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취재 - 촛불의 힘이 세상을 바꾼다

지금 촛불 집회에서 필요한 것

[칼럼] 새로운 대중교통적 직접행동의 뼈있는 질문

“가장 중요한 사실 하나는 대중이 완전한 하나의 사회세력으로 등장했다는 것이다.” '오르테가 이 가세트'가 80년 전 유럽의 정치 상황과 관련해 밝힌 소회다. 대중이 스스로를, 나아가 사회를 지배하려 든다는 점을 그는 ‘대중 반역’의 핵심적 특이점으로 꼽는다. 그가 보기에 대중은 더 이상 엘리트(권력)의 지적 지도력을 따르지 않는다.

이처럼 직접적으로 행동에 옮기는 대중의 출현, 반역의 대중에 공포를 느끼는 자는 누구인가? 대중과 이들의 직접행동은 참말로 민주주의의 적인가? 2008년 2MB 신자유주의 정권 하 민주주의 붕괴를 목도하고 있는 상황에서, 광장의 촛불을 매개로 한 대중의 집합적 출현은 전혀 반대의 해답을 제공한다. 대중적 직접행동 혹은 직접 행동하는 대중들의 사회 운동적 가능성을 새롭게 제시한다.

직접행동. 네이버 영어사전은 그 뜻을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써 말 그대로 직접적으로 설명한다. ‘Where there are no democratic institutions, people may resort to direct action.' '민주 제도가 없는 곳에서는 사람들은 직접 행동에 호소하는 일이 있다’라고 번역하고 있다. 참 깔끔하다. 맞다. 사회가 민주적으로 작동되지 않을 때, 혹 그렇다고 판단될 때, 대중이 직접 자신의 불안과 위기감, 개선의지를 행동으로 표출하는 집단행동인 것이다. 대의·대표(representation)시스템이 작동 불능 상태에 빠질 때, 인민 다중은 스스로를 책임짐으로써 사회까지도 보호한다는 윤리적 요청에 기꺼이 응대한다. 그래서 불법 통보를 거부하고, 구속 협박에도 불구하고, 집체적으로 거리와 광장으로 뛰쳐나온다. 그리하여 복수적 개인들 사이의 평화롭고 평등한 연합 관계, 카니발적 우정의 관계를 실현한다. 자기 의사·의지를 몸으로 직접 프리젠테이션(presentation)하고자 하는 대중의 주체적 욕망, 능동적 의지, 그리고 그 결과로서의 자발적 행동이 폭력적인가 비폭력적인가는 부차적인 문제다.

요컨대 직접행동은 21세기 민주주의 위험의 신호(signal)이자 그 아래로부터 부활의 기호(signs)에 해당한다. 무력한 체제의 불능 상태를 용감하게 선언하고, 부당한 권력의 폭력 작동을 일시적으로 중지시키는 사건적 집회다. 억압된 다중의 주권을 단호하게 주창하는 문제적 상황이다. 이렇듯 직접행동은 철저하게 민주적인 행동이고, 또한 행동으로 옮겨진 민주주의다. 에어프릴 카터(직접행동. 21세기 민주주의, 거인에 맞서다. 조효제 역, 교양인, 2007)가 직접행동을 신자유주의 제국·자본국가에 맞서는 대안과 대항의 최종 프로그램으로 제안하는 것도 이런 역능 표현적 측면 때문일 것이다. 절차적 민주주의, 대의적 민주주의가 신자유주의 공세에 의해 형식화한, 공화국 붕괴의 사태다. 이러한 상황에서 개인적인 행동으로 시작되는 듯 하나, 기실은 사회 공통적 사안에 관한 사회 공동의 의사 표식으로 실현되는 게 다름 아닌 직접행동인 것이다. 사회 공개적 양식으로 집중하고, 사회 교통적 코드로 융기하는 대중의 정치적 행동인 셈이다.

대중이 자신의 의사를 공공연히 밝히고 공통된 행동양식으로 옮기는 현장 민주주의, 민주주의 현장을 우리는 오랫동안 함께 해 왔다. 4월과 5월, 그리고 6월 세 달은 가히 한국 현대사에서 ‘직접행동 기간’으로 선포되어야 할 것이다. 지난 기억, 과거 기록이 아니다. 미선·효순의 죽임을 애도코자 한, 대통령 탄핵을 저지코자 한, 부안 핵 처리장 설치와 평택기지 이전에 반대하는 행동들이 계속되었다. 한미자유무역협정 체결을 무산시키고자 한 직접행동으로 이어졌다. 이 뿐이겠는가? 우리가 참여하지 못한, 결합하지 못한 많은 행동들이 또한 이곳저곳에서 바로 지금 일어나고 있다. 수만, 수십만이라는 숫자로 직접행동의 참뜻을 왜곡하지 않는다면 말이다. 비정규직 문제를 고발한 이랜드 투쟁, 등록금 문제를 이슈화 한 대학생들의 집회도 직접행동의 귀중한 사례로 인정되어야 할 것이다. 대중은 이렇게 노동자, 학생, 시민의 차이로부터 나서 공통된 의견을 모으고, 그 여론을 기초로 해서 민주사회를 능동적으로 재구축코자 한다. 거리와 광장이 그 재구성의 무대, 상황, 시공간이다.

