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과서 수정권고, 절대 받아들일 수 없다"

교육과학기술부 역사교과서 수정권고안 발표.. 역사교사, 학계 크게 반발

정부가 대한상공회의소, 국방부와 통일부, 그리고 뉴라이트 계열 단체인 교과서 포럼 등이 금성출판사 등의 고등학교 [한국근·현대사] 교과서 6종에 대해 낸 수정 요구안 253개 항목 가운데 55건에 대해 ‘수정권고’를 내렸다.

교육과학기술부는 30일 브리핑을 통해, 교과서 포럼 등의 수정 요구안을 검토한 결과, 55건에 대해 ‘수정 권고’를 결정하고, 각 출판사 집필진이 이미 자율적으로 내용을 수정한 102건을 제외하고, 나머지 96건은 크게 문제가 없어 집필자의 재량에 따라서 수정여부를 판단할 수 있도록 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심은석 교육과학기술부 학교정책국장은 “현행 교육과정 및 국사편찬위원회가 제시한 ‘서술 방향’ 등을 참고해, 교과서 내용이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해치고 있는지와 학습내용이 고등학생 수준에 적합한지를 검토 기준으로 삼았다”고 말했다.

심은석 국장은 55건에 대한 수정권고 결론의 근거로 △8·15 광복과 연합군의 승리에 대해 부정적으로 기술한 부분 △미·소 군정과 관련해 서로 성격이 다른 사료를 비교해 학생들을 오도한 부분 △분단의 책임을 대한민국에 전가한 부분 △대한민국을 민족정신의 토대에서 출발하지 못한 국가로 기술한 부분 △북한 정권의 실상과 판이하게 달리 서술한 부분 등을 언급했다.

수정 권고안의 상당 부분은 단어를 삭제하거나 첨가하라는 등의 지엽적인 내용으로, "'곧바로', '그 결과' 라는 단어는 빼고, '민족민주운동'은 '민주화운동'으로 변경하라" 라거나 "'일부'라는 단어를 추가하고 '결국'이라는 단어는 빼라" 라는 식이다. 또한 그간 논쟁의 핵심 지점이었던 부분은 추상적인 검토 의견과 수정안에 그치고 있다는 지적이다. 대한민국의 정통성과 관련된 부분에서는 “분단의 책임에 대한 오해가 있어 보완”, “대한민국 정부 수립의 의의 및 정통성에 대한 보충 서술”, “북한의 실상과 현저한 차이를 보이는 서술은 보완” 등 추상적인 검토 의견을 냈다.

이에 따라 교과부가 무리하게 교과서 수정에 개입해 불필요한 논란만 가중시킨 것 아니냐는 비판이 나오고 있다. 정태헌 고려대학교 한국사학과 교수는 "수정권고안에는 본질적인 하자나 문제를 제기한 부분이 없다"면서 "교과서를 지렛대로 삼은 정치공세용이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라고 말했다.

윤종배 전국역사교사모임 회장은 오늘 발표된 교과부의 수정안에 대해 "정통성, 자긍심 운운하며 현 교과서가 큰 문제가 있는 것처럼 떠들더니, 결과를 보니 어이없고 허탈하다" 며 "애초에 아무런 문제가 없었는데, 국가예산을 낭비하면서까지 필자들에게 첨삭지도를 한 게 아니냐"라며 분통을 터뜨렸다. 윤 회장은 또 "교육적 차원에서 고민하고 쓰고 수정하는 모든 몫은 현장에서 노력하는 교사나 학자 전문가에게 맡겨야" 하며 "입시를 앞둔 학생들에게 혼란과 부담을 주는 이런 세력들은 학생들에게 사과하고 뉘우쳐야 한다."고 덧붙였다.

이정은 역사문제연구소 사무국장은 발표된 수정권고안이 지금까지의 교과서 왜곡 공세에 비해서는 상당히 부실한 수준이라며, 그 이유로 “한국사학계의 연구성과들을 부인하는 뉴라이트의 주장이 학계에서 매우 소수의견에 불과하고, 국민들로부터도 많은 비판을 받고 있어 뉴라이트의 입지가 줄어들었다”며 “검인정제도 취지까지 뒤엎으면서 이런 내용으로 교과서를 수정한다는 것에 대한 정치적 부담도 크게 작용했을 것”이라고 분석을 내놓았다.

