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회신고는 선착순 1명".. '달려라 달려'

동작경찰서 앞에서 벌어지는 '한밤의 달리기'

'준비, 출발'... "오늘의 1등은 OOO씨, 집회신고 접수합니다"

25일 저녁 11시 59분, 서울 동작구 노량진동에 위치한 동작경찰서 정문 앞에는 5-6명의 사람들이 일렬로 도열해 있다. 이들은 마치 육상 경주라도 하듯, 출발 자세를 취하고 있다. 대기하고 있던 이들은 시계가 정확히 26일 자정을 가리키자 경찰서 정문 안쪽에 위치한 민원실을 향해 전력질주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가장 먼저 도착한 한 남자는 민원실 창문을 손으로 짚어 승리(?)를 알렸다. 경기를 지켜보고 있던 동작경찰서 관계자는 1등으로 도착한 이 남자가 들고 있던 서류를 받아 접수했다.

주 초 월요일이나 화요일, 동작경찰서 정문에는 '달리기 시합'에 참가하는 선수들로 북적댄다. 선수들 중에는 동작구 지역 철거민들도 있고, 때로는 재개발조합 측 관계자들도 선수로 뛴다.

  0시 정각을 기다리며, 동작경찰서 정문 앞에서 출발 준비를 하고 있는 시민들

이들이 이처럼 달리기를 하는 이유는 집회신고서를 접수하기 위해서였다. 이날 경기에서 패배(?)해 집회를 못하게 된 철거민은 "집회 날짜와 장소가 겹칠 때는 집회 신고를 먼저 한 사람을 받아주는데, 지난 11월 초부터 동작경찰서에서 이런 방법(달리기)으로 집회신고를 접수하고 있다"고 말했다.

우스꽝스럽게도 보이는 이 같은 '한밤의 달리기'는 동작경찰서 측에서 고안해 낸 방법이다. 그러나 '경기'를 관람하며 '심판' 역할을 하던 동작경찰서 관계자들도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동작경찰서 "우리도 법이 이러니, 어쩔 수 없다"

동작경찰서 정보과 한 관계자는 "우리들도 이런 방법으로 하고 싶지 않지만, 집시법(집회및시위에관한법률)이 집회신고를 먼저 접수한 사람에게 주도록 되어 있으니 어쩔 수 없다"고 말했다.

그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집회신고를 받다가 결국 하게 된 방법"이라며 "이렇게라도 안하면, 같은 날 같은 장소에 집회신고를 내겠다는 사람은 여럿인데, 이를 도무지 중재할 방법이 없다"고 토로했다.

현행 집시법은 중복되는 2개 이상의 신고가 있는 경우 후에 접수된 집회 또는 시위는 금지할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다. 집시법 상 이 같은 '중복집회 금지' 조항은, 때로는 집회를 의도적으로 방해하려는 이들에게 악용되기도 한다.

서울 중구 태평로 구 삼성 본관 앞 노동자들의 집회를 막기 위해 삼성 측이 관할 경찰서인 남대문경찰서에 수개월 치의 집회신고를 접수한 사례는 유명하다. 또 현행 집시법은 신고를 한 후 실제로 집회를 개최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별도의 벌칙규정이 없다.

현행 집시법이 이렇다 보니, 집회신고 과정에서 때로는 '달리기' 때로는 '민원실 의자에 먼저 앉기'(남대문경찰서) 등의 웃지 못 할 해프닝이 벌어지고 있는 것.

인권단체 "집시법 개정 안 되면, '쇼'는 계속될 것"

이 같은 집회신고 과정의 문제점에 대해 박진 다산인권센터 활동가는 "현행 집시법이 중복집회 자체를 금지하고, 허위 집회에 대한 벌칙 규정이 없기 때문에 반복되고 있는 문제"라며 "집시법 개정이 시급하다"고 지적했다.

그는 이어 "집회신고의 선순위를 정하는 기준이 법에 명시되어 있지 않고, 그러다 보니 경찰이 '달리기' 등 자의적인 방법으로 집회신고를 접수받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그러면서 박진 활동가는 "이는 선수위자를 결정하는 기준을 정교하게 만든다고 해서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라, 중복집회 자체를 허용해야 한다"며 "집시법 자체가 바뀌지 않으면, 이런 문제는 계속될 것"이라고 밝혔다.

특히 현행 집시법은 신고제임에도 경찰의 자의적 판단에 따라 사실상 허가제로 운영되고 있는 등의 문제점도 인권단체들에 의해 여러 차례 지적되어 왔다.

인권단체들의 이 같은 의견을 반영해, 지난 5월 천정배 민주당 의원 등은 △야간집회 허용 △폭력시위 사전 금지 조항인 5조 삭제 △중복집회 허용 △집회 신고 및 접수처를 지방자치단체로 이관 등을 골자로 한 집시법 전부개정안을 발의한 바 있다.

박진 활동가는 이번 동작경찰서의 '달리기 집회신고' 해프닝에 대해 "일선 경찰관들의 책임이라기보다는 집시법 자체의 제도적인 문제다"고 강조하면서도 "그렇더라도 집회신고 과정에서 경찰이 직접 나서 시민들에게 달리기를 시키는 것을 단순한 해프닝으로 치부하기는 어렵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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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시법 , 집회 , 동작경찰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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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승만독재정권이 1948년 국보법을 만들었어도 4.19로 인해 이승만독재정권이 무너지는것을 본 군사쿠데타로 정권을 쥐게 된 박정희가 1962년에 집시법을 만들었다.

  • 이 헤프닝 원조눈

    2년 전쯤인가의 저기 남쪽지방 어디다.

    그 때도 자정을 기해 땡! 노동자 대 회사측 용역이 주자가 된 집회신고 달리기가 벌어졌었고,

    양 옆으로 전경들까지 도열했었다.

    막상막하로 달리다 조금 앞선 노동자를 못된 용역놈이 슬쩍 다리를 걸어 훼방했고, 엄연한 반칙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사측이 동원한 용역이 집회신고를 하게 됐다.

    애시당초 너무 웃기는 사태지만, 그리고 원조 운운하는 게 더 웃길 수도 있지만,

    동작경찰서가 집회신고 달리기 경주 개최 원조란 말은 틀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