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정규직을 정규직으로 만들어 주면 될 걸 가지고"

[현장기자석] 이랜드 추석 집중 투쟁 4일차 - 2008년 9월 5일

주말에 선전전 하면서 배포할 유인물 글을 쓰느라 집에서 조금 늦게 나왔다. 홈에버 시흥점 앞에 도착하니 네 시가 다 돼 있었다. 이랜드 조합원 60여 명이 모여 집회를 열고 있었고 김성만 씨의 구성진 공연이 마침 한창이었다. 나는 걸쭉한 김성만 씨의 목소리를 들으며 잠시 숨을 돌렸다. 전경 버스들. 전경들. 용역들. 그리고 1일차 투쟁에서부터 용역들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 함께 나타나는 그 덩치 큰 사람. 깃발과 스피커. 매장 주변 곳곳에 놓여 있는 피켓들. 가로수 사이에 걸려 있는 현수막. 이랜드 집회 때마다 마주치는, 노동자들의 투쟁 영상을 전문적으로 제작한다고 하는 분에게 물어보니 집회 시작한 지는 삼십 분 정도 된 것 같았다.

전해투 사람이 나와서 특유의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힘 있는 발언을 하고 들어갔다. 이어 홈에버 목동 분회 조합원이 나와 발언을 했다.

“......바깥에서 싸우는 사람들도 잘해야겠지만 안에서 근무하는 노동자들도 정말 열악합니다. 박성수는 반드시 퇴출돼야 합니다. 말로는 이랜드에서 기독교 윤리를 강화한다면서, 노동자들이 쉴 수 있는 휴게실은 없애고 기도실만 있는 상황입니다. 기도실도 지친 노동자들이 자유롭게 들어가서 쉴 수 있는 곳이 아니고, 방명록에 이름을 쓰고 따로 신청을 하지 않으면 노동자들은 들어갈 수도 없습니다. 회사라면 노동자들에게 신바람 나는 일터를 만들어 줘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그래야 우리가 성실한 노동자가 될 수 있잖아요...... 홈에버가 이제 조만간 간판을 내립니다. 홈플러스로 바꾸겠죠. 그런데 저 위에 매장 건물 벽에 붙어 있는 광고판을 보세요. ‘홈에버-현대카드V 출시’라고 써 있죠? 며칠 있으면 홈에버라는 이름이 사라지는데 아직도 저런 광고를 하고 있습니다. 이건 시민들마저 우롱하는 일입니다...... 우리는 승리할 것이라는 무지개 빛 같은 희망이 있습니다. 끝까지 함께 했으면 좋겠습니다. 구호 하나 외치겠습니다. 끝까지 함께 하여 일터로 돌아가자!”

네 시 이십 분 쯤에 집회가 끝났다. 안양 2001아울렛으로 이동해서 선전전과 투쟁문화제를 연다고 했다. 조합원들은 버스를 타기 위해 길을 건너갔다. 이경옥 부위원장이 내게 오더니 인버터를 어디 가서 가져와야 한다고 함께 자기 차를 타고 가자고 했다. 인버터가 뭔지는 몰랐지만 키가 큰 나를 찾은 걸 보니 꽤나 무거운 물건인가 보았다. 승용차 조수석에 앉고 나니 뒷자리에 조합원 세 명이 더 탔다.

차가 출발했다. 차창 밖을 내다보다가 검은 양복에 새빨간 넥타이를 매고 있는 용역들 중 한 사람과 눈이 마주쳤다. 짧게 깎은 머리에 피부는 현무암처럼 새까맸고 덩치는 곰 같았다. 저런 용역들한테 걸리면 뼈도 못 추리겠지, 하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이경옥 부위원장과 조합원들 사이에 말들이 오갔다.