반면, 권고안 중 10여 개 항목은 뉴라이트 계열 교과서 포럼의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인 것으로, 필자들의 시각과 관점을 정면으로 공격하고 있어 큰 반발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교과서포럼은 “가장 이념적으로 편향된 반미적 서술”이라고 지적한 ‘광복을 공식적으로 확인하는 역사적 순간은 자주 독립을 위한 시련의 출발점이기도 했다’(금성출판사 256쪽)는 부분과, 반민족행위자처벌특별위원회의 친일파 척결 실패와 관련, “민족정신에 토대를 둔 새로운 나라의 출발은 수포로 돌아갔다”는 금성교과서의 서술에 대해 “지나친 표현, 주관적 표현”이라며 수정/삭제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이런 항목에 대해 김한종 , 주진오 교수 등 교과서 집필자들은 "상당한 문제가 있다"며 부당한 수정 요구는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입장을 보이고 있다. 검인정 과정을 아무런 문제없이 통과했을 뿐만 아니라 그간 필자들의 학문적 양심에 따라 자율적 수정을 거듭해 오고 있는데, 정치적 논리로 절차적 민주주의까지 무시하는 것은 좌시할 수 없다는 것이다.

또 교과부는 이번 수정안은 국사편찬위원회가 지난 15일 제출한 ‘한국 근·현대사 교과서 서술방향 제언’을 바탕으로 교사·교육전문직·교수 등 15명으로 구성된 ‘역사교과전문가협의회’를 구성, 논의 및 감수를 거친 것이라고 설명했는데, 이 협의회의 인적구성은 프라이버시 보호를 위해 밝힐 수 없다는 입장을 보였다. 이에 대해 역사교사모임의 한 교사는 "교과부의 말처럼 정말로 현장의 여론을 수렴하기 위해 학계와 교육현장에서 인정받는 권위있는 전문가로 협의회를 구성했다면 밝히지 못할 이유가 없다" 라며 "지난 6일 교과서 검정위원은 다 공개해 놓고 법적 근거도 없는 협의회는 공개하지 않겠다는 것은 자기모순이자 기만이다." 라고 반박했다.

교과부는 이날 각 출판사에 교과서 수정 권고안을 보냈으며,“앞으로 한 달 정도 시간이 있는 만큼 집필진과 충분히 토론해 합의를 도출해 내겠다”며 “직권 수정 등 강제적인 방법으로 교과서를 고치도록 할 계획은 아직 없다”고 말했다. 그러나 교과부의 계획대로 앞으로 한달 동안 교과서 내용에 대한 토론을 거쳐 다음 달 말까지 수정작업을 마무리하기에는 시간이 부족한 상태다. 또한 교과부가 내년 3월 신학기부터는 수정된 내용이 적용된 교과서가 각급 학교에 보급 하겠다는 의지를 보이고 있는 상황에서 만약 필자들과의 합의가 늦어지게 된다면 교과부가 검인정제도마저 무력화시키고 ‘직권수정’이라는 강제적 수단을 동원할 수도 있다는 전망이 나오고 있다.

현재 이렇게 검인정제도의 취지를 무력화하는 정부에 맞서서교과서 필진, 학계, 교육현장을 중심으로 대응 움직임이 만들어지고 있는 상황이다. <한국근·현대사> 교과서 출판사 가운데 5개 출판사 집필자들은 교수들을 중심으로 공동대책협의회를 꾸려, 교과부의 수정 권고에 공동 대응해 나가기로 했으며, 한국사연구회, 한국역사연구회, 역사문제연구소 등 역사관련 학회와 연구소, 단체들도 공동성명을 발표하기로 예정되어 있다.

전국역사교사모임 등 7개 단체로 구성된 역사교육연대회의는 초 중 고 대학을 막론하고 역사학에 몸담고 있는 모든 이들의 교과서 수정 반대의 의지를 표명하는 '전국역사교육자선언'을 다음주 초 주요일간지에 싣기로 했다.

또한 이번 수정안 발표를 지켜본 전국의 역사학, 역사교육 관련 학과의 석박사 연구생들도 교과서 수정에 반대하는 집단행동에 나설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고려대 한국사학과 박사과정에 재학중인 예대열 씨는 "현재 이 문제에 대응하기 위해 전국의 역사관련 대학원생들과 연락과 협의를 하는 중이며 역사교육연대회의와 보조를 맞추어 성명서 발표, 서명운동 등을 전개해나갈 것"이라고 밝혔다.

서울대 역사교육과 박사과정에 재학중인 김태호 씨는 "역사학의 자율적이고 전문적인 영역을 침해하는 정부의 움직임에 분노해 공동대응에 참여하게 되었다"고 밝히고 “객관과 균형이라고 말하지만 사실상 우편향을 요구하는 것 아닌가? 역사적인 잘못이나 문제는 대충 덮어버리고 자랑스러운 부분만을 부각시키는 것이 일본과 중국의 역사 왜곡과 무엇이 다른가" 라고 반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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