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의 기화점, 뱀파이어의 사랑

[배고프다! 영화] (1) 토마스 알프레드슨의 영화 <렛미인 Let the right one in>


<<글쓴이 고프 (Ghope)는 2006년 경향신문, 부산일보 신춘문예 영화평론 부문으로 등단했다. 최근 2년간 관악 공동체 라디오에 영화평을 연재했다. 앞으로 본지를 통해 영화에 대한 글을 써 나갈 예정이다. - 편집자 주>>


좀비와 뱀파이어는 다르다. 좀비 영화와 뱀파이어 영화도 다르다. 좀비 영화의 장르적 쾌감은 쓰러뜨리고 넘어뜨려도 다시 공격해오는 좀비를 일어설 수 없을 지경으로 분해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좀비를 학살하는 동안 인간은 동물이 된다. 논리와 윤리가 배제된 대상과 그의 공격에 대항해 자기 목숨을 지키기 위한 투쟁을 벌이기 때문이다. 좀비도 인간에게 죄의식을 느끼지 않고 인간도 좀비에게 죄의식을 느끼지 않는다. 좀 더 강하고 똑똑한 자가 승리한다. 싸움의 결과로, 진화의 법칙에 따라 인간이 더 많은 개체수를 유지하게 된다. 그러나 뱀파이어 영화에서 이런 기계적인 학살은 좀처럼 등장하지 않는다. 뱀파이어는 비록 괴물이지만 인격을 가졌다. 흔히 뱀파이어는 인간을 유혹하는 매력을 지녔거나 인간을 초월하는 능력을 지닌 존재로 묘사된다. 뱀파이어는 좀비처럼 사물화되는 대상이 아니다. 인간처럼 괴로워하고 다양한 감정을 표출한다. 그러다보니 뱀파이어와 인간 사이의 투쟁에는 윤리와 감정이 개입된다. 인간은 괴로움을 호소하는 존재에게 두려움 이전에 동정심을 느낀다. 동정심이 교환된 후의 싸움은 일방적인 학살이 될 수 없다. 좀비와 달리, 비록 뱀파이어가 인간과의 싸움에서 패배한다 하더라도 뱀파이어는 결코 멸종되지 않는다. 그들은 은둔한다. ‘은둔’, 뱀파이어와 인간 사이에 필요한 것은 소멸이 아니라 적당한 거리(distance)이다.

앞서 좀비와 뱀파이어는 다르다고 했다. 그러나 이런 다름은 공통점에 기반을 두고 있다. 그들은 잔인한 살해자들이다. 좀비가 기계적인 살해자라면 뱀파이어는 지능적이고 예술적인, 그래서 치명적인 살해자라고 할 수 있다. 뱀파이어는 사람의 피를 먹으며 목숨을 연명한다. 이것은 윤리적인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뱀파이어의 본성이기 때문이다. 본성을 잃는 순간 그 생명체는 자기 동일성이 파괴되고 더 이상 그것이 아니게 된다. 뱀파이어는 본성 상 인간과 양립하기 힘든 존재라 할 수 있다. 인간이 죄 없는 짐승을 사냥하듯 뱀파이어는 죄 없는 인간을 살육한다. 여기에서 극복할 수 없는 윤리적 격차가 발생한다. 앞서 말했듯 인간은 뱀파이어에게 유혹되고 동정심을 느낀다. 그들은 소수이지만 강하다, 그러나 인간의 피가 없이는 결국 생존할 수 없는 기생적 존재이다. 동시에 그들은 인간을 살해한다. 죄의 유무를 떠나 무작위적으로 인간은 살해당한다. 동정해야 할 대상에 대한 윤리와 나의 생명을 위협하는 존재에 대한 윤리, 이 두 윤리 사이의 격차에서 좀비 영화는 다양하게 분화한다. 그리고 이러한 분화는 구원을 향해 다시 수렴된다. 같은 세계에 살고 있는 이질적 존재들의 화해 혹은 어느 한 쪽의 소진을 통해 윤리적 격차는 극복되거나 무효화된다.