“쟤네들 웃겨. 상암점에서는 청바지에 티셔츠 입고 나오더니 여긴 본사라서 그런지 양복 빼입고 나오잖아. 용역들도 사람 차별하나?”
“그러게 말야. 호호.”
“얼마 전에 우리 매장 앞에다 스티커 붙이고 있는데 어떤 자식이 와서 내가 붙여 놓은 걸 다 긁어 떼어 버리는 거야. 그래서 열 받아서 한 마디 했지. 야, 니가 뭔데 이걸 떼는 거야? 아줌마, 여기다 이런 거 붙이면 안돼요. 이러길래 내가, 당신 뭐야? 경찰이야? 하니까 경찰은 아니래. 그러고는 하는 말이, 여기다 붙이지 마세요, 이 말만 계속 하는 거야. 그래서 나도 그랬지. 경찰도 아닌데 왜 떼고 지랄이야!”
“아이고, 우리도 욕쟁이 아줌마 다 됐구나. 큰일 났다.”
“근데 요새는 경찰 보고 짭새라고 하면 안된다며?”
“왜? 짭새라고 하면 잡아가나? 잡아가는지 안 잡아가는지 한번 경찰 앞에서 해 볼까?”
“무슨 명예훼손이라나? 뭐 그런가봐.”
“미친 새끼들, 가지가지 하는구나. 자기네들이 하는 건 다 합법이고.”
“요새 허리 아픈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걱정이야.”
“왜, 허리 아파?”
“조합원들 중에서 허리 안 아픈 사람이 어딨어.”
“허구한 날 서서 일하던 사람들이 갑자기 앉아서 집회 하니까 허리에 병이 안 나고 배겨?”
“병원에 좀 가봐야 할 텐데 다들 시간이 없으니.”
“그런 사람들이 병원에 가야 하는데 못 가고 있으니 병이 더 생기는 거지.”

차는 ‘제일산업개발’이라는 곳으로 들어갔다. 트럭들과 레미콘들이 여기저기 보였다. 파업 중인지 곳곳에 현수막이 걸려 있었고, 서 있는 트럭에는 구호가 적힌 피켓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뉴코아에서 투쟁 접으면서 우리한테 인버터를 반납해야 하는데 아직 안 했거든. 그게 여기 있다고 해서 찾으러 온 거에요. 한참 헤맬 줄 알았는데 의외로 금방 찾았네.”

차에서 내려 트럭에 걸려 있는 현수막들을 찬찬히 바라보았다.

‘20년 아스콘 운송 이대로 멈출 수 없다 끝까지 투쟁하여 쟁취하자’
‘노동자 기만하는 제일 아스콘 사용자 양○○은 각성하라’

문구 밑에는 ‘전국건설산업연맹 전국건설노동조합 제일아스콘분회’라고 쓰여 있었다. 아스콘이 뭘까 궁금해 하고 있는데 저쪽에서 ‘민주노총 서울본부’ 티셔츠를 입은 여자 분이 다가왔다. 이렇게 지지 방문 오신 김에 노동자들에게 잠깐 인사 하시고 가면 어떻겠느냐고 물어 왔다. 우리는 영상 교육을 진행하고 있다는 교육장으로 향했다.

방에 들어가니 건설노조 조끼를 입은 나이 지긋한 조합원들이 우리에게 손뼉을 쳐 주었다. 우리는 간단히 인사를 하고 바깥으로 나와 의자에 앉아 커피 한 잔씩 얻어 마셨다.

아까 그 여자 분에게 아스콘이 뭐냐고 물으니 도로에 까는 아스팔트를 생각하면 된다고 했다. 아스콘과 아스팔트가 비슷한 거라고 했다. 오늘이 파업 3일째라는 제일아스콘 노동자들은 400일을 훌쩍 넘겨 투쟁한 이경옥 부위원장과 조합원들에게 투쟁 선배로 모시겠다고 깍듯이 경례를 붙였다. 다들 웃었다. 우리는 얼마 동안 앉아서 서로의 투쟁 현황을 주고받으며 이야기꽃을 피웠다.

헤어지기 전에 나는 제일산업개발이라는 회사가 구체적으로 무슨 잘못을 저지르고 있는지 물어보았다. 유인물 같은 거 있으면 한 장 달라고 했더니 이제 파업 3일째라 아직 선전물은 나오지 않았다고 했다. 회사가 운반비 협상에도 성의 있게 응하지 않고 무조건 노조만 탄압한다고 했다. 나는 이곳으로 꼭 취재를 오겠다는, 지킬 수 있을지 없을지 모를 약속을 하고 그곳을 나왔다.

트럭을 운전하는 운송 노동자들은 특수고용 노동자들이다. 계약직이나 파견직처럼 비정규직인 것은 동일하지만 내가 가장 악질적인 고용 방식이라 생각하는 것이 바로 운송을 비롯한 특수고용직이다. 간단히 말해, 노조를 무력화하고 온갖 세금과 공과금을 비롯한 차량 유지비를 운송 노동자들에게 떠넘기기만 하는 고용 방식이기 때문이다. 경기가 어떻게 변동을 하든 모든 책임은 운송 노동자들에게 전가된다.

