’의 탈보다는 노동자의 이름을 찾고 싶으며 ‘스승의 날’ 보다는 노동자의 날을 찾고 싶다. 또한 스승이란 말이 한 직업군을 일컫거나 특정계층·계급을 일컫는 말이 아니라 이 땅에 살고 있는 모든 이가 스승이 될 수 있으며 그래야 한다고 믿는다. 해마다 되풀이되는 일이지만 내년에는 스승보다는 노동자로서 노동절에 쉬고 싶다. 그것이 스승의 날을 맞는 나의 작은 희망이다.
덧붙이는 말

이경호 선생님은 진보교육연구소 연구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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촛불문화제 , 스승의날 , 진보교육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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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사회의 부끄러운 성인으로서 가슴에 와닿는 말입니다.

  • 빠삐용

    배후가 전교조라는 얼빠진 소리에 당당히 참된 스승이 되기를, 그리하여 단순히 배후가 아니라는 소극적 부정 보다는 진정한 배후가 되기를 원하며 그렇게 된다면 감사하는...

  • 쌤~~

    그래도 학교 다닐때 생각해보면, 그나마 학생들 인간으로 대해주시는 분들은 전교조 활동하시는 선생님이었던 생각이 납니다. 지금 교육현장에서도 비슷하길 기대해봅니다.

  • 정명주

    구구절절 옳으신 논설입니다. 누구나 스승입니다. 교사만을 지탄하는 글들이 많습니다. 그 또한 학교내에서 아이들에게, 학부모님들에게 비춰진 교사들 자신의 자화상일것입니다.
    저 또한 이 사회의 일개 노동자임을 자처합니다.
    더욱이 가르치는 직업이라 높은 도덕성 또한 부담입니다.
    개개인의 노동자가 인생의 철학을 가지듯, 교사또한 자신의 교육에 대한 철학 하나쯤은 가지고 있습니다. 제가 학교다니던 시절에는 많이 맞던 시절이지만, 그럼에도 그 시절 선생님들은 아이들을 사랑할 줄 알았습니다. 아이들은 존경할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단지 반목입니다. 사회에서도, 가정에서도, 학교에서조차 서로 으르렁거리고 허물캐기에 여념이 없습니다. 이시대의 부끄러운 한 교사이고, 한명의 노동자로서 아이들을 보고 용기있는 행동에 부끄러움도 많습니다만, 이러한 사태를 과연 교사들만이 잘못한 것인지.. 교사가 아이들의 참된 스승이 되지 못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다른 의견입니다. 옛말에 7살이 되면 자신의 스승을 스스로 찾으라는 말이 있었습니다. 현재는 수업들어가면 아이들의 조롱섞인 농담과 수업방해로 인해 정해진 진도조차 나가기 어려운 시점이 왔습니다. 말그대로 정해진 진도나가는 것조차 어려워 따로 윤리시간을 둡니다. 아이들의 인간됨됨이를 따로 교육해야 할 형편입니다. 교사를 향한 지탄은 스스로 머리를 무릎사이에 넣고 달게 받겠습니다. 그러나, 그런 교사를 만들어 낸것은 이시대의 학부모님들과 이 시대의 어른들과 교사 모두의 책임이라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