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랜드 추석 집중 투쟁 2일차 - 2008년 9월 3일 수요일

[현장기자석]

검은 양복을 아래위로 갖춰 입고 귀에는 리시버를 꽂은 덩치 큰 사람들이 잔뜩 인상을 쓰고 있다. 더운 날씨에 이렇게 대낮부터 뙤약볕 쪼여 가며 일을 해야 할 테니 그럴 만도 하다. 어디 경비 업체 직원일까? 검은 양복들 사이에 놀랍게도 어제 이대 후아유 매장 밖에서 선전전을 할 때 언뜻 스친 얼굴이 눈에 띈다. 그럼 매장 직원이 아니었단 말인가? 기름을 흠뻑 발라 뒤로 빗어 넘긴 머리가 햇살에 번들거린다. 씨름 선수 같은 몸집이다.

이랜드 일반노조 깃발이 펄럭이고 있는 홈에버 시흥점 주차장 입구에는 이미 마이크와 스피커가 준비돼 있었고 조합원들은 선전전을 할 때 쓸 피켓들을 만들고 있었다. 나는 이경옥 부위원장에게 가서 인사를 하고 등에다 매달 선전물 하나를 얻었다. 그때가 세 시 십 분이었다.

스피커에서는 민중가요가 흘러나오고 가로수 사이에는 현수막이 걸려 있다. 앞쪽에 보이는 사거리에서는 조합원 몇 명이 벌써 피켓을 들고 서 있는 것이 보인다. 홍윤경 사무국장은 마이크를 들고 시민들을 향해 열심히 발언을 하고 있다.

“저희는 대량 해고된 지 오늘로 439일째가 되는 이랜드 홈에버 노동자들입니다. 저희들은 아직도 현장으로 가지 못하고 이렇게 투쟁을 하고 있습니다...... 사측은 아직까지도 비정규직 대량 해고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시민 여러분. 저희들의 사정을 알아주시고 이랜드, 홈에버, 2001 아울렛을 불매해 주시기 바랍니다...... 유통기한이 지난 생선을 팔다가 들켜 영업 정지를 먹고, 옷을 재고를 팔다가 공정거래위원회에 적발된 기업이 바로 이랜드입니다. 이랜드 홈에버를 심판할 수 있는 길은 시민 여러분들께서 불매에 동참해주시는 것뿐입니다...... 이랜드 홈에버에 오지 마십시오! 이랜드는 정말 나쁜 기업입니다. 오늘 홈에버에서 구입하셨다면 내일부터는 꼭 불매해 주시기를 간곡히 부탁드리겠습니다......”

나도 손팻말 하나를 들고 사거리에 가서 섰다. 한낮이었다. 거리 구석구석이 햇살로 환했다. 사람들은 어딘가에서 느닷없이 나타나 우리 쪽으로 걸어오는 것처럼 보였다. 조합원들 몇 명이 앞에서 유인물을 나누어 주고 있었고 다른 조합원들은 아까까지 열심히 만든 피켓을 가슴에 모두어 안고 사거리 횡단보도 앞에 서 있었다.

뒤를 돌아보니 머리가 희끗희끗한 경찰 간부와 여전히 인상을 쓰고 있는 검은 양복이 보였다. 검은 양복이 주는 이물감이랄까 위압감이랄까 하는 것들은 공권력과 뭔가 통했다. 그것들은 그대로 벽이었다. 저들은 우리를 지켜주려고 온 것이 아니라 우리를 잠재적인 범죄자로 여기고 홈에버를 지키러 온 것이었다. 나는 검은 양복을 향해 한 번 씩 웃어 주었다. 검은 양복과 잠깐 눈이 마주쳤지만 그는 얼른 시선을 피했다.

네 시쯤 되자 뒤쪽에서 홍윤경 사무국장이 집회를 시작하겠다고 알려 왔다. 조합원들은 선전전을 마치고 다시 홈에버 앞으로 모여들었다. 방석이 차례차례 손에서 손으로 건네지고 대략 오십여 명 정도 되는 사람들이 집회를 하기 위해 보도블록 위에 앉았다.