“저렇게 보이지 않는 곳에서 투쟁하고 있는 노동자들이 얼마나 많겠어요. 우리야 연대해 주시는 분들이 많으니까 좋긴 좋은데...... 참 안타까워요.”

인버터를 챙기고 제일산업개발을 나왔다. 안양역 쪽으로 향했다. 2001아울렛에 도착해 보니 먼저 도착한 조합원들이 선전전을 진행하고 있었다. 아울렛 건물 화단에 군데군데 꽂혀있는 노란 풍선들이 보였다. 현수막은 양쪽 가로수에 묶여 도로를 향해 펼쳐져 있었고 보도블록 위에는 피켓들이 한 줄로 늘어서 있었다.

‘나쁜 기업 이랜드 불매로 심판하자’
‘비정규직 설움의 땅 이랜드에 가지 말자’
‘이랜드 사태 책임지고 박성수를 구속하라’
‘악질 자본 이랜드 불매로 심판하자’

안양 2001아울렛은 육중한 7층짜리 건물이었다. 조직폭력배처럼 검은 양복 차림을 한 용역들이 입구마다 버티고 섰다. 홈에버 시흥점에서 따라왔는지 낯익은 용역들도 보였다.

선전전을 하던 조합원들이 김밥을 먹기 위해 모여들었다. 나도 끼어 앉아서 김밥을 먹으며 다시금 아울렛 건물을 바라보는데, 옷만 파는 것이 아니라 패밀리 레스토랑도 있고 꼭대기 층에는 24시간 사우나까지 들어가 있었다. 나는 이경옥 부위원장에게 물어보았다.

“여기 건물이 이랜드 소유인가요?”
“아닐 걸요? 이랜드 자본이 홈에버 하면서 이것저것 다 팔아 먹어서 아마 남아있는 게 거의 없을 거에요. 강남 뉴코아 말고는 없지 않나? 아미 여기도 이랜드 소유가 아니라 그냥 임대해서 들어간 걸 거에요. 걔들도 이젠 돈이 없지.”

여섯 시가 되었다. 조합원들은 다시 선전전을 시작하기 위해 풍선과 유인물을 들고 흩어졌다. 나도 유인물 한 뭉치를 들고 길거리로 나섰다. 퇴근 시간이어선지 버스가 올 때마다 사람들이 떼 지어 몰려왔다.

오 미터 정도 사이를 두고 내 앞뒤에 조합원들이 서서 유인물을 나누어 주고 있었다. 나는 그들이 놓친 사람들을 맡아 살며시 다가가 유인물을 쥐어 주었다. 대부분은 바삐 걸어가면서도, 손전화로 통화를 하면서도 유인물을 받아 주었지만 파리 쫓듯 손짓 한 번으로 저리 가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나는 그동안 내가 거리에서 무심히 지나쳤던, 전단지 나누어 주던 아주머니들을 생각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기억도 나지 않는 시시껄렁한 전단지였지만 아마 그 아주머니들에게는 밥줄이 걸려 있는 무척이나 중요한 노동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아주머니들이 나누어 주는 전단지에 전혀 관심이 없었고 어차피 쓰레기가 될 종이를 받는 것이 성가셔서 일부러 아주머니들을 멀리 피해 지나가버릇 했다. 이랜드의 횡포가 고스란히 적혀 있는 이 유인물은 물론 갈비집 오픈이나 선전하는 전단지보다야 훨씬 더 소중한 것이겠지만, 이랜드건 비정규직이건 하나도 관심 없는 사람들에게는 내가 아주머니들을 피해 다녔던 것처럼 손사래 치며 거부하고 싶은 종이 쪼가리에 불과할 것이었다. 나는 그 심정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수긍할 수는 없었다. 나도 지금껏 길거리의 전단지 아주머니들을 참으로 외롭게 했었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그깟 건 받지 않겠다고 손짓 한 번으로 밀치며 지나가는 사람들을 보면서 전단지 아주머니들이든 이랜드 조합원들이든 얼마나 외로웠을까? 공과금을 걱정하고 하루하루 밥벌이를 걱정해야 하는 세상이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까마득하게만 보였을까?

