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목소리를 낼 수 있다는 게 중요한 것 같아요”

[기고-미행(美行)] 충북 공공시설노조 청주대학교분회 아주머니들과의 만남

대학 다니던 시절, 학생회실 안에 모여 앉아 회의 한답시고 잔뜩 무게 잡은 채 나누었던 이야기들은 대부분 큼지막하고 추상적인 것들이었다. 이라크 전쟁, 민중 생존권, 국가보안법, 민주주의와 사회주의, 노동자의 계급성, 미국의 군사패권주의 같은 것들이 빼곡하게 적힌 유인물들을 돌려 보며 우리는 답이 나오지 않는 이야기들을 열심히 주워섬기고는 했고, 밤늦도록 회의만 하고 있는 우리들 뒤에서 조용히 쓰레기통을 비우시거나 복도를 쓸고 닦으시는 아주머니들에게는 누구도 관심을 갖지 않았다. 기껏해야 아주머니들과 지나치며 인사를 꼬박꼬박 해드린다는 것에 은근한 자부심을 느낄 뿐이었다. 나는 대학과 용역업체가 그 아주머니들의 삶을 판돈 삼아 어떤 돈놀이를 하고 있는지 알지도 못했고 관심도 없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낯이 달아오른다.

충북 청주로 내려가 민주노총 충북지부와 호죽노동인권센터를 중심으로 하는 지역운동에 대해 취재를 하다가 청주대학교에 들러 시설노조 조합원 아주머니들을 만나게 되었다. 청주대 아주머니들은 작년 5월에서 7월까지 석 달에 걸쳐 원청인 청주대 측에 고용승계를 요구하는 싸움을 벌였다. 학교 측은 6월 30일자 재계약을 앞두고 일찌감치 노조를 없애기 위해 용역업체를 세 곳으로 나누어 입찰을 받아 조합원 32명을 갈가리 찢어 놓으려 했고, 새로운 업체가 들어와 “이제 당신네들은 이곳 직원이 아니다”라는 막말까지 입에 올리며 조합원들을 쫓아내려 했다. 아주머니들은 본관 총장실 앞 복도를 점거하는 농성까지 벌이며 학교 측의 부당노동행위에 맞섰고 결국 24일 동안 점거 농성을 진행한 끝에 모두 고용을 보장 받았다. 학교 측은 용역업체를 멋대로 나누려 했던 계획을 거두어들일 수밖에 없었다.

  2007년 6월, 본관 점거 농성을 벌이고 있는 조합원들 [출처: 공공노조]

청주대 사범대학 방제실로 취재팀과 함께 들어가 조합원 아주머니들 일곱 분과 마주 앉았다. 사진기와 비디오 카메라를 들이대며 연방 질문을 던져 대는 우리들에게 지나간 일들을 조근조근 이야기해 주는 아주머니들은 집에 계시는 내 어머니와 참 많이 닮아 있었다. 자식들이 조금만 속을 썩여도 눈물을 글썽일 것 같은 분들이 어떻게 한 달 가까이 본관 점거 투쟁을 할 수 있었을까, 인터뷰를 하면서 자꾸만 생각해 보게 되었다.

인터뷰는 간담회 분위기로 흘러갔다. 아무나 궁금한 사람이 묻고, 아무나 거기에 먼저 응하는 사람이 대답하는 식이었다. 노조가 설립된 2003년부터 지금껏 노조 활동을 해 온 조합원도 있었고 작년 투쟁이 끝난 후에 새롭게 들어와 노조에 가입한 조합원도 있었다. 분회장, 부분회장, 조직부장, 쟁의부장.... 이런 으리으리한 이름으로 불리기에는 조합원 아주머니들의 눈매가 너무나도 순했다.

“노동조합이 결성된 건 언제였나요?”

“2003년에 결성했어요. 노조 처음 만들 때는 하루에 8시간, 주 6일 근무하면서 한 달에 43만 원을 받았죠. 4대 보험도 없었고..... 처음 노조 만들기 직전에는 의료보험 하나만 요구했었어요. 의료보험이라도 좀 되게 해 달라고 했는데 그런 요구도 용역업체 측에선 안 들어 주더라구요. 그런데다가 사장은 우리 마지막 월급도 안 주고 도망쳐 버렸어요. 그래서 결국 시설노조에 가입하게 된 거예요. 처음엔 으쌰으쌰 하는 게 싫어서 노조 안 한다고 했는데......(웃음)”

“43만 원 받을 때는 근무 조건이 정말 열악했어요. 건물 내부 청소가 원래 저희 임무인데 그것 말고도 화단에 있는 풀 뽑고, 시험 때는 책상 옮기고, 눈 오면 눈 치우고, 모래 쌓이면 모래도 치우고..... 돈은 조금 받으면서 일을 너무 많이 했어요. 임금도 최저임금에 못 미치고.”