토마스 알프레드슨 감독의 영화 <렛미인 Let the right one in> 역시 뱀파이어 영화가 사용할 수 있는 거의 모든 장르적 개념들을 반복해서 사용하고 있다. 그리고 동일한 윤리적 격차 앞에 서게 된다. 토마스 알프레드슨 감독은 이 격차 앞에서 새로운 해법을 제시해 기존의 뱀파이어 영화들과의 차별성을 만드는 데 성공했다. 그것은 영화의 제목이 암시하듯 ‘초대’라는 형식이다. 영화 <렛미인>을 통해 뱀파이어와 인간이라는 종족 대 종족의 만남은 오스칼과 이엘리라는 개체들의 만남으로 치환된다. 이엘리는 다른 인간들에게는 뱀파이어이다. 그녀는 인간의 피를 필요로 하고 인간을 습격한다. 그녀에게 물린 인간은 죽거나 뱀파이어가 된다. 그러나 그녀를 초대해 달라는 부탁에 응하는 존재들에게 그녀는 뱀파이어가 아니라 뱀파이어-성을 가진 존재가 된다. 즉 오스칼에게 뱀파이어는 그녀의 모든 존재를 규정하는 어떤 것이 아니라 그녀의 존재를 구성하는 성질 중 하나가 된다. 마찬가지로 오스칼도 인간-성을 지닌 존재가 된다. 존재와 존재의 만남은 신이 지정해준 본질(인간 혹은 뱀파이어라는 종족성)에 앞선다. 사르트르의 선언처럼, 존재는 본질에 앞선다. 그리고 이러한 관계는 사르트르의 선언이 그러한 것처럼 고행에 가까운 고됨과 기이함을 동반한다.



오스칼의 미래는 영화의 초반부에 등장하는 이엘리의 보호자이다. 거꾸로 말하자면 이엘리를 보호하던 늙은 남자는 오스칼을 통해 그의 과거를 읽어낸다. 늙은 남자는 뱀파이어의 존재를 감추기 위해 이엘리 대신 살인에 나선다. 그는 차와 사람들이 오가는 문명의 벌판에서 마치 원시인들이 수렵을 하듯 인간의 피를 수집한다. 그에게는 인간적인 도덕감과 윤리감이 느껴지지 않는다. 그의 윤리감은 오직 이엘리와의 관계를 향해서만 집중되어 있다. 그의 살인이 실패로 돌아갔을 때 그는 이엘리라는 존재를 감추기 위해 자신의 얼굴에 염산을 뒤집어 쓴다. 자신의 얼굴을 지움으로써 이엘리의 존재가 숨겨진다. 이는 “난 너야. 한 번만이라도 내가 되어봐.”라고 오스칼에게 부탁했던 이엘리의 요청이 암시한 결말이기도 하다. 늙은 남자와 오스칼은 이엘리가 되어 그녀를 보호한다. 이를테면 그들은 이엘리의 낮이며, 이엘리는 그들을 만나기 위해 밤을 기다린다. 오스칼과 늙은 남자의 교환이 발생하는 날, 즉 늙은 남자가 명을 달리하는 날 남자는 이엘리에게 오늘은 그 소년(오스칼)에게 가지 말아달라고 부탁한다. 늙은 남자는 이엘리에게 자신의 피를 내어주며 완벽하게 그녀의 일부가 된다. 말 그대로 이엘리가 된 것이다.