한 아저씨가 유인물을 받더니 “이런 나쁜 놈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라고 씨근거리며 내 쪽으로 가까이 다가왔다. 나는 그 ‘나쁜 놈들’이 과연 누구를 가리키는지 궁금해서 아저씨가 말하는 대로 잠자코 듣고만 있었다.

“이게 이러면 안돼요. 아무리 이래 봤자 위에 있는 놈들은 꿈쩍도 안 해. 법과 제도가 잘못된 거 아닌가? 법 때문에 비정규직이 자꾸 늘어나는 거잖아. 나도 옛날에 회사 다닐 때 우리 회사에 노조가 있었거든. 나는 노조 활동은 안 했지만 노조 사람들 많이 봤지. 그때는 노조 힘이 참 강했어요. 근데 지금은 다 약해졌어. 법이 문제야. 이렇게 거리로 나와서 하는 걸로는 안돼.”
“그래서 국회에서는 민주노동당이나 진보신당 같은 정당들이 비정규직법 철폐를 위해서 또 싸우고 있거든요. 국회 안에서는 그 나름대로 싸우시는 분들이 있고, 실제로 현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은 이렇게 거리로 나와서 싸우는 거죠. 가만히 있을 수는 없으니까요.”
“그건 나도 아는데, 답답해서 그래. 이렇게 데모 한다고 회사가 겁을 먹나? 노조 말을 들어 주나? 아니잖아. 내 생각엔 그래. 이러고 고생하지 말고 차라리 법과 제도를 바꾸려고 노력하는 게 더 빠른 길이 아닐까? 이랜드도 꽤 오래 되지 않았어? 그런데 지금까지 아무런 성과가 없잖아.”
“법을 개정하려는 노력도 지금 하고 있는데 아직은 안되고 있어요. 하지만 국회에서 아무리 노력을 한다고 해도 막상 현장에서 일을 하는 노동자들이 나서지 않으면 회사는 조금도 변하려 하지 않을 거에요. 지금까지 이랜드 노동자들이 열심히 싸워서 그나마 이랜드 자본이 궁지에 몰린 거잖아요. 장사가 하도 안되니까 홈에버를 홈플러스에 팔아 넘겼어요.”
“아, 그래? 그것도 성과네. 큰 성과지. 휴― 빨리 해결이 나야 할 텐데. 불황에 이게 다 뭐하는 짓거리야 그래. 비정규직을 정규직으로 만들어 주면 될 걸 가지고.”
“그러게요.”
“아무튼 열심히 해. 수고하고.”
“예, 감사합니다.”

나는 꾸벅 고개를 숙였다. 아저씨는 주변에 놓인 피켓들을 유심히 들여다보다가 저쪽으로 가 버렸다. 나는 마치 내가 조합원이라도 되는 것처럼 말한 것 같아서 조금 쑥스러웠다.

여섯 시 반에 선전전이 끝났다. 이경옥 부위원장에게 일정이 어떻게 되느냐고 물어보니 여기서 일곱 시 반까지 문화제를 하고 안양 시청으로 가서 시민 단체랑 결합해야 한다고 했다. 시민 단체? 안양 지역 시민 단체들이 시청에서 비정규직 문화제를 연다고 했다.

조합원들이 2001아울렛 정문 앞에 모여 앉아 촛불을 켜 들었다. 땅거미가 지고 있었다. 비가 오려는지 담배 연기처럼 뿌연 구름이 하늘 가득 자욱했다. 지민주 씨의 공연으로 투쟁 문화제를 시작했다.

공연이 끝나고 사회자가 발언을 하고 있는데 무심코 하늘을 올려다 본 나는 온 하늘에 커다랗게 걸린 무지개를 발견하고는 잠시 넋이 나가 있었다. 구름 하나 없는 쨍한 하늘에 걸린 것이 아니라 해질녘 잔뜩 끼어 있는 구름들 사이에 걸려 있느라, 구름에 촉촉이 스며든 노을빛을 배경으로 무지개는 정말 꿈에서나 봄 직한 환상적인 빛깔을 내비치고 있었다. 잠시 집회가 멈추어졌고 조합원들은 저마다 손전화를 꺼내 무지개 사진을 찍었다.

“느낌이 좋습니다. 우리가 승리하고야 만다는 계시 같습니다.” 사회자의 희망찬 말에 이어 사노련에서 나온 사람이 힘찬 연대 발언을 했다.