“그래서 여민(여성민우회)에 문의를 하기 시작한 거죠. 의료보험 혜택 받으려고 시작한 노조가 6년 동안 결국 여기까지 온 거예요.”

“작년에 조합원 30여 명을 10여 명씩 쪼개서 학교 측이 각각 용역업체 세 곳에 맡기려고 했어요. 그러면 노조 힘이 약해질 거 아니냐, 뭐 그런 생각을 했겠죠. 다른 용역업체가 막 밀고 들어와서 ‘우리 회사 사람도 아닌데 왜 나오냐’ ‘여기는 아줌마 회사 아니라서 어차피 돈 못 받는다’ 하면서 밀어내고......”

“올해는 학교 측이 적정 임금선을 제시했어요. 작년에 그렇게 투쟁을 했으니...... 지금 현재 조합원은 33명인데 학교에서 정한 고용 인원수가 32명이라고 해서 저희가 돈 조금 덜 받고 33명 모두 같이 가고 있어요. 학교에선 32명분밖에 돈을 안 주고요.”


작년에 있었던 학내 투쟁 이야기로 대화가 흘러갔다.

“작년 얘기 좀 해 주세요. 어떠셨어요?”

“교내 집회를 하려고 했더니 학교 측에서 막았죠. 왜 막느냐고 항의하니까 갑자기 체육과 학생들이 동원돼서 나왔어요. 체육과 선생이 데리고 나왔죠. 집회 한다 못 한다 막 실랑이를 벌이다가 아줌마 한 명을 학생이 밀어 아줌마가 확 넘어졌어요. 꼬리뼈를 다쳐서 한 달 동안 입원해 있었죠. 근데 그 학생에게 피해가 가지 않도록 학교 측에만 책임을 물었어요.”


조합원들은 작년 고용승계투쟁 당시 청주대 학생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해 강의실이 없는 본관 앞에서 점심 시간에만 집회를 했다. 이십대 대학생이라면 오십대인 조합원들에게는 아들 뻘이었을 것이다.

“그럼 다른 학생들은요?”

“학생들은 저희한테 관심 없어요. 학생회가 있긴 한데 전혀 활동을 하지 않아요. 서명 같은 걸 받으려고 하면 서명은 해 주는데 싸움에 나서려고 하지는 않아요.”

“해마다 6월이 계약 만료 시기인데...... 우리는 정년 65세까지 다니고 싶으니까 고용 안정 서명을 학생들에게 받으러 돌아다니면, ‘아줌마 힘 내세요’라고 서명 판에 쓰는 학생들도 많았어요. 근데 그런 학생들을 끌어 주는 학생회가 없어요. 학생회장들이 다 서울이나 수원 같은 외지에서 온 학생들이에요. 학생회장 경력이 나중에 사회 생활할 때 도움이 되니 그렇게 학생회장을 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어요.”

“강의실 문마다 선전물을 붙여 놓았는데 학생들이 응원 메시지를 많이 써 줬죠. 얼마 지나지 않아 직원들이 단박에 다 떼어 버렸지만......”

“정규직 전환을 생각해 보신 적은?”

“에이, 꿈도 못 꾸죠. (모두 웃음)”

“작년에 투쟁하면서 가장 속상했던 일이 있다면요?”

“애기를 봐야 하는데 저녁에 집에 못 들어가니 밥을 못 챙겨 줘서 참 속상했어요. 남편이 못 다니게 하기도 하고......(웃음)”

“새 업체가 들어온다고 했을 때 직원들이 ‘아줌마, 우리 회사 사람 아니니까 나오지 말아요’ 하면서 사람 취급도 안 했어요. 민주노총 분들이랑 다른 조합원들 때문에 끝까지 버텼지.”

“청주대 안에서 투쟁이 벌어지고 있다는 소문이 학교 바깥으로 퍼지지는 않았나요?”

“외부 용역업체들도 우리가 싸우고 있는지 다 몰랐대요. 지방 방송을 안 보나?”

“저도 몰랐어요. 저는 투쟁이 끝난 후에 들어왔는데 그런 투쟁이 있었는지 잘 몰랐어요.”