내가 이름을 잘 모르는 조합원이 나와서 사회를 보았다. 나는 공연히 미안했다. 본집회 시작과 함께 우리는 먼저 구호를 외쳤다.

“비정규직 설움의 땅 이랜드에 가지 말자!”

“비정규직 대량 해고 홈에버를 불매하자!”

이어 이경옥 부위원장이 나와서 발언을 했다.

“지금이 낮이기도 하고, 학생들이 개강을 해서 그런지 연대 동지가 지금은 많이 없지만 우리가 언제 연대 동지들 기다리면서 투쟁했습니까? 누가 왔건 안 왔건 열심히 투쟁합시다. 저녁 때 되면 많은 동지 여러분들이 와 주실 걸로 믿습니다. (웃음) ......뉴코아 동지들이 상황실에 짐 챙기러 온 것을 보고 무척 마음이 아팠습니다. 우리는 뉴코아처럼 되지 않기 위해서라도 더 열심히 싸워야 합니다...... 지금 이 자리에 노동부 근로감독관님이 와 계신데 아까 저한테 이랜드가 대체 어떻게 되고 있느냐고 물어보시더군요. 정부 관료들도 지금 우리들의 일을 잘 알고 있지 못합니다...... 우리는 사측이 원하는 대로 결코 교섭을 하지 않을 것입니다. 대량 해고와 징계 문제를 해결하지 않는 한 우리는 결코 타협하지 않을 것입니다. 열흘 동안 흔들리지 않고 열심히 투쟁합시다! 이 자리에는 지금 기륭 전자 동지들도 와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기륭 전자 조합원도 나와서 발언을 했다.

“반갑다는 인사보다는 마음이 아프다는 말이 나오게 됩니다. 힘이 되어 드리는 말을 해야 하는데...... 저희도 지난 3년간 누가 연대해 줘서 싸운 게 아니었습니다. 아무리 외롭고 힘들다 해도 싸움의 불길을 차마 꺼뜨릴 수 없었습니다. 이랜드 동지들의 마음을 왠지 알 수 있을 것 같아서 그런지 마음이 아프다는 말이 나올 뻔 했습니다. 힘내는 말씀을 드려야 하는데 자꾸 힘 빠지는 말이 나와서 죄송합니다...... 저희도 올해가 네 번째 맞는 추석입니다. 3년 전에는 저희가 현장 점거 농성을 할 때라 추석을 공장 안에서 맞았습니다. 공장 안에 차례 상을 차려 놓고 제사를 지냈습니다. 내년에는 꼭 추석을 집에서 쇠자고 다짐했었습니다. 하지만 2006년 추석 때는 30일 동안 단식 농성을 진행하던 때였습니다. 그때 농성이 잘 안 돼서 결국 기륭 분회와 성실히 교섭하겠다는 회사 측의 약속만 받아 내고 단식을 풀었습니다. 작년에는 조합원들끼리 돌아가며 컨테이너를 지키며 추석을 보냈습니다. 비조합원들이 추석 때마다 늘 추석 선물을 가지고 나가는 모습을 보면 가슴이 아픕니다. 이번 추석 때는 그러고 싶지 않습니다. 우리 조합원 동지 오늘로 85일째 단식입니다. 추석이 지나면 거의 백일이 됩니다. 이번 추석에만큼은 정말 미음이라도 한 그릇 드리고 싶습니다...... 이랜드 동지들 너무 외로워하지 말았으면 좋겠습니다. 저희도 그동안을 돌이켜 보며 이랜드 동지들 마음을 헤아려 보았습니다. 힘들어도 자기 자신을 믿고 투쟁했으면 좋겠습니다. 저희도 함께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울먹이려는 것을 간신히 참은 기륭 전자 조합원은 발언을 마쳤다. 이랜드든 기륭이든 조합원들에게는 서로 기댈 수 있는 동지들이 있을 것이겠지만 조합에 있는 모든 조합원을 한 몸처럼 생각한다면 ‘다른 몸’에 대한 그리움 때문에 날이 갈수록 외로워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다른 몸’이란 물론 조합원들이 ‘연대 동지’라고 표현하는 사람들, 곧 나 같은 사람들이다. 정말로 모든 것을 벗어 던지고 같은 조합원이 될 수 없어 자기 자신이 부끄러운 사람들, 시간이 나고 사정이 허락될 때 그제야 올 수 있는 것이 면구스러운 그런 사람들이다. 왜 나와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이렇게 불행해야 하는가를 제삼자 입장에서밖에 고민할 수 없는 그런 사람들이다. 연대라는 이름으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과연 무엇일까, 나는 가슴이 무거워졌다.