거리와 광장에 선 이들은 해방과 저항의 욕망을 구체적이고 정확한 고발의 언어, 판단의 몸짓으로 표식한다. 민주적 역사 만들기의 대중적 역사(役事)다. 광우병의 저주, 미국 광우병 쇠고기의 수입을 저지하기 위해 청계천과 광화문으로 몰려든 다중적 흐름은 바로 이런 직접행동의 최근 사례에 다름 아니다. (이렇게 말하는 게 여타 지역에서 좀더 소규모로 이루어지는, 마찬가지로 소중한 행동들에 실례가 되지 않기를.)

촛불을 매체로, 광장을 매개로, 그리고 ‘카니발’을 형식으로 취하는 점에서 이전 행동들과의 연속성이 쉽게 발견된다. 다만 이러한 직접민주주의적 지속성과 공통성 속에서도, 21세기 새로운 (혹은 ‘포스트모던’하다고 이름 붙일 수 있는) 직접행동 양상, 직접적 교통양식을 간파하는 것 또한 그리 어렵지 않다. 직접 가 보라. 오직 체험에 기초해 사유해 보자. 그러면 공통점과 변별점의 변증법이 금방 드러난다.

예컨대 우리를 뜨겁게 하는 조직의 깃발들이 더 이상 없다. 대신에 안중근의 핸드 프린트를 새긴 B급 깃발, 그리고 태극기 몇 개를 드물게 볼 수 있다. 그조차도 촛불의 시위에 밀리고, 대중의 웃음에 묻혀 의미가 희석된다. 그래서 그들의 애국주의, 민족주의가 그다지 위협적으로 다가오지 않는다. 개인적이고, 자유주의적이라고요? 직접행동의 초기 주도 주체로 나선 10대 소녀들에게 이를 넘어선 그 어떤 의식을 기대할 것인가? 그래서 실망하기보다는 이들의 발언에 부분적으로 스며들어있는 비판적 요소, 진보적 요인, 좌파적 잠재성 들에 주목하는 게 더 슬기로운 태도 아닐까? 기성세대의 구태의연한 말을 혐오하고, 기존조직의 상투적 언어를 기피하는 10대 주체다. 형식적 기표들로 자신의 느낌, 감정, 생각을 붙잡아 둘려 하지 않는다. 고정관념과 낡은 틀의 안티가 이들 직접행동의 신세대다. 이들 민주적 직접행동의 뉴 페이스들은 ‘해방’이나 ‘진보’와 같은 개념을 굳이 쓰지 않으면서도 여전히 민주적 발언과 비판적 교통의 시공간을 창작해낸다. 미숙한 10대 주체들이 그들만의 대화법을 통해 창의·창조해 낸 사건·상황이 바로 지금의 민주적으로 숙성된 촛불집회라는 아이러니.

이들은 인터넷, 핸드폰 등의 통신수단을 최적화하여 신속하게 교신하는 어린 교통대중들이다. 자본이 고안한 상품을 자본의 ‘자유무역의 자유’를 저지하는 투쟁에 활용하는 기술자다. 68 상황주의자들의 ‘데투르느망’ 전략을 당장 실천 가능한 형태로 옮기는 미래의 아티스트들이다. ‘괜히 잰체하는’ 책자들 대신에 ‘싸구려처럼 보일 수도 있는’, 그렇지만 훨씬 기발하고 그래서 효과적으로 의미가 전해지는 피켓을 마련하는 이들이다.

낯선 운동가요 대신에 이들은 누구나 따라 부를 노래를 스스로 작곡해낸다. 그래서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모든 권력은 국민에게서 나온다’고 또박또박 가르치고 또 과연 그러한지 질문한다. 입을 가린 마스크가 유니폼으로 꽁꽁 묶인 그들의 훈육적 신체를 상징한다. 그런데도 그런 구속된 몸과 검열된 의식에서 어떻게 그런 창의성을 발휘할 수 있는지, 어찌 그리 신속하게 몸과 생각·느낌을 동시에 움직일 수 있는지. 이들이 연출한 신선한 직접행동적 양식은 가부장적 자본국가의 권위에 결정적인 카운터펀치를 날린다. 권력에 예리한 비수를 꽂는다.