“저는 알았어요. 청주 뉴스에는 많이 나왔거든요. 저도 투쟁이 끝나고 들어왔는데...... 뉴스를 보면서 ‘아니, 저 아줌마들은 청소할 데가 저기밖에 없나? 왜 그 돈 받고 거기서 남아 있을까?’ 궁금했어요. 근데 여기 들어와 보니 알겠더라구요. 들어와서 노조원들의 행동을 보니, 43만 원 받던 시절에서 6년 동안 지금 여기까지 끌어올린 그 열의와 끈끈한 동료애를 보니 생각이 달라졌어요. 그리고 굳이 내 이익을 주장할 필요 없이 모두의 이익을 주장하면 된다는 것도 너무 좋았어요. 매년 6월 30일이면 또 으쌰으쌰 해야 해요. 같이 가는 거죠.

전에는 제가 은행에서 청소를 했어요. 여기서 청소 인원을 모집한다고 해서 왔는데 면접관이 노조 활동을 할 거냐고 물어봤어요. 노조 들어갈 일이 있으면 들어갈 거라고 했어요. 근데 합격됐죠.”

“그때는 이미 노조 활동을 학교 측에서 인정을 하고 있었어요. 그렇게 싸우고 난 다음이라서......(웃음)”

“노조 가입 안 하겠다고 각서를 쓴 사람도 있었어요. 각서를 썼어도 노조에 들어오면 다 괜찮아진다고, 절대 안 짤린다고 저희가 계속 설득을 했는데도 그 각서가 무서워서 노조에 가입을 못하고 있었던 거였죠.”

“그분한테 재계약 할 때쯤에 조합에 가입하려고 하면 안 받아 줄 거라고 했어요. 노조라는 건 조합원들이 다 같이 가야 하는 건데 자기가 아쉬울 때 들어온다는 건 말이 안 되잖아요. 그렇게 말하니까 한동안 고민하다가 결국엔 노조에 가입했죠.”

“지금 급여는 얼마를 받으시나요?”

“100만 원 받아요. 처음에 43만 원부터 시작해서 지난 6년 동안 차근차근 올랐어요. 4대보험료는 사측에서 따로 내 주지 않고 거기서 그냥 제하구요.”

“충북대학교 같은 경우 용역 급여가 70만 원에서 80만 원 사이예요. 거기는 최저임금 수준으로 받는 거죠. 노조가 없어서.....”

“서울 지역에서 학생들이 청소 노동자들에게 연대해 주는 걸 보고 너무 부러웠어요. 연세대학교도 그렇게 학생들이 연대해 주니까 체불금 3억 5천인가 돌려받지 않았어요? (공공서비스노조 연세대 분회는 연세대 학생들과 함께 8개월 동안 투쟁한 끝에, 용역업체가 떼어먹은 체불금 3억 5천만 원을 지난 11월 초에 돌려받았다.) 우리 싸울 때는 우리 손으로 하나부터 열까지 다 했는데....(웃음)”

“거기(연세대)서는 학생들이 조합원들 간식도 챙겨줬대요. 학생들이 그렇게 밀어주니까 잘 되잖아요. 학교의 주인은 학생 아니에요?”

“자식들이 학교 가서 데모한다고 하면 어떠실 것 같아요?”

“걱정될 거 같아요. (모두 웃음)”

“부모 입장은 다 그렇죠. 그런 활동을 하는 게 좋을 수도 있고 나쁠 수도 있겠는데...... 제가 활동을 해 봐도 너무 힘드니까......(웃음)”

“작년에 활동할 때도, 이런 거 하다가 자식들에게 영향을 주는 게 아닐까 너무 걱정이 되는 거예요.”

“옛날엔 신원조회까지 다 해서 가족들에게까지 불이익이 따르게 했잖아요. 우리 세대에서는 그런 의식이 아직 남아있어요. 불안한 거죠. 그런데 지금도 그런 거 있지 않아요? 미국 쇠고기 반대 집회에 나갔던 사람들 다 추적해서 잡아가던데......”

“예전에 노조 없을 때는 학교 밖에 있는 외국인 교수 아파트에 저희를 보내서 가사 도우미 노릇까지 시켰어요. 그리고 풀 뽑고 어쩌고...... 만능 청소기였죠 뭐. (웃음) 지금은 건물 안쪽만 관리하지만......”

“노동운동해서 좋아진 거지. 저보다 먼저 여기 들어와서 오랫동안 싸운 선배들이 너무 고마워요.”