다 같이 구호 몇 개를 외치고 노래를 부른 후 사회자가 다시 마이크를 잡고 시민들을 향해 발언을 했다.

“지나가시는 시민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저희는 430여일 넘게 싸우고 있는 이랜드 노동자들입니다. 옆 동료들이 한 순간에 잘리는 것을 보고, 그동안 성심성의껏 일해 모범상까지 탄 동료마저 잘리는 것을 보고, 저 일이 곧 내 일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이렇게 깃발을 들었습니다...... 이랜드는 맨 처음 청소 용역 아주머니들을 자르더니 그 다음엔 아무 이유도 없이 저희들을 잘랐습니다. 회사는 저희와 대화를 하려는 의지를 전혀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저희가 할 수 있는 일은 투쟁뿐이었습니다...... 작년 추석 때는 추석 매출 타격 투쟁으로 회사에 큰 재정적인 피해를 입혔습니다. 올해도 저희가 할 수 있는 일이 그것뿐이라 지금 이렇게 홈에버 매장 앞에서 투쟁하고 있습니다. 시민 여러분들은 홈에버를 잠깐 이용하지 않으시면 조금 불편한 것밖엔 없으시겠지만, 여러분들이 홈에버를 이용하시면 저희들은 일터로 돌아갈 수가 없게 됩니다. 불법 카드깡 쌀장사로 유통시장을 어지럽히는 악덕 기업이 홈에버입니다. 소비자 여러분이 심판해 주셔야 합니다. 비정규직 대량 해고 문제도 아직까지 해결되지 않고 있습니다. 결국 회사를 홈플러스에 팔아넘기고 노동조합 간부들 60여명을 징계했습니다. 소비자 여러분들께서 불매로 악덕 기업 이랜드를 응징해주세요. 발걸음 잠깐 멈추시고 여기 아줌마들 얘기 좀 들어 주시기 바랍니다...... 추석은 정과 마음을 나누는 시기입니다. 그런 시기에 악덕 기업에서 산 물건으로 정을 나누는 것은 맞지 않습니다. 추석 선물은 재래시장이나 다른 마트에서 구입해 주세요. 소비자의 힘으로 악덕 기업 응징하고 이랜드 투쟁 승리했으면 좋겠습니다. 구호 하나 외치겠습니다. 이랜드 완전 퇴출로 비정규직 탄압 몰아내자!”

나도 조합원들과 함께 구호를 외쳤다. 이어 민주노동당 서울시 위원장이 나와 발언을 하고 본집회가 끝났다. 다섯 시였다.

조합원들은 다시 선전전을 시작하기 위해 피켓과 손팻말을 들고 하나 둘 흩어져 갔다. 나는 오늘이 저녁에 출근하는 날이라 어쩔 수 없이 이경옥 부위원장과 인사를 하고 등에 매달았던 선전물을 떼어 돌려드렸다.

'PRESS' 완장을 차고 있던 어떤 기자분과 모자를 쓰고 열심히 현장을 촬영하고 있던 분이 그 자리에 취재를 온 전부였다. 나는 내일 홈에버 상암점에서 있을 집중 투쟁을 기약하고는 그 자리를 떠났다.

내 일터는 자그마한 보습학원이다. 시흥에서 안암까지 가려니 삼십 분 늦게 학원에 도착했다. 수업을 하려는데 중학생 아이들이 모두 예비 비정규직 노동자들로 보였다. 나는 어떠한 말도 하지 못하고 참고서나 줄줄 읽어 내려갈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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