그렇지만 주의하자. 이들의 경고는 2MB 정권과 자본국가만을 겨냥하지 않는다. 처절하게 폭로된 조중동만을 향하지 않는다. 구태의연한 운동·조직의 지도부까지도 동시에 추궁한다. 무대를 높이 올리고 스타들을 내세우면 대중이 모여들 거라는 수천 개 시민사회/운동단체/범국본의 알량한 권위, 안일한 발상을 위협한다. 모 인터넷 언론에 실린 다음 글에 귀 기울이지 못하는 ‘운동권’의 관성까지도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낡은 형식에 포함시킨다. “국민의 주권에 대해선 어른보다 더 잘 아는 아이들에게 어른들은 '무대'라는 또 다른 형태의 '교단'을 만들어 자신들의 주장 만을 외치려 했다. 촛불 집회까지 와서도 또 10대들을 '미숙한 존재'로 본 것이다.” “아이들은, 이제 막 촛불을 들고 자신들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자신의 능력을 최대한 살려 무엇이 거짓이고 무엇인 진실인지를 찾아내려고 하고 있으며, 이는 6년 전 10대였던 우리들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커다란 무대'를 만들어 자칫 이들의 목소리를 빼앗아 버리는 상황을, 어른들은 또 다시 되풀이하려 하고 있다.” 계속 들어보자. “촛불 집회에 필요한 것은 먼발치에 보이는 큰 무대가 아니라 나와 가까이 있는 '작은 발언대들'이다. 10대들을 비롯한 참가자들이 말하고 싶은 것, 표현(실천)하고자 하는 것을 마음껏 보여줄 수 있는 작은 발언대들 말이다."

나는 어른들이 촛불 집회에서 10대들이 자유롭게 목소리를 낼 수 있도록 '방어막'을 만들어주고, 지혜와 노하우를 조언해주는 역할을 맡아주었으면 한다. 지금 촛불 집회에서 필요한 것은 낚시를 '해주는' 어른이 아니라 낚시 방법을 먼발치에서 '보여주는' 어른들이다. ” 그렇다. 미국 쇠고기 광우병과 2MB정권/수구매체 동맹의 정신적 광우(狂愚)병을 동시 폭로한 대중의 새로운 직접행동은 무능하고 부정한 자본권력만을 겨냥하고 않는다. 기존 운동 관행 또한 민주화되어야 할 상대가 아닌지 의심하기 시작했다. 그러한 점에서 참으로 래디컬하게 민주적이다. 그 중대 교훈을 새겨듣고 기존 관행을 성찰하며 개선 의지를 밝히지 않고 과연 살아남을 수 있겠는가? 직접 행동하는 대중의 자발적 민주주의에 우리는 어떻게 응답할 것인가? 궁지에 몰린 2MB의 선택은 두고서라도.
덧붙이는 말

전규찬 님은 '문화연대 미디어문화센터소장' '공공미디어연구소 이사장'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태그

집회 , 민주주의 , 촛불집회 , 이명박 , 직접행동 , 2MB

로그인하시면 태그를 입력하실 수 있습니다.
전규찬의 다른 기사
관련기사
  • 관련기사가 없습니다.
많이본기사

의견 쓰기

덧글 목록
  • 정력두령

    인터넷 서명운동은 소추가 능한것으로 보임니다. 탄핵은 거이 불가능이고 국민소환비슷한것은 가능합니다. 이명박대통령의 득표수가 11482398표를 얻었는데 11482399명의 반대 서명이 있으면 대통령자리에 오점이 남기때문에 국민투표로 대통령으로 인증을 받아야 합니다. 여기저기 찿아보니 이방법이 유일하더군요 서명하세요 서명했더라도 다시 확인하세요 지우고 있는것같읍니다. 참조로 이국민투표에서 패할경우 이명박대통령의 모든추진한일이나 조약까지 무효가 가능합니다 국민의 대표자로 인정을 못받으니까요. 미국도 이것은 어쩔수없읍니다. 그전에 하야할경우는 추진을 요구할수있읍니다. 국민투표로 할경우 공공부분민영화나 쇠고기 협상 각종부동산정책이 노무현대통령이 해던것까지만 인정이됩니다. 서명하셔요 11482399명의 서명 불가능하지 않읍니다. 그리고 탄핵이나 소추로 물러난분의 모든정책이나 시행하고있는 공공사업에서 국가간의 했던 외교활동까지 무효가됩니다. 상대국에서 요구는 할수있읍니다. 그리고 서명은 전체가 입니다. 서명하세요 중고학생여러분에 폐를 끼치는것 같아 미안하지만 서명해 주세요 학생여러분의 직접적인 미래가 걸려있읍니다. 그리고 그분이 지명한 인사권도 무효이니 대통령이 뽑은 인사의 행사한일도 무효가 되니 강.부.자 고.소.영등 핵심인사는 한마디로 낙동강 오리알이 됩답니다. 대리업무는 기간경과에따라 틀린데 지금내려오면 다시 노무현 전대통령이 선거로 다시 뽑을때까지 대통령 업무를 수행합니다.

  • 공현

    그다지 이 글에 동의할 수가 없네요-
    청소년인권운동을 하는 입장이고,
    촛불집회 현장 등에서도 많은 청소년들을 간접적으로 봐왔지만-
    과연 그것이 희망으로 볼 수 있는 걸까요?
    솔직히 제가 그자리에서 봐온 건 뚜렷한 담론적, 프레임적인 한계였습니다.
    그건 운동권의 구태에 의거해서 판단한 것도 무엇도 아닙니다.

    다만 태극기 같은 직접적 상징으로 표출되지는 않지만 사고방식이나 발언 내용이나 피켓 속에 뿌리깊게 배어 있는 민족주의/국가주의적 요소들,
    그리고 자신들의 행동범위와 주장의 범위에 일정한 제한을 스스로 걸고 검열을 가하고 있는 모습들에 대한,
    슬픔일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