“평소에 일하시다가 힘든 점이 있다면요?”

“교수들이랑 행정 직원들은 그렇다 치더라도, 학생들이 바닥에 침 뱉고 아무데나 담배꽁초 버리면 인간적으로 정말 모멸감을 느껴요. 그래서 저희가 뭐라고 하면 학생들은 그걸 두 배 세 배로 갚을 수 있어요. 커피를 맘대로 뿌린다거나, 아니면 저희 얘기를 인터넷에 올린다거나. 그래서 그냥 입 닫고 있는 거죠.”

“저희가 처음에 워낙 열악해서 일부러 다른 집회에도 많이 다녔어요. 다른 데 많이 가면 그분들도 저희 쪽으로 연대해 주러 오시겠지 하는 생각을 했죠. 그래서 여름에 촛불집회 많이 했을 때도 빠지지 않고 많이 다녔어요.”

“법원 왔다 갔다 하고, 경찰서에서 뭐 날아오는 게 제일 무서웠죠. 아줌마들끼리 모여서 이게 뭐냐고 막 그러고.....무슨 폭행죄라고 했었나? (웃음)”

“최소 얼마 이상은 받아야 한다고 쓴 피켓 들고 용역업체 입찰하는 자리에 가서 서 있기도 했어요. 학교 측이 입찰 단가는 계속 낮추려고만 하고, 입찰할 때 저희들 의견은 전혀 들으려 하지 않으니까...... ”

“지금도 여기 방제실에 전화선도 안 넣어 주고 있어요.”

“학교 측에서 32명 뽑겠다고 한 걸 저희가 돈 덜 받고 33명으로 그냥 가겠다고 했는데, 다른 건물에서 일하는 사람이 한 명 아파서 휴직계 내니까 그 빈 자리를 저희 분회 조합원 한 명을 데려다가 메우려고 하는 거예요. 어차피 남는 인원이니 다른 건물로 보내 일을 시키겠다는 거죠. 노조에서 거부하고 있긴 한데..... 학교 측은 아직도 그런 식으로 굴어요.”

“마지막으로 한 말씀씩 해 주신다면?”

“저희들도 아직 멀었다고 생각해요. 우리 정도 힘들게 일하면 적어도 150만 원은 받아야 하는 게 아니냐 하는데...... 저희 말고 다른 분들 같은 경우는 노동의 대가를 제대로 못 받고 있는 거잖아요. 저희가 가서 느닷없이 ‘노조 합시다’ 이렇게 말은 못하겠지만, 상급단체가 가서 분위기를 잡아 주면 저희가 가서 이런저런 얘기도 나누고 조언도 해 줄 수 있겠죠.”

“우리 목소리를 낼 수 있다는 게, 그게 가장 중요한 것 같아요.”

“세상은 참 불공평해요. 자기 권리, 자기 밥그릇 찾으려면 자기가 일어서서 싸워야 해요.”


  공공시설노조 청주대 분회 조합원들

한나라당이 추진하고 있는 최저임금법 개악안 이야기가 나왔다. 지역별로 최저임금을 책정할 수 있게 해서 전체적으로 최저임금이 낮아질 수 있다, 임금의 70%만 주면 되는 수습기간을 3개월에서 6개월로 늘린다, 임금에서 숙식비를 공제할 수 있도록 한다 등등, 개악될지도 모르는 최저임금법 이야기가 나오자 조합원들은 속상한 마음을 감추려 하지 않고 말을 쏟아 내었다.

“휴우~ 정말 어떡해요?”

“그렇게 되기 전에 어떻게든 막아야지.”

“이명박 정부가 부자들만을 위한다더니 정말이네.”

“근데 대학생들은 관심이 없어. 어차피 자기들이 제일 먼저 타격 받을 텐데......”

“젊은 사람들이 세상 일에 대해서 좀 알아야 해요. 너무 즐기려 하지만 말고 진지하게도 살아야 하는데......”


조합원들은 본관까지 점거하며 힘들게 벌였던 싸움에 청주대 학생들이 함께 해 주지 않아서 못내 서운했던 모양이었다. 자기가 가르치는 학생들을 불러 모아 ‘구사대’로 동원하는 교수가 시퍼렇게 살아있는 대학이니 학생들이 조합원들에게 다가가기 쉽지 않았을 것 같기도 했다. 연세대 분회 조합원들이 본관 앞에서 집회를 열 때마다 깃발을 하나 둘 세워 들고 우르르 몰려오던 학생들의 모습이 자꾸만 떠올랐다.