저 앞쪽에서 검은 옷을 입은 젊은이들이 다가와서 나는 대뜸 몸짓패인가 싶었다. 서울대 몸짓패 ‘골패’라는 젊은이들이었다. 나중에 물어보니 골패는 ‘전진하는 예술가’라는 의미를 가진 순 우리말이라고 했다.

골패의 공연과 함께 문화제도 끝났다. 일곱 시 이십 분이었다. 바로 안양 시청으로 이동해야 했다. 나는 또 이경옥 부위원장의 승용차를 얻어 탔다. 집에 간 조합원들도 있어서 차 넉 대에 모두들 나눠 탈 수 있었다.

조수석에 타고 나니 뒷자리에 안양 조합원들이 탔다. 이경옥 부위원장과 말이 오가기 시작했다. 옆에서 조용히 들으면서 몇 가지를 물어보기도 하니 대강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나왔다.

2001아울렛에서 작년 추석이랑 올해 설에 회사가 파업 중인 노동자들에게 협박을 했다. 지금 일터로 복귀하면 선처해 주겠다고도 했다. 그래서 그때부터 지금까지 현장으로 복귀한 조합원들이 조금씩 있다. 끝까지 버티던 사람들 중에는 복귀하면서 일터에서 노조 조끼를 입고 일하는 조합원들도 있다. 어차피 출근 안 하면서도 다른 곳에서 알바 뛰고 할 거면 차라리 복귀해서 돈 벌면서 투쟁하라는 말도 들었다. 싸움이 자꾸 길어지니 다들 어려운 상황이었다. 먼저 복귀한 사람들과 나중에 복귀한 사람들 사이에 회사가 차별을 두는 건 없는데, 중계점에서는 먼저 들어간 사람들 가압류를 풀어주었다고 한다. 노조 조끼 입고 일하면 손님들이 물어본다. “아직도 안 끝났어요?” 그러면 “예, 아직도 해결 안됐어요”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여덟시 다 되어서 안양 시청에 도착했다. 나는 시청 앞에서 촛불을 든 사람들이 열렬히 집회를 열고 있을 줄 알았지만 알고 보니 시청 강당에서 열리는 문화제에 참여하기 위해 온 것이었다. 우리는 2층으로 올라갔다.

강당으로 들어가 보니 통기타를 메고 온 가수가 노래를 하는 중이었고 객석은 몇 군데 빈자리들을 빼놓고 가득 차 있었다. 조합원들은 뒤쪽에 남아 있는 빈자리로 가서 앉았다. 나는 계단에 걸터앉아 조용히 노래를 들었다.

강당 입구에서 받은 소책자를 보니 ‘비정규직과 차별이 없는 세상을 위한 문화제 행복’이라는 문구가 적혀 있었다. 안양 지역 노동조합들과 시민단체들이 함께 준비한 문화제인가 보았다. 스님이 나와 단소를 불기도 했고,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투쟁 동영상을 보여주기도 했고, 이랜드 노조 몸짓패와 안양 지역 청년들이 함께 공연을 하기도 했고, 풍물패가 등장해서 흥겨운 우리 가락을 들려주기도 했다.

아홉시 반에 문화제가 끝났다. 마지막에 사회자가 나오더니 이 자리에 함께 있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하나하나 호명하면서 객석에 있는 사람들에게 소개해 주었다. 이랜드, 기륭 전자, KTX, 코스콤 노동자들이 보였다.

이랜드 조합원들과 인사를 하고 나는 집으로 가는 지하철을 탔다. 피곤했다. 다리에 힘이 빠져 몇 번이나 넘어질 뻔했다. 빈자리에 앉아 고개를 푹 꺾었다. 비정규직 문제를 자기 문제로 생각하지 않고 그저 극장에서 남 이야기 보듯 관람하는 것으로는, 천 명 만 명이 모인다고 해도 아무 소용이 없을 것이라는 생각을 잠들기 전에 잠깐 했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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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정규직 , 이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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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목록
  • 갈대

    덕분에 좋은 글 잘 읽습니다.
    마지막 글이 저에게도 가슴 아프게 읽힙니다.
    비정규직 문제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1인이 아닐지
    저 스스로에게 자신이 없네요.
    치열한 성찰 놓치지 않도록 애쓰렵니다. 꾸벅.

  • 역시 여전히 집회를 찾아다니며 중요한 글을 쓰고 있네요.
    잘 읽었어요. 형 글은 여전히 길긴 기네요~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