이엘리는 이러한 방식으로 무척이나 오랜 열 두 살의 생을 지속했을 것이다. 그의 낮이 되어줄 소년을 찾고 소년은 그녀를 위해 대신 살인을 저지르고 소년이 더 이상 낮의 역할을 하지 못할 때 다시 새로운 소년이 나타난다. 소년은 이엘리를 초대하고 소년은 이엘리가 “평범한 소녀가 아니라고 하더라도” 그녀를 받아들인다. 이 영화는 이렇듯 남자와 소년의 삶, 두 개의 시간을 동시에 펼쳐 보이며 미래와 과거를 겹쳐 영원의 순환에 이른다. 영원은 뱀파이어의 일생이다. 이러한 이엘리의 삶에 대해 어떤 윤리적 비판을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러한 윤리적 비판은 그 즉시 이엘리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으로 수렴되기 때문에 비판의 수준을 넘어 멸종에의 의지로 치환되고 말 것이다. 영화 <렛 미 인>에 등장하는 또 한 명의 뱀파이어는 자신이 이엘리에게 물린 후 뱀파이어가 되어간다는 것을 알곤 스스로 자신의 목숨을 끊어 버린다. 이엘리에겐 스스로 목숨을 끊든가, 생존하든가 하는 선택이 남아 있을 뿐이고 결국 그녀는 존재를 선택했을 뿐이다. 따라서 주목하게 되는 것은 이엘리의 선택이 아니라 소년과 남자의 선택이다. 그들은 앞서 말했거니와 스스로 이엘리를 초대하고 적극적으로 이엘리-되기를 선택한다. 그들은 자신의 타고난 인간-성을 버리고 자신이 선택한 이엘리와의 관계를 존재의 근본적인 성질로 승화시킨다. 그들은 알고 있을 것이다. 자신들은 결코 이엘리와 더불어 영생의 삶을 누리지 못한다. 그들의 결말은 이엘리에게 잡아먹히며 자신을 대신할 다른 존재를 지켜보며 죽어가는 것뿐이다. 하지만 그런 과정을 거쳐 그들의 ‘사랑’은 누구도 도달해보지 못한 곳에 도달한다. 그들은 문자 그대로 그들이 사랑하던 사람이 ‘된다’. 지극한 사랑의 극점은 자기 동일성이 파괴되고 자신이 사랑하는 대상의 동일성을 향해 끌려들어가, 그 일부가 되는 것이다. 이렇게 이엘리는 여러 시대를 거치며 여러 존재들의 사랑을 완성시키는 존재가 된다. 이 점은 여타의 뱀파이어 영화의 주인공들이 뱀파이어와의 사랑을 완성하기 위해 뱀파이어에게 물려 뱀파이어가 되기를 선택할까를 두고 고민하는 것과는 사뭇 다르다. 오스칼과 남자는 인간이되, 인간성을 버린다. 그러나 뱀파이어라는 종족이 되지는 않으며 종국에는 뱀파이어-성을 가진 존재의 일부가 된다. 이 지점에서 영화 <렛미인>은 뱀파이어 영화의 새로운 한 지평에 안착한다.



이것은 거꾸로 인간세계에서 벌어지는 사랑과 우정 등에 대한 자각이기도 하다. 인간 세계에 존재하는 명분 없는 폭력과 그것의 무의미한 카타르시스는 결코 구원에 이르지 못한다. 인간의 사랑이란 것도 결혼을 통해 제도적으로 완성될 뿐 그 실존을 구원하지는 못한다. 오스칼의 이혼한 부모들이 그러하고 이엘리에게 물려 뱀파이어가 된 여성의 커플이 그러했다.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관계들은 지루하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본다면, 인간적인 관계들의 지루함은 뱀파이어의 영생이 초래하는 지루함에 비할 바가 아닐 것이다. 뱀파이어에겐 그들의 세계가 인간에겐 인간의 세계가 있다. 지루함은 인간에게 남겨진 중요한 성질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무기력과 분노, 다툼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지긋지긋한 인간의 한계이면서도, 그 덕분에 인간인 것이다. 그러니 오스칼의 선택이 지닌 초월성엔 놀라움을 느끼게 되지만 별로 따라하고 싶지는 않다. 간혹 스스로를 인간의 굴레를 벗어난 존재로 착각했던 자들이 저질렀던 폭력을 우리는 많이 알고 있다.

by(e) Ghope.