조합원들에게 인사를 하고 취재팀과 함께 사대 건물 밖으로 나오니 수업이 끝났는지 학생들이 여기저기서 무리 지어 몰려들고 있었다. 이 많은 학생들은 자신이 대학을 무사히 졸업한다고 해도 결국 비정규직으로 밥벌이를 시작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까? 평소에 인사도 안 하고 지나치며 전혀 관심도 가지지 않던 청소 아주머니들과 똑같은 처지가 되리라는 것을 알고 있을까? 알고 있는데도 울분을 삼키며 토익 책만 갉아먹고 있는 것일까? 아무리 그래도 자신이 구사대로 동원되는 상황에서 한 점 부끄러움도 느끼지 못했을까?

학생들 생각은 그만하기로 했다. ‘승리’한 투쟁을 취재해 보기 위해 들른 곳이었지만 노동운동이 벌어지는 현장에서는 과연 무엇을 승리라고 부를 수 있을지, 무엇을 승리라 불러야 하는지 생각해 보았다. 학교 측은 여전히 청주대 분회를 눈엣가시로 여기고 있고 내년 6월에는 또 어떤 핑계를 대며 조합원들을 몰아내려 할지 모른다. 승리니, 패배니, 절반의 승리니 뭐니 하는 말을 잘도 지어내는 건 항상 바깥에서 투쟁을 지켜보기만 했던 사람들이다. 오랜 시간 싸워 온 끝에 어떻게든 결말을 내 버린 조합원들의 마음은 아랑곳없이 연말에 카드값 정산하듯 노사 합의서를 분석해서 간단히 결론을 내려 버린다. “이건 절반의 승리요!”

그럼 500여 일이 넘도록 파업 투쟁을 벌였던 이랜드는? 외주화 철회와 고용 보장은 따냈지만 일부 조합원들이 복직하지 못했으니 절반의 승리, 혹은 절반의 패배라 불러야 할까? 우리는 이랜드 투쟁의 결과를 꼭 그런 식으로 이름 지어야 할까? 아니, 이랜드 투쟁은 정말 결말이 나기는 한 걸까? 교섭 결과가 어떻게 되었든 아줌마들이 그토록 긴 시간 동안 버텨 준 것만으로도 이랜드 투쟁은 승리한 것이라 말하던 한 홈플러스 조합원의 말은 왜 내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고 남아 있을까? 조합원들이 현장으로 복귀한 이후가 더 걱정이라던 이경옥 부위원장의 말은 또 무슨 뜻이었을까?

진부한 이야기일지 모르겠지만, 이 세상에서 비정규직이라는 고용 방식이 완전히 사라지는 날까지 ‘승리’라는 말은 아껴 두어야 하는지도 모른다. 청주대 아주머니들은 옳지 않은 행위에 맞서 싸웠고, 끝끝내 원하는 것을 얻어 냈다. 동료와 노조를 사랑하는 마음은 더욱 끈끈해졌다. 민주노총 충북지부는 청주대 분회를 ‘모범사례’라 부른다. 하지만 그것은 다가오는 추위에 외투 한 겹 더 걸쳐 입은 것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추위는 더욱 차갑게 들이닥쳐 오고 있다. 얼마 전 새벽에 가락동 농수산물 시장을 깜짝 방문한 이명박 대통령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상인들에게 “경쟁에서 살아남아야 한다”고 힘주어 말했다. 우리는 그런 세상에 살고 있다. 청주대 아주머니들이 늘 건강하시고 앞으로도 이 세상과 씩씩하게 싸워 나가시기를 빌어 본다.
덧붙이는 말

이 기사는 "미행(美行)":비정규직철폐를위한-미디어행동네트워크"의 첫번째 프로젝트인 지역순회 사업, "미디어게릴라들이 비정규노동자들을 만나다"의 일환으로 작성되었습니다. "미행(미행)"은 블로거와 인터넷TV부터, 시민과 노동자, 작가와 지식인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미디어 게릴라들이 함께 모여 비정규 노동의 현실을 고민하는 프로젝트 팀입니다. 미행의 지역순회 사업은 진보신당과 함께 진행됩니다.

태그

대학생 , 청소용역 , 충북 , 청주대학교

로그인하시면 태그를 입력하실 수 있습니다.
박병학의 다른 기사
관련기사
많이본기사

의견 쓰기

덧글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